공포증 - samk 공포증 - 1 - Phobia - 한 남자가 있다. 현재 xx 고등학교 3학년에 제학중이며, 키 185cm의 장신에 운동으로 다져진 균형잡힌 몸매, 거기에 날카로운 눈매와 곧게 뻗은 콧대 아래 자리 잡은 보기 좋은 입술까지 갖춘 즉, 외모가 꽤 아니 상당히 되는 인간인 것이다. 덧붙여 머리도 비상해 공부도 잘하며, 자칭 금융업에 종사하시는 돈이 많은 아버지 덕분에 재력까지 타고난 이 사람을 보고 남들은 모두 킹카라 칭한다. 그래서 xx 고등하고 사방에 포진해있는 여고생들 사이에서 이미 그는 세계사시험 출제빈도 1위로 추정되어지는(단지 추정만이다) 함무라비 법전과 함께 존재감을 확립하고 있으며, 나아가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 망을 통해 그녀들 스스로 조직을 결성해 그의 유명세를 전국적 함무라비 법전화 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허나... 언제나 동화속의 왕자님이 해피엔딩이라는 작가의 잔인한 말 한마디로 인해 자신의 전부를 들어내지 못하고 단지 왕.자. 라는 것만 밝혀진체 꿈 많은 여인들의 꿈속으로 사라져간 전례에서 보듯이 우리는 이 킹카를 알기 위해선 해피엔딩을 뒤로 미루고 잠시 그의 성질을 조금 구경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고? 그건... “씨발.. 이 개 호로자식들. 니들이 지금 나 몰래 이 구석에 처박혀 빵 뜯어 먹는거냐? 어?” 니 눈에는 정녕 이 널따란 매점이 구석으로 보이는 것이냐? “씹새! 너 교무실 갔었잖아! 너 없으면 우린 빵도 못사먹냐?” 병국아.. 왠만하면 대꾸하는 걸 말리고 싶다. 저 봐라.. 눈 가늘게 뜨는게.. 이제 한쪽 눈썹을 씰룩거릴 차례구나. “개쉑. 핑계댈게 없어 교무실 핑계를 대? 의리라고는 바퀴벌레 오줌만큼도 없는 새끼가.” “뭐? 야! 한 류인! 병국이가 뭐 틀린 말 했냐? 그럼 너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마냥 너 기다리며 교실에서 죽치고 있으란 말이야? 그리고 니 입에서 의리라는 말은 좀 웃기지 않냐?” 아.. 선호야 너까지 왜이러니. 저 자식 주먹 쥐고 있는거는 안 보이는 거냐? “씹.. 장 선호 다시 한번 그 아가리 놀려보시지.” “뭐? 너.. 어... 아... 그러니까...” 이제야 저 핏줄선 부들거리는 주먹을 본 모양이구나 선호야. 눈 부라림과 부들거리는 주먹 한방에 좌중을 조용히 시킨 녀석은 언제나 그렇듯이 결국은 한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으로 이 작은 일상을 마무리 지었다. “썅. 이게 다 니 탓이야. 이.경.민.” 그래.. 내 탓이다. 이건 모두 애초에 널 만나게 되어 버린 내 운명 탓이지. 잘 보시라. 이게 바로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왕자의 일면이다. 내 동생말로 표현하자면 성질 개.차.반.인 녀석, 그리고 포비아 덩어리인 한 류인 본 모습 말이다. -1 Acrophobia (고소 공포증) 난 책 냄새를 좋아한다. 의외로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 같은데, 아마 그 냄새가 바로 책으로 연상지어져서 활자를 좋아하는 날 안심시켜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새 책의 아직 잉크냄새가 남아있는 것이라던지, 오래된 곰팡이내를 풍기는 것이든 말이다. 그래서 책이라는 분류에 들지만 고3인 우리에게는 다분히 스트레스지수를 높일뿐인 문제집을 사러 서점가는 이 길에도 난 기분이 좋았다. 단지 동행에 불만이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아.. 저 자식 또 무단횡단 하네.” 병국이는 습관처럼 손으로 안경을 올리며 당당하게 빵빵거리는 차들 사이로 유유히 걸어가는 류인이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냐? 우리는 지금 육교위에 서있으니까. “저러다 한번 사고나지 진짜.. 아 경찰은 도대체 뭐하는거야? 저 자식 안잡아 가고?” 나는 강하게 긍정의 끄덕임을 해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도 류인이 저녀석이 저렇게 무단횡단을 할때마다 걱정보다는 도대체 함정수사를 즐겨한다는 그 경찰들은 모두 어디에 있길래 왜 안잡히나 하는 다분히 우정보다는 원한이 깔린 원망을 하기 때문이다. “너 아는 형 경찰이라며, 좀 불러봐.” 간절한 바램을 담아 병국이에게 대합한 후 난 류인이를 보았다. 류인이는 이제 도로를 다 건넌 후 우리가 내려올 때까지 기다릴 모양으로 서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젠장.. 길 한복판에서 교복 버젓이 입고 담배 꼴아무는 저 폼이라니.. 너무 멋지구나. --;; 남자인 내가 봐도 멋진데 주변에서 힐끔거리는 저 여자들이 어떨까. 하지만 나도 대놓고 녀석의 모습에 넋 나가 있을 수는 없다. 바로 그걸 노리고 담배를 피는 거란 걸 난 알거든. 제길.. 멋있어 보일려고 길거리에서 좋아하지도 않는 담배 피는 녀석은 너밖에 없을꺼다! 이눔아! “야, 저 녀석은 경찰 가지고는 모잘라. 저 성질에 경찰들이 와서 딱지 뗀다고 눈 하나 깜짝 하겠냐? 아주 군부대 하나를 투입해서 총 들이대야 정신 차리지.” 점심때 빵 사건으로 갈굼을 당한게 아직 분이 안 풀렸는지 선호가 류인이를 살짝 노려보며 말했다. 대놓고 노려봤다간 자신을 야리는 건 귀신같이 아는 류인이에게 들킬꺼라는 걸 알기에 선호의 살짝 야림은 내가 보기에도 애절했다. “저 성질에 군대도 어림없다. 근데 씨발.. 무단 횡단하는 이유가 육교 건너는 게 무서워서라는게 말이 되냐고 어?” 그랬다. 저 멋지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한류인이 무단횡단을 하는 이유는 멋있어 보이려고, 그렇다고 반항하기 위해서도 아닌 단지 육교가 무.서.워.서. 였다. 의외로 그는 고소공포증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3층 이상의 건물에서는 절대 창밖을 보지 않아 교실이 3층이었던 1학년 때에는 항상 창가에서 가장 떨어진 4분단 맨 끝이 그의 지정석 이었다. 3층 이상의 높이에서 고소 공포증을 느낀다고는 하지만 육교처럼 오픈 되어 있는 곳은 어느 높이든 절대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가 제일 싫어하는 스포츠는(?) 번지점프에 스카이 다이빙이고-거의 미친놈들 광짓으로 매도한다- 몇 년전 모 놀이동산에 자이로 드롭이라는 심장 떨어질만한(실제로도 떨어진다--;) 놀이기구가 생겼을 당시에는 니트로 글리세린을 구해 폭파해버린다고 날뛰는 걸 겨우 말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이 외모와는 전혀 안 어울리는 단점이 웃기게도 그의 팬들 사이에서는 인간다운 매력으로 받아진다는 사실에는 다만 경악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약점에 대해서 친구인 나도 높이 사는 점은 바로 그의 태도 때문이다 자신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는 고소 공포증을 류인이는 전혀 감추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일 예로 처음 고등학교를 들어왔을 당시 중학교 때 그의 활약상을 들은 학교 일진들이 류인이를 옥상으로 불러냈었다. 이짱이 친히 류인이를 부르러 온 후 유명한 oo중의 한 류인을 보기 위해 일진의 간부진들이 바람부는 옥상에 옹기종기 모두 모여 기다렸지만 그들은 류인이의 머리카락 한올도 볼 수가 없었다. 다음날 친히 교실로 모두 납신 일진 간부들의 다그침에 자다 일어난 류인이가 간결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씨발 나 고소공포증 있으니까 다음부터 옥상으로 부르면 다 죽을 줄 알아. 그리고 남 한창 잘 때 깨우는게 세상에서 제일 치사한 짓거리이야. 알아?” 그 다음부터 면회 장소가 체육관 뒤쪽 동산으로 바뀌게 된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덕분에 류인이가 고소공포증이라는게 모두에게 알려지게 되긴 했지만 아무도 그것가지고 그를 놀리는 사람은 없었다. 일찍이 아이들 모두 그의 개차반적 성질을 알아차린 덕분이었다. “근데 정말 이상하단 말야. 겁대가리 없어보이는 녀석이 고소 공포증이라니. 야, 경민아. 넌 뭐 아는거 없냐? 어렸을때 저녀석 어디 높은데서 떨어진거 아냐?” 계단을 내려오며 묻는 병국이를 보며 난 약간 인상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렸을적 기억이건 저녀석과 관계되는 모든 것에는 이미 머리가 지끈거리기에 병국이의 질문은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래도 너랑 류인이는 불알친구 아니냐. 뭐좀 몰라?” 불알친구? 씨발.. 내가 고자되고 말지. 뒤에서 내려오던 선호까지 합세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대답할 쏘냐. “몰라.” “모르는게 아니라 혹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있는거 아냐?” 슬쩍 내 어깨를 감싸며 병국이가 귓속말로 물어왔고 난 의외의 날카로움에 살짝 놀란 얼굴로 병국이를 보며 칭찬의 한마디를 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다정한 우리 사이를 방해하는 이가 있었으니. “나무늘보도 니들보단 일억만배 빠르겠다. 다리 짧은거 티내냐? 그리고 병국이 너 경민이 일년에 한번 목욕하는거 몰라? 이 옮으니까 떨어져라.” 매일 샤워하는 청결한 인간의 표상인 나에게 그 무슨 망발을... 그런데 병국이 넌 왜 게걸음 치며 옆으로 멀찌감치 떨어지는 거냐. 난 병국이의 뒷통수를 살짝 어루만져준 후 자기의 농담이 잼있다고 생각했는지 스스로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있는 류인이에게 다가갔다. “먼저 가서 책 고르고 있지 그랬어.” 언제나처럼 내 오른쪽에 선 류인이는 뒤따라오는 병국이와 선호는 돌아보지도 않은채 대꾸했다. “내가 니들처럼 의리 없는줄 아냐?” 그의 말에 또 선호가 발끈했다. “야! 니 입에서 의리란 말은 좀 웃기다.” “장선호. 너 아까부터 왠 망언이야. 죽고싶냐?” 죽고싶냐라는 대사와 함께 한류인표 강렬 눈빛 어택을 살짝 쏘아주자 선호는 잠시 움찔 하는 듯 했으나 그도 지지 않고 대꾸하기 시작했다. “망언? 너 니가 여태껏 한 행동을 잘 생각해봐. 작년 수학여행때 술마시다 걸려 혼자 내뺀거 하며, 저번에 동네 양아치랑 시비 걸렸을 때 우리는 죽어라 맞고 있는데 넌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 양아치랑 웃으며 농담 따먹기 했잖아!” 선호의 비분강개한 어조에 병국이와 난 동조의 표정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록새록 기억나는 과거의 암울한 기억들. 선생들에게 걸릴 때마다 매번 혼자 내빼는 녀석의 비열한 모습이나, 자신의 위험 앞에서는 우정도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 있는 저 강철 안면까지.. 류인이의 의리단어 파문에 선호가 열 받아 하는 것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는 바로 한 류인이다. “훗.. 쪼잔한 놈.” 이라며 한마디로 자신의 모든 비열한 행동을 일축해 버리는 한류인 말이다. 류인이의 피식거리며 정의내린 말에 쪼잔한 놈으로 낙인찍힌 선호는 혈압아 오른건지 붉어진 얼굴로 약간 어버버 증상을 보이며 병국이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야. 빨리와.” 선호를 보며 왠지 모를 한숨을 쉬고 있는 내 팔을 잡아끌며 류인이 바로 앞에 있는 대형 서점으로 끌고 들어갔다. 토요일 낮이라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그 사이로 희미하게 나는 책의 향기에 나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지었나 보다. “미친년같이 웃지마.” 라고 류인이가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말하는걸 보니 말이다. 쓰벌.. 단숨에 험악모드로 변한 표정으로 살짝 류인이를 올려다보자(그래, 난 이녀석보다 10cm나 작다!) 녀석은 내가 야리는 걸 금새 알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획 돌렸다. “눈 깔아.” 씹.. 그런다고 내가 눈 깔줄 아냐? 단지.. 돌릴 뿐이다. 어디까지나 난 평화를 사랑하니까. 쿨럭..--;; “너 왜 똥씹은 표정이야?” 선호가 나를 스쳐 앞으로 나가면서 물었고, “보나마나 류인이 야렸다가 걸린거겠지. 크크..” 내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뒤따라오던 병국이가 알아서 대답하고 있었다. “쓰벌..” 난 안경을 치켜 올리며 류인이에게 못 다한 야림을 두 놈에게 날렸지만 두 놈다 이미 류인이 따라 참고서 코너로 들어가 버렸다. 아.. 왠지 내가 제일 동네북이 된 듯 한데 말야.. 이래서 류인이가 포함된 친구관계는 오래끌수록 좋을게 없다니까. 특히 선호, 병국이, 류인이와 나 네사람은 고1 때부터 고3이 된 지금까지 내리 같은반에 되어버린 비극적 운명이라 앞으로 1년간도 내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듯 했다. 류인이와의 지긋지긋한 인연은 그렇다 치더라도 선호, 병국이와 3년 이나 같은반이 된다는건.. 역시 악연이 실존하고 있다는걸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었이랴. 나직히 한숨을 쉬며 나도 녀석들 옆으로 가서 한참 문제집을 고르는데 맞은편에 서있던 류인이가 책한권을 들어올렸다. “영어는 이걸로 하자.” “그래? 그게 괜찮아?” 류인이가 든 책을 집어 뒤적이며 선호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류인이 녀석이 억울하게도- 왜 억울한지는 나중에 설명하겠다- 우리 중에 공부를 제일 잘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 은근히 녀석이 고른 문제집에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내용을 보는 눈이 우리보다는 좀 낫지 않을까 하는.. “딴 건 다 색이 구려.” 기대는 개뿔. 유난히 얼굴이 찌뿌려진 병국이가 류인이에게 소리쳤다. “아, 씨! 난 빨강색 싫어. 차라리 여기 녹색으로 해.” 그래... 이제부터 병국이 넌 우리라는 범주에서 아예 빼주마. “야, 야.. 공부할껀데 문제집 색깔이 무슨 소용이야.” 게중 내가 제일 신임(?)하는 선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나무랐다. “차라리 이걸로 해. 이게 종이 질이 제일 좋거든.” 쓰벌... 선호 네 녀석이 부르터스 과인줄 이미 알고 있었다. 얼굴이 굳어진 난 아랑곳 안하고 세놈은 연신 문제집의 색과 종이질을 논하느라 모처럼 진지한 토론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그래 종이질도 중요하지. 지우개로 답 지우고 다시 풀때 자국 남은거 보이면 열받거든. 좀 매끈매끈한걸로 사자.” “아냐. 매끈 매끈한게 오히려 더 안 지워질때가 있어. 그리고 매끈한 종이는 가끔 샤프가 삑사리 날 때가 있단 말야. 그럼 공부할 기분 잡쳐.” 선호의 분석에 류인아와 병국이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를 표했다. “맞아. 그럼 저거 핑크색 바탕의 매끈 종이 아닌 걸로 사자.” 세명이 신나게 결론 핑크색 문제집을 병국이가 집어 들었을 때 난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병국이의 팔을 잡았다. “그건 안돼.” “왜?” 세 사람 모두 동시에 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자신들의 진지한 토론의 결과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결의의 눈빛을 내뿜으며 말이다. 하지만 내가 거기에 질소냐. 난 이런 식으로는 문제집 고르는 건 절대 반대란 말이다! “책을 펴서 안에 내용을 봐.” 내 말에 모두 책을 폈고, 난 손가락으로 내용을 짚으며 문제집 고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포인트를 말해주었다. “글씨가 명조체야. 맘에 안 들어.” 공포증 - 2 3학년 올라온 기념으로 산 문제집을 옆에 끼고 우리는 모두 뿌듯한 마음으로 - 원래 문제집을 사면 성적이 이미 오른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물론 살 때만이다. 풀기시작하는 순간 놀랍게도 기분은 사라진다 --; - 분식집에 들어가 4사람이 먹기에 적당한 6인분의 음식을 주문한 후 모두 젓가락을 들었다. 우선 각자 몫으로 나온 라면을 두, 세 젓가락 만에 삼킨 후 가운데에 놓인 떡볶이와 순대, 튀김을 공략할 때 우리의 머리 위쪽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에? 선배님? 류인이를 뺀 우리 세 사람이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는데... 세상에.. 순간 나도 모르게 ‘오 뷰리풀~’이라고 외칠 뻔했다. 목까지 닿는 약간 긴 갈색 커트머리, 그 안의 작고 하얀 얼굴에는 커다란 눈과 약간 작아 보이는 코, 그 아래 앙증맞게 부푼 빨간 입술... 내 평생 이런 아름다운 소녀는..이 아니라, 지금 저녀석 우리더러 선배님이라고 한거냐? 아니나 다를까.. 살짝 시선을 내리니 나와 같은 검정 마의에 회색 바지 교복을 입고 있는 몸체라니! 우리는 남고란 말이다!!! 우리가 모두 입을 반쯤 벌린체 녀석을 보고 있었지만 왠지 남자라는 사실에 배신감이 들게 하는 아리따운 후배는 우리는 상관하지도 않고 열심히 먹고만 있는 류인이 쪽으로 한걸음 다가가더니 다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아.. 류인이는 먹을때하고 잘 때 건드리는거 제일 싫어하는데.. 역시나 아리따운 후배가 단어 하나마다 스타카토로 끊어내며 인사를 했건만 류인이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옆에 서있는 후배가 안타까웠는지 병국이가 벌어졌던 입을 다물고 부드럽게 말했다. “류인이는 먹을 때 말을 잘 안하는 편이라.. 근데 넌 누구냐?” “풋.. 소문대로 정말이네요. 먹을 때하고 잘 때 건드리면 안된다고 하더니.” 뭐야 알고 있던 거야? 처음 강렬 미모 어택의 충격이 좀 가셔서 그런건지 자칭 후배의 말이 귀에 들어오자 저 녀석이 류인이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이 우리 학교에서 류인이는 유명하니까. 근데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전 1학년 8반 선우 현입니다. 선.배.님.” 질문을 한건 병국이었는데 자기소개는 여전히 음식에 고개를 밖고 있는 류인이에게 하고 있었다. 저녀석 고집이 있구나라고 생각이 들려고 했으나.. 한편으로 생각하니 지금 병국이를 무시한거냐? 그것도 갓 입학한 1학년이. 아니나 다를까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던 병국이와 선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표정이 약간 굳은체 선우 현을 보고 있었다. “너 뭐야? 류인이를 아는거면 우리가 3학년인줄 알텐데 지금 우리는 무시하는 거냐?” 선호가 약간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지만 선우 현은 병국이와의 형평성을 고려한 듯 선호의 말도 씹으며 여전히 류인이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저 류인 선배님 때문에 이 학교 왔어요. 풋.. 근데 먹는 모습이 상당히 귀여우시네요.” 아... 귀엽다는 말에 류인이 녀석이 열이 받은 듯 고개를 들었다...는게 아마도 선우 현의 목적이 아닐까 싶다만.. 아이야. 넌 류인이를 너무 모르는구나, 저 봐라 먹을 때는 오로지 오감중에서 미각만 살아있는 녀석에게 어떠한 도발과 욕설도 필요가 없단다. 역시나 류인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계속 보기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녀석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지만 이내 다시 짙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입을 멈추게 한건 무시를 당한 선호였다. “야. 신입생.” 꽤나 열이 받았는지 의자를 밀며 천천히 일어선 선호는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난 그의 각진 턱이 더 단단해 보이는 게 녀석이 이미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란 걸 경험상 알 수 있었다. 키는 나와 비슷하지만 체격은 나의 1.5배인 선호는 별명인 떡쇠처럼 300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설날 각 고을마다 열리는 씨름대회에서 소하나 쯤은 거뜬히 탔을 그런 체격의 소유자였다. 보통은 털털하고 선해 보이는 인상이어서 녀석을 쉽게 보지만 선호는 의외로 류인이 만큼이나 개같은 성질을 종종 보여주곤 했다. 하긴 그러니 2년 넘게 류인이와 친구로 지내는 거겠지만. “우리 말은 개짖는 소리로 들리냐?” “류인 선배. 내일 점심때 옥상으로 올라오실래요? 제가 도시락 싸올테니 같이 먹어요.” 아.. 선호 너 돗자리 깔아야 겠다. 선우 현은 개 짖는 소리로 들리나 보다. “씹.” 짧은 욕설이 들린다 싶더니 선호가 탁자를 돌아 선우 현에게 다가가려 하고 있었다. 이런.. 선호는 한번 나서면 멈추질 못하는데.. 그제서야 놀란 난 내 옆을 지나려는 선호의 팔을 잡아 채며 멈추게 했다. “진정해.” 그리고 난 포크를 들고 있던 손으로 몇 개 남지 않았던 순대를 모조리 찝은 후 입으로 가지고가 우적 우적 씹어 먹었다.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 병국이와 선호가 놀란 듯 쳐다봤지만 난 멈추지 않고 나머지 음식들도 거의 삼키는 수준으로 빠르게 없앤 후 류인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 쩝... 한 류인, 꿀꺽... 다 먹었으니까 얼른 저 녀석 처리해.” 어차피 선우 현이란 애도 내 말을 씹을게 뻔했으니, 이 상황을 말릴 수 있는 건 류인이 뿐이었고 그럴려면 접시의 음식을 바닥내는 수 밖에. “썅..” 하지만 이 개차반 한류인 녀석은 나의 이 깊고 심오한 뜻도 헤아리지 못한체 욕을 내뱉으며 날 노려봤다. “누가 두 세 개씩 집어 먹으래.” “야! 지금 이거 2/3 이상 먹은 건 너잖아! 왜 경민이 가지고 난리야?” 병국이가 어이가 없는지 소리쳤고 류인이는 금새 병국이를 노려봤다. 짜식 눈 찢어 지겠다. “씨팔.. 누가 먹지 말래? 안 먹은게 누군데?” “그래, 경민아 포크질 한번에 순대 3개 찍은건 내가봐도 좀 심하더라.” 내 옆에 서서 자신의 좀 전 하려던 행동은 모두 망각한 선호가 입을 나불댔고, 류인이는 원군까지 얻은 당당한 표정으로 나와 병국이를 동시에 야리느라 아주 바빠 보였다. “이미 돈도 똑같이 냈잖아. 우리가 잠깐 얼 나간 사이에 니가 다 먹었는데 나 같에도 순대 3개 한꺼번에 먹겠다.” 내 편을 드는 병국이는 류인이에게 침튀겨 가며 소리쳤다. 여기서 잠깐, 병국이의 저 돈을 이미 똑같이 냈다는 말은 결코 이 분식집이 선불로 받았다는 것은 아니다. 워낙에 더치 패이 정신이 철저한 류인이의 지랄에(이건 이놈 집안 내력이다) 우리는 모이면 항상 미리 돈을 걷고 밥을 먹었다. 그건 그렇고 내편을 들어주니 아주 고맙구나. 병국아. 근데... 말야. 지금 이 상황이 애초에 왜 이렇게 됐는지 니들 셋 모두는 자각이 전혀 없는거냐? 저렇게 류인이 옆에서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표정이 싸늘하게 변한 선우 현이 안보이냐고! 난 서점 이후 덤앤 더머 2탄을 찍고 있는 녀석들의 쓸.데.없.는 대화를 들으며 손으로 머리를 짚어야 했다. “야, 고만들 해라.” 창피하다란 말은 뺐지만 나의 짜증난다는 듯한 억양에는 충분히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자 세녀석 모두 갑자기 날 보더니 소리쳤다. “이게 다 니탓이야.” “그래, 너 왜 갑자기 순대 3개를 한꺼번에 집어 먹어서 분란을 야기 시킨거냐?” 난 세 녀석을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아직까지 안가고 서있는 선우 현을 보았다. “아직 할 말이 남았어?” 아.. 이제야 모두의 시선이 선우 현을 향했다. “선.우.현.입니다. 한 류인 선배님.” 아직도냐? 자기소개... 하지만 무표정한 류인이 자신을 쳐다봤다는 것에 만족한건지 선우 현은 입가에 달콤한 웃음을 지었다. “내일, 옥상에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왜 하필이면 옥상이냐.. 아마 백년을 기다려도 류인이는 안갈꺼다 라고 충고해 주고 싶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개무시하는 녀석이 얄미워 난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다음 선우 현의 말은 예상 외였다. “고소 공포증 제가 고쳐 드릴께요. 걱정 말고 올라오세요.” 알고 있던거야? 그런데 어떻게 당연히 류인이 올라 올거라는 걸 의심하지 않는지 주위에 상큼한 봄바람이 부는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미소로 류인이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니가 어떻게 고친다는 거야?” 아까 씹힌걸 그새 또 잊어버렸는지 선호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데 예상밖에 선우 현이 시선을 선호에게 돌려 대답을 했다. “그런거 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선 금방 고치게 되있어요.” 선우 현의 대답에 류인이를 뺀 우리 셋은 모두 다시 입을 벌리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게 정상이겠지만, 경악대신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그럴줄 알았어. 이번에는 남자냐?” “그래도 외모는 되잖아.” “자신감도 넘치고.” 마지막 말은 내가 한 말이었다. 그랬다. 우리는 지금 이런 상황이 상당히 익숙했던 거다. 선우 현처럼 대놓고 류인이가 자길 사랑하게 될꺼라는 하늘을 치솟는 자신감을 가진 이는 드물었지만 정기적으로 한달에 한번씩, 심하면 일주일에 한번씩은 꼭 저런 고백자(?)들이 우리 네사람이 모인 곳에 왔기 때문에 우리는 선우 현의 발언에 웃음을 터트린 것이다. 그럼 그렇지.. 우릴 무시하고 뭔가 싶었지만 역시 너도 류인이에게 반한 녀석인 거다라는 진부랄까? 덕분에 선우 현은 또다시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우리의 (나를 제외한!) 덤앤 더머식 대화도 듣고, 자신의 발언에 코웃음으로 일관하는 걸 보니 좀 놀라기도 하겠지. 그런데 말이다.. 지금부터는 더 놀랄텐데. “꺼져.” 류인이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선우 현에게 말했다. “싫은데요.” “얼굴도 존나 못생긴게 어디와서 껄떡대?” 못생겼다는 말에 약간 움찔거리는 듯 했으나 더 짙은 미소를 지으며 선우현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짜식... 상당히 귀여웠다. 허나, 류인이의 미적 기준은 이미 우주초월이었기에 녀석의 눈에도 그렇게 비췄을지는 X다(미지수란 얘기다 --;). “역시 제 상상 이상인데요.” 아.. 매져키스트 등장인가? 더 반했다는 표정이잖아? 이제 자리에 앉은 선호를 포함한 우리 셋은 이제 탁자에 편하게 턱을 받치고 두사람의 말싸움을 본격적으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류인이 녀석이 가끔 보여주는 이런 재미난 상황극이 아니면 정말 난 벌써 녀석 피해 이민 갔다. “상상이 이상하면 정신병원에나 가서 처박혀. 못난 얼굴 들고 환경오염이나 시키지 말고. 어디서 그딴 그지 같은 얼굴을 내밀고 들어와 말을 붙여 붙이길? 너같이 주제파학 못하는 새끼들 때문에 나만 귀찮게 입 열고 설교 하는 거 진짜 짜증나 새꺄. 어디 한번 그 찌그러진 얼굴로 계속 웃어봐. 아주 못생겼단 말에 기분좋아 보이던데 니 쓰레기같은 매져 기질 북돋아주러 아주 의자로 패줄까? 어글리 보이?” 무표정하게 느린 어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류인이의 악담은 자주 봐왔던 내가 듣기에도 가끔은 소름이 돋았다. 오히려 흥분해서 욕하는 것과는 달리 저렇게 평상시 어조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하면 기분 나쁘다는 것 이전에 무언가 한기가 느껴졌다. 무서운건 류인이의 저 독설이 진심이라는 거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100% 진심으로 느껴지는 녀석의 말투와 덧붙여 저 반쯤 감긴 눈을 정면에 쳐다보고 듣는 당사자는 아마 ..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저런 말투에 떨어져 나간 고백자들이 상당수 되니 효과는 좋겠지만 말이다. 일반 고백자들처럼 기겁을 한건 아니지만 선우 현의 얼굴이 상당히 굳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보통 고백하는 애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외모에 기대를 걸고 하는(하긴 외모가 아니면 첫 대면의 고백에 차일께 뻔하니) 인간들이 대부분이라 저렇게 너 못생겼다고 대놓고 말하면 충격받는 이들이 많았다. 아니, 자신있어 하던 부분이 전혀 상대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달까? 그래서 그런지 류인이에게 차인 녀석들중 외모 때문에 차였다는 소문은 전혀 나지 않았다. 지금 표정이 강한 눈빛으로 류인이를 내려다 보는 선우 현도 별로 예상 못했던 일이었겠지. 어글리 보이라... 아마 평생 못생겼단 말은 못 들어봤을지도. “저 선배 좋아해요. 무슨 말을 하셔도 제 마음은 안 바꿔요. 내일부터 매일 옥상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제가 올라오시게 만들 테니까요.” 아.. 강적이구나. 하긴 그 외모라면 류인이의 독설도 거절의 핑계로 넘겨버릴 자신감이 있겠지. 옆에서 병국이의 끌끌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쨍알 거리지마. 지금까지 그 얼굴 봐가며 니 얘기 들어준 것도 충분히 역.겨.웠.어. 구린내 풍기지 말고 니 마음은 니가 구워 삶던 말던 못.생.긴 상판 들고 저리 꺼져.” 세뇌의 방법은 단순하다. 그저 같은말을 반복해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류인이는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데 상당히 효과적인 방법을 쓰고 있었다. 저런 아리따운 외모의 소유자에게 지속적으로 못생겼단 말을 해주니 옆에서 듣는 나도 잠깐 혼동이 올 지경이었다. 근데도 상당히 기분나쁠 당사자인 선우 현은 마지막으로 씩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는 인사를 했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 드리죠. 하지..” “썅. 헛 소리마. 니가 물러나 드리는게 아니라 내쫓기는 거니까 착각 말고 그 못.생.긴 얼굴 어디 빨리 구석에 처박아 버려.” 아.. 짜식. 마지막으로 인사하는데 중간에 짜르기는.. “훗.. 조만간 옥상에서 뵙죠.” 선우 현이 나간 후 잠시 썰렁했던 사이 선호가 류인이의 어깨를 툭 치며 입을 열었다. “잘했다. 저 놈은 좀 싸가지가 없더라.” 평소 류인이의 고백자 물리치기 악담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선호였지만 선우 현이 꽤나 맘에 안 들었는지 류인이를 칭찬했다. 병국이도 류인이를 보며 잘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근데, 이번에는 좀 끈질길 것 같던데?” 내가 살짝 선우 현이 나갔던 문을 쳐다보며 묻자 류인이가 물컵을 입에 대며 중얼거렸다. “존나 못생긴게..” 야.. 니 덕분에 우리까지 세뇌당하겠다. 선우 현의 뷰리풀한 첫인상이 이리 바뀔줄 누가 알았겠는가. 공포증 - 3 선우 현이라는 3학년 들어 처음 맞이한 고백자의 등장은 월요일 학교에 가기 전까지 우리 네 사람의 기억에서는 거의 잊혀져 있었다. 하지만 월요일 대망의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류인이를 찾아온 일련의 방문자들 덕분에 우리는 선우 현이란 이름을 다시 기억해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처음 보는 얼굴의 이 무리들은 분명히 가슴에 녹색 명찰을 달고 있는 1학년 들이었다. 학년별로 명찰의 색깔이 다르기 때문에 한눈에 일학년임을 알아봤지만, 3학년 교실에 감히 겁도 없이 침입해 들어온 일학년 무리들은 내가 보기에도 평범한 놈들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긴 그러니 3학년, 그것도 류인이를 찾아 교실까지 왔겠지만. 그래도 7명이나 온걸 보면 조금은 무서웠나 보지? “니네 뭐야?” 식당으로 가려던 걸 저지당한 선호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지만 녀석들 중 한명이 앞으로 나서며 류인이에게 물었다. 선호야 또 씹히는 구나. “한 류인 선배시죠?” 순간 류인이의 심하게 얼굴이 일그러졌고 말을 걸던 일학년이 계속 입을 열었다. “선배에게 볼일이..” “썅!! 니들!!!!” 순간 류인이의 외침에 그 일학년은 말을 멈추어야 했다. 그리고 굉장히 화가 나있는 류인이의 모습에 약간 의아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아직 볼 일이 뭔지 말도 안 꺼냈는데 소리부터 지르고 화를 내니 당황도 했겠지. 하지만 류인이는 주먹까지 꽉 쥐고 부들거리며 다시 한번 소릴 지르고 있었다. “야!! 거기서!!!!” 그제서야 일학년은 류인이가 화내는 대상이 자신들이 아니란 걸 알았고, 류인이의 시선이 가있는 우리들, 정확히 말하자면 막 교실을 나가려던 우리에게 돌려졌다. 그랬다. 녀석은 지금 자기 빼놓고 식당에 밥 먹으러 가는 우리의 조심스런(?) 움직임을 캐치해 낸 것이다. --;; “한 류인. 너의 인기에 찬사를 보내지만 우린 주린 배를 채워야 하니 넌 인기나 만끽하고 있으라고.” 병국이가 실실 웃으며 류인이를 놀렸고, 난 고개를 살짝 흔들며 위로했다. “니 몫까지 먹어주마.” “썅!! 의리 없게 니들..” 앗.. 한 류인 웬만하면 의리라는 단어는 꺼내지 않는게.. “뭐? 야! 한 류인. 니 입에서 의리라는 말은 정말 웃기다. 응?” 역시나.. 의리에 민감한 선호가 또 흥분을 하는구나. 이런 상황이라면.. 식당은 결국 병국이와 둘이서 가야겠군. 눈치 챘겠지만 우리 사이에 잠깐의 기다림 같은 우정은 절대 있을 수 없다. --; 순간 눈이 마주친 병국이와 마음이 맞은 난 사이좋게 손을 잡고 복도로 나섰다. 뒤에서 선호와 류인이의 광끼어린 목소리들이 들려왔으나 사뿐히 한귀로 흘려주고 식당을 향했다. “씹... 니들.. 나도 빼고 먼저 가냐?” 뒤늦게 식판을 들고 온 선호가 이미 밥을 반쯤 먹은 우리의 탁자로 와 앉으며 좀 서운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래, 의리에 대한 토론은 다 나누고 온거냐?” 내가 카레를 한 숟가락 떠 입안에 넣으며 묻자 선호는 인상을 팍 썼다. “근데 류인이는 어딨어?” 병국이가 묻자 선호가 카레를 입안에 쑤셔 넣으며 웅얼거렸다. “그 일학년 녀석들과 잠깐 놀아준다고 소각장 뒤로 갔어.” “그 녀석들 뭐야?” “저번 주 토요일 날 분식집에서 류인이한테 못난이 소리 들었던 이쁘장한 녀석 기억나냐?” “선우 현?” 내가 이름을 기억해 말하자 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놈이 보내서 온 거였어.” “에..? 그 야리하게 생긴 놈이 녀석들 짱이라도 된데?” 병국이가 놀래서 묻자 선호는 잠시 입안에 카레를 삼키느라 대답이 늦었다. “그게... 꿀꺽.... 그녀석이 짱은 아닌데, 짱하고 아는 사인가 보더라.” “아무리 그래도.. 일학년인데 그렇게 몰려다니고 그러면 선배들이 뭐라 할텐데. 그리고 옥상은 일진 애들 전용이잖아. 전에 선우 현이 옥상에 있겠다고 했지?” 내가 좀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자 선호가 잠시 날 보더니 숟가락을 놓고 비밀 얘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나도 좀 전에 들은 얘긴데, 학교 짱이 바꿨다더라. 그 일학년 무리 짱으로.” 뭐야.. 일학년이 이 삼학년을 이겼다고? 나와 병국이가 못 믿겠다는 듯 놀라 아무말 못하자 선호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왜 저번주 금, 토에 우리반 윤성인가 하는 놈 안나왔잖아? 그게 목요일 날 싸움이 있었나봐. 이삼학년 일진은 모조리 물러났다던데.” 윤성이란 애는 3학년 일진 중 하나였다. 아직 학기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들 얼굴을 많이는 모르지만 맨 뒤에 껄렁한 자세로 앉아 모든 걸 야리는 시선으로 보는 요주의 인물을 모를리는 없었다. "뭐야 그럼... 민섭이도 당한건가?" 2학년때 같은반이었던 민섭이가 생각나 물었다. 류인이와의 인연으로-결코 좋은 인연은 아니다! - 나까지 안면트게 된 녀석이었는데, 목소리만 빼면 털털하니 괜찮은 녀석이었다. 2 짱인 만큼 싸움도 잘하니 뭐 많이 다치진 않았겠지만.. "글쎄.." 선호도 약간 걱정이 된다는듯 고개를 흔들었다. “흠.. 그럼 그 일학년들 꽤 쎈 애들인가 보네?” “응. 모두 같은 중학교 출신이라던데?” 그때 갑자기 병국이가 소릴 질렀다. “그럼 류인이 위험한거 아냐? 7명하고 나간 거잖아!” 아! 류인이...잊고 있었다. “그렇지. 일학년이라고는 하지만 학교 일진하고 붙어 이긴 놈들이라면..” 숟갈을 입에 문 선호가 멍하니 말했고, 나도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위험하겠는걸.” 우리는 모두 류인이가 걱정됐다. 1:7이라니.. 아무리 싸움을 좀 하는 사람이라도 7명은 확실히 무리인 숫자였다. 하지만... “그래도 류인인데 뭐, 지가 알아서 잘 피하겠지.” “그래. 녀석 발도 빠르거든.” “야, 우리 피자빵 하나씩 더 먹을까?” “그래!” “그래!” 피자빵을 사기 위해 일어선 우리의 머릿속에 류인이의 걱정은 손톱만큼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단지 나머지가 모두 피자빵으로 채워졌다 뿐이지. 결코 잊거나 걱정을 안한건 아니다! 그렇게 손톱만큼의 걱정이 남아있던 류인이는 5교시가 시작되기 바로 전에야 씩씩 거리며 교실로 들어왔다. “왜 이제와?” 내 옆에 철푸덕 주저앉는 류인이를 보며 묻자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며 날 노려봤다. “썅.. 니들 나 없이 밥 먹으니..” 난 아무말 없이 책상 속에 넣어두었던 빵 세 개를 꺼내 조용히 녀석 손에 쥐어주었다. “흠흠.. 이런다고 내가 용서 할줄..” 500ml 흰우유도 건냈다. 그제서야 눈이 풀리고 조용해진 녀석에게 내가 다시 물었다. “괜찮냐?” 외관상 다친데는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상대가 7명이었던 만큼 예의상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빵을 우걱우걱 씹느라 내 질문은 듣지도 않는 것 같던 녀석이 우유를 한모금 마시고 나더니 웅얼거렸다. “쩝.. 씨발.. 꿀꺽... 그 녀석들 때문에 좆 빠지게 학교만 뛰었잖아.” 흠.. 그 말은 잘 도망 다녔단 말이군. 안봐도 훤했다. 쪽수가 영 아니다 싶으니 온갖폼으로 상대를 안심시킨 후 잽싸게 튄거겠지. 그건 이 녀석 전공이다. 싸움 잘한다고 소문도 났겠다, 녀석의 눈빛은 평소에도 사람들을 움츠러 들게 하니까 설마 도망갈꺼라고는 생각도 못했겠지. “잘 했다. 같이 맞짱 떠봤자 몸만 상하지 뭐. 아 근데 또 찾아오면 어쩔 거야?” “오늘은 아니야.” “왜?” “내가 체육 기물실에 가둬놓고 왔거든.” “.. 잘했다 --;” 내 칭찬이 기분 좋았는지 나머지 빵도 한입에 해치운 후 녀석은 배를 뚜들기며 교과서를 폈다. 선우 현이란 애가 의외로 강한 빽이 있었다는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뭐 류인이가 알아서 잘 피하겠지란-말했지만 녀석의 발은 빠르다- 생각도 있었고, 절대 옥상근처에는 가지도 않는 녀석이니 선우 현이 언젠가 알아서 포기하겠지라고 생각했던 거다. 선우 현이 류인이를 꼭 옥상으로 올라오게 만들겠다는 말도 잊고 말이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 류인이의 말대로 그날은 아무도 찾아오질 않았다. 기물실에 갇혀 있는 놈들이 무슨 수로 찾아오겠냐만은 그 다음날도, 또 그다음날도..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나도 류인이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나는 옥상에서 매일 선우 현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은 수업을 마친 금요일이었다. 오후 보충수업까지 모두 끝나고 반 이상은 자다 깬 얼굴로 아직 고 3 생활의 첫 달이 겨우 지나가는 3월에 지친 모습으로 아이들은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서고 있었다. 나 역시 내리 앉아만 있어 굳어진 몸을 이리 저리 풀며 가방을 들쳐 메고 병국이와 선호 쪽으로 다가갔다. “류인이는?” 내 옆에 류인이가 안 보이자 병국이가 물었다. “아까 담임이 불렀잖아.” “그랬냐?” “그래, 넌 어떻게 담임이 쨍알거리는 목소리로 종례하는데도 그렇게 잘 자냐?” 선호가 병국이의 뒷통수를 살짝쳤고, 병국이는 그런 선호를 째리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원래 집중력이 좋잖냐.” 아주 좋은 집중력 가져 좋겠구나 그래. 하지만 병국이가 집중력이 좋다는 건 분명 사실이었다. 쓸데없는 것에만. “그럼 우리 먼저 가야되나?” 병국이의 질문에 난 고개를 저으며 내 한손에 들린 류인이의 가방을 보여주었다. “또 우리끼리 튀면 다리병신 만들어 놓는다면서 나갔다. 시간 좀 남으니까 잠깐 농구라도 하고 있자.” “아 그럴까?” 나보다 야리야리 하지만 키는 큰 병국이가 농구 얘기가 나오자 기분이 좋은지 얼른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섰다. 하긴 멀대같이 큰 키에 유일하게 잘하는 -절대 주관적이다- 운동이 농구니 좋기도 하겠지. “새끼 좋아하기는. 병국이 너 또 저번처럼 내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지면 농구고 뭐고 없을줄 알아.” “야! 누가 배나온 복덕방 아저씨처럼 바지를 그렇게 올려 입으래?” “올려입긴! 다리가 긴 것도 죄냐?” 선호의 외침에 나와 병국이는 잠시 선호의 짧고 굵은 다리에 원치 않는 시선을 주어야 했다. “내 언젠가는 니가 심각한 현실도피로 혼자 망각의 세계를 만들어 낼 줄 알았지.” 난 선호의 어깨를 다독여 주며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세계에서 넌 마법에 걸린 왕자지?” “아, 씨.. 이 경민 너..” 손을 치켜 올리는 선호를 피어 얼른 녀석에게 떨어져 나와 실실거리는 찰나 갑자기 우리 셋 앞에 검은 그림자들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어..?” 우리가 놀라 고개를 돌리니 월요일날 류인이를 찾아왔던 일학년들이 눈앞에 장벽처럼 길을 막고 서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명이 웃으며 말했다. “같이 옥상 가서 얘.기.나 나눌까? 선배님들.” 제일 다혈질인 선호가 발끈하며 한발 앞으로 몸을 내밀며 소리쳤다. “이 새끼들이 지금 누구 앞에서 반말 지껄이야!”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복도에 선호의 소리는 울림이 되어 퍼졌고, 난 류인이를 찾아야 마땅한 이 녀석들과의 대면에 인상을 쓰며 조용히 물었다. “류인이를 찾는 거라면 지금 교무실 갔으니 기다려. 우리하고도 볼 일이 있는거냐?” 처음 말을 건 녀석의 시선을 잡으며, 보이지 않게 살며시 선호와 병국이의 옷 끝을 잡아 끌었다. 바보 새끼들.. 류인이 잡으려고 우리를 미끼로 쓸려는 걸 설마 모를 줄 아냐? 그런건 이미 1학년 때 류인이가 학교 일진과 마찰이 일 때 한 번 당했던 일이란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괜히 저 강철안면 한 류인의 친구겠냐. 아니나 다를까 선호가 갑자기 녀석들 뒤쪽으로 시선을 집중시키는가 싶더니 소리쳤다. “야! 한 류인! 씹 너 때문에 우리까지 이게 뭐야!” 선호의 외침에 눈앞에 있던 일학년 녀석들이 고개를 돌렸고, 순간 우리 셋은 아주 익숙한 동작으로-왠지 쓰면서도 상당히 비굴하다- 뒤돌아서서 열나게 뛰기 시작했다. “꼴통 새끼들! 우리가 미쳤다고 니들 따라 옥상에 올라갈 줄 아냐?” 병국이가 손가락 인사와 더불어 외치는 말을 들으면서도 일학년 녀석들은 3학년씩이나 되서 자존심도 없이 도망가는 우리가 한심하고 어의가 없었는지 멍하니 지켜볼 뿐이었다. 쳇.. 우리라고 선배에게 반말지꺼리나 하는 너희들을 그냥 놔두고 싶겠냐. 다만.. 앞으로 열심히 공부도 해야 하고 다가올 수많은 밤샘을 대비해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단지 돌아간다는 방법을 쓴건 뿐이다 이거야. 하지만 그렇게 단숨에 복도 끝까지 와서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여태까지 뛴 게 너무 억울하게도 문 앞에는 4명의 일학년들이 버티고 서서 우릴 맞이하고 있었다. “허.. 뭐야? 진짜 이리 도망 왔잖아?” “또라이들 아니야? 크크..” “눈물나서 못 봐주겠네 그 표정들 푸핫..” 뭐냐.. 얼핏 보기에도 나 한 싸움 한다라고 쓰여 있는 얼굴 낮짝의 4인조가 우리를 비웃고 있었다. “씨발..” 선호의 나직한 욕설이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순간이었다. 이 녀석들이 이렇게 머리를 쓸 줄이야.. 한편으론 선우 현이란 놈의 집착성, 좋아하는 사람 한번 보려고 친구를 납치하는 그 싸이코 적 집착성에 짜증이 나려했다. 그때 아무 말 없이 문 옆에 기대있던 한 놈이 몸을 일으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어두운 곳에 있어서 잘 몰랐던 녀석의 모습이 밝은 곳에 나타나자 직감적으로 이 녀석은 좀 다르다는걸 느꼈다. 류인이 만큼 큰 키에 귀를 덮는 약간 헝클어진 갈색 머리, 얼핏 보면 잘생겨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간 찢어진 눈이 상당히 매서워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우리를 쓱 훑어보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움찔.. 순간 난 그 녀석의 강한 눈빛에 한발자국 뒤로 물러설뻔 했다. 뭐야..? 류인이가 너무나 무심한 눈빛으로 사람을 얼어버리게 한다면 이 녀석은 그 반대의 경우였다. 자신의 힘을 그대로 내뿜는 다고나 할까. 씨바.. 니가 엑스맨이냐? “정말 귀찮게 하는군.” 어이..이봐 그건 우리가 할 대사라고. 꽤나 낮은 목소리로 녀석이 말하자 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귀찮으면 그냥 가.” 내가 무덤덤하게 말하자 녀석은 대꾸도 안하고 뒤에 애들을 향해 명령했다. “위로 올려 보내.” 잠시 지금 녀석들과 싸우면 어떻게 될까 생각을 해야 했다. 절대 옥상으로는 올라오질 않을 류인이 녀석 때문에 이렇게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일학년들에게 둘러싸여 비굴하게 인질신세가 되느니 여기서 승부를 내고 그대로 튄다면... 이란 생각은 제길... 저 범상치 않아 보이던 갈색머리 녀석을 보자 그대로 접어야 했다. 강한 놈. 몸을 부딪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녀석의 기 덕분에 선호와 병국이 모두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건지 쉽게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사이 우리의 갈등을 해결해 주듯이 뒤쪽에서 느릿한 걸음으로 몰려오는 나머지 일학년 녀석들이 보이자 순순히 옥상으로 녀석들의 호위를 받으며 올라가야만 하는 처지가 되 버렸다. 공포증 - 4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선배들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는 저 귀여운 후배님을 보며 우리 셋이 감명 받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얼른 위에 뻘건 엑스 누르고 나가기 바란다. 아무리 밸도 없고 자존심도 없이 도망 다니는 인생이라 하더라도 무릎 꿇린 상태에서 저 인사를 받아봐라! 누가 착하다고 칭찬해 주겠나! “씨발.. 니 눈에는 이게 안녕한걸로 보이냐?” 역시나 선우 현에게 제일 감정이 많아 보이던 선호가 인사말에 다정히 대꾸해주었다. 그러자 천사같은 미소를 지으며 선우 현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자신의 모습이 귀여울꺼라는 걸 알고 거울 보며 연습한 듯한 그 포즈가 전혀 안 이뻐 보이는 건... 류인이의 세뇌가 먹힌건가?--; “지랄... 귀여운 척은.” 병국이 너도 세뇌의 효과가 있구나. 하지만 우리의 빈정댐은 선우 현에게 아무런 상처도 안되는지 여전히 빙글거리며 웃더니 쓱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날 내려다 봤다. “이 경민 선배. 류민 형과 오래된 친구라면서요?” 하지만 난 녀석의 말은 무시하고 앞뒤로 가방을 메고 있는데다 딱딱한 콩크리트 바닥에 무릎 꿇은 자세가 불편해 이리 저리 뒤척이기만 했다. 그러자 갑자기 퍽하는 소리와 함께 강렬하게 느껴지는 어깨의 통증에 난 몸을 앞으로 숙여야 했다. “아..” 작게 신음소리를 내며 내가 고개를 돌려 위를 올려보자, 일학년중 한명이 내 어깨를 찼던 발을 올린 자세 그대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답이나 해, 선배.” 넌 선배가 대답 안하면 발로 차냐? 선배에 대한 예의는 눈꼽만큼도 찾아 볼수가 없구나 이 씨펄놈아.. 그래 명찰을 보니 이름이 박 순남 이구나. 이 전혀 이름과 매치 안되는 녀석.. 너 두고봐라. 열심히 놈을 야려준 후 난 앞의 가방을 추슬러 안으며 선우 현에게 대답했다. “친구는 개뿔.. ” “풋..” 선우 현은 나의 심드렁한 대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나와 눈 높이를 맞췄다. “저번부터 느낀거지만 선배들 참 재밌어요. 바보같은 대화들하며 아무렇지도 안게 도망다니고, 사소한걸로 막 싸우고.. ” “웬만하면..” 난 선우 현의 눈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바보같은 대화에서는 날 빼주기 바란다.” “뭐야? 이경민! 그럼 우리가 하는 대화는 바보같다는 거냐?” “야, 따지고 보면 니가 제일 얼빵할 때가 많아.” 인질이라는 사실도 잊고 나의 발언에 발끈하는 선호와 병국을 보며 선우 현의 말을 눈앞에서 입증해 준 것 같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푸훗... 하하.. 정말 잼있어요.” “그래. 니 말대로 우린 그냥 웃고 농담 따먹기나 하는 사이야. 필요하면 주저없이 도망치고, 내가 제일 중요하다는 입장들이니까.. 우리가 여기 있다고 해서 류인이가 올꺼란 생각은 하지마.” 내 말에 선우 현은 눈을 반짝였다. “맞아요. 류인 선배는 아마 여기에 친구들이 잡혀있다해도 눈하나 깜짝않고 그냥 내빼버리겠죠. 나도 알아요.” “그럼 뭐야? 우린 왜 데리고 온건데?” 병국이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방법을 생각해 내라구요. 누가 인질이래요? 선배들 말처럼 류인 선배는 자기 갈길 갈테니까, 선배들도 자신의 안전을 생각해서 얼른 류인선배가 이리 올라올수 있게 만들라는 거에요. 특히..” 선우 현의 웃음이 더 짙어지며 내게 얼굴을 들이댔다. “여기 소꼽 친구, 아 죄송.. 어릴 적부터 단순히 알던 사이인 이 경민 선배에게 기대가 크다구요. 나.” 소름돋는다 새꺄. 얼굴 치워라. 나의 무표정한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선우 현이 잠시 웃음을 지우더니 고개를 또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하나도 안 귀엽다니까! “아.. 선배..” 그러면서 내 턱을 손으로 강하게 잡아끌었다. “너 뭐하는..” 내가 그 손을 치우려 하자 뒤쪽에서 누군가 내 두 팔을 뒤로 잡아 끌어버렸다. 뭐야? 너.. 너 순남이지? 안 봐도 다 안다! 제발 이름대로 순박한 행동을 하란 말이다! 내가 갑자기 꺾인 팔에 얼굴을 찌푸리자, 감상하듯 내 얼굴을 잡고 요리저리 돌려 보던 녀석이 안경마저 벗겨내더니 눈을 음침하게 빛냈다. “핫.. 선배.. 이제보니..” 그래! 나 뭐!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녀석을 노려보는데 내 턱을 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험한데요? 류인 선배 가까이에 이렇게..” “아 썅! 너 류인이 보고 싶음 직접 내려가! 여기서 우리 붙잡고 지랄 떨지 말고.” 선우 현의 말은 갑자기 소리 지르는 선호의 말에 막혀버렸다. 갑작스런 선호의 발악이 그의 신경을 끌었는지 나에게서는 몸을 돌렸지만 돌리기 전 날 차갑게 노려보는건 잊지 않았다. 근데 선호 저자식은 갑자기 왜 소릴지르고 난리야? “왜 꼭 옥상이냐고! 류인이 녀석 고소공포증인거 알잖아? 그녀석 죽어도 안올라 올텐데 뭐하러 이 인원 데리고 여기서 삽질이냐? 이정도면 아래에서도 류인이 잡을 수 있어.” “왜 꼭 옥상이냐구요?” “그래!” “옥상이 아니면 안되요. 여기여야만, 여기서 날 봐야 기억 깊숙이 각인 될테니까요. 그리고 다루기도 쉬울꺼고. 이만큼 좋은 조건이 어디 있다구요.” 빙글거리며 말하는 선우 현이 모습이 참으로 추해보일 수가 없었다. 공포에 떠는 류인이에게 널 각인시키겠다고? 제기랄.. 난 몇 번 그녀석이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의 반응, 아니 손가락 하나 까닥 못할 만큼 패닉에 빠져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걸 본적이 있다. 근데 뭐.. 다루기가 쉬워져? 씹.. 내가 류인이를 많이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녀석이 고통에 빠져 너같은 사이코에게 조종당하는 걸 보고 있을만큼의 인간관계는 아니다 선우 현. 난 천천히 분노로 식어가는 머릿속을 회전시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에 있는 녀석들은 총 11명. 앞쪽에 선우 현과 함께 3명이 호위하듯 서있었고 문 앞에 2명이 지키고 있었다. 우리 바로 뒤에는 4명이 포진해 있었고, 마지막 무리에 강하다고 느꼈던, 필시 이 무리의 짱일법한 엑스맨은 저 멀리 담 밑에 앉아 지루한 듯 담배를 피고 있었다. 솔직히 숫자는 중요치 않았다. 목적이 이기는게 아니라 도망이라면. 하지만 역시.. 문제는 저 엑스맨인데.. 결국 모두 빠져나가는 건 무리인건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을 정리 한 후 옆을 보니 나만큼이나 열이 받은 건지 선호와 병국이의 표정도 상당히 굳어 있었다. 난 슬쩍 병국이 너머 선호와 시선을 교환했다. 한명이라도 빠져나가야 한다면 그건 병국이 여야 했다. 어쨌든 선호와 난 싸움이라면 좀 손에 익었지만 병국이는 키에 비해 의외로 약골이라 한방 제대로 맞았다간 필히 병원신세질께 뻔했다. 선호도 나와 생각이 같았는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 방법은 생각하고 계신 거에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는 선우 현이 아무 말 없는 우리를 보며 물어왔다. 그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에 품었던 류인이의 가방과 등에 맸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래. 방법을 생각해 봤지.” 류인이는 어차피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류인이를 원망하는 건 아니다. 선우 현의 말대로 우리 관계가 이것밖에 안되어서는 결코 아니다. 다만.. 녀석도 우리도, 당장 자기 자신의 가슴에 친구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의 상처를 내게 될지라도 상대방이 원하는 단 한명이라도 다치지 않는 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복수는 그 다음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류인이 녀석이 올라와서는 안될 때였다. 전혀 도움도 못줄 것이고, 스스로의 책임감을 체우기 위해 다친다하더라고 우리가 전혀 기뻐하지 않을꺼란 걸 알테니까. 녀석은.. 똑똑하니까.. 죄책감에 아프고, 가슴에 칼이 밖히더라도.. 올라오지 않을 것이다. 그게 녀석과 우리의 우정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손 놓고 있으면 복수의 대상이 자기가 될꺼란 건 아는 녀석이니 무언가 다른 방법을 취하긴 하겠지. 담임과의 면담이 길지 않아야 할텐데.. 선우 현은 아직까지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궁금하냐? 그딴건..” 난 대답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금새 어깨를 내리 누르는 손이 느껴졌고 난 빠르게 그 손을 잡아 몸을 돌려 꺾으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없어.” “으악!” 나에게 한 팔이 꺾인채 몸을 잡힌 순남이의 비명이 크게 울리는 걸 시작으로 선호와 병국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각자 앞의 녀석들에게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뒤 쪽의 엑스맨은 돌아볼 여유도 없이 문 앞에서 달려오던 놈들을 발로 차주며 병국이에게 소리쳤다. “병국아!” 내 말에 잠시 멈칫거리던 녀석은 눈에 괴로운 빛을 띄었지만 곧 나와 선호가 터놓는 길 쪽으로 뛰어왔다. “이 씹!” “개새끼들 잡아!” 일학년 녀석들의 아우성 속에 갑작스런 기습을 받은 앞쪽 녀석들을 헤치고 병국이가 문을 열고 뛰쳐나갔고, 우리의 의도를 알아차린 일학년 녀석들이 금새 문쪽으로 달려들어 왔다. 하지만.. 병국이가 나간 뒤 순식간에 닫혔던 문 뒤로 찰칵거리며 들려오는 문 잠그는 소리에 우리에게 공격을 퍼붙던 녀석들이 일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헤헤.. 얼핏 맞은 주먹에 입안에 핏물이 고인 것 같았지만 벙쩌하는 녀석들의 표정을 보니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 우리학교 옥상 문은 특이 하게도 옥상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에서 문을 잠그도록 되어 있던 것이었다. 이유는 옥상에서 나쁜짓 하는 녀석들 걸리면 바로 가둬버리겠다는 교장의 잔머리였지만.. 어쨌든 지금 그건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한마디로 녀석들은 갇혀 버린 거지 뭐. 아.. 그래. 나와 선호도 갇힌 거 알아. 안다구. “자.. 우리 모두 옥상에 갇힌 신세가 됐으니 사이좋게 지내볼까?” 넥타이는 반쯤 풀어지고 남방 단추가 한 두개 튿어진 모습으로 문에 기대어 선호가 씩 웃으며 말하자 녀석들의 표정이 금방 일그러졌다. “썅.. 뭐하는 짓이야? 빨리 문 안 열어?” 무리들 중 한명이 욕하는 목소리를 무시하면 난 고개를 살짝 문 쪽으로 향하며 소리쳤다. “병국아! 류인이한테 가서전해. 세현이한테 전화해서 애들 데리고 이리 오라고 해. 그리고 7반 민섭이한테 연락해서 저번주에 왕창깨진 건방진 1학년들 옥상에 있으니까 복수하고 싶으면 달려오라고 말하고.” “알았어. 쫌만 기달려!” 문 밖에서 병국이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고, 선호가 급하게 외쳤다. “야! 우리 형한테도 전화해서 오라고 해! 올 때 파스 잊지 말고 가지고 오라고 하고!” ‘알았어 새끼야’라는 조그마한 소리가 들린 후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의 하는 꼴을 보고 대충 상황이 돌아가는걸 알았는지 녀석들이 당황해 하는게 눈에 보였다. 아.. 쫌만 더 당황해 주면 좋을텐데... 라는 바램은 선우 현의 웃음소리 때문에 깨져버렸다. “푸훗... 하하하하... 정말.. 하하.. 정말 잼있어..” 아예 눈물까지 나는지 허리를 감싸 안고 손으로 눈가를 훔치던 선우 현은 우리를 보더니 헐떡거리며 물었다.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걸요?” 당연하지. 성공한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야! 선우 현 웃지만 말고 어떻게 할 거야?” 누군가 선우현에게 소리치자 언제 웃었냐는 듯이 표정이 싹 바뀌더니 냉랭하게 1학년 무리들을 보았다. “시끄러. 지금 고작 두명 가지고 니들이 지금 쫄아 있는 거야?” 이런.. 굳이 저 사고가 정지된 돌들에게 현 상황을 인식시켜 우리가 몰매 맞는 상황을 만들어 주지 않아도 되는데.. “하지만.. 저 문.. 잠겼는데 어쩔 거야?” 말한 일학년을 정말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던 선우 현이 고개를 뒤로 돌려 아직까지 담 밑에 앉아있던 엑스맨을 쳐다보았다. 고백컨대 솔직히 나도 녀석을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 근데 명찰도 안 달린 녀석의 이름을 내가 알 턱이 없지 않은가. 엑스맨 팬들 이해해달라. 선우현의 시선을 느꼈는지 놈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씨발.. 난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녀석이 핸드폰의 번호를 누르는 걸 지켜보았다. “나야. 옥상으로 올라와서 문 열어.” 간단히 지시를 한 후 전화를 끊은 그가 아이들을 헤치며 나와 선호 앞으로 다가왔다. “훗.. 니가 전화로 부른 놈이 빠를까 병국이가 부른, 아니 류인이가 빠를까? 옥상만 아니라면 류인이는 어디서든 싸울 수 있다는 걸 모르나 보지? 네가 부른 놈들 몇 놈들은..” “상관없어.” 선호의 말에 정말 녀석은 상관없단 표정이었다. “싸울 상대가 많으면 지루하지 않으니까.” 제기랄.. 저 녀석은 진짜 싸움꾼이다. 원군을 기다리는 것과 상관없이 몇 일 결석은 각오해야 겠군. 솔직히 저런 무서운 녀석과 이 많은 인원을 앞에 두고 떨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도 표정을 유지하며 숨을 골라 쉴 수 있는 건 다 한 류인 덕택이다. 어렸을 적부터 그 성질머리로 워낙에 적들이 많아서 옆에 있던 나까지 불똥이 튀긴게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그게 10년이 넘어 가다 보니 이런 살 떨리는 상황에서도 몇 일이나 결석해야 하나를 한쪽머리로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난 입안의 핏물을 바닥에 뱉어 내며 한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이런.. 야, 이경민. 지루하시단다.” 옆에서 들리는 선호의 말에 난 엑스맨에게 씩 웃어보였다. “놀아줄게.” 내 말을 끝으로 선호와 난 녀석들에게 돌진했다. 공포증 - 5 ‘퍽!’... ‘쿠당’... “한 놈씩만 덤벼!!! 치사한.. 으윽!” 정신없이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는 와중에 선호의 외침과 비명이 들려왔지만 달려가 도와 줄만큼 내 사정이 좋은 건 아니었다. 아니.. 실은 아주 안 좋았다. 간신히 날아오던 발차기를 피해 몸을 옆으로 돌리던 순간 명치끝을 겨냥하고 날아오던 주먹을 피하지 못하고 광대뼈 근처에 맞고 있던 중이기 때문이었다. “읏..” 나도 모르게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맞은 충격으로 만들어지는 몸의 반동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비어버린 복부에 누군가의 발을 정통으로 맞아야 했다. 순간 몸이 반으로 꺾였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내가 무의식중에 복부에 닿았던 발을 잡고 있는걸 알아차렸다. “씹.. 쥐새끼 같은 놈..” 나에게 발을 잡힌 놈이 짜증난다는 듯이 내뱉으며 주먹을 휘두르려는 찰나 난 입술을 꽉 깨물며 녀석이 지탱하고 있던 한발의 무릎 아래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쿠당!’ 엄청난 소리와 함께 녀석이 넘어졌고 그 소리를 즐길 여유도 없이 뒤에서 날아온 주먹에 나까지 앞으로 고꾸라져 바닥에 엎어져야 했다. 제기랄.. 정신을 차리기 위해 깨문 입술이 효과도 없이 바닥에 나뒹굴어 버린 내가 한심했지만, 사방에서 날아오는 발길질에 그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덜 아프기 위해 애쓰느라 그런 감정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래서야 놀아준다고 말한 당사자인 엑스맨에게는 주먹한번 날려보지 못해 체면도 말이 아니었지만 계속 가해지는 린치에 난 정신만은 잃지 않으려 애썼다. 엑스맨 미안하구나, 다음번엔 꼭 같이 놀아주마. 그 순간 몸에 가해지던 압력들이 사라졌다는 걸 느꼈고, 난 조심스레 머리를 들어올렸다. 이미 안경이 날아 간지는 오래였지만 누가 내 앞에 와 서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푸훗.. 생각보다 꽤나 오래 버티셨는데요. 뭐, 아까의 기세로 봐서는 좀더 놀.아.주.길 바랬지만 그래도 실망 안 했으니 걱정 마세요.” 내가 아까 했던 놀아주겠다는 말이 상당히 귀에 거슬렸었는지 선우 현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그저 웃음만 나왔다. 맞아서 퉁퉁 부어버린 얼굴 근육으로 웃음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말이다. 난 안 보이는 시선을 집중시키며 선우 현 뒤에 서있는 엑스맨에게 입가의 근육을 억지로 말아 올려 보았다. “넌 다음에 놀아줄게. 울지말고 기다려.” “쿡쿡.. 사람들이 류인선배 패거리는 모두 특이하다고 했던 말을 이제야 믿겠어요. 특히 경인 선배요.” 누가 우리더러 특이하다고 하든? 하긴.. 류인이 녀석과 같이 다니는 것 만으로 특이하긴 하겠지만.. 믿어줘 선우 현. 우린 평범하다고. “근데 이상해요.” 선우 현이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아직까지 고개조차 못 들고 있는 날 가까이서 내려다 봤다. “이렇게 재미있고..” 그의 손이 살짝 내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꽤나 호감가는 외모인데..” 선우 현은 손에 뭍은 나의 피를 천천히 자신의 입가로 가지고 가더니 혀를 살짝 내밀어 맛을 보았다. “전혀 좋아지지 않아요.” 무표정한 표정과는 달리 그의 눈빛은.. 사납게 빛나고 있었다. “나.. 전에 선배 본적이 있어요. 처음 류인 선배 보던 날 선배도 옆에 있었죠.” 잠시 그때를 생각하는 듯 녀석의 눈이 살짝 내리 감겼다. “훗.. 처음 류인선배 본게 기절하는 모습이었다면 믿겠어요?” 선우 현이 다시 나와 눈을 마주치며 천천히 이야기를 해 나갔다. “작년 12월에 백화점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고 나온 건 바로 선배에게 업혀 있던 류인선배였죠.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요. 하얗고 창백한 표정으로 선배 등에 얼굴을 기대고 쓰러져 있던 류인선배의 얼굴은 너무 아름다웠거든요.” 허... 이제 보니 너 매저키스트가 아니라 새디스트였구나. 남 기절해보이는 얼굴이 그리 멋지든? 설마 그래서 그 얼굴 한번 더 보자고 옥상을 고집한 거냐? 그런데.. 작년 12월 백화점이라면.. 제길.. 그때군. 류인이 큰형인 류민형 따라 억지로 백화점에 끌려갔었는데 한번 전자제품 구경에 빠지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헤어나올 줄 모르는 형을 피해 몰래 도망치다 걸려 녀석과 난 급한 김에 열리는 아무 엘리베이터에 탔던게 화근이었다. 숨을 몰아 쉴 때는 몰랐는데 허리를 피고 돌아서는 순간.. 갓 뎀! 우리가 탔던 건 전망엘리베이터 였던 것이다! 순간 확 하고 펼쳐지는 7층 높이의 장관... 그리고 말없이 그대로 쓰러지는 한 류인. 나 보다 10cm나 큰 녀석을 단지 친구란 이유로 들쳐 업으며 기필코 돈 모아 이민 간다고 결심을 굳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선배가 류인선배를 의자에 눕힌 후 급히 어디로 뛰어갔죠. 그때 류인선배에게 다가가면서 내 심장이 얼마나 떨렸는지 아마 모를꺼에요. 처음... 경험하는 거였죠. 그렇게 아름다운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아니..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울리는 건 바로 내가 살아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순간이었거든요. 아, 그 누워있는 얼굴 보면서 내가 얼마나 눈뜬 그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는지 모를꺼에요.” 난 조용히 그의 눈을 응시했다. “닭살이다.” 녀석이 나의 무덤덤한 말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씩 웃었다. “그런가요? 그런데 조금만 더 들어주실래요. 정작.. 눈을 뜬 그의 모습을 그렇게나 보고 싶어 했는데, 선배가 어디서 가져온 물수건으로 닦아주자 류인선배는 금새 눈을 뜨더군요. 그리고 놀란 건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내렸던 엘리베이터 문을 발로 막 차면서 욕을 하는 거였어요. 좀 전에 기절했던 사람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말이에요. 그때 굉장히 궁금했죠. 왜 화가 났을까? 왜 기절했던 걸까?” 당시 녀석이 행패를 생각하니 아직까지 창피함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녀석의 난동을 말리느라 백화점 경비원 3, 4명이 달라붙어서야 겨우 진정시켰으니까. 덕분에.. 한 달간 그 백화점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다. “나중에 류인선배가 고소공포증이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요?” 아.. 나한테 물어 본거냐? 하지만 대답을 않고 멀뚱히 바라보자 녀석이 표정을 가라앉히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망했어요. 그리고.. 존경스러웠죠. 이상하죠? 완벽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의 단점이 상당히 싫었지만, 그의 태도는 날 끌어당겼으니까요. 너무 당당했으니까.. 기절했던 주제에 벌벌 떠는 것도 아니고, 당연하다는 듯이 엘리베이터를 차는 모습. 그게 절대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핑계에서의 행동이 아니란 것도 단번에 알았죠. 그리고 모자랄거 하나 없는 그가 자신의 약점을 당연시 여기며 받아들이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난 충격이었어요. 어째서.. 그는 더욱 더 완벽해 질수 있는데.. 극복한다면 완전해 질텐데...” 선우 현은 마치 나에게 해답을 원하듯 눈으로 묻고 있었다. “한 류인 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의 전부였다. 그래, 한 류인 이기 때문이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매번 기절하는 자신의 상황에 스스로 겁을 먹겠지만, 한 류인.. 녀석은 너무 나도 쉽게 자신을 받아들이고, 이해해 버린다. “그런가요? 훗.. 그게 류인선배의 저력이겠죠?” 저력까지야..--;; 한편으로 생각하면 단순함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뭐. 그래도 녀석의 말을 공감하는 건, 나도 류인이에게 그렇게 느꼈기 때문일까? “하지만 내가 원해요 이젠. 약점을 인정해버린 류인선배의 당당함도 좋지만, 더 바라게 되요. 내가 못하기 때문에.. 난 해볼 수도 없는 일을 당연시 하는 류인 선배기에 그가 더 완벽해진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걸 난 알아요. 보고 싶어.” 제길.. 나도 모르게 눈썹이 찌푸려졌다. “내가.. 그렇게 만들겠어.”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 나에게 내뱉은 말을 마지막으로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류인이는 네 장난감이 아니야. 너의 대리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란 말야. 소리쳐야 했다. 저 미친놈이 더 엇나가기 전에 말려야 했다. 하지만 다시 살벌한 기세로 다가오는 일학년 녀석들을 보자 처음으로, 내 능력, 아니 내 존재의 한심함에 후회가 들었다. 당장 이 순간 당할 린치를 피할 힘도 없으면서 저 뒤에 팔짱을 끼고 서서 느긋이 내가 맞는 걸 구경하겠다는 듯 서있는 녀석에게 충고 따위 먹혀들리 없었으니까. 빌어먹을 선우 현. 난 갑작스런 오기로 힘이 나서 상체를 일으켜 녀석을 노려보았다. 나도 말이야 이젠.. 네가 예의 바르고, 꽤나 호감 가는 얼굴이라 할지라고 널 결코 좋아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전의에 다시 불타올라 주춤 일어서려는 순간.. 난... 보.고.야. 말았다. 싸우느라 잊고 있었던, 결코 잊지 말았어야할... 처참히 밟혀 찌그러진... 한 류인의 가방을! “으아~~~~~~~~~악~!!!!!!!!!!”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명을 질러대자 내 주위에 있던 녀석들이 놀라 움찔거렸다. 하지만 녀석들의 눈은 더 커져야 했다. 왜냐하면 내가 미친 듯이 네발로 기어가 가방을 덮치는 모습을 봐야만 했으니까. 당시 간신히 눈만 뜨고 있었다던 선호의 말을 빌리자면 그때 나의 모습은 가히 엑소시스트의 악령소녀가 머리통 돌린체 네발로 계단 내려오던 자세(상당히 아크로바틱한 자세로 안보신 분들은.. 보지 말라. 무섭다--;)와 흡사 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웬만해선 비명 같은 건 지르지 않는 내가 미친놈처럼 소리지르며 가방을 감싸 않는게 너무 맞아 머리가 돌아버린 줄 알았단다. 하긴.. 당시 류인이의 가방이 온갖 발자국들로 도장이 찍힌체 널부러진 모습을 보고 나도 머리가 돌뻔했으니까. 내가 갑자기 소릴 지르며 달려갔던 이유는... 하교 후 나에게 가방을 맞기며 당부하던 녀석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조심해.” 가방을 넘겨주며 녀석이 말했다. “왜?” 심드렁하게 묻자 날 쓱 보던 녀석이 중얼거렸다. “류민이 형 PDA 들어있어.” “에엑?” 류민이 형의 PDA라면 분명 엄청난 컬렉션을 자랑하는 그의 전자제품 모으기 취미중 하나인 물품일 터인데.. 손가락 하나라도 건들면 바로 칼날라 오는 그 물건을 도대체 왜 가지고 온거냐! “뭐야? 니껀 어쩌구 형껄 가지고와?” 나의 경악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아무렇지도 안게 말했다. “수리 맡겼어.” 너.. 너무 담담한거 아니냐? 나중에 걸리기라도 하면.. “형 지방 내려갔어.” 그래도 그렇지. 간땡이가 부었구나. 아니 이미 부었지만. “휴.. 오늘 하루는 그냥 거래 하지 말지 그랬냐. 뭐 하러 류민형 PDA까지 들고 와서..” 혹시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지만, 류인이의 취미는.. 주식거래였다. --;; 녀석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라고는 하지만, 눈에 불을 켜고 수시로 PDA보며 사고 팔고 하며 이익 남을 때마다 그 음흉한 미소를 짓는걸 보면.. 분명 즐기고 있는거다. 고등학생이 무슨 주식투자라니 라지만.. 녀석은 고 1때부터 했다. 그리고 열 받는 건 상당히 짭짤하게 벌어들인다는 거겠지만. “시끄러.” 나에게 가방을 맡기고 교실을 나서던 류인이의 뒷모습을 보며 결코 지금처럼 녀석의 가방을 감싸고 후회를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솔직히.. 가방을 감싸고 동그랗게 구부러진 위로 쏟아지는 일학년 녀석들의 구타보다도 앞으로 다가올... 흠집이 갔을 PDA로 인할 생각지도 못할 공포 때문에 머리가 마비되어 왔다. 그리고.. 그 마비되어 가는 머릿속에서 한 가지.. 나 만큼이나 PDA로 머리가 돌아버릴 한 사람을 떠올리고야 만 것이다. 이런.. 설마.. 설마 류인이 그 자식 설마.. ‘쾅’하고 옥상 문을 발로 차 열고 들어오는 지금 같은 짓을 하지는.. 으악!! “어? 뭐야? 왔잖아. 고소공포증이라며..” 머리위에서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멀리서 울리는 뱃고동 만큼이나 희미하게 들려오며, 난 무표정하게 쓰윽하고 훑어 보다 나와 내가 감싸고 있는 가방에서 시선을 멈추는 녀석을 봐버렸다. 제기랄!! 너.. 너.. 남들에게는 전혀 안보이겠지만 지금 내 눈에는 보였다. 천천히 한발자국씩 옥상으로 내딛으며 평상시와 같은 표정이지만 이미 뚜껑 열려 있는 너의 상태를 말이다! 아니면.. 문을 여는 순간 기절해야 옳았을 녀석이 옥상으로 들어오는 걸 설명할 수 는 없다. 이 상태는 이미 이성이 땅굴 파고 북으로 넘어갔다고 해도 좋으니까. 제길.. 지금처럼 녀석이 눈에 뵈는게 없는 상황을 보는게 도대체 얼마만이지? “선배. 올라 오셨군요.” 선우 현이 나서며 류인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시선을 나와 가방에만 준 채 마치 선우 현은 없는 사람인 듯 밀치고 그대로 걸음을 내딛었다. 서늘한 눈빛이 날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 큰일이다. 이봐 일학년들.. 너흰 이제 죽었다고. “선배!” 그때 무시당한 선우 현이 손을 들어 류인이의 팔을 잡았고, 순식간에 류인이의 몸이 비들린다 싶더니 어느새 선우 현이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군 모습이 되어 버렸다. 류인이의 빠른 일격이 어떻게 제대로 선우현에게 맞은건지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놀란 일학년 녀석들이 류인이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퍽’ “으악!” ‘타탁..’ 정확하게 명치만 가격하며 깨끗한 움직임으로 한명씩 쓰러트리는 녀석의 모습은 가히 투신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만큼 이었다. 뒤에서 날라 오는 주먹을 살짝 움직인 머리사이로 피하며 손을 들어 간단히 녀석의 얼굴을 가격하는 것과 동시에 왼쪽 발을 뻗어 앞에서 공격하던 놈의 옆구리를 쳐냈다. 그리고 한 템포 쉬는 것도 없이 바로 쓰러지고 있는 녀석의 가슴을 다시 발로 쳐냈고, 듣기에도 끔찍한 신음소리를 내질르며 한 놈이 뒤로 날라 갔다. 그 사이 류인이의 모습에 겁을 먹고 몇몇이 뒤로 물러 서는게 보였고, 잠깐 사이 네 다섯 명을 그대로 헤치 훈 류인이 앞에 이제는 지루한 표정을 완전히 감춘 녀석들의 짱이 나섰다. 웃기게도 엑스맨 녀석은 입가에 미소까지 띄우고 있었다. 평소라면 잘생긴 얼굴에 미소라 보기 좋다며 박수라도 쳐줬겠지만 자신의 상대를 만났다는 듯 짓는 그 미소는 섬뜩해 보였다. “현이 녀석이 말했을 때.. 난 안 믿었지.” 느릿하게 말하는 녀석을 류인이가 천천히 돌아보자 녀석이 더 짙은 웃음을 지었다. “너 말이야.. 내 입맛에 맞을 꺼라고 했던 현이가 말했었거든. 미안. 이렇게.. 딱 내 입맛인데 말야.” 류인이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여전히 무표정인 채로 있었지만 녀석은 상관없는 악인대사의 전형을 내뱉으며 한걸음 더 다가왔다. 뭐야.. 이 긴장감은. 서있는 놈들, 나가떨어진 놈들, 바닥에 나뒹구는 나와 선호 모두들 정말 숨 하나 내쉬지 않고 둘을 바라보았다. 마치 서부극에서 결투를 앞두고 있는 두 대결자가 총 뽑을 자세로 멈춰선 모습을 지켜보듯이 말이다. 드디어 멈춰 섰던 엑스맨이 더 이상 기다리기 싫다는 듯 몸을 날렸고 그 순간! “씨발, 너 뻥이면 죽을줄 알아? 새끼 지금이 몇신데 그 일학년 개쉐이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그리고 얌체같은 이경민이 설마 붙들려 있다는..” 남자치고는 높은음색의, 결정적으로 상당히 경박스럽게 들리는 목소리가 조용하던 옥상의 분위기를 한순간 깨버렸다. 그리고 등장한 사람은 목소리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외모의 소유자인 민섭이였다. 불량학생 답지 않게 등하교 시간은 정확히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민섭이을 어떻게 데리고 온 건지 옆에는 뛰었는지 숨을 헐떡거리는 병국이가 있었다. 근데 누구보고 얌체라는 거냐 김민섭. --; “뭐.. 뭐야? 썅! 이 좆만한 일학년 새끼들.. 니들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야? 어라? 이 경민! 넌 왜 거기서 엎어져 뒈져 있는거야?” 웬만한 방해로는 깨어질 것 같지 않았던 엑스맨과 류인이의 결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단숨에 한여름 불쾌지수를 능가하게 하는 마력을 지닌 민섭이의 목소리로 깨어져버렸다, 덕분에 뭔가 기대하던 눈빛이던 일학년 관중들이 민섭이에게 좋은 눈길을 보낼리는 없었다. 하지만 민섭이는 그 일학년 녀석들의 야림을 깨닫기도 전에 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헉!... 너.. 너... 한 류인 니가 왜 .. 여기에...!” 평생 몇 번 보지 못할, 민섭이에게는 이번이 두 번째인 옥상위의 류인이 모습에 민섭이는 거의 경악으로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러고 보니 지금 상황이 딱 1년 전과 비슷하잖아? 다른게 있다면 민섭이가 엑스맨의 위치에 있었고, 당시 내 품에 있던게 류민형의 10.5인치 노트북이 있었다는 것 정도? 그리고 어떻게 됐더라.. “씨...ㅂ.. 그.. 그럼 지금.. 저.. 저 녀석..”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민섭이의 모습을 보아하니.. 그래, 당시 개떡이 되도록 맞았던 네 모습이 생각나는구나. “야, 김 민섭. 니가 웬일로 수업 끝난 학교로 우릴 부르고 그러냐? 어라? 너 왜 그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옥상문턱을 넘어서는 4명의 낮 익은 인물들이 등장했다. 하나같이 얼굴에 반창고를 붙인 전 학교 일진 녀석들이었다. “어! 니 녀석들은!” 그리고 처음 민섭이의 반응처럼 자신들을 뭉겐 일 학년들을 보자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소리쳤고 곧 대치 상태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아주 징그럽게도 내가 끌어안고 있는 가방을 노려보고 있는 류인이 녀석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헉! 한.. 한류인... 네가 왜... 왜... 여기에..?”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네 명은 뒤로 주춤 물러섰고, 그들을 흥미있게 바라보던 엑스맨이 눈을 빛내며 류인이를 다시 돌아보았다. “점점.. 더.. 재밌어.” 그리고는 소리 없이 몸을 앞으로 내밀며 류인이의 비어있는 가슴 정면에 주먹을 날렸다. ‘휙’ 스치는 바람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옆으로 몸을 비튼 류인이가 녀석의 손목을 잡아 그대로 끌어 녀석이 몸이 앞으로 쏠리게 한 후 바로 복부를 향해 무릎을 차올렸다. 하지만 역시 녀석은 만만치 않았다. 어느새 잡힌 손을 중심으로 한바퀴 회전하듯 몸을 돌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위치를 바꾸어 다시 주먹을 휘둘렀고, 류인이는 나머지 한손으로 방어하며 다리를 들어 올렸다. 다시 빠져나가고, 주먹들이 오가고, 방어하고... 마치 액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휙 휙 바람소리를 내가며 싸우는 녀석들이 정녕 고등학생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살벌하게 싸우고 있었다. 재미있겠다며 웃던 녀석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듯 평소의 움직임이 적은 싸움과는 달리 류인이의 동작도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녀석이 류인이의 킥에 녀석의 옆구리에 맞아 뒤로 주춤 물러서는 게 보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류인이의 주먹이 녀석의 가슴께, 갈비뼈가 갈라지는 명치를 정확히 가격했다. 제대로 맞으면 심장과 폐에 무리가 있어 그대로 골로 가버릴지 모르는 급소를 맞아 헉하는 숨소리와 함께 주저앉은 녀석의 모습에 난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 류인이 주먹에 급소라니.. 나 같으면 벌써 기절하고 남았다. 꽤나 독한 놈 이구나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빠르게 투닥 거리는 와중 순식간에 급소를 가격하는 류인이의 괴물 같은 능력에 다시 한번 놀라느라 주저앉은 녀석에게 신경을 줄 틈이 없었다. 나도 잘은 아니지만 꽤 주먹을 쓴다는 소리를 들어 알고 있다. 실전에서, 특히나 저렇게 반사신경 하나만 믿고 싸워야 하는 상대를 쓰러트린다는거.. 새삼스럽지만 둘째형인 류진형의 교육이 정말 무섭긴 무섭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슬쩍 눈을 들어 주위를 보니 엑스맨이 쓰러졌다는 것에 놀란 일학년 녀석들이 얼음동상이 되있는 게 보였다. 하긴 놀랄 만도 하지.. 다시 공항상태가 되어버린 휑한 옥상에서 모두의 시선을 받는 주인공이 된 류인이가 몸을 돌렸다. “일어나.” 옥상으로 온 후 처음으로 류인이가 입을 열었다. 근데 정말 너 대단한 놈이구나.. 분명 여기가 옥상이란 것도 잊을 만큼 퓨즈가 나간 상태일텐데 말하는 건 평상시와 똑같다니. “어?” 멍하니 류인이를 생각하느라 난 그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명령하는 녀석의 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일어나라고.” 다시 나직히 들리는 녀석의 말에 난 그제서야 내가 류인이의 가방을 감싸 안고 공처럼 몸을 말아 엎어진 자세였다는 걸 깨달았다. “아.. ” 순간 이 자세가 꽤나 쪽팔리는 모양새라는 걸 생각하고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분명 뇌에서는 정확히 명령을 내렸는데.. 채 무릎을 다 피지도 못하고 꼴사납게도 난 가방을 끌어 앉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윽... ” 류인이의 등장으로 잊고 있었던 통증들이 새록새록 전신으로 퍼져 나가면서 순식간에 고통이 몸을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아.. 이 경민. 그동안 좀 편하게 살았다 싶더니 이런 어린애들한테 좀 맞은거 가지고 지금 일어나지도 못하는 거냐? 스스로도 한심한 생각이 들 때 갑자기 내 위로 그늘이 생겼다.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드는 순간 번쩍 하고 가볍게 내 몸이 들어 올려졌다. “한 류인..” 너무 당황스런 상황이라 내가 입만 벌려 겨우 녀석의 이름을 중얼거렸고, 못 들은건지 류인이는 처벅처벅 걸음을 옮기며 아직까지 돌이 되어버린 사람들 사이를 지나 문으로 향했다. 덕분에 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주변의 모습을 본의 아니게 보게 되었다. 그리고 선우 현이 입술을 깨물고 우리 쪽을 노려보는 모습과 이제는 편하게 주저앉아 여전히 묘하게 웃고 있는 엑스맨의 모습은 앞으로 다가올 녀석들과의 악연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 머리가 아파왔다. 그런데, 민섭이를 비롯한 네놈들의 표정이 좀 이상하구나. 왜 경악스럽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거지? 내 몰골이 그리 이상한가? 아니 자세히 보니.. 병국이의 저 익숙한 표정은.. 왠지 닭살 돋아 하는 것 같은데. 닭살? 류인이가 날 안고 가는 이 상황이 뭔가 이상하단... 헉! 난 급히 눈을 돌려 류인이에게 공주님 포즈로 안겨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봐야 했다. 안긴것도 모잘라 난 머리를 녀석의 가슴에 기대고, 무의식중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가방을 안고 있지 않은 한 팔을 들어 녀석의 목에 감.고.있.었.다. 이.. 이 무슨 개같은 포즈란 말인가! 순간 띵하고 머리가 울리며 쪽팔림으로 인한 충격에 난생 처음 기절이란 걸 해버렸다. 하.. 역시 이민을 가야.. 공포증 - 6 무언가 웅성거리며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건 쌍둥이라고 믿겨질 만큼 선호와 판박이로 생긴 준호형이 선호를 치료해 주고있는 다정한 모습이었다. ‘퍽!’ “아~악! 아파 형! 파스 붙인다는 명목으로 제발 패지 좀 마!” “지랄.. 엄살은.” ‘퍽! 퍽!’ “으...” 살벌해 보이는 파스붙이기 행위에 이제는 아파서 입만 벌린체 윽윽 소리를 내는 선호는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불쌍해 보였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선호가 표정을 풀며 물어왔다. “어? 경민! 괜찮냐?” 난 으드득거리는 몸을 일으키며 준호형에게 고개를 까닥해 인사를 해 보이고는 침대위에 앉았다. 둘러보니 역시나.. 양호실이었다. 밖은 벌써 캄캄해 져있었고, 양호실에는 나와 선호, 준호형 만이 있었다. 문득 시계를 보니 9시. 시간이 생각보다 늦은걸 알고는 난 살짝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떻게 들어온 거야?” 끝나는 종이 치면 학생들보다 먼저 양호실 문 잠그고 칼퇴근 하는 양호선생님을 생각해서 내가 묻자 선호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준호형이 여기 열쇠 있잖아.” 그래.. 잊고 있었다. 너희 집안을. 교문에서 2분 거리에 떨어져있는(거리상으로는 1분이지만 중간에 신호등 때문에 1분이 추가된다.) 선호네 가족은 이 학교를 상당히 사랑하고 있었다. 집에서 가깝다는 명분 하에 학교의 기물들과 시설들을 이용해 줘야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이 가족들은 밥이 없는 날이면 단체로 학교식당에 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외식을 하며, 여름이면 운동장 한구석에 아예 어디서 구했는지 대청마루를 가져 다 놓고 열대야를 수박과 함께 보내곤 했다. 그러니 어렸을 적부터 학교의 모든 시설을 제집마냥 이용한 이 가족에게 구급약이 항시 상비되어 있는 양호실의 열쇠가 있다는 건 당연한 거였군. --; 하긴.. 한밤중에 메신저에서 선호를 만나 어디냐고 물어보면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다. ‘학교 컴퓨터실이지.’ 혹시 교무실 열쇠는 안가지고 있냐? 그때 나의 멍한 표정을 바라보던 준호형이 치료를 마친 선호를 밀치며 말했다. “너도 와라. 파스 붙여주마.” 그 말에 화들짝 놀란 나는 몸을 뒤로 쭉 빼고는 당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 괜찮아요. 형. 전 별로 다치지도 않았어요.” 그러자 형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넌 기절까지 했다며?” “아.. 그건..” 쪽팔린 포즈로 인한 정신적 충격때문이죠라고 차마 설명을 못하고 있을때, “크큭.. 형 그건 말이지 아파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커다란 데미지를 입어서라고 할 수있지. 저 녀석 말야, 류인이한테 이~렇게 안겨서 내려왔거든.” 파란 멍과 부어오른 얼굴로 괴수스럽게 웃는 선호는 준호형 무릎에 앉아 몸소 시범을 보여주며 내 대신 자세히 알려주고 있었다. 아주 팔은 준호형 목에 걸치고, 머리까지 다소곳이 가슴에 기대고 말이다. 당시 상황을 알려주고자 노력하는 너의 모습은 좋다만 선호야.. 상당히 위액 올라오는 포즈구나. 제길.. 나도 저랬나? “오~ 드디어 러브러브인가?” “하하.. 맞아 형! 이런건 러브가 아니면 절대 설명 못할 바디 컨택트라고나 할까?”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주고받는 형제를 보며 난 밀려오는 두통에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고 물었다. “그런데 류인이랑 병국이는 어디 간거야?” 아직까지 형의 무릎위에 앉아있던-제발 떨어져!- 선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병국이는 뭐 먹을거 사러갔고, 류인이는..” 내가 계속 설명하라는 듯 쳐다보자 선호는 머리를 긁으며 입을 열었다. “너 여기 내던져 놓고는 급하게 가방에서 PDA 꺼내더니 얼굴 하얗게 변해서 뛰쳐나갔어.” 윽.. 잊고 있었다. PDA.. 난 서서히 핏기가 빠져나가는 나의 얼굴을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PDA.. 마,, 많이.. 흠집 났냐..?” 조심스런 나의 물음에 무심하게도 선호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오 마이 갓! 설마 류인이 녀석 류민형에게 내가 PDA 그렇게 만들어 놨다고 떠넘기진 않겠지? 그래, 설마.. 지놈 땜에 옥상에서 복날 개 맞듯이 맞은건데.. 자신의 컬렉션을 건드리는 자에게는 단 한톨의 자비심도 없이 야차로 변해 응징을 가하는 류민형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난 머리를 굴려야 했다. 분명 류민형의 취향으로 봐서 국내에는 출시되지도 않았을 희귀 기종일텐데.. 그래도 흠집난거 어떻게 되겠지? 그렇게 한창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는 나에게 선호가 결정적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근데, 그거 안 켜진다고 류인이가 중얼거리던데?” “뭐야!” 너무 큰 충격에 초인적인 힘으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선 나는 온몸에서 아우성처 대는 고통들을 무시하고 선호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며 소리쳤다. “진짜냐!!” “으..응. 류인이가 그랬는데.. 왜 그래?” 헉.. 난 죽었다. 류인이도 모자라 그 형제들에게까지 공포를 느껴야 하는 내 인생이라니.. 내가 말도 못하고 멍해진 눈으로 서있자, 이번엔 선호가 내 팔을 흔들었다. “이 경민 무슨 일인데?” 그때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고 손에 봉지를 든 병국이가 나타났다. “어? 경민아 괜찮아?” 하지만 넋이 나가버린 내 모습에 이유를 묻듯이 선호를 쳐다보았지만, 선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거..” 내가 겨우 입술을 떼며 소리를 내자 시선이 모두 나에게 모아졌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 PDA.. 류민 형꺼야.” 내 말을 끝으로 선호와 병국은 입과 눈을 있는데로 크게 벌린 경악스런 포즈로 굳어버렸다. 나의 정신력에 박수라도 보내주고 싶을 만큼 엉망인 몸을 이끌고 다음날 난 학교에 갔다. 전날 나의 몰골에 놀란 것도 잠시 가족들은 으레 내가 또 류인이 일에 말려들어 사고쳤구나 정도로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 가족간의 정이 고작 초코파이 만하다는 걸 확인 시켜 주었다. 그래도 나의 영원한 팬인 올해 5살이 된 막내 한얼이만 형 아파 보인다며 내 옆에서 훌쩍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어 날 감동시켰다. 그러나 곧 전생이 여우 과 동물이 아니었을까 강력히 의심되는 여동생 여울이가 과자로 한얼이를 유인해 데려가 버려 감동의 기쁨은 5분을 넘기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지금.. 교실 문을 넘어서는 순간 보이는 류인이의 모습을 보니 정신력이고 뭐고, 당장 뒤돌아 집으로 향해 뛰고 싶었다. “류..인아?” 엎어져있는 류인이를 보다 한참 만에 녀석을 조심스레 불렀다. 자는건가? 아무런 반응이 없어 초조해하는 내 눈에 멀찌감치 떨어져 이 쪽을 긴장한 채 바라보고 있는 선호와 병국이가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내가 손을 들어올리자 두 녀석이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뭐..뭐냐.. 어제 몰매 맞은 여파로 아무리 얼굴이 몬스터가 됐다지만 그렇게 뒤로 물러설꺼 까지야... 헉! 이놈.. 심장 떨어지는줄 알았다.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 다시 돌린 시선에 류인이의 얼굴이 보이자 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떨리는 미소를 지었다. “앗.. 류인아.. 언제 일어났냐?” 그러나 자느라 눌린 우스운 머리모양의 노력에도 환한 미모의 빛을 발하는 류인이는 날 노려보기만 했다. 저렇게 노려본다는 건.. 역시...PDA가 잘못된...건.. 하하... 아닐 거야. “너..” 꿀꺽. “으..응?” “이따 집으로 와.” 제기랄! 집으로라니. 설마 지옥도 울고 갈 너네 집을 말한다는 건.. PDA 잘못됬구나.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어버린 상황에 암담한 심정으로 류인이를 애처롭게 쳐다보자, “뭘 야려.” 라고 다정히 답하는구나. “아니 야린다기 보다도...” 암담한 현실을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고민중이다 이눔아. “도.망.갈. 생각하지 마” 오.. 그것도 한 방법이겠구나. “도망은 무슨..” “끝나고 같.이. 간다.” 이 친구에 대한 믿음이 발가락 때만큼도 없는 놈아.. 현명하구나. --;; 도망갈 걸 알아차리다니. 하지만 나 혼자 당할 수는 없어! “아, 오랜만에 가는건데 선호랑 병국이도 같이....... 갈..까?” 내 말이 들렸는지 움찔거리며 한발자국씩 뒤로 물러서는 선호와 병국이가 보였다. 날 그런 원기어린 눈으로 노려봐도 소용없다. 특히 선호! 의리에 예민한 만큼 이번에 증명하란 말이다! 그리고 내 기대에 부응하듯 선호가 소리쳤다. “난 안돼!! 할아버지 제사야!” 너.. 의리한번 짱이다 새꺄. 난 선호를 흘기며 무덤덤하게 물었다. “너희 할아버지 제사 9월이잖아.” “헉! 증..증조 할아버지야! 우..우리 증조할아버지가 날 얼마나 이뻐 하셨는데. 오죽하면 죽으면서 유언으로 제사때 내가 꼭 있어야 된다고 말하고 돌아가셨다는 전설이 남아있다니까!” 누가 그런 유언이 전설로 탈바꿈하는 유치한 거짓말을 믿을 것 같냐! “유언이라면.. 남아야지.” 한 류인은 믿는구나 --; 난 굉장히 안도하는 표정으로 변한 선호는 제치고 병국이를 보았다. 하지만 움찔거린게 언제였냐는 듯 의외로 담담한 표정의 병국이는 입가에 가는 미소까지 지어 보였고 나와 류인이를 쓰윽 보더니 한마디 했다. “그날이다.” 제기랄... 그날이라면.. 난 결국 포기했다는 실망감을 드러내며 대꾸 해줄 수 밖에 없었다. “치료 잘하고 와라.” “후훗~” 심각한 치질로 1월 말 수술 받은 후 한달에 두 번씩 병원에 가는 그날이 오늘이었다니! 평소에 그날이 되면 날 죽여줘라며 칼을 들이데며 싫어하던 놈이었는데.. 네가 지금 웃은 걸 담당 여.의.사.가 알면 기뻐하시겠구나 병국아. “야! 빨리 와.” 어기적거리며 최대한 느린 걸음을 걷고 있던 날 보며 류인이가 짜증난다는 듯 소리쳤다. 하긴.. 평소 5분이면 걸어갈 교문까지의 거리를 15분으로 연장시켰으니 짜증도 날만 하겠지. 하지만 말야! 사이좋게 너네집을 가는게 아니라 나도 증조할아버지 제사에 항문외과 정기검진을 가고 싶단 말이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런다.”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울분들은 삼킨 채 조용히 말하자 녀석이 걸음을 멈추고 날 지긋이 보았다. 근데 왜 니 눈빛이 걱정스러운 듯 보이는 거지? 약간 혼란스러움을 느낄 때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류인이가 낮게 말했다. “또 어제처럼 안.아.서. 데리고 갈까? 어?” “짜식.. 꾀병이었다. --;” 그리고 정말 안을까 싶어 빠른 걸음으로 류인이 녀석을 앞질러 가는데 교문 근처에 눈에 익은 두사람이 서있는 게 보였다. 아니 익은 정도가 아니지 바로 어제 나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한 상대들인데 말야. 안그래? 선우 현과 엑스맨. 그때 내 어깨에 류인이 손이 올라오더니 나를 자신 쪽으로 살짝 끌어 당겼다. 내가 녀석을 쳐다보자 앞만 보던 류인이가 중얼거렸다. “신경 꺼.” 글쎄.. 난 그러고 싶지만 우릴 발견하고 다가오는 두 녀석들이 신경 쓰이게 하는구나. “안녕하세요. 선배님.” 언제 봐도 산뜻해 보이는 선우현의 웃는 모습이 망막에 비췄을께 분명하지만 뇌에서는 반대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내가 여전히 무표정하게 바라보는걸 보면. 그래도 난 시선이라도 줬지 류인이는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고 내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선우 현.. 이렇게 냉담하고 무관심한 놈한테 정말 애정이 생기는 거냐? “뭐야?” 선우 현의 인사를 듣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엑스맨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서있었다. 류인이가 귀찮다는 듯 묻는 질문에 녀석은 한쪽 입가를 씨익 올리며 엄지손가락으로 운동장 끝 철봉대를 가리켰다. 잠시 엑스맨을 노려보던 류인이가 내 어깨에서 손을 내리고는 녀석을 따라 철봉대로 움직였다. 뭐야.. 설마 저 엑스맨 녀석 또 싸움을 걸려는 거야? 놀라서 쫓아가려는 날 붙드는 손이 있었다. “놔.” “훗.. 몸은 좀 어떠세요? 경민 선배?” 난 팔을 쳐내며 내 옷깃을 붙잡고 있던 선우 현의 손을 떨쳐냈다. 간신히 170cm이 넘을 것같은 선우 현은 몸집이 외소해서 인지 실제 키보다는 더 작아보였다. “아파 죽겠다.”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녀석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정말 재미있으시다니깐..” 하지만 전혀 재미가 없던 난 삐딱하게 녀석을 내려다 보며 물었다. “그래, 이제 지상전으로 바꾼거냐?” 옥상에서 류인이를 보겠다던 녀석의 고집이 꺾인 것에 비아냥 거리며 물었지만 선우 현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귀엽게(?) 대답했다. “아... 지상전이라.. 아니 전면전이라고 해주세요. 기대하셔도 될꺼에요.” “난 평화주의자야.” “그러시면 안 되죠. 이번 작전의 주인공이 바로 선배인데.” 얼굴이 찡그려 지려는 건 간신히 참으며, 난 애써 무덤덤하게 보이고는 대수롭지 안은듯 답했다. “상대역이 너라면 사절이다.” “아, 가슴 아파라.” 정말로 손을 가슴에 얹으며 연기하는 모습을 어이 없이 지켜보는데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어왔다. “참, 그런데 어제 류인선배는 어떻게 옥상에서 멀쩡할 수 있던 걸까요?” 제길.. 혹시.. 오해 하고 있는건가? 나를 주인공 운운할 때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녀석은 거기가 옥상인줄도 몰랐을 꺼다.” “그래요...” 선우 현의 웃음이 짙어졌다. “너 말야, 뭔가 잘못 생각하나 본데. 어제 류인이가 정신이 나갔던 건 나 때문이 아니라고.” 왜 이런 쓸데없는 것까지 설명해주는 상대를 만나 버린걸까? 한편에서 짜증이 올라왔지만 녀석은 내말을 믿는건지 안 믿는건지 계속 묘한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왠지 구구절절 PDA와 류인이 형에 관한 설명이 필요 없을꺼란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저 웃음의 대상이 내가 아닌것만 같았으니까. 왜지? 당장 눈앞에 서있는 내가 아닌 다른 상대에게 공격의 시작을 알리듯 웃는건데. 역시 류인인거냐? 난 녀석을 바라보다가 어제 집에서 생각했던 문제를 꺼냈다. “너 말이야.." 내가 계속 변명의 말을 꺼내는 거라 생각했는지 관심 갖는 척 눈을 좀 크게 뜨며 날 올려다봤다. “위태로워 보여.” 선우 현의 웃음이 사라졌다. “니가 류인이를 정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류인이를 몰아붙여 잡고는 완벽해지게 만들고 싶다는 니생각.. 내가 보기엔 말이야..” 너무 까매서 홍체와의 경계도 구분할 수 없는 선우 현의 눈을 보았다. “니가 스스로한테 채찍질하는 것 같아.” 선우 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난 그 아름다운 눈 속의 무언가를 보길 원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뭘 무서워하는 거야? 왜 류인이를 자신의 대리로 만들어서 고통을 주려는 거냐? .. 너 분명히 알고 있잖아. 류인이는 절대.. 완벽해 지지 않을거란 걸. 그 놈은 그 자체가 전부니까. 솔직히 말해봐. 니가 원하는 모습은 현재 류인이의 모습이잖아. 안 그래? 뭐가 두려워서 류인이 아니 너를 자꾸 내모는..” “푸하하하... 하하... 너무.. 하하.. 어떻게 그런 잼있는 생각을 한거에요? 네?” 허리까지 굽히며 웃던 선우 현이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날 올려다봤다. “태연한척 하고 있지만 선배야 말로 내가 두려워서, 나한테 류인 선배 뺏기기 싫어서.. 그런 헛소리를 사실이라 망각하고 지껄인다는 거... 본인은 알고 있어?” 뺏겨? 난 미간을 찌푸리며 녀석의 의도를 알아내려 애썼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아.. 선배의 농.담.은 고마웠어요. 풋.. 내가 나를 내몰고 있다구요? 하하.. 내가 현재 류인선배 모습을 원한다고? 하하..” 다시 웃기 시작한 선우 현은 눈가에 눈물까지 매달고 있었다. 내가 녀석의 다 웃길 기다리자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내게 다가오더니 바로 얼굴 아래 5cm 정도만 남겨둔 거리에서 그 검은 눈동자로 날 노려보며 소곤거렸다. “내가 원하는 게 어떤 모습이 뭐든.. 류인 선배는 내.꺼.야.” 그리고 훌쩍 뒤로 멀어지더니 다시 생긋 웃어보였다. “역시 경민 선배는 유쾌해요. 다음에 또 얘기 나눠 주세요.” 어느새 다가온 건지 엑스맨이 어슬렁거리며 선우현에게 걸어갔고, 활기차게 손까지 흔들며 선우 현은 엑스맨과 사라졌다. “가자.” 엑스맨과 별일 없었는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인 류인이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류인이의 뒷 머리를 보면서 난 머릿속에 울려오는.. 선후 현의 말이 곱씹어야 했다. 내가 류인이를 선우 현에게 빼앗기길 싫어한다? 왜지? 왜 녀석은 날 그런 식으로 생각한걸까? 단순히 날 혼란시키기 위한 말이었다 치더라도... 녀석의 눈은 아니었다. 배고픔에 허덕여 겨우 발견한 먹이를 앞에 두고, 만나게 된 적을 노려보듯이 선우 현의 검은 눈은 분명 날.. 경계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공포증 - 7 2. Ailurophobia (고양이 공포증) “아니! 고치는데 이틀이나 걸린단 말야! 그래서.. 어떻게 할껀데?” “외관이 비슷한 물건을 하나 구해서 일단 제자리에 놓긴 했는데..” 말끝을 흐리는 류인이를 보며 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웬만해서는 말끝을 흐리는 법이 없는 녀석이 저런다는 건.. “설마... 류민 형.. 언제 오는데?” 집 앞에 다다른 후 걸음을 멈춘 류인이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오늘.” “야!! 그럼 큰일이잖아.” 엄청난 물량의 첨단(?) 전자기기들을 모으는 류민 형은 매일 저녁 12시가 되면 자신의 사랑스런(각자 이름도 있다--;) 수집품이 있는 방으로 내려가 일일이 대화를 나누며 하루를 마감한다. 대화란.. 모든 기기를 작동시켜 한번씩 사용하는 것이었지만, 실제 대화도 나누는 섬뜩한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다. 아무튼.. 기기를 키면 다르다는걸 알게 될텐데.. 이미 문을 열고 들어서는 류인이가 뭔가 대안을 가지고 있을꺼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너 때문인거 알지? 해결해.” 라고.. 싸가지 없이 말하고 있구나. 이미 녀석을 만난 후 만성두통환자가 되버린 난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류인이가 혼자 기거하는 독채를 빙자한 창고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20평이 약간 넘어 보이는 원룸식으로 된 류인이의 집(?)은 다른 가족이 기거하는 본가 바로 근처에 지어져 있는 부록 같은 건물이었다. 류인이가 자신의 집에 사람을 들이는 걸 싫어하는 탓도 있지만 나 스스로도 워낙 이 집에 오는 걸 싫어했기 때문에 류인이의 이 방에 들어오는건 몇 달 만이었다. 근데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우리 집에 뻔질나게 오지 않나? 왠지 분한 마음이 들어 살짝 인상을 쓰고 난 쇼파에 주저앉으며 가방을 옆에 던졌다. “참 그러고 보니 내일 일요일인데 PDA는 월요일에나 찾아야 하는 거야?” 내가 생각나다는 듯이 급하게 묻자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던 류인이가 입에서 물병을 떼며 대답했다. “내일 찾을 거야.” 아... 그래 어련하시겠냐. 일요일에도 나와야 하는 서비스센터 직원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다. 가 아니라!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니지.. “야.” 머리를 쇼파 등에 완전히 기댄 채 녀석을 부르자 날 힐끔 쳐다보았다. “류민이 형은 몇시에 오는거야?” “7시.” 그 말에 난 자동적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지금이 1시 30분 이니까... 생각할 시간은 좀 있군 그래. “어쩔 거야?” 난 대답 대신 류인이를 물끄럼히 쳐다보았다. 녀석의 도가 지나친 뻔뻔함을 한 두해 겪어 보는게 아니 것만 새삼스레 나에게 짐을 떠넘기려는, 아니 당연시 하는 놈의 행태에 열이 뻗쳐 오는건 어쩔수 없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서는 녀석의 행동을 이해하는 내가 있다. 웃기는군.. 그래, 이해한다고 젠장. 녀석과 만난지 12년. 인정하기 싫지만 재수 없게도 난 12년 전 녀석들 가족을 처음 본 이래 그들에게 계속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싸가지 없는 집안 막내에게는 가차 없는 일도 내가 나서면 웃음 한번으로 끝나던 불행한 과거가 지금 저렇게 류인이를 뻔뻔스런 놈으로 만든거겠지. 그런데 말이야.. 이번에는 내가 해결하기에도 좀 벅차단 말이다. “니가 한번 해결해 보지 그래?” 조금은 욱하는 심정이 없지 않아 있어 투덜거리듯 말하자 녀석이 악마같이 씨익 웃더니 큰 보폭으로 걸어 내 옆에 앉았다. “어제 병국이한테 전하길 감히 나한테 김.세.현에게 연락하라고 했다지?” 윽... 난 슬쩍 눈동자만 돌려 녀석을 살피다 눈이 맞았다. 으앗.. 너.. 너.. 그 살벌한 눈 안 치울래? “아니 그건 말이지.. 뭐랄까.. 흠흠.. 거기 있던 일학년 녀석들 겁 좀 먹으라고 그냥.. 좀 공갈을 치기위한 하나의 임시방편이었다고나 할까?” 갑자기 ‘턱’ 하는 소리가 날정도로 류인이가 한 팔을 들어 내 어깨를 감싸더니 손에 힘을 주며 끌어 당겼다. 놀라 헉 소리 나는 걸 겨우 참으며 난 류인이의 팔 안에 갇혀서 몸을 웅크린 채 녀석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꽤나 비굴한 포즈지만 내가 이렇게 꼬리 내리는 모습을 녀석이 좋아한다는 걸 알기에 난 당장 비위를 맞추자는 의도로 속으로 울분을 삼켜야 했다. “하하.. 설마 내가 진심으로 그랬겠어? 니가.. 세현이 싫어한다는 걸 아는데..” 싫어하다 뿐이겠어.. 눈에 띄면 바로 죽이려고 덤벼드는데.. 그리고 바로 당시에는 그걸 노리고 말한거였다. 류인이 녀석 세현이 이름 들으면 분명 그냥 집에 가려다가도 열 받아 뭔가 도움을 주는 행동을 취하지 않을까 싶은 효과를 노려서 말이다. 뭐 그때는 PDA의 존재를 잊고 있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임병국 이자식. 세현이란 인물이 류인이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면서 내가 한말을 곧이 그대로 전하다니. 좀 돌려 말했어야지. 효과가 너무 크잖아! 암튼.. 월요일날 보자 친구. “그런데 말야, 병국이의 말에 의하면 상당히 절박하게 세현이 개.자.식.을 찾아 이름을 부르짖었다는데 그건 뭘까?” 월요일이 뭐냐. 그냥 내가 내일 니 집에 찾아가마. 임 병국. “하하.. 병국이가 또 오바 했구나. 아이~ 그 오바자식..” 내가 이렇게 아양을 떠니.. 아, 점점 가늘어지는 녀석의 눈이 보이는 구나. 제길. “그래! 그래! 류민이 형 PDA 내가 어떻게 해결한다 이자식아!” 그제서야 눈에 힘을 풀고 입가에 미소를 짓는 류인이를 보자 또 당했구나라는 생각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내 인생이 불쌍하다. “당연하지.” 느끼하게 웃는 녀석을 살짝 째려봐주며 어깨에 얹어있는 팔을 치웠다. “하아.. 내가 어떻게 해보긴 하겠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다.” 나중에 해결 안됐을때를 대비해 미리 변명을 해보자는 심정으로 말을 꺼냈는데 류인이는 뭐가 좋은지 그 느끼한 웃음을 아직까지 입에 달고 있었다. 녀석의 팬들이 보면 좋아할 웃음이 왠지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렸는데 문득 멀리 떨어진 책상에서 내 눈을 끄는게 있었다. 난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다. 약간 지저분하게 여러 책들이 널려있는 책상에서 내가 확인하려 했던 건 저번에 새로 산 영어 문제집 아래 빼꼼히 나와 있는 은색 몸체의 기기였다. 어라? 이건.. “야, 네 PDA 고장 났다며?” 익히 보아왔던 류인이의 PDA를 집어 들며 내가 묻자 등 뒤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답이 꽤 늦는게 이상하다고 생각되어 고개를 돌릴때 녀석의 말이 들려왔다. “고쳤어.” 벌써? 내가 아무 말 안 했지만 내 표정에 그런 의문이 나타났는지 류인이가 갑자기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씨발! 고쳤다면 고친줄..” 저 자식 답지않게 왜 저리 흥분하나라고 여길때쯤 류인이의 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그러자 금새 입을 다물고 전화를 집어드는데.. 잠깐 언 듯 비친 표정이 왠지 안도해하는 것같다는 느낌은 역시 착각이겠지? 혼자 갸우뚱하고 있을때 번호를 보더니 살짝 표정이 굳어지는 류인이의 모습이 보였다. 번호하나로 저런 표정을 만들 수 있는 인물이라면.. “네. 어머니.” 그래. 너희 어머니가 있었구나. 그리고 그녀는 바로 이집 가족들이 나를 마음에 들어하는 중요한 요인이기도 했다. 나를 데리고 밥 먹으로 본가로 오라는 그녀의 지시에 따라 현관문 앞에까지 다가가다 문득 아직까지 뒤따라오고 있는 류인이를 알아차렸다. “너... 정문으로 들어가게?” “응.”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덧붙였다. “그 악마새끼들은 네가 좀 처리해.” 어련하시겠냐. 네가 말하는 그 악마새끼들 때문에 평소 이 본가에는 오지도 않고 일이 있다면 나무타고 2층 창문으로 넘나드는 걸 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류인이가 이렇게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갈 때는 어머니가 그 악마새끼들을 모두 데리고 가끔 한번씩 외출을 하실 때와 내가 와서 그 악마새끼들의 주의를 사로잡아 류인이 근처에 안 가게 할 때뿐이었다. 악마새끼들이라.. 난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거실에 있던 류인이의 악마새끼, 어머님의 보물단지들이 고개를 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냐~옹” 한마리가 인사라도 하듯 날 발견하고 다가오며 소리를 내자 뒤쪽에서 움찔하며 물러서는 류인이가 느껴졌다. 아 그냥.. 2층으로 넘어 오지 그랬냐. 이 고양이 공포증 환자야. 솔직히 공포증까지는 아니라고 나도 인정한다. 뭐랄까 공포증 보다는 증오증(?)에 가깝달까? 고소공포증처럼 기절까지 가는건 아니니깐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는 것만으로는 괜찮지만 고양이가 몸에 닿을라 치면 그걸 떼어내려고 광폭한 성격으로 돌변해 눈이 돌아가 버려 주위에 아무것도 남아나질 않게 된다. 이런 녀석의 증상의 이면엔 분명 고양이를 13마리 키우시는 어머님이 한 몫한 건 당연하다. 언젠가 한번 제대로 설명하겠지만 이 집안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모두 한 가지씩 무언가에 빠져있다는 점이다. 삼형제중 큰형인 류민이 형은 전자제품 모으기에, 둘째 형인 류진 형은 오토바이 그리고 어머님은 바로 고양이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고 계시다. 아 류인이 아버지는 뭐냐고? 그분이 좋아하는 건.. 돈이다. --; 직업상으로써가 아니라 일명 돈놀이를 하는 아버님의 표정은 주식으로 이익을 남겼을 때 짓는 류인이의 미소가 어디서 나왔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부부는 일심동체 라더니 어찌 저리도 닮은 남 녀가 만나 결혼을 한건지 그 만남이 신기하긴 하지만 아버님의 취향이 아들들에게 그대로 전해진 것에 비해 류인이 어머님 집착의 대상은 전혀 환영받지 못하다는 건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의외로 얌전하고 스스로의 시간을 갖길 좋아하는 고양이가 왜 형제들 사이에서 비극의 존재가 될 수밖에 없나 의아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잠시 그 고양이들을 소개하겠다. NO.1에서 NO.13의 이름으로 불리는(꼭 영어로 불러야 한다.) 집고양이, 흔히들 말하는 도둑고양이들은 주인을 닮은건지 꽤나 건방지고 거만한 성격을 하나같이 지니고 있었다. 주로 집안 1층에 풀어져 키워진 탓에 그곳을 완전히 자신들의 영역이라 생각하고 침입하는 자들에게는 가차없는 공격을 한다. 그리고 그 경계의 대상에 바로 가족이 포함되었다는게 문제였다. 내가 처음 이집에 왔던 12년 전 당시에도 이미 어머님은 고양이를 키우고 계셨는데 류인이와 형제들은 어머님 몰래 항상 피튀기는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영악스럽게도 형제들을 공격해 대던 고양이들은 어머님만 나타나면 야옹~ 하는 귀여운 소리를 내며 약한 척을 해 항상 그곳에 씩씩거리며 있던 형제들만 죽어라 맞는 거였다. 고양이들은 특히 류인이와의 불화가 상당히 심했는데, 문제는 8년 전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NO.3와의 5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였다. 그 여파로 두 다리에 골절을 입은 NO.3와 자기화를 주체 못해 눈 돌아 기절해 버린 류인이로 인해 어머님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아들을 위해 가족들이 고양이를 다른 곳에서 기르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한참을(약 5분간) 고민하시던 어머님은 결국 내치기로 결정하셨다. 고양이를? 아니, 자신의 막내 아들을. --;; 뒤따라 들어오는 류인이를 봤는지 몇몇 고양이 들이 쉿 소리를 내는 것 같았지만 이내 나를 보고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거나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게 바로 문제였다. 신기하게도 어머님 이외에 아무도 사람취급하지 않는 이 고양이 들이 날 좋아 한다는 것이다. 처음 고양이와 다정스레 놀던 날 발견한 집안 식구들의 경악어린 표정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NO. 11, NO. 8 먼지 묻으니 떨어져라.” 차갑게 고양이들에게 지시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난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방으로 이어지는 복도에서 걸어 나오는 류인이 어머님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나와 거의 비슷한 키, 40대 후반이라고는 믿기질 않을 젊고 늘씬한 외모, 언제나 웃음기 없는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12년 전부터 보아왔던 흑백의 의상들. 어렸을 적에는 항상 검은색과 흰색의 옷만 입는 그녀를 보고 왜 다른색의 옷을 안입는지 물은적이 있다. 그때 그녀가 말하길 '내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니까.' 이 말의 뜻은 나중에 가서 그녀가 색맹이라는걸 알게 되었을 무렵 이해하게 되었지만 몰랐던 당시 내가 무어라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으로 나에게 웃음이란걸 보여주었으니가. 아.. 뭐라고 했더라? “류인이 넌 저 구석으로 가있어.” “야, 저 놈들 데리고 쪽방에 좀 몰아넣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인사한 사람 무색하게 각자 자기말만 하던 모자는 상대방의 말을 깨닫고 서로를 잠시 노려보았다. “니가 쪽방에 갇혀볼래?” “모처럼 아들과의 상봉을 쪽방에서 보내고 싶은가 보져?” 음.. 서로 무표정하게 하는 말들이 듣는 사람은 왜 소름끼치게 들리는지 12년이 지나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대화였다. 난 내 발 아래서 몸을 부비는 녀석 둘을 안아 들었다. “어머니. 저희 식사하라고 부르신거 아니세요? 잠시만 얘네들 방에 두고 밥 먹은 다음에 저희는 금방 2층으로 올라가던가 할께요.” 종종 착해 보인다는-친구들은 바보웃음이라 부르는- 말을 듣는 미소를 지으며 내가 조용히 말하자 쓰윽 눈을 돌리신 어머님이 내가 안고 있는 고양이를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셨다. “대신 먼지 안 묻게 조심해서 옮겨라.” “그.. 그럼요.” 그러고 보니 처음 어머니를 만났을 때 들었던 말도 비슷한 거였지? ‘병균 옮으니 저 지저분한 꼬마에게 떨어져라’ 라고. 굉장히 적응 안 되고 차가운 말만 하는 분이지만 확실히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는 아버지 말씀처럼 지금은 그게 다가 아니란 걸 안다. “국.. 식으니까 식당으로 얼른 오고.” 지금처럼 무표정한 얼굴 속에 숨겨진 따뜻함 말이다. “예” 밥 먹고 고양이들을 다시 풀어준 후 2층으로 올라간 나는 어렵지 않게 류인이가 전에 사용하던 방을 찾아 들어갔다. 자그마한 옷 방이 딸린 8평 규모의 방안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건 구석에 세워져 있는 첼로였다. 장식용이냐고? 아니 놀랍게도 이 첼로는 저 감성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녀석이 살아온 세월만큼 켜온 악기였다. 오랜만에 보는거라 반가워 다가가 줄을 팅팅 튕겨보았다. “씹.. 건들지마. 소리도 듣기 싫어.” 물론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전혀 안 좋아하는 물건이기도 하고 말이다. “요새도 연주회하고 그러냐?” 연주회란.. 음악에 상당히 조예가 깊으신 어머님의 취미셨다. 태어날 때부터 악기 하나씩 쥐어주고 연습시켜 자신이 원할 때 연주를 듣겠다는 어머님의 결심은 상당히 좋았지만 당하는 아들들에게는 고양이 이외에 악기 혐오증까지 추가될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질문에 인상이 구겨지는 네 표정을 보아하니 요새도 하나 보구나. “언젠가 꼭 저 음악실 불질러 버릴 거야.” “마지막으로 연주 한게 언제야?” 자신이 싫어하는 주제임에도 계속 물어 보는 내가 이상했는지 류인이는 표정을 풀 고 물어왔다. “뭐야?” “생각해 봤는데, 내일 PDA가 고쳐진다니까 그거 제자리에 놓을 때까지만 류민이 형이 안보면 되는거잖아? 그래서 말인데..” 내 말에 뭔가 불안함을 느꼈던 걸까 녀석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갔고, 난 씩 웃으며 말했다. “오늘밤 연주회나 해보자.” 싫다며 발악을 써대는 류인이를 뒤로 하고 그길로 은근히 내 팬인 어머님께 가서 모처럼 집에 왔으니 류민형과 류인이의 연주를 듣고 싶다고 청하니 흔쾌히 승낙하셨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바로 지방에 있다던 류민형에게 연주회를 할 예정이니 빨리 올라오라고 전화를 하셨다. 이러면 게임 끝. 류민형은 곧바로 류인이에게 연락해 집에는 한 일주일 있다 들어간다고 전해 온 것이었다. 오랫동안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간단히 끝나버린 일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물론 어머님께 붙잡혀 홀로 음악 감상실로 끌려간 류인이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해주는 건 잊지 않고 말이다. “장 선호.. 장 선호.” 전설이라는 1:9 가르마를 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담임이 늦게 뛰어 들어온 선호의 이름을 이 사이로 내뱉으며 노려보고 있었다. “선생님! 제가 지각하고 싶어서 그런게 아니에요 절대!” “그럼, 또 신호등이 막혀 지각을 했다는 거냐?” “우와.. 잘 아시네요. 학교 앞 신호등 정말 심하다니까요. 도대체 대기시간이 다른 신호등에 비해 몇배나.. 으악!” 가볍게 귀를 잡아당기며 사라지는 담임과 선호의 퍼포먼스를 보고 있자니 뒤돌아 앉아있던 병국이가 중얼거렸다. “저 새끼는 집도 코앞이면서 지각한다는 게 말이 되냐? 어?” “신호등 때문이시라잖냐.” “쳇, 그건 핑계고 아무리 봐도 선호가 일대구에게 마음이 있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다고 봐.” 아무리 농담이라도 선호의 성적, 미적 취향을 무시하는 그런 발언은.. “충분히 그럴수 있군.” 내가 동조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병국이가 만족한 웃음을 띄었다. 그리고 지나가듯 말했다. “참, 아침에 오다가 1층 과학실 옆에서 고양이 봤다.” “뭐?” 라며 신경질 적으로 물어 온건 옆에서 자고있던 류인이였다. “아.. 밤중에 야자하는 애들이 종종 고양이 소리 들었다고는 했는데.. 진짜 학교에 서 사나?” 난 들고 있던 샤프를 내려놓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류인이를 힐끔 보았다. “제길 악마새끼들.. 공부할 것도 아닌 것들이 왜 학교에 살고 지랄이야.” 녀석의 말을 들으며 난 칠판 옆에 붙어있는 시간표를 보고 눈을 찌푸렸다. 근데 과학실 옆이라.. 분명 오늘 생물시간에 과학실에서 무슨 슬라이드를 보여준다고 한 것 같은데.. 설마 별일은 없겠지? 정말.. 학교에서 이 녀석 발광하는 건 사절이니까. 하지만 아침의 이 걱정이 바로 몇 시간 후 사실로 다가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덧붙여 내 인생 최악의 기억 best 3에 들만한 사건도 함께 말이다. 공포증 - 8 3교시가 끝난 후 노트와 필기도구를 들고 과학실로 향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도 엎어져 자고 있는 선호를 깨우기 위해 류인, 병국이와 함께 다정히 등을 손바닥으로 힘껏 토닥여 주고 있는데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경민아 누가 너 찾아 왔는데?” 반 아이의 말에 난 문 앞에 서있는 일학년 아이를 보았다. 일학년? 순간 선우 현이 떠올라 잠시 망설였지만 곧 그 애 앞으로 다가갔다. 일단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고 키도 나보다 작은게 별로 그쪽 애는 아닌 것 같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야?” “저.. 여기 담임 선생님이 이 경민 이라는 선배 교무실로 오라고 하시던데요.” “일대구가 나를?”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안절부절 못하는 듯한 녀석은 나에게 할말만 남기더니 곧 내뒤에 서있는 류인이에게 무언가를 쑥 내밀었다. “뭐야?” 류인이가 차갑게 묻자 얼굴이 하얗게 변한 일학년이 버벅 거리며 말했다. “누.. 누가.. 이거 전해주라고.. 꼬.. 꼭 지금 보셔야 해요.” 그러더니 몸을 돌려 뛰어가 버렸다. 난 류인이 손에 들린 쪽지를 보며 물었다. “또 러브레터 아냐?” “뭐? 러브레터? 얼~ 한류인. 요새 남자한테 인기가 아주 많아.” “야 빨리 열어봐.” 어느새 다가온 건지 선호와 병국이가 류인이에게 다그쳤다. 그런데 평소라면 이런 편지는 찢어버렸을 류인이가 왠일인지 잠시 편지를 노려보다 뜯어서 보기 시작했다. “뭐야? 누구야?” 별로 긴 내용이 아니었는지 쓱 읽어 내리는 정도로 살핀 후 곧바로 찢어 버렸다. “가자.” 그리고는 먼저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싱겁기는 짜식.” 툴툴대는 선호를 보다 시선을 돌리니 뭔가 벙쩌하는 표정의 병국이가 있었다. 녀석답지 않은 표정에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툭 쳤더니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정신 차리시게나.” “어? 어..” “뼝국~! 러브레터 못 받아서 서운한거냐? 내가 러브레터는 아니지만 비슷한 종류의 편지는 써줄 의향이 있으니 걱정 말아라.” “무슨 편지?” “행운의 편지.--;” “죽어라~!!” 녀석들의 재롱을 보며 따라가던 난 일대구가 생각나 과학실로 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아, 니들 먼저 가라. 일대구가 나 좀 보자고 했다니까 교무실 들렸다 갈게.” “뭐? 일대구가? 아니 왜?” 흥분하는 선호를 보더니 병국이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야, 장선호. 일대구가 너 안 불렀다고 질투하냐?” 곧바로 난타전에 들어간 녀석들을 뒤로 하고 난 몸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날 부르는 류인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경민.” “어?” 반쯤 돌려진 몸으로 류인이를 쳐다보자 녀석이 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날 내려다 보았다. “...” “왜?” “... 빨리 와라.” “뭐?” 갑자기 녀석 답지 않은 무슨 소린가 혼자 해석하려 할 때 이미 류인이는 선호와 병국이를 끌고 사라져 버렸다. 눈빛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별일 아니겠지 하고 혼자 교무실이 있는 옆 건물로 향했다. 교무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가기 전 화단을 돌아 뒷문을 향하며 일대구에 대해 투덜거리고 있을때였다. 갑자기 어떤 물체가 나를 향해 날라 온 건.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순간적으로 몸을 옆으로 비틀고 상체를 뒤로 젖혔다. 미처 눈앞을 스치는 거무스레한 물건을 확인 하기 전에 ‘휙~!’ 하는 소리가 바로 내 귀 옆을 스쳐 지나가는 걸 느꼈다. 순간 본능적으로 위험에 반응하듯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헉.. 뭐야..” 너무 놀라 잠시 자리에 얼어붙었던 난 ‘툭’하며 바닥에 둔탁한 소리로 떨어진 물건으로 다가가 무었인지 확인했다. 검은색의 계란 반절만한 크기의 쇠구슬. 욕이 나오려는걸 참으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도대체 누가 이런걸 던졌을까란 의문을 막 떠올릴 때 쯤 간단히 그 의문을 해결해 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선배 반사 신경 굉장히 좋으시네요.” 몸을 일으켜 방실거리며 보기좋은 미소를 띄고 있는 녀석을 쳐다보았다. “선우 현.” 손에 든 쇠구슬을 움켜잡으며 내가 녀석의 이름을 낮게 부르자 녀석이 내 주면을 휘익하고 둘러보았다. “아.. 실망이야. 역시 안나오셨네요.” “뭐?” 무슨 헛소리냐라고 외치려할 때 선우 현 뒷 쪽에 어슬렁거리며 나타나는 엑스맨과 그 일당 3명이 보여 난 입을 다물었다. 제길.. 일대구가 날 부를 리가 없지. 이미 수업이 시작했는지 조용해진 학교 내에서 건물 뒤쪽으로 사람이 올 가능성은 적어보였다. “흠.. 왜 안나왔을까?” 여전히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선우 현을 무시하고 난 일학년 녀석들을 향해 물었다. “늬들은 수업도 안 들어가냐?” “저희보다 고3인 선배가 더 걱정이에요.” 언제나 대화는 자기 몫이라는 듯 선우 현이 걱정스럽게 대답했다. 근데 지금..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못 들어 가는건데! “아, 걱정해주다니 몰랐네. 이왕 걱정하는 거 좀 더 인심 쓰라는 의미로 아직 붓기도 안 나은 내 얼굴이랑 온 몸의 타박상을 보여주고 싶은데?” 그냥 가라 이놈들아. 니들한테 맞은거 3일도 안 지났다. 라고 직접 소리치고 싶은걸 겨우 참으며 알아서 세겨 듣고 불쌍히 여겨 제발 가라는 심정으로 한 말은 선우 현의 익숙한 웃음소리를 이끌어 내기만 했을 뿐이었다. “하하하.. 싸움 피하려고 입 놀리시는 건 여전하네요.” 그래, 나도 안 통할 줄 알았다. “뭐 떼거지로만 덤비는 니들의 치사함만 하겠냐?” 내가 좀 짜증난다는 듯이 내뱉은 게 거슬렸는지 일학년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인상을 썼다. “어디 계속 그 입 나불대나 지켜보자구.” 이런.. 너 참 반가운 얼굴이구나. 순남아. “글쎄.. 과연 니가 계속 지켜볼 수나 있을까?” 난 무덤덤히 말하며 슬쩍 벽에 기대어 서있는 엑스맨을 쳐다보았다. 좀 비어있다 싶은 눈이 나와 마주치는 순간 전과 똑같은 삼켜버릴 것만 같은 강한 눈으로 돌아와 날 보았다. “걱정마. 오늘은 나까지 안 놀아 줘도 되니까.” 나를 만나면 하게되는 녀석의 고정맨트에 난 의외라는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엑스맨 넌 나서지 않겠다고? 그럼 날 상대하는 건 저 세 놈이란 소린가? 그런데.. 뭔가.. 내가 감지해내지 못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 찝찝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미처 생각을 하기도 넞 내가 다시 도망갈 껄 걱정했는지 달려드는 순남이 덕분이 녀석에게로만 집중해야 했다. ‘슉!’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리는 녀석을 피해 급히 몸을 수그릴 때 재미있다는 듯 생글거리며 있는 선우 현의 모습이 언뜻 망막을 스쳐 지나갔다. ‘퍽!’ 숙인자세 그대로 비어있는 녀석의 가슴께에 팔꿈치를 올려붙이며 심장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12년이나 붙어 다녔으니 내가 녀석을 닮아가는 건 당연한 건가? 저렇게 웃고 있는 선우 현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머릿속이 명확해지는 이 개 같은 상황은 분명 류인이의 전매특허인데 말이야. 나에게 맞은 여파로 몸이 살짝 굽어지는 녀석의 몸에 앞서 살짝 몸을 뒤로 뺐던 난 눈앞에 들어나는 놈의 어깨에 보며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류진이 형의 말을 생각해 냈다. ‘여기 쇄골뼈와 등뼈가 이어지는 중간 삼각지점 말이야. 한번 맞으면 기절해 정신이 날라갈망정 죽지는 안는 아주 유용한 곳이란 말이지.’ 죽지는 않는다라.. 확대경처럼 눈앞에 명확히 펼쳐지는 녀석의 급소를 향해 난 반쯤 쥐어진 주먹을 강하게 내리꽂았다. “으아~~~~악!” 끔찍한 비명소리와 함께 순남이가 어깨를 감싸 안으며 주저앉았다. 녀석의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콧잔등에 흘러내려간 안경을 올리다 녀석을 때리던 손안에 그 쇠구슬이 들어있는걸 깨달았다. 아.. 이런 너 좀 아프겠구나. 피식.. 나 지금 웃음 나오는 건가? 순남이가 내 몇 방을 맞고 쓰러지자 주춤하더니 덤벼드는 두 놈을 보고 손에 쥔 쇠구슬을 손가락 사이에 끼며 고쳐 쥐었다.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든 선우 현? 날 류인이 미끼로 유인할 만큼 내가 그리 약해 보이던? 언젠가 앙심을 품고 덤벼드는 학교깡패 녀석들을 꽤나 심각하게 두드려 팬 후 질려하는 나에게 류인이가 한말이 머릿속을 울리고 있었다. ‘잔인해져. 아님 병신 되는 건 나야.’ 그래. 결국 저놈들은 날 병신 취급하는 거였군. 빠르고 짧게 옆 뒤로 스텝을 밟아가며 한 놈의 공격을 피한 후 곧바로 오른 손을 쳐 올려 앞의 놈의 턱을 가격했다. 선우 현이란 기름 덕분에 높아진 내 불쾌지수를 잔인함으로 발화 시켜주겠어. 놈이 급하게 몸을 뒤로 빼는 바람에 스쳐 맞았지만 ‘헉’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휘청하는 게 보였다. 선우 현이 던져준 쇠구슬의 효과는 만족할 만 했다. 뭐, 녀석은 바라지 않는 효과였겠지만. 뒤로 쓰러지려는 녀석을 발로 그대로 차려다 뒤에서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는 게 먼저이기에 좀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어 몸을 뒤틀어야 했다. 세게 뒤튼 몸 옆으로 쳐내던 주먹이 빠르게 빠져나가는 걸 보고 숨을 들이킨 상태 그대로 왼쪽 다리를 슬쩍 차올렸다. 내 발길질에 공격하던 녀석이 지레 움찔하는 사이 어정쩡하게 빠지던 팔을 잡아채 내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며 그대로 반 바퀴를 돌려 끌어 내렸다. “으악!” 짧은 비명소리를 들으며 난 내리려던 왼쪽다리를 그대로 접어 잡고 있던 녀석의 팔 위로 인정사정없이 찍어 내렸다. “아악~!” 고통스러운 듯 들려오는 소리에 그제서야 난 참았던 숨을 들이쉬며 팔을 던지듯 놓았다. 심장이 두근대고 있었다. 너무 빠른 시간에 긴장을 한 채 움직여댄 운동 탓에 폐에서는 쥐어짜듯이 공기를 원하며 숨을 헐떡거리게 했다. 하지만 천천히 일어서며 날 노려보는 세 놈들앞에서 그럴수는 없었다. 3월말의 시원한 바람에도 난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만에 이렇게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한 걸까? 고동치는 심장소리가 안에서 귓가를 울려 시끄럽게 했지만 잔인하리 만큼 공격한 내 일격에 얼굴을 구기고 서있는 녀석들을 보니 오히려 빠르게 모든게 가라앉고 있었다. 마지막 내 무릎에 팔이 꺾여 버린 놈은 아예 싸울 의욕이 거의 사라졌는지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금정도는 가지 않았을까? 내가 그렇게 지독한 사람이었나라는 기분이 들 정도로 내 무릎 아래서 뒤틀리던 팔은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았다는게 신기할 뿐이었다. 그리고 어깨를 쇠구슬로 맞은 녀석도 그리 상태가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아직까지 어깨를 쥐고 있지만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보여주고 있었다. 단지 턱을 스친 녀석만 한쪽 발에 힘을 주는 폼이 곧바로 덤비려는 것 같았지만 아직까지 내 손에 있는 쇠구슬이 마음에 걸리는 듯 싶었다. 아무말 없이 잠시 대치중인 이 상황에서 난대 없는 박수소리가 들렸다. “와... 선배 정말 잘 싸우네요. 보기와는 달리 전혀 가차 없이 싸우는 거 정말 의왼데요. 안 그래?” 선우 현이 동의를 구하듯이 벽에 기대 삐딱하게 서있던 엑스맨에게 물었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녀석에게 향했는데 놈의 눈이.. 평소의 강하던 안광 이외에 감정을 내포하고 있었다. 재미있어하는. 제기랄.. 싸우지도 않은 놈이 여유작작하게 승자의 눈처럼 내리깔아 보다니. 류인이한테 지고도 자기보다 강한 놈이 나타났다는 거에 즐거워보이던 싸이코니 상대하면 나만 머리 아프겠지. 난 한발자국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턱을 맞았던 녀석이 경계하며 몸이 굳는 게 보였다. 그런 녀석에게 난 손안에 쥐었던 쇠구슬을 던져 주었다. “속아주는 건 이번 한번이야. 보기와 달리 가차 없다고? 내가 얼마나 더 가차 없는 인간인지 확인하고 싶어 또 건들면..” 녀석들을 둘러보던 시선을 멈춰 선우 현의 눈을 보았다. “나도 니들처럼 치사함도 마다않고 애들 불러 모아 니가 원하는 전면전 치러주지.” “훗.. 꽤나 귀여운 협박인데요?” 눈 꼬리를 만들며 웃던 녀석이 입가에 조소를 띄고 말을 이었다. “글쎄 불행히도 선배가 불러 모으려는 애들이 고.작. 이 학교 전 일진들이나, 이 세현이라는 조무래기 깡패친구를 말하는 거라면 흐음.. 어쩌죠? 상대도 안될텐데?” 아.. 그래. 애초에 네 녀석 콧대 높을 때부터 무언가 큰 빽이 있다는 걸 알아 차렸다구. 세현이도 알고 있는걸 보면 도대체 어디까지 나와 류진이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거야? 근데.. 한계가 겨우 친구까지인걸 보면 아직 류진이 형의 위치는 잘 모르나 본데.. “설마 내가 믿는 구석도 없이 널 협박하는 거라 생각하냐?” 아, 좀 놀라는걸 보니 모르고 있나보군. 하긴 그 한씨 집안 비밀스러운거야 내가 인정하지. 단지 류진이 형이 지금 군대에 있다는 게 문제지만.. “늦었다. 지금이라도 수업 들어가라 니들.” 더 이상 대화했다간 기분만 더러워질 것 같아 돌아서서 녀석들 사이를 천천히 빠져나갔다. “참 수업 들어가시면 류인선배한테 좀 실망했다고 전해주세요.” “뭐?” 녀석들을 빠져나와 건물의 꺾어진 면으로 가던 난 선우 현의 말에 반쯤 몸을 돌린 채 물었다. “훗.. 아무리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친구 사이라지만 충고도 없이 친구를 사지로 보낸 건 정말 심했다구 전해주세요.” “너.. 무슨 말이야..?” “아, 류인 선배가 정말 말 안해요? 내가 분명 경고하는 쪽지까지 보냈는데.. 난 정말 경인 선배가 나올 줄 몰랐다구요.” 쪽지? 아까 그 일학년 녀석이 주었던..? 갑자기 가슴이 싸아 해지면서 발끝부터 한기가 올라오는 것 만 같았다. 류인이한테 경고를 했다고? 그게 진짜라면.. 아냐, 녀석이 말 안 했을 리가 없어. 내가 아무 말 없이 서있자, 녀석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숙이고 날 살폈다. “선배.. 화 났어요? 흠.. 왜 그랬을까? 난 분명 선배 따라 류인선배도 나올 줄 알고 기대도 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전 선배한테 볼일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녀석의 말을 믿어선 안 된다고 머릿속에서 중얼대고 있었다. 그런데.. 왜 가슴 한쪽은 찌릿하게 통증이 느껴지는 걸까? “경고했다. 날 또 이용한다면 전면전을 치러주겠다고. 류인이에게 볼 일이 있다면 직접 불러내, 겁.쟁.이. 고 3 수업방해나 하지 말고.”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안다는 듯 평소의 나처럼 농담을 던져야 했지만 나도 모르게 딱딱하게 말이 나와 버렸다. 제길.. 녀석에게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이면에 류인이를 의심하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기분이 정말 엿 같았다. 내 말에 녀석의 표정이 어떻게 변했을지 상관도 않고 다시 몸을 돌려 한발자국 내딛을 때 조금 옆에 떨어져 벽에 서있던 엑스맨이 중얼거리는 게 들려왔다. “조심해.” 눈만 돌려 녀석을 쳐다봤다. “다음 전면전의 상대는 나야.” 공포증 - 9 흐르는 땀에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으며 상당히 나빠진 기분 때문에 그대로 수업 제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 놈의 친구가 뭔지 아침에 들었던 고양이 얘기가 생각나 과학실 쪽으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 옮겼다. 선우 현의 말을 믿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신경을 쓰는 자신이 한심해 웃음마저 나오려고 했다. 겉으로는 아닌척 하지만 12년이라는 시간이 나와 그 녀석을 보이지 않게 묶어 버렸다고 믿고 있었던 걸까? 쓸데없는 사소한 말에 실망이 느껴지려 하는 건 내가 그만큼 녀석을 받아들이고 있단 건지.. 단지 자기밖에 모르고, 독설을 퍼 붙기 일수며, 괴짜가족에 둘러쌓인 평범치 않은 놈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던 건 오히려 나의 안일함인가? 난 고개를 흔들었다. 이 이상한 녀석 옆에 붙어 다니며 나에게까지 불똥이 튀기는 싸움을 하며 살아왔던 시간들은 단순히 녀석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아니었을꺼다. 단지 선우 현의 헛소리에 흔들린 내 마음으로 새삼 확인하게 된 거겠지. 그래.. 헛소리겠지. 그리고 난 생각보다 녀석의 존재가 나에게 크다는 걸 깨달았고 말이야. “재미없어..” 혼자 중얼거리며 과학실의 문 앞에 다다른 난 살짝 문에 귀를 대어 보았다. 조용한 가운데 생물선생님이 간간히 무언가 설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모두들 열심히 수업 받고 있을텐데 문 열고 들어갔다간 집중 받을 것 같아 망설여졌다. 잠시 주저하다가 살짝 소리 안나게 손잡이를 돌린 후 몸을 수그리고 빼꼼히 연 문사이로 안을 들여다봤다. 검은 커텐이 쳐져있고 불까지 모두 끈 상태에서 윙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프로젝터만 돌아가고 있었다. 다행히 복도가 옆 건물에 가려 어두운 편이라 문 연건 티가 안 났다. 슬쩍 보니 문에서 2m 정도 떨어진 뒷자리에 앉은 사람은 언뜻 보기에도 류인이었다. 버릇처럼 내가 앉는 의자에 손을 걸치는 폼이 내가 없는 상황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다행히 모두들 프로젝터 옆에 앉은 생물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앞을 주시하고 있어 내가 뒷문을 1/3쯤 열고 거의 바닥에 쭈그려 앉은 상태로 들어오는걸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자 몸은 들어왔으니 이대로 문을 닫고 슬며시 류인이 옆자리에 앉으면... “으아~~~~~~~~아악~~!!!” 이란 갑작스런 비명소리와 함께 계획은 깨져버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쿠다당..’ “으악! 밀치지마.” “뭐가 발 밑으로 지나가잖아!” “새끼야 갑자기 달라 붙지마! 헉.. 뭐야?” “저리 비켜!!!” ‘쿵’ “이게 뭐야! 날 물었어!” “야! 너 저리 비켜!” 순식간에 아비균환으로 변해버린 과학실은 자리에서 일어나 비명을 질러대는 건장한 청년들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 “야! 니들 모두 자리에 앉아! 그리고 누가 불을.. 으악!” ‘타다당..’ 생물선생님의 비명과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과학실을 비추고 있던 프로젝터마져 꺼져버렸다. 뭐..뭐냐.. 어정쩡하게 쭈그려 앉아 뒷문을 닫은 상태 그대로 얼어버린 내 귀에 여러 고함중 확연히 들리는 한 단어가 있었다. 바로, “이거 고양이 아냐!” 이런! 젠장맞을! 어두운 과학실에 출현한 고양이의 등장에 엎어져버린 수많은 부상자들을 걱정해야 했건만 내 몸은 자동적으로 앞으로 내딛으며 류인이를 향해(있을법한) 달려갔다. 탁 하고 누군가의(류인이여야 하는!) 긴장한 팔을 붙잡는 순간 녀석이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씹.. 다 죽었어.” 맞구나.. 그게 아니지, 안돼!! 난 속으로 절규하며 보이지도 않으면서 앞으로 튀어나가려는 녀석의 몸을 그대로 덮쳐버렸다. ‘쿠다당..’ 굉장한 소리와 함께 의자가 넘어지고 내 몸무게를 못이긴 녀석도 쓰러져 버렸다. “윽..” 어디에 부딪친 건지 나에게 깔린 녀석의 입에서 신음이 들렸고 잠시 내가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내 아래에 누워있던 녀석이 강하게 내 팔을 잡으며 밀고 일어나려 했다. 제길 이녀석 분명 고양이란 소리에 반쯤 돌아버렸을 텐데.. 더군다나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 역시 이성은 이미 바이바이 겠군. 그리고 죽이긴 누굴 다 죽인다는 거냐! 이러면 안돼는데.. 날 밀어내려는 녀석의 손을 턱 잡으며 난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이 시끄러운 교실 안에서 녀석을 말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흥분을 해버린 나는 몸을 일으키려는 녀석의 뒤통수를 나머지 한손으로 급하게 잡아챘다. 오직 머릿속엔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녀석을 기절시키자! 친구 된 입장으로 이 난장판 된 교실을 더 초토화 시키려는 널 막아야 한다! 오직 이 사명감만이 머릿속을 울리며 3학년 7반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리고 손에 잡힌 녀석의 뒤통수를 기준으로 머리통있을 지점을 가늠하며 힘껏... 나의 머리를 들이 밖았다. 그래, 이 한몸 희생하마. 그리고 순교자적 자세를 밑바탕에 깔고 본능적으로 눈을 감으며 이마에 느끼게 될 고통을 기다릴 때, 불행히도 나의 계산에 착오가 있다는 걸 알아버렸다. 나에게 잡힌 손을 빼기 위해 순간적으로 머리를 뒤로 빼며 옆으로 기울인 녀석을 잊은 것이다. 이런 판단미스로 아픔이 느껴져야 할 이마 대신에 다른 곳에서 강한 충돌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바로.. 마우스 투 마우스. 우리말로 입.맞.춤. “!!” “...” 째...................... 깍.......................... 백만년과도 같은 일초동안 충격에 휩싸인 우리는(일단 나는) 얼음동상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재빠르게 이성을 회복한, 아니 조건반사적으로 여전히 굳어있는 류인이를 확 밀치며 뒤로 주저앉은 나는 몇일 전 옥상에서 보여주었던 네발 달리기의 쌍벽이라 일컬어지는 뒤로 엉덩이 걷기를 시전하며(고백하건데 제정신이 아니었다.) 바람과 같은 속도로 조금 열려있던 뒷문으로 기어 나가버렸다. 그리고 내가 나가자마자 바로 닫히는 문 뒤로 과학실 안에 환한 불이 켜지는게 느껴졌다. 이 경민... 도대체 무슨 짓을.. 숨마저 멈추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가까운 화장실로 급하게 뛰어 들어갔다. “헉..헉..” 오늘 유난히도 폐를 혹사시킨다는 걱정은 일단 나중에 할 일이고.. “제기랄..” 난 세면대에 두 팔을 기대 수그리고 있던 상체를 올렸다. 벌개진 얼굴, 헐떡이며 숨을 내쉬는 입술, 눈을 살짝 덮는 앞머리의 끝은 긴장으로 흘린 땀인지도 모를 무언가로 살짝 젖어있었다. 이건 누구냐? 제기랄.. 바보같이.. 왜 하필이면 입술이 닿을게 무어란 말인가! 게다가 한손으로 녀석의 뒤통수를 잡고 내가 끌어당긴 모양이라니.. 완벽한 키스의 폼이구나. --;; “으윽..” 난 한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그래 뭐... 실수로 그럴수도 있는거 아니겠어? 단지 그게 내 첫키스일 뿐... 헉! 난 고개를 번쩍 들어 눈을 동그랗게 뜬 거울 속의 나를 보았다. 첫.. 키스인데.. 그렇다면 대학가서 처음 사귄 여친과 떨리는 마음으로 별빛이 쏟아지는 한강변에서서 그녀의 보드라운 뺨을 두 손에 쥐고 조심스레 그 떨리는 입술에 하려던 내 첫키스의 계획은!! 다시 홱 거울 속에 나를 노려보았다. 뭐냐... 지금 나의 위대한 로망은 깨어진 거냐? 응? 말해봐라 이 정신없는 모습의 이 경민아! 그것도 남자와 키스를. 더 웃긴건 류인이라는 거겠.. 응? 그 상대가 한 류인? “안돼~!!!!!” 4교시 중간 어디서 들려왔는지 모를 괴성에 전교생 모두 잠시 수업을 중단해야 했다는 얘기는 뒤로 하고, 화장실에 주저앉아 심각한 자아붕괴에 빠져있던 난 ‘삐리리~’ 하며 들려오는 종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래, 일단 밥을 먹고 생각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안경을 쓰며 밖으로 나온 나는 과학실로 다가갔다. 아직 아무도 안나온 걸로 봐서 아까 일 때문에 수업이 좀 더 진행되는 건가하고 조심스레 뒷문을 열었는데.. ‘삐~걱~’ 전에는 듣지도 못했을 문소리가 과학실에 조용히 울려퍼지자 난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마치 아무도 없다는 듯 숨소리하나 나지 않는 과학실에는 분명.. 반 아이들 모두가 앉아 있었다. 그럼 수업을 듣고 있냐고? 아니, 널부러진 책상과 의자들은 그대로 인 채 눈 하나 깜박 안하고 모두 한곳에 집중해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삐딱하게 의자에 앉아 주먹 쥔 한 팔을 책상위에 걸치고, 쓰러져 반쯤 부서진 의자에 한쪽 다리를 올려놓은 심히 황제 같은 자세로 앉아있는 한류인이 있다는게 현 상황이랄까. 무슨 사태인지 이해를 못한 내가 반쯤 들어오다 말고 좀비 처럼 모두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반애들에게 놀라있을 때 몇몇이 나의 존재를 알고 내 쪽을 쳐다보았다. “누가 눈 돌리래.” 나직히 중얼거리는 류인이의 말이 마치 교실을 울리듯 느껴진 건.. 녀석이 뿜어내고 있는 저 무시무시한 오라 때문이라 단정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에게 눈을 돌렸던 몇몇이 몸을 흠칫 떨며 다시 류인이에게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이 상황... 상당히 안 좋다. 어디 갔는지 생물선생님은 보이지도 않고 반애들은 류인이에게 붙잡혀 저리 벌벌 떨며 앉아있는 이 상황의 원인은 설마.. 난 두근거리는 심장에게 조용하라 명령하고, 떨리는 발을 떼어 류인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류인이 앞쪽에 앉아있던 병국이가 눈동자만 살짝 올려 나를 애처롭게 쳐다보았다. 마치 니가 좀 말려봐 라고 하듯이.. “임.병.국. 눈 돌리지 말랬지!” 하.. 진짜 화났군. 그런데 말이다. 아무래도.. 이 녀석이 이렇게 된게.. 불현듯 PDA사건 때와 비슷한 설마 고장이겠어라고 했던 그 익숙한 불안감 드는 건 하하.. 갓 뎀. “어떤 새끼야.. 어떤 새끼가 나한테.... ..... 한거야?” 녀석의 팬들이 들었으면 손수건 물고 기절했을 만한 근사한 저음이 나에게는 악마의 포효로 들려왔다. 뭘 했다고? 녀석 근처에 있던 의자에 살짝 앉으며 녀석이 내뱉지 못한 단어,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단어에 집중했다. 역시나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반 아이들도 류인이의 말에 귀를 쫑긋하는 게 보였다. “누가 나한테.. ... 한거냐고!” ‘쾅!’ 책상에 금이 가지 않았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강하게 내리쳐진 류인이의 주먹에 아이들은 아무리 궁금해도 도대체 그 말 못하는 점땡땡이 무었인지 물어볼 용기마저 사라져 버렸다. 근데 말이다.. 류인이 너 혹시.. 그 말 못하는 단어가...키.. 키스는 아니겠지? 하하.. 그래, 얼굴에 붙은 철판만으로 조선소 하나는 거뜬히 먹여 살릴 네가 설마 그 단어를 말 못하는 건 아닐 거야. 라곤 하지만.. 나 역시 엄청난 충격이었으니 왠지 이해가 가는 건 불행한 사고를 함께 경험한 자로써의 동질감이랄까? 난 조심스레 녀석의 눈치를 살피다 이마에 하나둘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는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밥도 못 먹고 당하는 녀석들을 보니 상당히 미안해 졌고.. 차라리 류인이에게 내가 했다고 그냥 말해버리는 건.. 절대로 못하지! 내가 했다는 걸 알아봐, 난 그날로 영혼분리 되는 거야. 이건.. 정녕코 무덤까지 가지고갈 비밀이다. 으읏.. 근데 어쩌지? 이 녀석 지금 범인 잡겠다고 이러는 거잖아. 끈기와 집념하면 바로 한씨 집안이 아니던가! 난 사태의 심각성을 절실히 느끼며 녀석을 회유해 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 류인..” “썅! 너!” 갑자기 류인이가 한 아이를 향해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허걱... 나..나..나.. 마..말야..?” “아니, 너 말고 그 옆.” “앗.. 저..요?” 류인이가 지적한 작은 키의 무테 안경을 쓴 아이는(반장이구나--;)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하얗게 변해버린 얼굴로 숨마저 멈추고 있었다. 뭐야? 저 반장이 그런 걸로 혹시 오인하는 건.. “너 누가 그딴 그지 같은 샤프 가지고 다니래, 씨발.. 그 분홍악마 캐릭터가 그리 좋아? 어?” 분홍악마라면 류인이가 가장 싫어하는 캐릭터인.. 반장, 너 왜 키티 샤프를 가지고 있는 것이냐? --; “이.. 이건.. 동..생 꺼라서...” “씨발 다음부터 그거 내 눈에 띄면 너도 샤프에 그려진 것처럼 모가지만 둥둥 떠다니게 만들어 놓겠어.” 살벌하구나. 뿌득 소리는 안 났지만 이빨을 갈고 있을 것만 같아 난 류인이 쪽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근데 너 눈도 좋다. 저 멀리 반장이 가지고 있는 샤프 옆면에 조그맣게 세겨진 키티가 보이든? "그리고.“ “네..네?” 불쌍하리만치 떠는 반장을 다시 부른 류인이는 과학실 안쪽 창고로 쓰이는 곳의 문을 턱으로 살짝 가리켰다. “데려가.” “네?” “씹.. 못 알아들어? 데려가라고 저 안에 있는 악마새끼! 니네 집에 데려가서... 밥 먹여.” 제대로 알아듣긴 한건지 반장은 무작정 고개를 흔들었다. “옆에 너.” “어.. 아니 네?” 처음 지목 당했던 반장 옆자리 아이가 화들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지만 그 모습에 류인이가 인상을 쓰자 바로 손을 무릎위로 내렸다. 잠시 녀석을 또 노려보다 반장쪽에 눈길을 주며 중얼거렸다. “감시해.” “아... 예...” 할말이 다 끝났는지 잠시 두 녀석에게 부라리던 눈을 돌려 반 애들을 쓰윽 훑어 보기 시작했다. “다들 내 눈 똑.바.로. 봐. 눈 마주란 말야. 나한테 ... 하고도 감히 그냥 넘어가려는 놈.. 잡히기만 하면..” 아.. 차라리 소리 높여 화라도 내면하고 바랬다. 저렇게 낮은 음성으로 으스스하게 하면 누가 나 범인이다라고 자수하겠냐고? 물론.. 무덤까지 가지고갈 비밀이기에 그럴 일은 없다. 그리고 너의 그런 행동이 자꾸 나의 죄책감을 불러 일으켜 반 아이들에게 미안해지려는 마음을 야기시킨단 말이다! 난 눈을 감고 속으로 한번 크게 숨을 쉰 후 떨리는 손을 들어 류인이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자 녀석이 홱 하고 고개를 돌려 날 노려보았다. 헉.. 순간 너무 놀라 내가 범인이야라고 소리칠 뻔 한 걸 태연을 가장한 표정으로 애써 감추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밥 먹자. 점심 시간이다.” 숟가락 하나 들어 올리는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그리고 그걸 아무렇지도 안은 척 여기며 연기해야하는 고통도. “야.. 경민이 채하겠다.” 옆에서 보기 안쓰러웠는지 선호가 조심스레 날 노려보고 있는 류인이를 말렸다. 난 선호말에 힘을 얻어 슬쩍 고개를 들었는데.. “이 경민.” “어?” “...” 돌덩이 같은 밥을 꿀꺽 삼키며 녀석에게 대답했으나, 이 놈은.. 가라앉은 눈으로 날 보기만 했다. “...” “...” 우리가 앉은 탁자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만 있는 녀석과 나로 인해 시간이 멈춘 듯 했다. 선호와 병국이도 덩달아 우리를 주시한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녀석과 눈을 처음 마주칠 때의 두려운 감정은 둘째 치고 저렇게 류인이의 눈에 사로잡혀 보고 있으니.. 뭔가 가라앉은 놈의 눈 때문에 기분이 이상해져갔다. 뭐지? 그 눈에 나타나려는 건? 마치 나에게 화내는 것과 동시에 미안하다는 듯한 감정을 깔고 말이야.. 미안해? 난 스스로 왜 그런 단어를 생각해 냈는지 의아스러웠다. 어째서 류인이의 눈을 보고 그런 단어를 떠올린 걸까? “너.. 수업 중간에 과학실 들어온 적 없어?” 뜨끔. “응.”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을 무마해주듯 뻔뻔스럽게 나온 답변에 난 스스로가 대견했다. “그래?” 라며 눈썹을 치켜 올리는 류인이는 과연 믿을지 모르겠지만. “야.. 너도 봤잖아. 경민이 수업 다 끝나고 들어온 거.” 선호 너의 의리를 한순간 의심했었던 과거의 날 용서해라. “근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난 지나가듯 물으며 다시 떨리는 손으로 밥 한 숟가락을 퍼 입안에 집어넣었다. 솔직히 밥이고 뭐고 당장 조퇴해 산산이 부서진 대 로망의 꿈을 집에서 애도하고 싶었지만, 그 모든걸 카바할 만큼 류인이는 무서웠다. --; “아.. 아까 수업 중간에 갑자기 고..” “악.마.새.끼.” “그..그래.--; 악..마새끼가 나타나는 바람에.. 교실이 엉망이 됐거든. 갑자기 슬라이드 보여주던 기계도 넘어가 버리고, 그것 때문에 생물선생님 다쳐서 지금 병원 가있잖아.” “큰 일 이었네.” 내가 설명을 해준 병국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엉망정도 였겠냐,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지. 내가 잘 알.. “너 별로 안 놀라내?” “어?” 날카로운 류인이의 질문에 입에 있던 밥풀을 튀길뻔 했지만 난 억지로 얼굴 근육을 움직여 웃음을 지어냈다. “아니야.. 놀라고 있어. 내가 좀.. 잘 안 놀라잖아.” “니가?” 그냥 내가 그러면 그런줄 알아! “그..그럼. 너도 전에 그랬잖아. 난 전형적인 큰아들 이라고. 듬직한 큰아들인데 부동심이야 기본이지.. 하하.. ” “내가 언제?” 한류인 왜 너답지 않은 꼬투리인거냐. 혹시... 눈치 챈...건가? “어, 나도 들은 적 있어. 류인이 니가 전에 경민이 보고 시골에서 농사짓는 큰아들의 전형이라고 했었잖아.” 너 이름 바꿔라 선호야. 장 의리로. 그래도 여전히 의심의 눈을 풀지 않고 있는 류인이에게 병국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류인아.. 너.. 아까.. 애들한테 왜 그런거야?” 병국이의 말에 우리 셋은 모두 류인이를 쳐다보았다. 궁금해 하는 두 명의 시선과 불안해하는 한명의 시선으로. 하지만 나를 노려보다 지쳤는지 시선을 탁자위로 떨구고 인상을 구기고 있던 류인이는 당채 입을 열지 않았다. “야, 말해봐? 무슨 일인데? 누가 너한테 뭔 일 한거야?” 답답했는지 선호가 류인이를 다그쳤다. “아까..” 우리는 모두 녀석의 보기 좋은 입술을 주시했다. “어떤 자식이..” “꿀꺽” 누군지 모를 침 넘기는 소리가 긴장한 우리 세 사람 사이에 울려 퍼졌다. “나한테..” 이제 한마디. 우리 셋이 느끼는 초조와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 “....” “....” 두근.. “...키스했다.” “헉!” “!” 선호와 병국이는 더 이상 커질 수도 없는 눈을 부릅뜨고 류인이의 충격적인 말에 정신을 못차리는 듯 보였다. 윽.. 니 입으로 그런 소릴 듣는 나도 꽤나 충격적이구나. 하지만 나의 충격은 다음에 나온 류인이의 말에 올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주 계.획.적으로 작정하고 말야.” 이빨 사이로 내뱉는 류인이의 말은 그대로 심장이 멎게 했다. 계획적으로.. 작정하고.. 아니야! 절대 아니야! 난 분노의 게이지가 최대치를 나타내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절규했다. “헉.. 아주 악질이네 그놈.” 휙~ 난 고개를 돌려 같이 류인이의 분노에 동조하는 선호를 노려봤다. 누가 악질이라는 거냐! “뭐야, 그럼 우리 반에 그동안 널 노리는 놈이 있었단 말야?” 노리긴 누굴 노려! 물론 예전에 한번 류인이가 잘 때 녀석의 먹다만 빵을 노린 적은 있지만, 설마 내가 작정하고 녀석에게 키스를 했겠냐고... 난 아무 말 못하고 경악과 당황이 그대로 들어 난 얼굴로 류인이를 보았다. 고개를 들어 선호와 병국이를 보던 류인이는 살짝 눈만 돌려 날 보았다. 그리고 날 보며 다짐하듯 이를 악 물며 낮게 중얼거렸다. “꼭.. 잡.는.다.” ............................. 제.기.랄. 공포증 - 10 옆에 앉은 류인이 모르게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한 2시간이 후다닥 지나가 버리고, 마지막 7교시만 남겨두었을 무렵 배가 슬슬 아파왔다. 역시나 점심때 충격적인 말을 들으며 꾸역꾸역 먹은 밥이 문제였던 것 같다. 시계를 보니 남은 쉬는 시간은 단 2분. 허나 깨끝한 좌변기에서만 볼일을 볼 수 있는 특이체질인 탓에 조건이 맞는 교사동까지 갔다 오려면... “왜?” 스윽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에게 범인 잡겠다고 반 애들 하나씩 노려보던 류인이가 물었다. “화장실. 선생님 오시면 말 좀 해줘.” “뭐야, 똥 싸러 가냐?” 선호야 그렇게 큰소리로 말하면 내가 얼마나 민망.. 할줄 알았냐? “응.” 고개를 크게 흔들고 우정의 펀치를 날려주려는데... 아뿔싸. 나와 선호의 대화에 천천히 몸을 돌리는 병국이를 잊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애처러운 표정은 차마 눈뜨고는 볼 수가 없구나. “너.. 너... 똥.. 싸러가?” 울먹이듯 말하는 만성 변비환자 병국이 앞에서 저런 자랑(?)을 하는게 아니었는데. 너의 괴로움이 뭍어나는 표정을 보니 친구로써 가슴깊이 사죄를 하고 싶다. “뼝국! 너 몇 일째 똥 못 싼거야?” 선호도 걱정스러웠는지 소리 높여(주로 이런 일에만) 물었다. “흑.. 4일..” “씨발.. 도대체 항문외과 닥터 리는 뭐하는 거야! 애가 사흘째 소식이 없는데.” “흑 닥터 리를 탓 하지마!” “뭐야! 니가 지금 닥터 리를 옹호하는 거냐? 이 의리없는 놈?” 의리가 나왔군.--; 그렇다면.. 난 곧바로 미련 없이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반 아이들이 우리의 대화를 몰래 관람하는 걸 알아차렸다. “아... 야.” 난 몇 교시째 누군가의 눈 부라림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반 애들을 보며 류인이의 어깨를 툭 쳤다. “다른 애들도 화장실 가고 싶지 않을까?” 그러자 류인이가 반 애들을 훑어보더니 한마디 내뱉었다. “갔다 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 몇몇이 바지 가랑이를 움켜쥐고 뛰쳐나갔다. 아.. 왠지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아(사실이다) 괴로운 마음에 난 얼른 교실을 빠져나왔다. 아직까지 들려오는 닥터 리와 의리에 관한 논쟁을 뒤로 하고. 침착하게(?) 볼일을 마친 후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류인이에 대한 생각을 하느라 잠시 틀어놓은 물에 손만 대고 있었다. 이 놈이 정말 범인을 잡으려고 작정을 한 것 같은데.. 아 뭐 나라도 누가 어두운데서 갑자기 입을 맞추면 화가 날만도 하지만 말이다.. 고작 몇 초란 말이다! 뭐 나의 포즈가 작정하고 키스하려 덤비는 것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으나 불과 몇 초동안 살짝 입술만 닿은건데.. 왜 저리 불같이 화를 내는 거냐 한류인. 첫 키스를 너에게 뺏겨 대 로망의 꿈을 접어야만 했던 나도 있는데 말야. 라고.. 정말 류인이에게 말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무덤까지 가지고갈 비밀이기에 그럴 수는 없고.. 뭔가 대책을 강구해야해. 무의식중에 손수건으로 손을 닦은 후 류인이 일로 골몰하며 화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교사동을 거의 빠져나갈 때 쯤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무언가 허전함이 느껴졌다. 아! 손수건. 난 바로 몸을 돌려 화장실로 빠른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누가 가져가진 않았겠지만 좀 특별한 거라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거였다. 바로 전설의 디지몬 손수건. 작년에 막내 녀석 그 어린게 어디서 사왔는지 형 생일이라고 포장까지 해서 준 거였다. 녀석의 깜찍한 행동에 뒤집어진 가족들 덕분에 나의 생일날 주인공의 존재는 아예 잊혀져 버린 건 비극이지만 말이다. 잠시 한얼이가 생각나 씩 웃고는 화장실 쪽으로 가까이 갔는데 누군가 입구에 멍하니 서 있는게 보였다. 왜 안 들어가고 저기 있는거지? 잠깐 이상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계속 걸어갔다. 그런데 서있는 녀석의 뒷 모습이 좀 이상했다. 분명 어깨가 떨리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서둘러 그 애에게 다가갔다. 그때 갑자기 그 애의 몸이 휘청 하는 것 같더니 벽을 짚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 돌아선 녀석의 얼굴을 본 순간 난 동작을 멈춰야했다. “어?” 내 눈이 의심스러웠다. 선우 현 니가 왜.. 너 어디 아프니란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며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선우 현의 모습은.. 아니 녀석의 눈이.. 너무나 익숙해 도저히 손을 들어 녀석을 잡을 수 없었다. 류인이를 통해 몇 번 보아왔던... 그 공포. 선우 현의 눈 속에는 오로지 공포밖에 없었다. “선우 현...” 난 겨우 입을 벌려 녀석의 이름을 불렀지만 공황상태에 빠진 것처럼 비틀거리고 벽을 짚어가며 멀어져 가기만 했다. 무슨 일이지? 난 급하게 화장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대체 뭐가 녀석을 그렇게 공포로 몰아간 거지? 하지만 모퉁이를 돌아들어선 화장실 안에는.. “어? 너 이새끼..이 경민? 수업 안 듣고 여기서 뭐해!” 라는 일대구의 다정한 음성이 반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막 볼일을 끝냈는지 자크를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 화장..실이 급해서요.” “급한 놈이 뭐 하러 여기까지..” “일대.. 아니 선생님 먼저 가볼께요.” 다시 화장실 밖으로 급하게 나온 나는 선우 현이 사라진 곳으로 뛰어갔다. 바로 몇 시간 전 속에서 올라오는 증오를 참아야 했던 대상을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난 그렇게 인정 많은 사람이 아니니까. 단지.. 그 눈이 너무나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녀석이 그렇게 된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것도. 건물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담장 옆 창고로 이어지는 낡은 화단을 따라 걸었다. 예감이 맞았는지 불확실한, 그러나 분명 사람이 내는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창고 뒤, 창고 벽과 학교 담벼락 사이의 좁은 공터에서 들려오고 있었는데 점점 가까이 갈 수록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으윽..웩...쿨럭... 쿨럭..” 선우 현.. 도대체 뭐지? 나 스스로 표정이 굳는 걸 느끼며 창고의 벽을 짚고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서려다가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간신히 3사람 정도 서있을 폭의 좁은 공터에 구토를 하는 선우현이 있었지만 혼자는 아니었다. 안쓰럽게 몸을 떨고 거의 바닥에 쓰러질 듯한 자세로 구토를 하는 선우 현을 누군가 받쳐주고 있었다. 아니 안아주고 있다고 해야 옳을까? 나에게 등진 자세로 앉아 선우 현을 반쯤 껴안다 싶이 하고 한손으로는 등을 어루만져 주는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담에 기대어 서서 허공에 시선을 주고 서있는 사람은 확실히 엑스맨이었다. 그리고 이상한건 아까도 언뜻 보았던 녀석의 그 비어버린 눈이 지금은 확연히 보인다는 거였다. 아무것도 없는.. 무. 실제 내가 알고 있는 그래서 엑스맨이라고까지 별명지어 버린 녀석의 강렬한 눈은 어디에 두고 온거지? 다행이도 나의 이 궁금증은 나를 알아차린 엑스맨에 의해 풀렸다. 몸이 반쯤 공터로 들어서려다 만 나를 발견하고는 예의 그 눈빛으로 돌아간 것이다. 녀석의 눈을 보며 내가 생각한건 바로 스위치였다. 그래. 녀석은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하듯이 분명 의도적으로 눈빛을 바꾸고 있었다. 마치.. 위장이라도 하듯 말이다. 녀석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을 때 선우 현의 등을 두드려 주던 애가 걱정스럽게 묻고있었다. “괜찮아? 양호실로 갈까?” 이런.. 요새 자주 만나는구나 순남아. 엑스맨은 아직 내 존재를 모르는 두사람에게 나를 알릴 생각은 없는 건지 내가 선우 현과 순남이를 보던 눈을 들어올리자 좀더 가라앉은 눈으로 날 보며 입을 열었다. 비록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뜻은 알 수 있었다. ‘가’ 알았다 자식아. 난 간단하게 만국의 공통어인 중지만 펴기 인사법을 보여주고 착한 선배답게 녀석의 뜻대로 몸을 돌렸다. 언뜻 녀석의 눈이 휘어지는 것 같았지만 백짓장처럼 변한 얼굴로 아직까지 구토를 하는 선우현의 모습이 더 신경쓰여 자세히 보는 못했다. 선우 현.. 처음에는 단순히 류인이를 쫓아다니는 독한 스토커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아니 조금 전까지도 그랬지. 그런데.. 저 두 사람 도대체 뭐지? 답이 주위를 맴돌지만 보고서도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젠장..” 오늘은 욕데이라고 칭해야 할까보다. 오전부터 사건이 끊이지 않으니 말이다. 교사동을 스쳐 교실로 향하려던 나는 갑작스럽게 발길을 돌려 교사 동으로 뛰쳐 들어갔다. 내 디지몬 손수건! 취향이 아주 독특한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가져가지는 안았겠지만 혹시라는 마음에 화장실로 들어섰고, 세상에는 독특한 취향의 어른이 많다는 걸 깨달아야 했다. 바로 일대구처럼. “선생님.” 종례가 끝나자마자 일대구를 쫒아간 난 조심스레 담임을 불렀다. 한가닥의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날리며 일대구가 뒤돌아 서자 난 대뜸 그에게 물었다. “아까 화장실에서 손수건 줍지 않으셨어요?” “이경민.. 이경민.”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느끼하게 학생이름 두 번 부르기에 난 머리카락이 쭈빗 서는 것만 같아 슬적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아침마다 일대구의 저 부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내는 선호에게 감탄하며. “이거 말하는 거냐?” 그가 주머니에서 디지몬 손수건을 꺼내주었다. “예.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손수건을 받아들었는데... 어째서 손수건이 팽팽하게 늘어지는 것이냐. “선생님?” 손수건 끝을 잡고 안 놔주는 일대구에게 내가 의아해하며 묻자 그가 나에게 다가오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거 이쁘던데?” 삐릿! 온몸의 털이 곤두서게 하는 그 느끼함과 사제의 정을 단숨에 뛰어넘는 살인충동을 자제하느라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 “왜 그러지? 이 경민, 이 경민?” “아뇨, 하하.. 선생님의 탁월한 안목에 잠시 말을 잃었을 뿐입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지는 일대구의 모습을 보며 잠시 굳어있었다. 그런 나의 상태를 꺼내준 건 언제 들어도 짜증을 끌어올릴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보이스 일명 김인문 목소리의 주인공, 민섭이었다. “어이~ 이 경민.” “어.” “여기서 뭐하냐? 근데 좀 전에 일대구랑 있지 않았냐? 얼~ 사이가 아주 좋은가봐? 크크크..” 너의 그 삼중으로 갈라지는 목소리에 크크크란 웃음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냐? 1년이 지나도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작년에 전교생이 천원씩 모아 녀석의 성대를 고쳐주자는 운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근데 몸은 좀 괜찮냐? 너 그날 보니 복날 개 맞듯이 맞던데.” “--; ... 개 같은 회복력으로 다 나았다.” “크크크큭... 그러냐? 크크..” 나도 모르게 손이 저절로 올라가려는 걸 19년간 듣고 살았을 녀석의 가족을 생각해 참으며 물었다. “넌 어떻게 된거야? 그날 다시 한판 붙은거야?” “아.. 씹.. 말하지마. 내가 쪽팔려서 원.. 생각 같아선 당장 학교 때려치고 싶은거 마미 때문에 참고 있으니까. 뭐, 다시 붙긴 했는데..” “근데?” “깨졌다. --;” “또?” “으.. 그 개놈의 자식.. 너도 봤잖아! 그 윤이라는 녀석 류인이하고 싸우는거. 근데 제정신이 아닌 류인이 상대로 그렇게 싸우던거 보고 좀 억울한 마음은 덜 들더라.” “윤이?” “어. 그 눈만 살아서 마주치면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놈 말야. 선우 윤.” 선우 윤... 선우 현... 그래, 뭔가 연결고리가 있을꺼라고는 생각했지만, 가족이었단 말야? 전혀 닮지는 않았는데.. 사촌인가? 다행히 목소리의 매력을 충분히 뽐내려는 듯 민섭이의 수다가 이어졌다. “1학년의 유명한 선우 현하고 사촌이잖아. 그래서 그것 때문에 선우 현한테 맘주는 녀석들이 다가가질 못하고 있지. 항상 선우 윤 패거리하고 붙어 다니거든. 근데 내가 보기에도 선우 현 그놈은.. 캬... 너무 이쁘단 말야. 더구나 그 미모에 빵빵한 집안 받쳐주겠다, 머리도 좋고, 예의까지 바르고..” 선우 현은 자신을 쓰러트린 일당에서 완전히 제외시켜 생각하는 건지 넋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리는 민섭이를 보며 한가지에는 동감했다. 그래, 예의는 바르지. “그 녀석 집안이 어떤데?” “어 몰랐어? 선우 태원이라고 국회의원알지? 그 사람이 아버지잖아. 그리고 형은 CLI전자 사장이고. 선우 윤은 그 사람 아들이라더라. 졸나 빵빵하지 않냐? 둘다 외모 되, 돈도 많아.. 기집애들 꽤나 꼬일 거야. 씨발 열라 부러운 것들.” 가진자들이 더 원한다 했던가? 그래서 너무 많은걸 가졌기에 더 완벽해지려고 기를 쓰는건지. 선우 현에게 그 대상이 류인이가 됐다는 건 솔직히 나도 이해는 간다. 워낙에 이 근방에서 유명한 녀석이고, 공포증 말고는 정말 완벽한 녀석이니까. 단지 문제는 녀석이 내 친구라는 거겠지. 선우 현이 생각보다 더 엄청난 것 같아 좀 우울해졌다. 내가 아니더라도 녀석 스스로 자신을 잘 지키긴 하겠지만, 문제는 나였다. 계속 이용당하고 폐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것. 아니.. 이건 거짓말이다. 내가 신경 쓰는 건 아까 선우현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의 위험을 알고도 도와주지 않았던 류인이의 그 완벽한, 이기적일 정도로 완벽한 녀석의 모습에 상처를 받을까봐서다. 고백하건데 두렵다.. 기대했던 만큼 녀석이 해주지 않아 배신감이 드는 것, 나를 위해준다고 믿는 마음이 실은 내 스스로의 착각일 수도 있다는 것... 그래도 녀석에게 기대를 갖는 나. 그리고... 모두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것. 과대망상. 아직도 뭐라 중얼거리는 민섭이의 말을 듣지 못한 채 이 한단어로 금방 터질 것 같은 뚝을 잠시 덮어 두었다. 후에 뚝이 터져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지금은.. 편안해지자.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아..” 못 들었다.--; “솔직히 한 류인 새끼야 눈꼽만큼도 걱정 안 되지만, 넌 또 괜히 옆에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질까 겁난다고.” “누가 새우라는 거야?” 눈을 가늘게 뜨고 물어보자 민섭이는 머쓱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니 뭐.. 넌 귀여우니까 새우라고 표현해도..” 귀여워? 이 어이없는 한마디에 좀 전의 걱정은 모두 날려버린 난 험악한 인상을 지어 보였다. “지금 누구보고 그런 소릴 하는거냐, 김.민.섭.?” “아니.. 난.. 뭐.. 그냥 단지..” 얼굴이 벌개져서 버벅거리는 민섭이를 노려보다 난 교실로 향했다. 민섭이의 섬뜩한 발언에 기분이 상해 교실 뒷문을 열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류인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일부터 번호대로 면담한다.” 마치 과학실로 시간이동을 한 듯 똑같은 상황이 연출되는 이 상황에서 난 제일 중요한 고민을 잠시 잊고 있던 자신을 탓했다. 근데 내일부터 면담이라니? 이 녀석이 반 애들 개개인의 학업과 학교생활에 대해 심도 깊은 상담을 할리는 없고, 설마.. “미리 말해두는데, ... 했던 놈 잡히면 죽지 않을 만큼만 팬다.” 니가 인간이냐! 너..너의 그 무쇠주먹을 생각하란 말이다. 거기에 한방 맞으면.. 뒷문에 서서 차마 교실로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서있던 나는 문득 차라리 녀석에게 죽을 때까지 한번 맞는 걸로 그냥 끝내버릴까 라는 생각을... “딱 10년 동안.” 역시 무덤까지 함께 가자. 제길, 10년 동안 맞는 짓을 하느니 차라리 월북해버린다. 아냐.. 저 녀석은 북한까지 쫒아올지도 몰라.. 아득한 공포로 그렇게 서있을 때 화장실 다녀온 이후 약간 시기어린 모습으로 날 보던 병국이가 소리쳤다. “경민아 왔냐. 근데 왜 그러고 서있어? “아.. 아니야.”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진짜 이대로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도.망.가.는. 놈은 범인으로 알겠어.” 무서운놈.. 사방을 저렇게 다 봉쇄해 버리다니. 난 마지막으로 말은 마친 후 아이들에게 가보라는 신호를 하고 있는 류인이를 보았다. “안가?” 멍하니 서있는 나를 발견하고 가방을 싸며 류인이가 물었다. “가야..지..” 천천히 다가서자 짐을 다 챙긴 선호가 뒤돌아 앉으며 나에게 말했다. “야 오늘 류인이네 가자.” 난 고개를 홱 돌려 류인이를 쳐다보았다. 이 녀석 집에? “왜?” “왜긴, 대책회의를 해야지. 우리의 프랜 류인이에게 삐리리한 행동을 한 악독하고 파렴치한 범인을 잡아야 하지 않겠어!”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병국이를 살짝 야리며 난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되물었다. “대책회의?” 이것들이 지금 류인이를 말리지는 못할망정 더 부추기겠다는 것이냐? 대책회의는 무슨 얼어죽을!! 그리고 누..누가 지금 악독 파렴치라는 거냐 임병국. 화가 치밀어 올라, 뭐라 한소리 덧붙이려 하는데.. ‘우드득..’ 내 혀를 얼게 하기에 충분히 섬뜩한 음향이 들렸고, 난 그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살짝 눈을 돌렸다. 그래, 꽉 주먹진 너의 주먹을 보니 그곳이 진원지인 것 같구나 류인아.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경민아 너 괜찮아? 얼굴이 창백해!” 당연히 창백하겠지, 지금 내 몸의 피가 모두 빠져나간 것 같은데 말야. “어.. 그냥 좀 안좋네.” “어디 아프냐?” 여전히 주먹 쥔 손을 풀지 않으며 류인이가 물었다. “글쎄... 아..픈가?” 갑자기 녀석의 손이 쓱 하고 내 이마에 살짝 와 닿았다. “열은 없는데.” “아.. 뭐..” 한 팔을 책상에 걸친 채 반쯤 돌아 나를 보는 류인이의 눈이 정말 걱정해주는 것 같아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날 유심히 살펴보던 선호가 낮은 목소리로 날 불렀다. “야, 이경민. 혹시...” 선호답지 않은 진지한 시선에 난 눈만 깜박이고는 대답을 못했다. 혹시라니.. 너 설마 알아차린 건.. “너도 변비냐? 아까 화장실 가더니만 너 못 싼거지? 그지? 어쩐지 오래있는다 싶었어.” --; 거의 확신한다는 듯 외치는 선호의 말이 어이 없다기 보다 다행으로 들렸다는 사실에 비참한 기분마저 들었다. “뭐야! 너도 변비야!?” 유난히(?) 반가워하는 병국이가 나의 손을 덥썩 잡더니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근데 너 왠지 내가 꼭 변비여야 한다는 듯한 얼굴이다. 미안하지만 난 하루에 한번씩 규칙적으로 볼일을 보는.. “응.” 인간 이 경민 정말 비굴해졌구나. 내 대답으로 류인이는 내 팔에 살짝 얹었던 팔을 홱 치워버렸고, 선호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 병국이는 변비를 퇴치할 수 있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래 뭐.. 일단은 류인이에게 걸리는 것보다 변비환자로 있는게 낫겠지.. 젠장. 공포증 - 11 3. Homophobia (호모 공포증) ‘달칵’ 문소리가 나는걸 보니 돌아보지 않아도 류인이가 샤워를 마치고 나온 듯 했다. 올 때마다 이런게 왜 있을까 강력히 의구심이 드는 빨간 토끼무늬 앞치마를 대충 앞에 두르고 후라이팬에 감자를 볶던 나는 고개도 안 돌리고 소리쳤다. “야! 후추 어딨어?” 내가 왜 지금 여기서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요리인 볶음밥을 만드는가 하는 사정은 하교 길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네들이 무슨 김전일이라도 된 양 범인 잡겠다며 신나 류인이 집으로 향하려던 선호와 병국이를 떼어 놓기 위해 갖은 방법을 쓰며 애를 썼지만 이 녀석들은 요지부동으로 같이 버스에 오르려 해 상당히 당황스런 순간이었다. 녀석들 없는데서 류인이를 구슬리려던 계획이 있었기에 전전긍긍하는데 의외로 류인이의 한마디로 쉽게 해결 되 버렸다. ‘니들 밥 없어. 알아서 먹고 와.’ 라며 날 붙들고 버스에 올라타 버린 것이다. 의리와 우정에 대해 목에 핏대 세우고 성토를 하는 선호를 뒤로 하고 집에 오자마자 녀석이 당연하다는 듯 밥하라고 요구했다. 전 같으면 난 밥 안먹어 라고 소리쳐야 정상이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눈물을 흘려가며 양파를 까 이렇게 녀석에게 몇 번 해주지 않았던 볶음밥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선호와 병국이는 삐져서 연락도 안할꺼라는 나의 추측은 무참히 깨져 문자로 8시까지 온다는 연락이 와 녀석들의 집요함에 치를 떨어야 했다. 왜 지들이 난리냐고! “아야..” 머리를 감싸며 고개를 돌리자 류인이가 내 머리를 친 손을 내리며 젖은 머리를 하고 바로 뒤에 서있었다. 근데.. 한 여름도 아닌데 왜 웃통은 벗어 제낀거냐? “야채나 잘 볶아.” 녀석이 턱으로 후라이팬을 가리키고는 좀더 내 쪽으로 한걸음 다가와 손을 뻗어 올렸다. 내 등 뒤로 류인이의 상체가 살짝 닿는다 싶더니 그의 뻗은 손이 내 바로 위 찬장을 열고 있었다. “후추라고?” 시원한 샤워코롱의 냄새에 잠시 류인이의 말에 대답을 못하자 고개를 살짝 숙여 날 내려다 보는게 느껴졌다. “어? 어.. 후추.” 뭐냐.. 자세히 살피려는지 좀더 내 등에 상체를 기대고 한쪽 팔은 내 바로 옆 싱크대에 기대어 난 완전히 녀석에게 갇힌 폼이 되고 말았다. 등에 닿는 류인이의 맨살은 오랜 운동으로 들어난 근육 때문에 단단하게 느껴졌다. 난 살짝 눈만 돌려 내 얼굴 바로 옆을 스칠 듯 올려져 있는 팔 보았다. 뒤적거리며 움직일 때마다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팔 근육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나도 모르게 뻘쭘해져 얼른 눈을 내려 후라이팬에서 볶아지고 있는 감자에 집중했다. 녀석의 집에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런가? 자꾸 류인이의 몸에 시선이 가려는 자신이 변태같이 느껴져 난 살짝 미간 눈살을 찌푸렸다. “후추 없으면 안돼?” 내 머리 바로 위에 대고 중얼거리듯 말하는 류인이의 목소리가 갑지기 너무 섹시하게 들려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을 뻔했다. 아, 나 왜 이러지? “없으면.. 그냥 놔둬라.” 목소리가 갈라져 나올까봐 걱정할 정도로 긴장이 되어 버렸다. 천천히 찬장 문을 닫는 게 느껴지고 녀석의 팔이 내려왔다. 그래, 이제 나한테서 떨어지면 나아질 거야. 오늘 너무 신경쓰는 일이 많아서 그런 것.. “그거.. 나 먹을래.” 헛...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쉴 뻔 했다. 당연히 떨어질꺼라 생각했던 류인이가 나머지 한팔을 넓게 벌려 싱크대에 손을 얹어 완전히 날 가둬버린 후 내 귓가에 대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놀라 잠시 감자를 볶던 수저를 순간 꽉 쥐었다. 내 어깨에 녀석의 머리에서 채 마르지 않아 물방울이 떨어진 것도 못 느끼고 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빨리 뛰고 있는 심장에게 소리쳤다. 시끄러! 그리고 무의식중에 녀석에게 답했다. “알아서 집어먹어 새꺄.”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의 입이 위로 곡선을 그리고 있을 것 같아 난 류인이의 얼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실은.. 내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다. 붉어져? 미치겠군.. “야, 좀 비키지 그래? 지금 내 배가 가스불에 닿아 삼겹살 구이가 되는 꼴을 꼭 봐야겠냐?” “훗..” 녀석의 목을 통해서 낮게 울리는 웃음소리가 아직까지 내 왼쪽 귀를 뜨겁게 만들고 있었다. “요새 고기도 못 먹었는데 삼겹살 좋지.” 라며 녀석이 몸으로 내 등을 살짝 밀어내고 있었다. 야..야.. 그렇게 달라붙지 말란 말이다! “우리한번 실험정신에 입각해 감자만 넣은 볶음밥을 먹어볼까?” 난 최대한 험악하게 말하며 안경을 쓸어 올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아직 내 뒤에 붙어 있는 녀석을 노려봤다. “씨발 농담에 예민한 반응하기는. 대신..” 말을 잠깐 끊은 녀석은 갑자기 감자를 열심히 볶던(그 와중에도 잊지 않고!) 손을 잡아 채더니 수저위에 감자를 들어 올려 자신의 입에 가져갔다. 난 멍하니 녀석 손에 잡혀 올라가는 내 손을 바라보았다. “좀 덜 익었는데.” 뭐가? 아.. 지금 네가 오물거리고 있는 감자가? 근데 왜 내 손은 거기에 있는 거지? “경민아...?” “응?” “나한테 반했냐?” “뭐?!!!” 이 자식이 지금 무슨 소리를! 난 화들짝 놀라 소리치고는, 녀석 손에서 내 손을 강하게 빼내었다. “농담이야.” 아.. 민망해라. 여기서 얼른 상황이 부드럽게 넘어가도록 나도 뭔가 맞받아 쳐야 하는데.. 도통 입이 열리지 않았다. 평소에는 잘도 나불대던 이 입이 말이다. “뭐야, 진짜야?” 나에게 살짝 떨어진(그러나 여전히 가깝다) 류인이가 살짝 고개를 옆으로 숙이더니 묘하게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내려다보았다. 그래, 내가 우스워 보이겠지, 한 두 해 보는 얼굴도 아닌데 신체적 접촉을 좀 했다고, 얼굴이 붉어지지 않나(봤을까?), 농담도 못 알아먹질 않나.. 하지만 오늘 나는 내가봐도 이상하다구 친구. “휴...” 난 한숨을 쉬며 살짝 감았던 눈을 떴다. “너 왜 그래?” “그냥 오늘 좀 힘들어서 그래. 미안하다. 소리쳐서.” 그리고 손을 들어 살짝 녀석의 어깨를 밀은 후 가스 불을 줄였다. 이러다 감자 타겠군. “무슨 일이야.” 솜털이 쭈삣서는 느낌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녀석이 화났을 때 내는 낮은 목소리. 근데 어떻게 대답해야하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무슨 일은 무슨일이 있었겠냐.. 오전부터 쇠구술 공격을 시작으로 세 놈과 대판 싸우고, 첫키스를 친구와 해버리고, 범인 잡겠다고 있는 살기 다 세우는 친구놈 옆에서 간 졸이다 손수건도 놓치고... 또... 흠.. 참 많은 일이 있었군. “너 오늘 혹시 선..” “아냐. 그냥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런다. 너 답지 않은 걱정에 기분 더 상하려고 하니까 저쪽 가서 밥이나 기다리고 있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나를 마치 사실인지 판별하는 사람처럼 잠시 물끄러미 보더니 휙 몸을 돌렸다. 한 마디를 잊지 않고. “햄 많이 넣어라.” “야.” 내가 만든 밥 잘 먹고 있는 사람 웬만해선 중간에 부르긴 싫었지만 도저히 눈에 걸려 못 참을 지경에 치닫자 숟가락을 내려놓고 류인이를 노려봤다. “왜?” 밥을 먹으며 대답을 한건 의외였지만, 입에 밥을 문 채 그러면 밥풀 튀잖냐. “옷 좀 입지 그래?” 생전 남 앞에선 옷도 잘 안 벗던 놈이 오늘따라 왜 저리 웃통을 벗고 설치는 거냐? “더워.” 너.. 너.. 더우면 보일러를 끄란 말이다! 기름 한 방울 안나오는 나라에서 낼 모래면 4월인 이 시점에 무슨 보일러를 틀고 난리냐고. 라고 소리치고 싶은걸 오늘 저녁의 목적을 생각해 참고 웃으며 충고했다. “보일러를 좀 끄면 시원하지 않을까 친구?” “싫어.” “왜!” 결국 내가 소리 지르자 녀석이 입에서 숟가락을 빼며 날 쳐다보았다. “그냥.” 난 잠시 눈을 감고 셋을 세었다. 참자.. 참어. 오늘 내가 이 집구석까지 온 이유를 생각하자고. 녀석을 회유하기 위해서는 화를 내면 안 되지. 암. “밥 더 줘.” 어느새 다 먹었는지 빈 밥그릇을 나에게 내밀며 녀석이 당당히 요구했다. “없어.” 화는 아니고 단지 무뚝뚝함일 뿐이다. 근데 어라? 너 지금 어딜 보는 거냐! 그건 내 밥그릇.. “안 먹을 꺼지?” 뒤에 물음표는 예의상 붙인 게 뻔한 명령의 어조로 내게 물었다. “그래, 먹어라! 먹어!” 놈에게 내 밥그릇을 넘겨주고는 옆에 있던 물을 벌컥 들이켰다. 아 물 컵 넘어 힐끔 보니 또 악마 같은 미소를 짓고 있구나. 젠장. 물 컵을 내려놓는데 맞은편 벽에 걸린 시계가 보였다. 7:30. 맞다. 선호랑 병국이가 8시까지 오기로 했지. 바보같이 잊고 있었다니. 난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면 류인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너.. 그.. 범인 진짜.. 잡을 거야?” 밥을 먹다말고 갑자기 숟가락질을 멈추더니 그대로 눈만 들어올렸다. 헉.. 노..노려본다고 내가 포길할쏘냐. “응.” 다시 숟가락을 움직였다. “아니 내가 보기엔.. 반 애들도 무서워하는 것 같고.. 범인도 지금쯤은 후회 많이 하고 있을 거야. 니가 아까 좀 살벌했어야지.. 아마 지금 이불 뒤짚어 쓰고 울고 있을지도..” ‘챙!’ 거칠게 내던져진 숟가락이 탁자위에 큰소리로 뒹굴었다. “씨발.” 그 씨발은.. 내가 하고 싶다고.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에 두 사람다 말없이 서로를 보고만 있었다. 그때 다행히도 류인이의 전화가 어색한 침묵을 깨주었다. 류인이는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식탁위에 있던 전화를 들었다. “어, 형.” 류민 형인가? “응, CD에 담아와.... 알았어. 오늘 저녁에 해줄게.” 일이 생긴 건가? 류인이는 종종 집안 가업(?)을 도와 회계장부를 정리하곤 했다. 돈을 주로 다루는 가업의 특성상 첫째인 류민형은 주로 사람들을 만나며 계약을 했고, 둘째인 류진형은 사후 뒤처리 즉 말로 해서는 해결할 수 없을 때 일단의 사조직을(말이 좋아 사조직이지 완전 조폭이다--;) 이끌고 나서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씨 집안의 막내답게 류인이는 자신의 능력을 살려 숫자와 관련된 장부 일을 간간히 보고있는 것 이였다. 역시 큰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초등때 미래의 자신의 꿈에 대해 적어서 내는 시간에 녀석은 ‘경리’라고 써서 담임선생님의 입이 10분간 다물지 못한 일을 초례시킨 무서운 놈이었다. “내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내가 왜 고.마.워. 해야하지?” 저런 싸가지.. 뭔가 부탁한거 같은데 형한테 하는 말버릇하고는.. 근데 부탁? 평생 아무에게도 안 쓰던 말인데.. 급한 일이었나 보군. 통화가 끝났는지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은 녀석은 다시 살기어린 눈빛으로 변해 날 노려봤다. “씹.. 다시 한번 지껄여 보시지.” 살벌하게 말하는 류인이를 보며 난 속으로 한숨을 쉬고 포기한 듯 자조적으로 물었다. “그 키.. 스가 그리 싫든?” “...” 노려보던 눈빛이 좀 가라앉아 보였다. 그리곤 뭘 생각하는지 날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하다 혼자 말인 양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라서 .. 더 미치겠는거야.” 뭐라고? 뭐가 아니라 미쳐? 뭔 소리야, 자세히 설명을 해보렴. 이해를 못하겠으니. 그때 세워진 한쪽 손에 턱을 기대더니 류인이가 물어왔다. “왜 일까?” “뭐가?” “대답해봐.” 아, 그러니까 뭘! 근데 말이다.. 너.. 그 눈.. 식당에서 봤던.. 그 눈빛 같잖아. 또다시 떠오르는 단어. 화내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미안함..? 어째서..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어?” 잠시 그 눈을 생각하느라 멍해 있던 난 녀석의 질문에 뒷전으로 밀려났던 목적을 떠올렸다. “아.. 그러니까 난.. 음.. 좀더 애들에게 기회를 주자 이거지. 니가.. 그렇게 몰아세우면 아마 끝까지 안 나타날지도 모르잖아?” 아마 죽어서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등장 안 할꺼다. “한 일주일, 아니 삼, 사일 만이라도 스스로 찾아올 그.. 유예기간을 주는거지. 하하.. 솔직히 너의 성질머리, 야,. 표정 풀어라 하하.. 흠.. 그러니까 니 성격 모르는 사람도 없는데 간 부은 놈이 아니고서야 니 말처럼 작정하고 계획적으로..” “맞.아.” “그.. 그래--; 계획적으로 하진 안았을꺼란 얘기지.” 아.. 먹히는 건가? 도통 기분을 알 수 없는 그 무표정은 제발 지워줘.. “그래서.. 안 나타나면.” “그땐 또.. 그때 가서..” 이런.. 눈이 가늘어지고 있구나. 작전변경이다. “솔직히 난 니가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니라고 봐. 뭐, 모르는 상대에게 기습 키스를 당한게 기분 나쁘긴 하지만 그냥 똥 밟았다 생각하고 넘어갈 일일수도 있잖아?” “그 상대가..” 그래 뭐? “남.자.여.도?” “하하.. 뭐야 설마 너 그게 껄끄러웠던 거야? 야, 요즘 세상에 좋아하는데 남자 여자가 어딨어. 봐, 너도 남자애들이 종종 고백하고 그러잖아. 이건 고개를 좌, 우 어느쪽으로 돌리냐로 생각의 폭이 완연히 바뀌는 문제야. 그러니까 너도 조금만 고개를 돌려서 다르게 생각하면..” “싫어.” “남자가?” “그래.” “진짜로?” “응.” “다시 묻겠는데.. 정말, 진짜로, 골똘히 생각해 봐도 남자랑 키스했다는 사실이 니 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거냐? 너무 싫어서?” “그래.” 제길... 그래 나도 니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고. 지금 니가 이 난리만 안쳤어도 나도 집에서 남자 때문에 무너져 버린 대 로망을 슬퍼하며.. “..... 아니니까.” “응? 뭐라고?” “...” 사람 무안하게 빤히 쳐다보기는.. “그럼 넌 상관없냐?” “뭐가?” 방법을 생각하기위해 머리를 몰래 쥐어뜯느라 녀석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요는 녀석의 생각이 좀 바뀌면 화가 풀릴꺼란 얘긴데... “남.자.가 너한테 키스해도 상관없냐고.” 당연히 상관있지! 벌써 이렇게 무너진 대 로망으로 꽃다운 십대에 절망의 늪에 발목을 담근 상태니까 말야. 허나... “상.관.없.어.” 내 말에 류인이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등을 천천히 뒤 의자에 기댔다. 그리고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짝 거렸다. 아, 그래 너도 놀라기도 했겠지. 평소 보수적이란 말을 꽤나 듣는 내가 이런 자유분방한 생각을 가지고 말했으니 말이다. 걱정마. 나도 놀랬으니. 내 거짓말에. --;; “그래?” 녀석은 살짝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느긋하게 되물어왔다. “응. 솔직히 사람을 좋아하는 거 자기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단지 그 상대가 남자였다고 해서 포기하고, 속마음을 감춰야만 한다는 건 비극이라고. 아마 너한테... 키..스한 애도 그런 절박한 심정이었을지도 몰라. 뭐, 니 기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냐. 여자도 아닌 시커먼 남자 놈이 달려들어 너도 놀랐겠지, 하지만 말야..” 꽤나 진지하게 녀석을 바라보며 제발 알아먹고 맘 좀 풀어라의 심정으로 주절거릴 때 녀석이 뜬금없이 물어왔다. “너 남자를 좋아해?” 미쳤냐? 내가 머리에 총 맞게? “그럴..수 있다는 거지.” “흠..” 엄지로 입술을 누르며 녀석은 잠시 혼자 생각하는 듯 했다. 간간히 무언가를 중얼거리기도 하면서. 하긴 12년이나 알고 지내온 놈이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다고 선언하니 좀 혼란스럽기도 하겠지. 계속 혼란스러워 하라고. 그래서 제발 그 범인 찾기는 중단해줘. “아.. 내가 말한 거 때문에 놀랐냐?” 난 조심스레 녀석을 떠보았다. “조금.” “그래, 하하.. 뭐 그렇지만 내가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 “증명해봐.” “뭘?” 내 물음에 녀석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뗐다. “니가 사랑을 하는데 있어서 남자라도 상관없다는 거.” “ㅇ..왜?” “못 믿겠거든. 니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친.구.인 나도 너의 그 위대한 박애정신을 따라 범인에게 유예기간을 줄 수도 있지.” “어떻게.. 뭘 증명하라는 거야? 난 지금 좋아하는 사람 없어. 그리고 증명 때문에 갑자기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류인이는 몸을 더 앞으로 내밀어 내 얼굴 가까이에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꼭 좋아하는 사람은 필요 없잖아? 간단한 스킨쉽 정도라면 호감정도만으로 할 수 있을테니. 남.자.와.” 너.. 너.. 영어 이름 데블이지! 어떻게 그런.. 속에서 폭풍처럼 불어 닥치는 경악을 표정에 들어낼수 없는 상황에 분개하며 침을 꿀꺽 삼키고 되물었다. “스킨쉽?” “응.” “누구하고?”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이자식이 나와 병국이 혹은 선호와 이상한 스킨쉽을 시키려고 장난치는 건 아닐까 생각했었다. 다음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나.” 공포증 - 12 ‘털썩’ 가방을 내려놓고 힘없이 자리에 앉자 일생에 전혀 도움 안 되는 두 인간이 아침부터 아는 척을 해왔다. “왔냐 경민.” “야, 씨발 한류인 이자식 어제 우리가 힘들게 지네집까지 갔으면 차라도 한잔주고 내쳐야 하는거 아니냐?” 난 가방에서 책을 빼내며 병국이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해주고 류인이 불평을 해대는 선호를 잠시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 어제 학교에서 밤샜냐? 그렇지 않고서야 니가 .. ” “후, 이 경민 이 형님도 가끔은 일대구의 혈압을 위해 지각 안 할 때도 있다 이 말이 다.” 선호의 대답에 병국이가 엄지와 검지를 벌려 턱을 잡고는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넌 일대구와 뭔가가 있어.” “있긴 뭐가 있다는 거야?” “뭔가가..” “그니까 뭐?” “뭔가..” “이게!” 귀엽게 투닥 거리는 두 녀석을 무시하고 책을 서랍 속에 챙겨 넣다 옆자리를 보니 항상 나보다 먼저 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어야 할 류인이가 보이지 않았다. 가방은 있는데.. “류인이.. 어디 갔어?” 아직까지 병자처럼 ‘뭔가’를 중얼거리던 병국이가 내 질문에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와보니까 가방만 있고 사람은 없더라고.” “그래...” 내 인생 최악의 날로 꼽힐 어제의 마무리는 류인이의 그 천인공노할 증명요구였다. 제길.. 나보고 남자도 사랑할 수 있다는 증명을 하라고? 그래야만 자신도 감명 받아(?) 범인에게 유예기간을 준다나.. 그렇다고 내가 진짜 그런 말도 안돼는 증명을.. 해야겠지. --;; 어제 녀석의 말을 듣고 한참동안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선호와 병국이가 왔고, 류인이는 할 일이 있다며 채 신발도 벗지 못한 두 녀석과 함께 나를 집 밖으로 몰아내 버렸었다. 당연히 어제 집에 와서 잠도 못자고 뜬눈으로 새벽을 맞이해야 옳았으나 워낙 피곤한 하루였기에 가자마자 자버렸다. 아.. 생각 좀 해둘걸. 녀석이 분명 어제 나갈 때 시간을 금요일까지만 준다고 한 것 같은데.. 4일 남은건가? “별일이네. 자고 있어야할 녀석이 없다니, 야 이 경민 어제 류인이가 뭐라 안하든? 뭐 짐작가는 범인이라든지.” 난 물끄러미 선호를 바라보며 굳은 결심을 했다. 류인이 보다 먼저 제거해야 할 대상은 바로 앞의 두 놈이다! 라고. 너희의 오지랖으로 인해 어린나이에 월북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되지 않겠니 친구들? “혹시 범인 말이야..” 내 말에 병국이와 선호가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왔다.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니네 둘 중 하나 아냐? 솔직히 말해서 류인이하고 제일 가까이 있었던 것도 너희고, 일이 벌어지고 가장 의심 안 받을걸 아니까 그걸 이용해서 했을 수도 있고..” “절대 아냐!!!!!” “이 경민 입 닥쳐!!!” 얼굴이 허옇게 변해서 소리치는 녀석들을 보고 난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마지막 펀치를 날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류인이도 니들을 의심하게 될 거야. 아니 이미 하고 있을지도.” “헉.. 너..너.. 그런 끔찍한 소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선호와는 달리 병국이가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지만 난 일부러 크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솔직히 어제 류인이 행동 때문에 범인이 자백하고 싶다하더라고 생각을 바꿨을 거야. 나.라.도. 정말 그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갈꺼라고. 그럼, 범인이 안 나타난다면.. 결국 류인이는 가까이에 있는 너희들을 의심할 수 밖에 없고..” “그만!” 선호가 두 귀를 막으며 괴롭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너..너 설마 우리를 의심하는 거냐?” 병국이가 믿기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나도 의심하고 싶진 않지만.. 솔직히 말해서 가장 유력한건..” 내 말에 선호와 병국이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녀석들 모르게 씩 웃으며 나머지 말을 강하게 내뱉었다. “니.들.이.지.” 경악과 공포로 넋이 나간 두 녀석을 보며 간만에 기쁨을 즐기고 있을 때 누가 주춤거리며 날 불렀다. “겨.. 경민아..” 난 고개를 드니 내 옆에 두 손을 꽉 쥐고 불안한 듯 서있는 키티반장을 보았다. “왜?” “저기..” 귀엽게 생긴 키티반장을 올려보다 문득 반 아이들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살짝 표정을 굳히며 키티반장을 올려다보자 침을 한번 꿀꺽 삼키더니 어렵게 입을 뗐다. “물어볼게 있는데..” “뭔데?” “류..류인이 말야... 어제 왜 화난건지 알아?” 아.. 그러고 보니 녀석이 오늘 번호대로 면담한다고 했었지. --;; “그게.. 알긴 아는데, 본인이 말 안하는데 내가 말하는 건 좀... 미안하다.” “그래...” 왠지 풀이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는 게 좀 안쓰럽고 상당히 미안해 난 몸을 뒤로 젖히고 녀석을 올려다보며 살짝 웃어보였다. “어제 말한 면담은 오늘 없을 거야. 이 번주.. 까지는.” “정말?” 키티반장은 고개를 들며 좀 기쁜 듯이 물어왔다. “그게... 아마도.” “그럼, 그 안에 범인이 잡히면 면담 같은거 아예 안해도 되겠네?” 아.. 범인은 절대 안 잡힐꺼라고 내 입으로 절대 말 못하지. “.. 뭐.. 그러겠지.” “어제.. 반 애들이랑 얘기해봤는데..”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애들을 훑어보았다. “과학실이 너무 어두 웠어서.. 류인이가 바닥에 넘어진게.. 솔직히 누가 한건지 아무도 모르겠데. 워낙 어수선한 상태였거든.. 혹시 모르고 민 걸 수도 있긴 한데.. 자신이 민건지 확실하지 않으니까 애들은..” 저 혹시.. 너 눈이 촉촉해 지는건 설마 울려는 건 아니겠지? 한류인 너 결국 애까지 울리는구나! 물론 내 탓도 1% 정도 있긴 하지만 --; 미치겠군... “그래.” “그래서... 저기.. 경민이 넌 류인이랑 친하니까.. 아니, 어제도 보니까 류인이 말릴 수 있는건 너밖에 없는거 같아서.. 저기.. 미안한데... 류인이한테 말해서 바닥으로 민거 누군지 우리끼리 찾아볼 테니까 그냥 기다려 달라고 말해줄래?” 아.. 바닥으로 민게 아니라 키스의 범인을 찾는거라고는 .. “근데 그게 바닥에 민 정도가 아니니까 그렇지.” 병국아 웬만하면 그냥 조용히.. “그래, 아무리 류인이 녀석 성격이 개차반이라도 설마 민 것만 가지고 그랬겠어? 어떤 파렴치한 놈이 글쎄 류인이한테..” “범인 잡기 전에 니들이 먼저 골로가고 싶냐?” 난 병국이를 도와 설명하려는 선호의 말을 막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버린 두 녀석을 놔두고 다시 고개를 들어 키티반장을 보았다. “일이 이상하게 되버려서 미안하다. 류인이한테는 내가 말해볼게. 아마.. 시간이 지나면 화도 좀 풀리겠지.” 그러겠지? 라는 강한 의문은 속으로 삼키고 조용히 말하자 키티반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고마워.. 너 정말 소문대로인 것 같아.” “소문?” “아.. 어.. 너.. 유명하잖아.” 내가? 하긴 뭐.. 류인이랑 같이 다니는 것 만으로도 유명하겠지. “그래, 류인이가 워낙 눈에 띄는 애니까. 같이 다니면..” “아냐!” 헉.. 너 왜 갑자기 소리 지르고 그러냐? 놀란 내가 눈살을 좀 찌푸리자 키티반장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너.. 얼굴도 잘생기고, 성격도 좋고, 운동도 잘하고 그리고 보기보다 싸움도 잘하고... 암튼 너 멋있다고 좋아하는 애들 많아.” 잠깐.. 그거 내 얘기 맞아? 한 류인이 아니라? 내 표정에 의심스럽다는게 들어 났는지 키티반장이 열심이 입을 놀려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류인이도 멋지긴 하지만... 걔는 좀 우리하고 동떨어진 사람 같은데, 넌 아니거든.. 이게 나쁜 뜻이 아니라..” 내가 멍하니 말을 듣고 있는데 반장의 말을 끊은 건 충격에서 깨어난 선호였다. “후후.. 반장, 반장..”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느끼한 이름 두번 부르기로 좌중을 얼린 선호는 나와 키티반장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내 너를 어여삐 여겨 말해주겠는데 넌 저 녀석이 만들어낸 고도의 이미지술에 넘어가버린 희생자 일뿐이야.” “야, 장 선..” “선호의 말이 백번 옳지. 암. 반장, 애들한테 잘 전해줘. 경민이 이 녀석은 말이야, 겉으로 보기엔 화도 잘 안내 듬직해 보이고, 신사처럼 예의도 바라 보이지만.. 실상은.. 오~노~ 얌채에 우리보다 더 잔머리 굴리고, 가끔 얼빵하기도 한 단순한 고딩이란 말이 쥐.” “임 병국, 내가 언제 ..” “쉬잇! 넌 조용히 해. 반장 눈 크게 뜨고 잘 봐. 이녀석이 잘생겼다고? 후훗.. 니 들은 속고 있는거야! 이 녀석의 외모는 안경빨이란 말이다 안경빨! 안경 벗기면 얼빵한 이녀석의 모습..” “이것들이..” 화를 참지 못하고 내가 벌떡 일어서 두 녀석을 노려보자 그제서야 선호와 병국이가 실실 웃으며 내 비위를 맞추려 들었다. “하핫.. 경민, 화내지 말라구 그래도 넌 류인이 개 같은 성질에 비하면 넌 세발의 피잖아.” “그래, 말은 우리가 이렇게 했지만 류인이의 그 지랄 맞은... 헉!” 갑자기 병국이가 말을 멈추는 바람에 난 어리둥절해졌다. “뭐야? 왜 그래?” 어라? 키티반장 넌 왜 땀 흘리며 게걸음을 치는 건데? 손을 들어 반장을 잡으려는 순간 바로 내 어깨 뒤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소리에 나마저 얼어버렸다. “계속해봐.” 헉.. 이 귀신같은 놈. 언제 온 거냐 한류인? 천천히 내 옆 의자를 빼 앉은 자신에게 온 반의 시선이 쏠리는걸 알았는지 류인이 녀석이 고개를 들어 쓰윽 쳐다봤다. 그러자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듯 모두 고개를 숙여버렸다. “너 분홍악마.” 류인이가 부르자 슬금슬금 도망치던 키티반장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류인이를 바라보았다. “네..네?”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마.” 대답도 못하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반장은 보지도 않고 바로 고개를 돌린 류인이는 아직까지 입 벌린 채 얼어있는 병국이와 선호를 보며 한쪽 입 꼬리를 살짝 올려 보였다. “아주 재미있던데 임.병.국., 장.선.호.” “하..핫.. 류..인아.. 저기..” 잔뜩 쫄아있는 녀석들이 샘통으로 느껴지는건 당연한 이치겠지? 혼자 흐뭇해 하고 있을 때, 나의 기쁨은 눈뜨고 못 보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게 확실시되는 류인이가 고개를 돌렸다. “근데 넌 너의 그 동성애적 사랑을 증명해 보일만한 준비는 된거냐?” 헉! 동성애적 사랑이라니! 너.. 너 여기서 그런 말을 하면... 아니나 다를까 선호와 병국이가 무슨 말인가라는 놀란 표정으로 나와 류인이를 번갈아 보았다. “아니 그건...” 뭐라 말해야 하나 고민하며 입을 떼었을 때 다행스럽게도 평소 전혀 도움되지 않던 일대구가 적절한 타이밍으로 교실에 들어왔다. 눈을 크게 뜨고 방정맞게 소릴 지르며. “뭐야? 장 선호! 니가 지금 왜 이 시간에 여기에 있는거냐!” 나에게서 기필코 동성애적 사랑이 무엇인지 듣겠다는 녀석들 때문에 3교시 끝나고 화단 뒤로 붙들려와 쭈그려 앉은 나는 녀석들에게 대충 어제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긴 불알달린 놈 치고 남자한테 키스받는거 기쁜놈은 없지.. 그래서 류인이가 그 난리친게 남자라서 그랬다?” 난 선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근데... 선호, 병국이 니들 표정이 좀 묘하다? “굉장히 싫어하던데. 이해는 하지만.. 너무 애들 잡는거 아닌가 싶다.” 나도 잡고 있지. 아주 피가 마른다고 젠장. 근데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둥 거리는 두 놈은 동조대신 다시 되묻기만 했다. “진짜로.. 남자가 싫대?” “어. 표정이 살벌했어. 근데 왜 그래? 당연한거잖아.” “아..” 선호는 뭔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고, 병국이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근데 그 말은 뭐야, 동성애적 사랑이니 뭐니.. 너 정말..” 이번엔 내가 ‘아’할 차례군. 제길.. 어떻게 말하지? 이 놈들한테도 거짓말 해야 하는 건가? “우리가 듣기에도 좀 의외다. 니가.. 남자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건.” 고개를 들은 병국이가 진지하게 말해왔다. “저기 실은..” 반쯤이라도 사실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선호가 말을 끊었다. “호모 포비아는 아니더라도, 류인이 남자를 싫어하는건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싫어한다고 한거 맞아?” “호모 포비아?” 처음 듣는 낮선 단어에 내가 묻자 두 녀석이 서로 처다 보곤 날 돌아보았다. “호모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사람 말야. 병적까진 아닌가?” 병국이의 설명에 난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당연한거 아냐?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있나? 라고 혀끝까지 밀려오던 말을 겨우 삼키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포비아 덩어리인 녀석이 또 하나의 포비아를 가지고 있다는 건가? 그거 심각한 건가? 고심하는 찰나 앉은 자세가 불편해 생각은 중단됐다. “야, 근데 우리..” 내가 두 녀석을 심각하게 부르자 바로 날 보았다. “꼭 이렇게 화단 뒤에 숨어서 얘기해야 하는거냐?” 앙상한 가지만 있는 개나리 화단 뒤, 건장한 세 놈이 여자처럼 쭈그리고 앉아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는 게 상당히 맘에 걸려 물었다. 결정적으로 앉아있다 해도 절대 우리의 등치는 가려지지 않는단 말이다! 내 말에 선호가 진지하게 답했다. “씨크릿 토킹은 원래 이런 곳에서 해야 폼 나.” 개뿔 폼은! 지금까지 한 얘기의 진지함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선호자식 때문에 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일어나. 쉬는 시간 다 끝나겠다.” 뒤돌아보지 않고 먼저 화단을 넘었는데 어쩐 일인지 병국이는 아직 그 자리에 쪼그려 앉은 자세로 심각하게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야! 종친다니까.” 내가 소리 지르자 병국이가 약간 슬픈 듯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울 듯이 중얼거렸다. “다리 저려...” 공포증 - 13 세 사람 모두 류인이의 눈치만 보며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으니 참으로 어이없는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뭘 잘못했기로 써니... 그래, 흠흠.. 물론 조금의 잘못은 했다. 하지만 그게 다 3학년 7반의 안위를 위해 저지른 일이었기에 후회는 없다. 단지.. 지금처럼 녀석에게 물을 떠다 주는 상황에 울화가 치밀 뿐이다. “먹어라.” 티 안 나게 물 컵을 콱 류인이 앞에 내려놓은 후 자리에 앉으려는데 선호가 물어왔다. “내 물은?” 아니 도대체 식판에 밥 받아올 때 물도 같이 떠오는게 정상 아냐? 어? 속에서 울화통이 터지려는 걸 참으며 다시 뒤돌아섰다. 단지 류인이에게만 물을 떠다 줄 만큼 쫄았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전혀 쫄 이유가 없는 선호에게는 물 컵을 힘차게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이런! 옷이 다 젖었구나?” 나의 고의적 행동에 부들부들 떠는 선호는 무시하고 아직까지 자신을 화단에 놔두고 가벼렸다고 삐져있는 병국이에게 예의상 물었다. “너도 물 필요하냐?” ‘정수기 물을 아예 부어주마’라는 이중의 의미를 용케 알아챘는지 병국이는 고개를 홱홱 저었다. 이제 겨우 자리에 앉아 밥 좀 먹어보려는 순간, 오늘 내 입술은 숟가락과의 조우가 없다는 듯 누군가의 부름으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어? 혹시 선배님은..” 류인이를 제외한 셋의 얼굴이 동시에 들어졌고, 마치 얼마 전 선우 현과의 만남을 떠올리게 하는 충격에 셋 모두 멍하니 입을 벌려야만 했다. 단지 충격이 정반대라는 게 아쉬울 뿐. 근데 지금 선배님이라고 했나? 응? 아저씨! 선호와 비슷한 두깨의 몸통, 류인이와 비슷한 키, 병국이 2배 크기의 머리... 그리고.. 우리 모두의 나이를 합한 것 같은 얼굴! 아무도 대답을 못하고 있었지만 전혀 상관없는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전 오늘 1학년 8반으로 새로 전학 온 최 이슬이라고 해요. 선배님들.. 헤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자신이 후배라고 우기는(분명 명찰은 1학년 이지만 조작일 가능성이 강력히 의심된다) 저 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외모와 매치가 안됐기 때문에 시각과 청각에서 받아들이는 상이한 자료를 분석하느라 뇌만 고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함이 최 이슬? 참이슬이 아니고? 그래, 어쩔 수 없이 이 상황에서 누군가의 작명센스를 탓해야하는 내 심정을 이해하기 바란다. 허나 17년 전(확실하다면) 여아도 아닌 남아에게 이슬이란 이름은 도통 그 아버님이 뛰어난 혜안을 가지고 계셔서 훗날 한국 알콜계의 거목이 될 브랜드의 이름을 도용한 것이라고 밖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름이지 않은가. 그때 제일먼저 정신 차린 선호가 정중히 물었다. “저.. 1학년 새로 온 선생님이시라구요?” 역시 선호도 나와 똑같은 상황에 고생을 했었는지, 결국 시각을 믿어 질문을 한 듯 보였다. 허나.. “아하하... 농담이 참 재미있으세요? 헤헤.. ” 라고 상대방에서 응수하니.. 확실히 1학년인 모양인데... 어이하여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시는 겁니까? 싱긋. 눈이 안 보일정도로 웃음을 지어 만들며 보이지만 더 음침해 보이는 효과를 가져온 그가 나에게 사근 사근 물었다. “이 경민 선배님 맞죠? 그죠?” “아... 예...” “와~~ 정말 소문대로 귀여우시네요~” 굳이 뭐 씹은 표정을 하고 있지 않아도 너희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선호, 병국. “여기 와서 선배 얘기 듣는 순간 딱 내 타입이구나라는 생각이 확! 와 닿았었는데 만나보니 와... 너무 너무 좋아요. 헤헤..” “그..그러신가요..” “아이~ 말 놓으세요. 선배님.” 그게 저도 자동으로 나오는 거라서요.. 라는 말은 삼키고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근데 지금 뭐라고 한거지? 내가 누구 타입? 이제 완전히 입이 벌어져 다물 줄 모르는 선호와 병국이의 웃긴 모습을 놀리려면 지금이 적기였지만 남 말 할 처지가 아니었다. “저.. 죄송한데... 누굴 좋아하신다구요?” 병국이가 어지러운지 머리를 흔들며 물었다. 그러자 그 1학년님은 예의 그 음침한 눈웃음을 날리며 날 수줍게 바라보았다. “훗.. 경민 선배님이요. 근데 근데... 경민 형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처음에는 소름 돋았던 말투가 자꾸 들으니 익숙해 지려하는 불상사가 벌어지려하자 난 얼른 대화를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아... 예.. 근데..” “차암~ 형은 말 놓으세요. 그래야 저도 말 놓져. 푸훗..” 아니.. 그쪽은 그냥 말 놓으셔도 괜찮거든요. 그때 식당 입구가 유난히 웅성거렸고,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큰 소리로 손을 흔들며 외쳤다. “어? 현아~~” 식당 입구에 들어서던 선우 현과 순남이는 1학년께서 크게 부르자 멈칫하는게 보였다. 근데 어라? 선우 현.. 니가 그런 당황스런 표정을 짓는걸 보니 상당히 흥미롭구나. 하긴 척 보기에도 이 이슬군은 남을 긴장시키는데 타고난 재질이 있는 듯 했다. “오늘 사귄 친구한테 가봐야 되서요. 그럼 나중에 봐요 경민 혀엉~” 저쪽은 전혀 친구분위기가 아닌 것 같은데 신나게 온 식당을 울리고 뛰어가는 1학년님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동상처럼 앉아만 있었다. 휘~잉하고 바람소리가 지나가는 게 느껴졌을 무렵 그 동안 열심히 밥 먹던 류인이 녀석이 물을 마시며 물었다. “뭐 하냐 니들?” “한 류인..” 병국이가 심각하게 류인이를 불렀다. “왜?” “니가 아무리 무감각대왕이라지만 현 상황을 보며 무언가 오는 느낌은 없냐?” 병국이 말에 이슬이가 사라진 곳을 흘깃 보더니 류인이가 되물었다. “쟤 말하는 거야?” “그래!” 그러자 피식 웃더니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한 단어를 내뱉고야 말았다. “귀여운데.” 그래... 내 박수를 쳐주마. 너의 그 우주초월 미적감각을 범인이 우리가 어찌 이해하겠냐! 어? “니가 왜 여태껏 애인이 없었는지 알려주는 한마디구나. 뭐 귀여워? 니 눈에는 진짜 저...가 귀여워 보이는 거냐?” 차마 이슬이란 이름은 말 못하겠는지 선호가 흥분하며 따졌지만 류인이는 거만하게 대답했다. “응.” “하... 야.. 저게 귀여운 거면.. 난 정말 저 얼굴 딱 보는 순간 ‘어르신!’ 할 뻔 했다니까? 한 20년 꿀은 고등학생 아냐? 안 그렇게 생각해.” 물론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선호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지금 그것 때문에 놀란게 아니었다. 우리의 표정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선호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야? 니들 왜 그래?” “선호야..” 류인이가 답지 않게 감정을 들어내며 부르자 선호가 눈을 크게 떴다. “응?” “솔직히 말해라.” “뭘?” “너 전생에 떡쇠였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는거지? 씨발.. 인간적으로 너 너무 자연스러운 거 아니냐? 그 ‘어르신’” 가끔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 정곡을 찔러 말하는 류인이의 말발이 빛을 발하는 순간 선호는 분노했다. 솔직히 말해 그 이슬이라는 자칭 1학년께서 날 좋아한다고 했을 때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글쎄,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까? 어쨌든 나에게 있어서 동성애란 가끔 류인이에게 고백하는 이상한 놈들의 웃긴 장면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나에게 현실로, 그리고 류인이에게 말한 내 변명을 스스로 인식해야 할 순간이 오리라고는 .. 알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등교할 때까지만 해도 이슬이란 인물은 그저 인간게놈이 풀어야할 인체의 미스테리정도 였다. 일단 류인이 일로 머리가 복잡했던 난 그쪽으로 신경 쓸 새가 없었으니까. 교문에 가까이 왔을 무렵 조금 늦었다는 걸 알고 걸음을 빨리하는데 교문 바로 앞에 딱 보기에도 부자라는 말이 절로 나올 차 한대가 스르륵 멈춰 섰다. 학교에 저런 차를 타고 다니다니 도대체 누구.. 아.. 국회의원과 전자회사사장 아드님이시군. “씨발, 꼭 저렇게 티를 내며 교문 앞에 내려야 하냐?”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더라도 주인공을 알수 있게 해주었다. 아마 다시 환생해도 알아들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럼 교실 앞에서 내리리?” 내 말에 민섭이는 살짝 내 뒤통수를 쳤다. “새꺄, 부럽냐?” 어이없다는 듯 녀석을 쳐다보다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다 이쪽을 보고 있던 선우 윤 과 눈이 마주쳤다. 근데.. 얼굴이 참 화려하구나. “저 녀석 요새 밤마다 활약이 장난이이더라. 어제도 대낮부터 학교 빠지고 나가서 한탕했다던데.” 내 시선을 알았는지 옆에서 민섭이가 조용히 설명했다. “이 일대에서 쌈 좀 하는 놈들은 다 붙고 다닌다고 하더라고. 조만간 한일공고랑도 붙을 것 같던데.” 난 살짝 눈을 찌푸렸다. 한일 공고? 거기 짱은.. “혹시 거기 짱 아직도 김 세현이야?” “어? 너 김 세현 알아?” “그냥 좀.” 내 말에 민섭이는 놀랐다는 표정을 짓더니 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 자식이 아직 짱이지. 근데 말야 정말 소문처럼 그놈 게..” “안녕하세요. 선배님.” 뒤에 삐딱하게 서있는 선우 윤을 대동하고 내 앞에 다가와 인사를 하는 선우 현 때문에 민섭이의 뒷말은 듣질 못했다. “너만 안보면 안녕하지.” 내 무뚝뚝한 대답에 소리 없이 웃던 선우 현이 고개를 숙이고는 뒤돌아서며 말했다. “아, 이따 5교시 끝나고 지난번 그 장소에서 뵈요. 선배.” “난 5교시 끝나고도 안녕하고 싶은데.” “훗.. 어쩌나.. 내 얼굴 보러 나오시게 될텐데..” 선우 현은 뒷말을 묘하게 흐리며 몸을 완전히 뒤돌아 걸어갔고, 그 뒤를 이틀 전 내가 했던 인사를 돌려주듯이 나한테 가운데 손가락들 들어올리고 몸을 돌리는 선우 윤이 있었다. 물론 나도 선배 된 입장으로 예의를 차려 재빨리 양 손을 들어올려 맞대응을 해줬지만 말이다. 또 녀석의 눈이 휘는 것 같았지만 금새 몸을 돌려버려 볼 수는 없었다. “너 도대체 저 녀석들하고 무슨 관계야?” 표정을 굳히며 묻는 민섭이의 어깨를 한번 툭 쳐주며 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선 후배 사이지.” 근데 또 뭣 땜에 날 보자는 거지? 미친.. 설마 또 내가 바보같이 나갈꺼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도 열 받아 꼭지 돌면 꽤 싸우긴 하지만 선우 윤 같은 녀석과 상대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세현이.. 중학교 동창이긴 하지만 연락을 안한지 꽤 됬는데.. 조만간 붙을 꺼라는 민섭이의 말에 찝찝한 마음이 들어 교실로 들어가면 조심하라는 문자라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아침부터 찾아온 1학년 어르신 때문에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혀~엉. 이거 드세요. 아침은 원래 잘 먹어야 해요. 에휴.. 형 살 좀 더 쪄야겠다.” 그렇지 않아도 류인이 때문에 요새 들어 조용했던 교실은 내 책상 옆에 쭈그리고 앉아 혀~엉을 외쳐대는 어르신 때문에 아예 숨소리마저 잃어버렸다. “저..” 류인이 녀석과 12년을 붙어 다닌 통에 나 역시 꽤나 포커페이스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지금 느껴지는 당혹감을 감출정도로 수양을 쌓은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나도 내 얼굴에 핏기가 빠져 나간게 느껴지니까. “왜요? 왜요? 혀~엉?” 비위 안 좋은 병국이의 등이 움찔하는게 보였고, 반대로 어떤 비위에도 강한 선호는 뒤돌아 앉아 흥미로운 눈으로 대놓고 어르신을 보고 있었다. “이제 교실로 돌아가야 하지 안... 니?” 존대 말이 튀어나오려는 본능을 억누르며 겨우 묻자 예의 그 음침해 보이는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괜찮아요. 형 빵 먹는 거 보구 갈래요~” “아.. 저... 일단.. 나는 아침도 집에서 먹..고 왔고, 또.. 일대구, 그러니까 우리 담임은 좀 일찍 교실에 오는 편이라... 알겠지만 우린 고3이고..” “에이.. 더 있고 싶은데..” 라며 울상을 짓는 표정에 힐끔 힐끔 뒤 돌아 보던 반 아이 몇 명이 경기를 일으켰다. “그럼 1교시 끝나고 다시 올께요 혀~엉.” 발랄하게 손을 흔들며 나가는 어르신을 보는 내 머릿속에는 ‘1교시 끝나고..’라는 녀석의 말만 암울하게 되풀이되어 울리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자고 있던 류인이가 기다렸다는 듯 쓰윽 일어나더니 중얼거렸다. “그럼 그 빵 나줘.” 내 걱정거리의 99%를 차지하고 있던 동성애적 사랑 증명이 완전히 잊혀질 만큼 매 교시마다 찾아와 대 활약을 해대는 어른신 때문에 점심시간에는 밥도 거른 채 입학이례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아니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던 기도실(꼴에 미션스쿨이다)에 숨어들어야만 했다. 물론 내 운이 언제나 그렇듯 대마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교목선생님한테 딱 걸려 점심시간 끝날 때까지 두 손 맞잡고 회개의 기도를 올려야 했지만 말이다. “야, 너 어디 갔다 이제와? 우리의 최 이슬 군께서 지금까지 걱정하다 가셨다.” 열정적인 기도의 여파로 쾡해진 눈을 하고 선호를 멍하니 쳐다보니 세 놈이 상당히 놀란 듯 했다. “너 무슨 일이야?” 어르신이 주고 간 빵 5개를 게 눈 감추듯 먹고 역시 귀여운 놈이야라는 발언을 해 좌중을 또 한번 경악시켰던 류인이 놈이 날카롭게 물었다. “종교의 길은 역시 험난해...” 심오한 나의 말에 무슨 개가 짖냐는 듯 치부해버린 놈들은 걱정이 사라진 얼굴로 모두 돌아 앉아 버렸다. 내 저놈들을 친구라고.. 살아온 인생을 한탄할 때 갑자기 앞문이 쾅 열리더니 들어와야 할 국사선생님은 안보이고 일명 개소주라 불리 우는 학주가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이 새끼들 모두 동작 그만.” 갑작스런 학주의 방문에 모두 어안이 벙벙해있는데 그가 애들을 한번 노려보더니 소리쳤다. “씹새끼들 가방은 놔두고 모두 복도로 나가 있어!” 웬만해선 잘 건들지 않는 고3교실에 난입해 갑작스런 소지품 검사라니.. 속으론 투덜댔지만 개소주의 성질을 알기에 모두들 얌전히 복도로 나가 섰다. 그리고 얼마 뒤 뒷문을 통해 나온 그의 손에는 가방 하나가 들려져 있었다. “이거 주인 누구야!!” 나는 추리력은 별로 좋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학주가 가방을 흔들어 대는 모습을 보고 선우 현이 떠오지 않을 만큼 나쁘지도 않다. 아침에 했던 말.. 이런거였냐? 표정이 굳어진 녀석들을 뒤로하고 난 입을 열었다. “접니다.” 공포증 - 14 “씨발.. 개소주..” 전에 옥상에서 맞아 터진 입안이 개소주가 출석부로 날리는 바람에 다시 터져버린 것 같았다. 선우 현이 말했던 장소로 향하면서 바닥에 입에 고였던 핏물을 뱉어냈다. 아픈 것 보다도 입안에서 진동하는 피 비린내로 기분이 나빴다. 그대로 교무실로 질질 끌려가 일단 맞기부터 하고 있는데 개소주 옆에 서있는 비리한 일학년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눈에 익다 싶었는데, 전에 나에게 메시지를 전해주러 왔던 비실이였다. 개소주는 그 애에게 이 자식이 그 놈 맞냐고 물었고, 그 일학년은 심하게 떨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건 잊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맞다는 건지란 의문은 내 가방 속에서 쏟아져 나온 엄청난(?) 양의 담배로 인해 풀렸다. 그리고 단번에 난 일학년에게 담배를 강.매.하는 상업정신이 투철한 선배로 낙점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우습게도 난 비 흡연자 인데 말이다. 능력도 좋지, 언제 남의 가방에 담배를 넣어놨을까? 이 유치찬란한 음모극을 평소라면 어이없는 웃음 한방으로 넘기겠지만 입에 개 거품을 물며 출석부를 휘두르는 개소주의 현란한 동작에 여유 같은 건 이미 물 건너 간지 오래였다. 다행히 교무실에 있던 2학년 때 담임이 놀라 개소주를 말리는 바람에 겨우 산송장은 면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의 중재 하에 1학년 녀석과 나의 대질신문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뻔히 내 가방에서 담배가 나온 상태였고 그냥 보기에도 얼굴에 피해자라고 써있는 녀석과의 대화는 별 도움이 안 되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입에서 천천히 말이 나왔다. “언제.. 날 언제 본건데?” 그때까지도 점심시간의 그 기도가 날 살려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조..좀 전에요... 바.. 밥 먹고... 저한테.. 이거 사라고...” Mr. 사투리라 불리 우는 2학년 때 담임이 진짜냐는 눈으로 날 쳐다보았고, 난 그에게 피 때문에 빨갛게 변했을 이빨을 들어내며 살짝 웃어주었다. “교목 선생님 불러다 주세요.” 만약 그 애가 점심시간이 아닌 다른 때를 말했으면 어쨌을까? 아니 내가 기도실에서 교목에게 잡히지 않았다면... 웃음이 나왔다. 악의 구원을 외치던 교목의 말처럼 정말 구원받은 기분이었으니까. 할렐루야라고 외쳐야 하나? 바로 눈앞에 보이는 모퉁이 돌면 선우 현이 또 떼거지로 애들 데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아마 이번엔 선우 윤이 저번에 말한 경고처럼 놀아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피식.. 뭐.. 될 때로 되라지. 한걸음 더 내딛었다. 그리고 몸을 틀어 그 공터로 나가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선우 현과 마주보며, 내게 등을 보이고 서있는 녀석은.. 꽤나 익숙한 모습이었으니까. 12년간이나 지겹게 봐와온. “... 하지만.. 할 수 있잖아요? 난 봐야 되요. 난.. 선배가.. 완벽해지는 걸 볼꺼에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선우 현의 표정은 상당히 애처러워 보였다. 희고 깨끗한 얼굴이 울상으로 찌그러져 있었지만 오히려 더 아름다워 보였다. 진짜? 아니.. 거짓말. 지금 내 눈에는 어린애의 투정밖에 보이질 않는다. 또 그 얘기인가? 완벽?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분명 무표정일께 뻔한 류인이를 그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선우 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날 구원해.” 구원.. 도대체 뭘까? 선우 현의 공포는. 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겠지. 단지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건 샘플일 뿐이다. 어떤 공포라도, 자신의 어떤 결함이라도 지지 않는 그 무엇.. 선우 현의 눈앞에 서있는 저 건방진 샘플 말이다. “선배. 그러기 위해서 난 .. 선배를 몰아 세울 꺼에요. 완벽한 선배에게 그런 큰 구멍은 어울리지 않아요. 왜 대답하지 않는 거죠? 정말 인정하지 않는 거에요? 아닐 거야.. ” 선우 현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얘기지? 언뜻 그가 말하는 그 큰 구멍이 류인이의 공포증이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이 스치고 갔다. “난 속지 않아요. 내가 본 선배는 두려움 자체도 받아들이니까.. 아마 처음부터 알고 있었겠죠. 근데 왜 망설일까? 그냥 yes or no 로만 답하면 되잖아요? 뭐야.. 선배. 정말로 내가 어떻게 할까 무서운 거에요? 선배의 그..” “그만 좀 쨍알거려.” 꽤나 지루하다는 듯한 류인이의 낮은 목소리가 선우현의 말을 막았다. “언젠간 알게 될꺼에요.” 난 눈을 찌푸렸다. 저 두사람의 대화.. 전혀 알아듣질 못하겠으니까. 내가 모르는 류인이의 큰 비밀이 있었던가? 아니.. 비밀 따위는 아예 가지고 있지도 않은 놈인데.. 선우현이 말하는 건 도대체 뭐지? “상관마.” “싫어요! 선배를 몰아세울 꺼라고 했죠? 그런 큰 장애물이 있을지 전혀 예상 못했지만 상관없어요. 선배는... 뭐든 해낼테니까. 내가... 자유롭게 해줄께요. 완벽해 지도..” “귀찮아.” 류인이의 표정에서 뭘 본걸까? 선우 현의 눈이 독기를 품기 시작했다. “자꾸 날 실망시키지 마세요. 간단한 문제의 대답도 안 해 주시고... 만약..” 흠칫! 살짝 그 까만 눈동자만 돌려 날 주시하는 선우 현의 눈과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뒷걸음을 칠 뻔했다. 낚시줄에 걸린 듯 살짝 내리깔은 눈으로 날 쳐다보며 선우 현이 중얼거렸다. “선배의 절.친.한. 친구인 경민 선배가.. 오늘 당한 일이 모두 류인선배 때문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류인선배가 나한테 간단한 대답만 하면 피해 보지 않았을텐데.. 말이죠. 아.. 제가 요구도 아닌 단순한 질문에 답을 안하면 경민선배에게 해가 갈꺼라고 충고해 드린 걸 설마 잊진 않으셨겠죠? 흠.. 근데 경민 선배 어떻게 됐더라? 학생주임 선생님한테 불려갔다면서요? 휴.. 그 선배도 참 안됐지. 그냥 간단히 응, 아니만 하면 되는데 친.구.가 피해 입는 쪽을 택하다니.” 싱긋. 류인이를 보며 웃고 있었지만 날 향한 웃음이란 걸 충분히 알수 있었다. 그런거였나? 너무 나한테 집착을 보이는 거 아닌가 의심했다. 단순히 류인이 친구라 당하는 괴롭힘보다 무언가가 더 있을 꺼라고 생각했는데.. 그런거냐 한류인? 니가 대답을 안 해줘서 내가 대신 힘들어야 하는 거냐? 씁쓸했다. 아직 남아있는 피 맛도 모를 만큼 목이 타들 것만 같았다. 그래.. 뭐 너한테는 중요한 질문이었나 보지. 친구는 생각나지도 않을 만큼.. “시끄러워.” 한참 만에 류인이가 대답을 했다. 여전히 웃음을 풀고 있지 않던 선우 현이 류인이를 향해 고개를 더 들어올리며 밝게 말했다. “흠.. 시끄럽다는데요? 경.민. 선배.” 아.. 질문을 할 땐 말이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는 거라고. 아니 미안, 실은 나도 질문자인 너의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으니 할말은 없구나. 모델처럼 쫙 빠진 녀석의 날씬한 등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리고 말없이 천천히 뒤 돌아 서는 류인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르겠다. 화가 날것도 같은데.. 솔직히 슬픈 마음이 더 앞서는 자신이 유치해서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난... 너에게 뭘까? 평소와 다름없는 녀석의 얼굴을 보며 전에 뭍어 두었던 질문을 꺼냈다.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난 너에게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닌거냐? 소리쳐 물었다. 읽어봐. 입으로는 내뱉지 못하니까 니가 알아서 읽어. 그리고 대답 좀 해 봐라. 근데 말야, 나도 니가 소리 내지 않고 말하는 걸 들을 수 있을까? 니 눈... 좀 다르다고 느끼는 그 눈.. 내가 읽어야 하는 거냐? “너..” 녀석의 입이 작게 벌어져 겨우 소리를 내었다. 기다렸지만 다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선우 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축하한다.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대신..” 천천히 나에게서 눈을 돌려 선우 현을 내려다 봤다. “너도 대답해.” 그리고 몸을 돌려 약간 당황한 선우 현을 끌고 건물 쪽으로 사라졌다. 아.. 머리 아프군. 여기서 멍하니 완전히 없어진 두 녀석의 빈자리를 보고 뭐하는 거냐? 치사가 하늘을 찌른다는 선호의 말처럼 자기밖에 모르는 저 녀석을 이미 알고 있는데, 뭘 또 실망하는 건지. 아니 실망한건 나야. 상대방의 슬픔을 등에 짊어지는 게 친구라지? 나는 어디까지 짊어질수 있는 걸까? 아픈 머리를 겨우 돌려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런데 내 바로 몇 미터 뒤, 오늘 하루 나를 꽤나 쫓아다녀 준 1학년이 멍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도대체 1학년 8반은 단체로 땡땡이 친거냐? “그.. 그.. 얼굴..” 입을 반쯤 벌린 상태로 상당히 놀랐는지 눈을 깜박거리며 내 얼굴을 가리켰다. 아.. 개소주의 작품.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녀석을 보자.. 억눌러왔던 이기심이 솟아올라 나도 모르게 차갑게 내뱉어 버렸다. “가라.” 그리고 그대로 지나치려는데 너무 의외의 말이 그에 입에서 나왔다. “미안해요... 형.” 미안해? 니가 왜? 난 걸음을 멈추고 이슬이를 쳐다보았다. 기분이 정말 엿 같았다. 그런 말은 너한테서 듣고 싶지 않아. 니가 아니야.. 그 말을 듣고 싶은 사람은 말야.. 제길. “뭐가 미안한데? 내가 이렇게 다친거? 어떤 놈이 지 편하자고 친구 나몰라라 한거? 아.. 설명 한마디 없이 재수 없는 놈과 사라진거? 씨발.. 니가 뭐가 미안한데!!!!” 헉.. 헉... 목이 터저라 외친 후 거친 숨을 내쉬며 이게 아니야, 너 답지 않아 라고 ..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나도 알아. 그리고 화도 내지 않고 뭔가 안쓰럽다는 얼굴로 날 보는 이슬이한테 미안해해야 하는 것도 안다고.. 근데 그게 안돼. “형..” “너 가라. 얼굴 보기 싫다.” 숨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말했다. 그대로 돌아 서려는데 갑자기 이슬이가 손을 뻗어 내 옷깃을 잡았다. 그리고.. “미안해요..” 지끈.. “니가.. 왜 미안한데?” 하지만 녀석은 입을 일자로 꾹 다문 채 날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다시 돌아서 가려 하자 잡은 옷깃을 살짝 끌어 당겼다. “형.. 좋아하니까요.” “뭐?” “좋아한다구요.” 너의 그 좋아한다는 단순한 like가 아니란 말야? 녀석의 눈을 보며 진실을 알려했다. 뭐야 너.. “너.. 호모야?”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길.. 난 무의식적으로 녀석이 잡고 있던 손을 쳐냈다. 어떻게 그걸 당당히 말하는 거지? 어? 너 비정상이잖아,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거라고! 아주 이기적이었던 그 순간의 나는 겉으로 들어 나는 내 표정 따위를 신경 쓰지 못했다. 평소의 생각하던 호모 그대로 .. 역.겨.워하는 내 추악한 마음이 얼굴에 들어 났다. 그래서 멍하니 나를 보고 힘겹게 웃으며 사라지는 이슬이를 보면서도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제발 이 엿 같은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바랬을 뿐. 수업이 다 끝나고도 돌아오지 않는 류인이를 걱정하는 선호와 병국이를 뒤로하고 그대로 집으로 왔다. 얻어터진 내 얼굴을 보고 또 싸웠냐며 어이없어 하시는 엄마의 잔소리를 한귀로 흘리며 평상시처럼 옷 갈아 입고, 씻고, 밥 먹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일 제출할 수학숙제를 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하아..” 고개를 들어 몇 년 전 불장난 하다 그을린 벽지를 가리기 걸어 놓은 제임스 딘 사진을 보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은.. 체질상 안 맞아. 그런데 저사람은 좋겠군. 아무도 없는 길 한복판을 바람을 맞으며 두손은 주머니에 꽂은 채 입에 담배를 문.. 세상 사는게 지겹다는 듯 옆을 바라보며 걷는 그는 외로워 보였지만 말을 붙일 수는 없었다. 날 내버려둬.. 온몸으로 얘기하고 있으니까. 부러워. 나도 저렇게 되고 싶어... 하지만 그럴려면 당당해 져야한다는 것도 안다. 어떻게? 내 안의 이기심과 추악함을 인정하는 것부터. 덮어둔다고 모든게 해결되진 않겠지.. 류인이와 선우 현의 관계가 어떻게 되건 녀석이 간섭받고 싶지 않다면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한다는 것도 인정하자. 설사 그래서 내가 선우 윤과 맞닥뜨린다 해도.. 선우 윤? “앗! 세현이!” 난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열고 세현이 번호를 급하게 찾아 눌렀다. 경고해 줘야 할텐데.. 녀석은 니 생각보다 훨씬 강한놈이라고. 신호가 오래간다 싶을 때 수화기 넘어 처음 듣는 중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흑.. 여보세요?” 누구지? “김 세현 전화 아닌가요?” “흑... 세현이.. 흑흑.. 우리 세현이..” 난 갑자기 우는 목소리에 어이가 없어 귀에서 떼고 잠시 전화를 노려봤다. 뭐야 이 여자.. 혹은 남자 --; “어떡해요.. 우리 세현이 그 눈깔귀신하고.. 흑흑..” 눈깔귀신? 바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 얼른 물었다. “선우 윤? xx고의 선우 윤하고 만난거야 세현이?” “몰라요.. 이름 따위.. 암튼 그 학교 맞아요.. 흑 근데 세현이가 둘이서만 맞짱 뜬다고..” “씨발.. 어디로 갔어!” 운동화를 제대로 신을 새도 없이 미친 듯이 달려 근처의 유명한 싸움의 전당, 곧 문화 유적지로 지정된다는 헛소문이 도는 모 초등학교 근처에 위치한 조그만 공원으로 갔다. 그리고 익숙하게 한 장소를 향해 뛰었다. 익숙한 이유는 중 3때 세현이가 왠지 모르지만 류인이와 줄기차게 싸우던 장소가 바로 여기였으니까. 어두운 공원 안, 드문드문 서있는 가로등만 있고 11시가 넘어서 그런지 운동하는 사람들도 뜸한 듯 고요했다. 난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어딨지? 내가 너무 늦은건가? 그러다 몇 년 전까지 매점으로 이용되던 작은 1층짜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옆에 서있는 가로등은 불이 나간건지 너무 어둠 속에 있어서 건물의 형체를 눈에 익히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이상한 기분에 천천히 다가가서는 문도 없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이 달이 떠 있어 그리 어둡지 않았지만 안을 살피느라 잠시 주춤거렸다. 그때 희미하게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눈을 돌려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누군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모양이.. 설마.. 난 빠르게 다가가 이름을 부르려 했다. “세..” 아니야.. 세현이가. 그리고 저.. 눈은.. 그렇게 놀라 굳어 버린 나를 천천히 그가 고개를 들어 응시했다. 스위치가 나가버린 듯.. 나를 봐도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은 선우 윤의 눈을 보며 머릿속엔 온통 왜란 단어만 떠돌았다. 세현이는 어딨지? 싸움은? 널 작동시키는 스위치는 왜 망가져 버린거지? “선우 윤.. 너..” 한발자국 그에게 더 다가가 몸을 숙이려는데 바지 속에 있던 핸드폰이 울려댔다. “여보세요?” “어디야?” 한 류인? 난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굳히며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벌리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벽에 기대어 앉아있던 선우 윤의 상체가 자신의 반쯤 세워져 있는 무릎 쪽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야! 선우 윤!” 전화를 귀에서 떼어내고 서둘러 녀석의 팔을 잡자 무언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는게 들렸다. “..마..” 뭐? 그의 쓰러지려는 상체를 붙잡고 옆에 같이 앉아버린 나는 그의 말을 듣기위해 더 다가가려다 한손에 들린 전화가 생각나 얼른 다시 귀에 가져다 댔다. “나 지금...” 하지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폴더를 닫아 주머니에 넣은 후 나머지 손도 선우윤의 상체를 잡으려다 그대로 몸을 굳혀야했다. 또다시 작게 중얼거리는 그의 말.. “..가지 마.. 가..지 마..” 속삭이듯 가지마를 되 뇌이는 선우 윤의 손을 잡은 건 분명 평상시와 너무 다른 그의 이질적인 모습에 내 사고가 반쯤 마비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쩜 내 어린 동생들을 보듯이 약해보이는 녀석을 잡아줘야 겠다는 본능도 한 몫 했으리라. 녀석의 차가운 손을 끌어 잡자 선우 윤이 자연스럽게 내 가슴 쪽으로 머리를 숙였다. 아무것도 담겨져 있지 않은 인형처럼 변해버린 녀석의 등을 한손으로 덮어주며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기더라도 일단은 도와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하고 선우 현.. 도대체 내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거지? 응? 단순히 악인으로 치부해야 쉬울 녀석들이 너무도 약한 모습을 하나씩 보이다니 이건 정말 불공평 하다고. 알아 듣냐? “후..” 조용히 한숨을 쉬며 조금씩 온기가 돌아오는 녀석의 손을 느꼈다. 아직까지 어린아이처럼 내 품에서 숨을 쉬는 녀석을 보며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야겠다고 생각해 입을 벌리려는데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건물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를 보기 위해 내가 고개를 돌리자 길다란 형체만 보이는 그가 걸음을 멈췄다. 나를 알아봤는지 잠시 그대로 숨을 고르던 그가 냉정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떨.어.져.” “너..” 뭐야 저 녀석? 난 천천히 움직이는 그로 인해 창을 가리고 서서 잘 보이지 않았던 얼굴이 들어 나자 어이가 없어 말이 안나왔다. 한 류인 너.. 아니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안거야? 그리고 전화 끊은지가 언젠데 이렇게 빨리... “떨어지라고 했다. 이경민!” 난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표정을 읽기 위해 애썼다. 뭐 때문에 저렇게 화가 난거지? “기다려봐. 지금 이 녀석.. 어어.. 야!” 갑자기 선우 윤의 뒷덜미를 한손으로 잡아 그대로 벽에 던져 버리는 괴물 같은 류인이의 행동으로 인해 나까지 딸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니 그래야 했는데 어느새 내 팔을 잡고 있는 녀석 덕분에 바닥에 키스하는 건 간신히 면했다. “야! 한 류인! 너 왜 갑자기..” 힘 자랑 하고 난리야라는 뒷말은 나를 노려보고 있는 녀석에게 놀라 나오질 못했다. 그래 솔직히 좀 쫄았다. 저렇게 화난 거 정말 별로 보지 못했으니까. 뒷머리가 쭈삣 설 만큼. 내가 말을 멈추고 녀석을 멀뚱히 쳐다보자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날 일으켜 세우더니 몸을 돌려 바닥에 구겨져 있는 선우 윤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내가 어 하는 사이 녀석의 몸을 마치 짐짝처럼 끌고 나가버렸다. 도대체 뭐야!! 차마 말릴 새도 없이 빠르게 선우 윤을 끌고 차도가 있는 공원 입구까지 오더니 갑자기 멱살을 잡고 있지 않던 한 손을 올려 그대로 늘어져 있는 녀석의 배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헉..” 고통스러운지 배를 감싸 앉고 바닥으로 무너지는 선우 윤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며 류인이가 낮게 중얼거렸다. “건들지 마.” “크큭..” 여전히 배를 두 손으로 감싸 앉은 채인 선우 윤의 입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들리고 천천히 녀석의 고개가 들리더니 류인이와 시선을 맞췄다. 다시 스위치가 작동된 눈으로. “현이의 말은.. 언제나 옳아.. 녀석이 그랬거든. 니가 우리에게 해답을 줄꺼라고. 정말 대단해 한 류인.. 어떻게.. 한번에 알아 낸거지? 현이도 나도.” “알거 없어.” “정말.. 나도 기대해 볼까? 단번에 알아냈으니 해답을 줄 수 있을지...” 옆에 서서 멍하니 녀석들의 대화를 듣는 지금.. 저 두 사람이 오늘 처음 본 사람처럼 낮 설어 보였다. 내가 해석 할 수 없는 이야기들.. 낮에 선우 현과의 대화처럼 나는 파고들 수 없는. 그런데도 묘하게.. 그 대화들은 내 신경 한 구석을 자극하고 있었다. 내가 알아야할 무언가가 꼭 있는 것처럼. 마치 대화의 중요한 한 조각에.. 내 자리가 있는 것 같이. 선우 윤의 말을 듣기만 하고 더 이상 대답을 않던 류인이가 갑자기 한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바로 옆 길가에 천천히 택시 한대가 멈춰 섰다. 한 류인.. 너 사시냐? 어떻게 선우 윤과 눈을 마주친 상황에서 택시를 잡을 수 있단 말이냐 이 괴물아! “꺼져.” 차갑게 한 단어를 내뱉으며 다시 선우 윤의 멱살을 잡아 끌어올린 류인이는 택시 뒷문을 열고 녀석의 몸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문이 닫히려는데 그 사이로 나와 선우 윤의 눈이 마주쳤다.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듯한 눈으로 날 보던 그가 중얼 거렸다. “손..” 문을 닫으려던 류인이도 멈칫하는 게 보였다. 손? “따듯해..” 살짝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그대로 사라지는 택시를 바라보며 겨우 그 말이 내 손을 의미한다는 걸 알았다. “이... 경민.” 고개를 돌리자 복잡한 눈으로 류인이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 “얘기... 하자.” 공포증 - 15 얘기하자고 말한 놈은 옆에 앉아 몇 십 분이 넘게 앞만 야리고 있었다. 사람 없는 공원안쪽으로 끌고 와 자리에 앉히길래, 어디 한번 들어보자는 심정으로 노려봤지만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문 녀석만 있는 것이다. 나도 자존심이란게 있지 니 놈이 말하기 전에 내가 입을 열 것 같으냐란 심정으로 두 주먹을 몰래 불끈 쥐었으나 불행히도 주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늘을 향해 서있는 팔의 털들과 엠보싱화 하는 스킨,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맞춰 떨려주는 근육들이 방해공작을 피고 있었다. 제길.. 아까 바보같이 급하게 나오느라고 반팔에 추리닝바지만 입고 나온 게 이렇게 사나이 자존심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 오리라곤 정녕 몰랐다. 아니 4월이면 봄 아니야? 응? 왜 이리 추운거야! 동장군 가출했어? 얼른 집에나 갈것이지. “야.”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을 끌어 당겨 끙 하고 근육에 힘을 팍 준 다음 전혀 안 추운 척 녀석을 나직하게 불렀다. 그런데 어라? 이 녀석.. 내 말에 빠르게 고개를 돌리는 폼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보이는구나 이 시펄 놈아. 뭐야, 결국 지 녀석이 먼저 얘기 하자고 했으면서 정작 말은 내가 먼저 꺼내길 기다렸다는 거냐? 말 해보라는 듯 날 유심히 바라보는 녀석을 보며 너도 어쩔수 없는 막내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참 나.. 그래 나 장남이다. “얘기 하자며?” 내가 띠껍다는 듯이 묻는데 녀석이 시선이 살짝 내려가 있었다. 류인이의 시선을 따라 내려가 보니 나도 모르는 새에 추워서 한쪽 손을 차가워진 팔 위에 올려놓고 문지르고 있었다. 화들짝 손을 떼자 다시 고개를 든 류인이가 날 보다 자신이 입고 있던 점퍼를 벗기 시작했다. 설마 저거.. 난 눈살을 찌푸리며 녀석에게 내뱉었다. “내가 기집애냐? 안 추우니까 너나 입어.” 그러자 나에게 자신의 점퍼를 내던지며 녀석이 말했다. “니가 무슨 학교 홍보대산줄 알아?” 라는 말에 지금 내가 입고 있는 반팔티가 학교 체육복이란 걸 깨달았다. 가슴에 커다랗게 녹색으로 선명하게 찍혀있는 마크와 자랑스런 궁서체의 xx고등학교. 서당도 아니고 궁서체라니. 학교에 굉장한 애착을 가지고 있어 하버드대학 마냥 학교 이름이 들어간 옷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닌다면 내가 미친놈이고, 단지 편하니까. --;; 그리고.. 싸길래 하나 더 사서 그냥 집에서 입고 있다. 아 그래, 실은 두개 더 있어서 여름을 체육복으로 견딘다. 됐냐? 그리고 다 알면서 저리 얄밉게 말하는 놈이라니.. 물론.. 집 밖으로 입고나온 건 내 실수긴 하지만.. 왠지 머쓱해져서 녀석의 점퍼에 팔을 끼워 넣는데 아직까지 류인이의 온기가 남아있는 옷 안은 그야말로 난로였다. 짜식.. 그래도 친구를 위해서.. “쪽팔려.” 친구는 개뿔. 내가 노려보자 녀석이 턱으로 살짝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크나 올려. 학교이름 안보이게.” “아예 니 얼굴에 학교 이름을 세겨줄까?” 투덜대긴 했지만 녀석의 말처럼 난 나에게 꽤나 헐렁한 옷 끝을 부여잡고 양쪽 자크의 끝을 맞춰갔다. 이건 단지 추워서 일 뿐이다라고 강조하며. 아 근데.. 어두워서 잘 안보이네. 눈을 찌푸리고 고개를 자크 쪽으로 바짝 숙이려는데 갑자기 류인이가 내 손에서 옷자락을 잡아채더니 내 앞에 엉거주춤 앉아버렸다. “야.. 놔...” 갑자기 이자식이 약 먹었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당황스러움이 몰려와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지만 녀석은 나대신 말없이 자크의 끝을 맞추었다. 내 턱 바로 아래 와있는 류인이의 머리를 살짝 내려다 보다 시선 둘 곳이 없어 고개를 돌리는데 희미하게 전에 맡았던 녀석의 샤워코롱 냄새가 스며들었다. 시원하고 자유로운... 청 녹색 냄새. 살짝 눈을 감는데 천천히 자크를 올리다 멈추는 녀석의 손길이 느껴졌다. 눈을 뜨고 내려다보자 가만히 내 가슴을 응시하더니 중얼거렸다. “너 아직도..” 상체를 내 무릎에 완전히 기댄 채 시선을 들어올렸다. “그 냄새나.” 그 냄새? 아.. 언젠가 류인이가 나한테선 아기 냄새가 난다고 한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샤워하고 가끔 바르는 바디로션을 얘기하는 거였다. 다큰 시커먼 남학생이 무슨 바디로션이냐겠지만 나이차이 많이 나는 동생이 둘이나 있다보니 녀석들 목욕시키고 가끔 나도 바르곤 했던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다른 사람은 모르던데 혼자 예민한 척 한다며 당시에 핀잔을 줬었는데.. 신기했다. 내가 류인의 냄새를 맡고 있을 때 녀석도 같은 생각을 한다는게. 너에게 보이는 내 냄새는 무슨 색일까? “싸고 양 많으니까 이 형님은 아직도 종종 애용하고 계신다.” 녀석 안보이게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짐짓 무뚝뚝하게 말했다. 언뜻 녀석의 입가도 살짝 휘는 듯 보였지만 너무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도로 자리에 앉은 녀석이 날 보다가 뭔가 말할 듯 했는데 주저하는 듯 하더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 니 맘대로 해라. 솔직히 류인이가 얘기하자고 말 꺼냈을 때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껄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게 먼저 말을 꺼낸게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기도 했지만, 반대쪽에서는 듣고 싶지 않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정의 그 어색함과 힘든 여정을 뒤로 미루고 싶단 생각도 컸으니까. 춥지도 않겠다 좀 느긋한 마음이 들어서 그랬는지 류인이의 다물어진 입은 이제 별 신경이 안 쓰였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는데 별이.. 딱 세 개가 있구나 --; “저 별 이름이 뭘까?” 무심결에 내 바로 위 제일 빛나는 별을 보며 물었다. 물론 대답을 바라고 한건 아니지만.. “인공위성.” 이라니. 아, 이... 낭만이라고는 고양이 눈꼽 만큼도 없는 놈. 너 분명 나중에 애인이 나잡아 봐라하고 바닷가에서 뛰면 다리 걸어 바다에 빠뜨려 엄한 해양구조대만 용쓰게 할 위인이다. 하지만 그 어이없는 대답 덕분에 허탈감이 느껴져 녀석과 대화해야 하는 부담감 같은게 사라져 버렸다. “중 3때 말야.” 류인이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은 후 편하게 몸을 의자에 기대며 어두운 공원 전방에 시선을 두고 천천히 얘기를 꺼냈다. “한창 여자애들 사이에서 수련회 때 잠자던 니 사진 돌은 적 있었지? 누가 장당 750원씩에 팔았던거 말야. 그거..” “....” “.. 나다.” 류인이 쪽은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고 1 겨울방학때 너 몰래 선호랑 병국이랑 롯데월드 놀러갔었다. 자이로드롭 타러. ... 5번이나.” 쓰윽 고개를 돌려 녀석을 보았다. 만약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리려 했지만 류인이는 심각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그래, 이해한거냐? 내가 왜 과거의 구질구질한 비밀들을 꺼낸건지. “선우 현은.. ” 난 재촉하지 않고 말을 꺼내는 녀석을 바라보기만 했다. “공포증이 있어. 나랑... 비슷하지.” 난 아까 택시타기 전 선우윤의 말이 생각나 물었다. “혹시 선우 윤도 그런거야?” 류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알았어?” “오늘.” “그럼.. 선우 윤이 니가 한번에 알아냈다고 한게 그거야?” “응.” “나한테 전화하고 빨리 왔던 건 원래 여기 있었던 거였어? 선우 윤 만나러?” “만나러 온건 아니었어. 단지 눈으로 확인할게 있었지.” 확인.. 선우윤의 공포? 뭘까.. 선우 현, 선우 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공포증은. 그리고 이 녀석은 어떻게 그걸 알아낸 거지? 하지만 이 의문들을 뒤로하고 내가 질문한건 다른 문제였다. “왜.. 알아낸 거야?” 너답지 않게 말이다. 누가 싸움을 걸던 무시와 회피가 주를 이루던게 너잖아. 남들이 치사하다고 비웃어도 내가 관심 없음 그만이다라고 코웃음 쳤잖아. 근데 왜 이번엔 대응을 한거야? 내 물음에 잠깐 말이 없던 류인이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 너 믿는다.” 믿으면? 그래서 니가 말 안 해줘도 내가 실망 안할꺼라 생각하는 거냐?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근데.. 이런 불평 따위 할 수가 없었다. 저 녀석..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날 보지도 못 할 만큼 눈을 감고 말하는 저 한마디에 그 답지 않은 처음 보는 나약함이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선우 현이 하는 말에서 느꼈던건데 너한테 내가 모르는.. 큰 뭔가가 있는거냐?” 류인이가 눈을 떴다. “그래서 그 자식이 그거가지고 너 협박한거야? 완벽 운운하길래 난... 너 고소공포증인줄 알았었는데 아닌 것 같아.” 아무런 대답도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속으로 큰 한숨을 내뱉고 몸을 돌려 다시 의자에 기댔다. 12년 동안 붙어 다니면서 내가 모르는 녀석의 또 다른 공포증? 그런게 있을리 없을텐데.. 하지만.. 가슴이 답답해졌다. “중 3때.” 힐끗 입을 떼는 녀석을 보았다. “수련회때 너 술 취해서 얼굴에 낙서한 다음 여자애들 교복입고 개다리 춤 춘거 그때 내가 캠코더로 녹화했었다.” 헉! 그..그... 당시 자리에 있던 놈들 모두의 뇌를 끄집어내어 기억을 지워야만 할 그 전대미문의 쪽팔린 춤을 녹화했다고? 내가 경악으로 눈을 크게 뜨고 보자 무덤덤히 다음 말을 이었다. “영상실에서 한명당 1200원 받고 관람시켰지.” “뭐!!!” 벌떡 일어나 부들거리는 두 손을 꽉 쥐며 녀석을 노려보자 어깨를 으쓱했다. “선호랑 병국이도 이미 봤어.” 이... 이... 좀 전까지 친구의 의리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던 건 이미 지구 저편으로 날라갔다. 이건 니 잠자는 사진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단 말이다! “거짓말 아니야.” 그래, 100% 진담이란게 본능적으로 살 떨리게 느껴진다 이놈아. 그 추악했던 과거를.. “앞으로도 거짓말은 없어.” 류인이가 내 눈을 응시해왔다. “속이지도 않아.” “...” “그러니까.. 기다려.” 평생 부탁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녀석 다운 말투였지만 내 귀에는 기다려줘 라는 뜻으로 들려왔다. 젠장.. 난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내뱉었다. “미쳤냐? 기다리게.” 그래 언젠간 말해주겠지. 지금 너의 사정도 모두.. 그때 갑자기 녀석이 물어왔다. “넌?” 내가 무슨 뜻이냐는 듯 쳐다보자 무뚝뚝하게 물었다. “속이는 거 없냐고.” “무슨..” “그냥. 근데.. 너의 그 넓은 동성애적 사랑증명은 잘 준비 되어가고 있냐? 귀여운 후배까지 나타났던데.” 귀엽다는 단어가 귀에 상당히 거슬렸지만 제쳐두고 류인이가 질문하는 의도를 생각하느라 잠시 가만히 있었다. 내 동성애적 사랑.. 나에게 그런게 있을리 없지. 이상하게 류인이의 질문이 범인잡기를 방해하기 위해 녀석을 속였다는 것보다 나 스스로에 대한 기만을 묻는 것 같아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생각나 버렸다. 오늘 이슬이에게 했던 나의 행동들. 애써 발로 밟고 흙으로 덮어두고 있던 스스로를 속이고 있던 실체. 그래.. 인정하자. 호모포비아... 그건 나였다. 문제는 여태껏 내가 호모포비아란 단어를 몰라왔듯이 그것이 잘못된 인식이란 생각도 해 본적이 없다는 거겠지. 지금도 솔직히 뭐가 옳고 그른지 모르겠다. 단지.. 아까 내 행동에 상처받았을 꺼면서도 애써 웃으며 갔던 이슬이의 모습이 날 다시 생각하게 했다는 가다. 갑자기 재밌는 말이 떠올랐다. ‘이건 고개를 좌, 우 어느 쪽으로 돌리냐로 생각의 폭이 완연히 바뀌는 문제야’ 내가 류인이에게 했던 말이 나 스스로에게 더 어울리는 충고라는 걸 깨달으니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정말일까? 난 계속 우측으로만 고개를 돌리고 산건가? 알고 있다. 좌측으로 돌리면... 스스로에 대한 기만을 걱정하는 것 따위도 중요하지 않게 될꺼란 걸. 중요한건 내가 고개를 돌릴 준비가 됐느냐다. 난 무얼 알고 있었을까 그들에 대해서. 단지 머릿속에 동성애는 에이즈와 바로 연결지어 더럽다는 생각? 비정상적인 그들의 애정은 단지 욕망일 뿐이란 것? “모르겠어.” 난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아직 준비가 되었는지.” 내가 말한 준비는 녀석이 물은 것과 달랐지만 류인이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근데 니 표정.. 난 아무런 설명도 안 했는데 왜 마치 다 이해한다는 듯 한거냐 한류인. 그때 갑자기 녀석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낮게 물어왔다. “기한이 이틀 남았을텐데? 토요일부터는 본격적으로 그... 한 악.질.적.인. 놈 잡아..” 그리고 한쪽 주먹을 우드득 소릴 내며 감아쥐었다. “딱 숨만 쉴 수 있게 죽여 놔야지.” 뎀 잇! 녀석의 말에 잊고 있었던 기억너머 무덤과 함께할 어두운 과학실 사건이 떠오르고 말았다. 그리고 내 현제 가장 중요한 목적도. “아.. 생각해보니 난 준비 만빵이야. 그리고 나 좋다던 이슬... 이에게도 아무런 반감이 없다니까?” 내일 이슬이를 찾아가 일단 용서부터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진지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래? 그럼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던 나와의 스킨쉽에도 충격 받지 않겠군.” 도대체 누가 너한테 그런 거짓말을 한거냐? 응? 내가 평소 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니. 너에 대한 반감이나 불쾌감은 차고 넘쳐나 나조차 주체를 못하는데 좀 나눠주랴? 라곤 되묻지 못한다. 불행히도.. 그 악질적인 놈이 누구인지 아는 죄로. “충격은 무슨. 마이 플레져지. 하하하..” 그렇게 어색한 웃음으로 마무리 하려는데.. 어라? 너.. 왜.. 그렇게 날 보는거냐.. 보임당하는 나는 굉장히 불안하단 느낌을 받고 있단다. 하지만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의 식스센스를 확인시켜주고야 말았다. “너.. 누군지 알고 있지?” 헉!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춰버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노려보는 녀석의 살벌한 표정에 난 아니라고 고개를 마구 저어도 모자랐지만, 갑자기 당한 일이라 입만 벌리고 멍하니 녀석 보고 있었다. 아마 얼굴에 크게 써있을께 분명했다. ‘나 알아!!!’ 라고. “누구야. 씹... 이 경민, 거짓말 할 생각이면 지금 여기서 땅 파는게 좋을 거야.” 이.. 이봐 .. 난 너에게 평소 호감을 가지고 스킨쉽까지 할 친구란 말이다. 땅이라니.. 설마 땅굴 파 북으로 도망가라는 뜻은 아닐테고... 제기랄. “아..야.. 내.. 내가 뭘 안다는 거야. 하.하.” 연극하는 사람이 봤으면 목매달고 자결할만한 놀라운 어색 연기를 보여주며 웃기까지한 나를, 눈으로 점점 더 압박해 오던 녀석이 이빨 사이로 한 단어를 내뱉었다. “말.해.” 꿀꺽. 무덤까지 가지고갈 비밀이라고 지금 여기서 말한 후 땅 파고 같이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경민 머리를 돌려라. 여태껏 12년간 녀석과 함께 해온 굴곡진 역사가 괜히 있는게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급박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와버렸다. “안돼!” “뭐?” 녀석의 주먹이 올라갔다. 히익! “왜.. 왜냐면 니가 다치니까!” “무슨 헛소리야.” “그..그니까.. 걔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 하지만 녀석은 못 믿는 눈초리였다. “만약 니..가 자신을 해할 걸 알면... 이미 상처받은 가슴에 더 상처를 받아서 아마.. 아무도 말릴 수 없게 될지도 몰라.” “씨발.. 내가 싸이코 하나 못 당할 거 같아!” “아.. 물론.. 힘으론 이기겠지만.. 그 녀석은.. 아.. 아주 끈질겨서 오히려 너한테 걸려 맞으면 반발 작용으로 더 너한테.. 집착, 그래! 집착할지도 모른다는 거지!” “씹.. 그렇다고 내가..” “한류인!” 난 녀석의 손을 덥썩 잡았다. 이 녀석 아직도 주먹쥐고 있었군. 징한 것.. “선우 현을 봐! 세상에 싸이코는 많아. 넌 니가 진정한 싸이코의 세계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거냐? 천만에! 아직 니가 모르는 무궁무진한 싸이코의 세계에 넌 발가락도 안담근 상태란 말이다! 내말을 믿어! 옛말에 친구말을 믿으면 몰려오던 싸이코도 도망간다고 했어.” 나의 열변에 녀석은 마치 내가 싸이코라는 듯이 쳐다봤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일단 제정신이 아니었고 우선은 녀석을 혼란스럽게 하는게 급선무니까. 난 톤을 조금 낮춘 후 녀석의 눈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지금 범인을 설득하고 있어. 조금만 지나면 너에 대한 포기가 이루어 질 듯 해. 그때가서 그 놈을 패든, 땅 파게 하든 늦진 안잖아?” 마지막은 내가 듣기에도 거의 애절했다. “어떻게 포기 시키고 있는데?” “하하.. 물론 너의 개같은 성질을 잘 설명..이 아니고, 어허, 한국말은 끝까지 들으라니까. 니가 남자를 싫어하고, 결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절대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이라고 말해 놨다.” “...” 난 조심스럽게 류인이의 안색을 살폈다. 아까보다는 좀 표정이 안정된 것 같은데.. “일단은 나한테 맞겨라. 친구야.” 그리고 제발 평생 잊어버려라. 조마조마한 심정을 감추고 있을 때 드디어 녀석이 입을 열었다. “2주. 내 생일 전까지 해결하고 나한테 이름 넘겨.” 휴... 난 녀석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라니..! "어?" "너의 그 동성애적 증명은 낼 모레까지 확.실.히 실행해." "그.. 그래..--;" 지독한 것. 잊어버리지도 않다니. 그래도 일단 한고비는 넘겼다는 안도감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근데 어라? 녀석 생일? 그러고 보니.. 4월 13일은 류인이 생일이었다. 태어난 날이 더구나 금요일이었다는 풍문이 전해지는 녀석의 생일은 숫자부터 불길했다. 아마 신도 알고 있었을꺼다, 녀석이 행한 악마적 행동들을. 특히 내 치욕스런 개다리 춤 녹화사건! 내 입으로 사진 판 것만 말 안 했어도 절대 용서 안하는 거였는데.. 혼자 궁시렁 거리며 앉아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매년 생일이 다가오면 하는 질문을 해왔다. “뭐 줄 거야?” 그리고 매번 되묻는 내 말도 이어졌다. “뭐 받고 싶은데?” “... 전부.” “밥이나 사주마.” 뚱하니 항상 하는 대답을 하는데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까지 일으켰다. “가자.” “ 어..” 시계를 보니 어느새 12시가 가까워 있었다. 꽤 늦었군. 가족들이 걱정.. 할리가 없지. 그렇게 류인이를 따라 피곤한 하루라 생각하고 걸어가는데 녀석이 공원 입구가 아닌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야! 너 어디...” 라고 물어보는 중간 봐 버렸다. 류인이가 점점 다가가는 불길한 검은 물체. 분명 바퀴가 두개이고 저 길고 우아한 몸체는... 설마.. 내 눈이 점점 커져 갈 때 쯤, 내 불안을 감지한 듯 녀석이 씩 웃으며 오토바이의 곁에 서며 말했다. “타라.” 하지만 이미 몸이 굳어 버린 난 소리없는 절규를 외쳐야 했다. 뭐야! 그건... 류진이 형 오토바이잖아!!!! 공포증 - 16 도대체 이 간 덩어리가 붓다 못해 온몸의 간 덩어리 화가 되어버린 한류인이란 자식은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의식을 못하겠다는 듯 거만한 포즈로 류.진.이 형의 바이크 옆에 서있었다. 보통 NAKED 스타일의 깔끔하고 실용적인 모델들을 좋아해 그 유명한 가와사키의 제파나 야마하의 XJY 시리즈를 선호하는 류진형이지만 예외로 속도가 빠른 RACER REPLICA를 2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저 녀석이 그 두 대중 한대인 야마하에서 경기용으로 만들어진, 류진형이 친히 일본가 밀수를 해왔다는 신빙성있는 소문이 도는 경기용 바이크를 끌고 나온 것인 것이다! 아.. 보기만 해도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것 같다. 진정한 라이더의 참모습은 긴머리가 포인트라며 어깨 넘는 장발을 휘날리고 자신의 바이크에 손댄 놈들에게 가차 없이 발을 날리던 악귀 같은 류진형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뭐 입대 전 머리를 밀며 아이처럼 울어버려 내 인생의 못 볼꼴 BEST 10의 한 장면을 장식해주기도 했지만... 아직 그 이쁘장한 얼굴이 악귀로 변하는 모습은 내 뇌리 속에 남아있다 이거다. 근데 넌! “미쳤구나?” 어이가 없어 이 한마디 밖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군대 가 있는 놈 알게 뭐야.” 그래, 군대 가있지. 그런데 말이다, 그 군대가 계신 형님은 어째 휴가 때마다 바이크에 손댄 놈들을 척척 알아내시고는 골로 보내는 걸까? 응? 태생은 대범하나 한 때 실수로 친구를 잘못 사귄 덕분에 소심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난 그대로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그래, 난 그 군대 가계신 류진형님이 무섭단다. 그런데.. “어? 야! 이거 안 놔!!” 류인이가 무지막지한 힘으로 날 잡아 바이크 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물론 난 두발로 버티며 녀석에게 욕을 해대기 시작했지만 이 인정머리 없는 녀석은 결국 발악하는 내 한손을 끌어 당겨 바이크 위에 척하니 붙여버렸다. 그리고 검은 어둠 속에 동화되어 위험스레 빛나는 악마 같은 웃음을 나에게 씨익 지어 보였다. “너도 공범이야.” 저런 천인공노할 놈...! 그리고 순간적인 혈압상승으로 뒷머리를 짚으며 내가 쓰러지는 틈을 타 날 짐짝처럼 바이크에 태우고 녀석이 출발했다. 혈압최고점 갱신을 도와주는 한마디를 하며. “우리 집 가자.” 내가 왜!!!! 말 그대로 바람처럼 달려 5분만에 류인이네 집에 도착하고 아직까지 높은 혈압을 주채 못하는 나를 자신의 집으로 끌고 들어가는 녀석에게 물었다. “왜 오자고 한건데?” “도와주려고.” “뭘?” 문을 따고 들어가 불을 켜는 녀석을 현관에서 인상을 쓴 채 보고 있자, 슬쩍 고개만 돌리더니 손가락으로 입가를 가리켰다. “약.” 그 말에 낮에 개소주에게 맞은 상처를 떠올렸다. 이미 찢어진 입술은 상처가 굳어서 피딱지가 얹어졌고, 아까 거울로 보니 한쪽 볼에 푸르스름하게 멍이 들어 있었다. 부어있는 건 당연지사고. 근데 뭐.. “됐다. 이게 하루이틀이냐?” 그래 하루이틀이 아니지. 장장 12년간이나 누구덕분에 몰매로 다져온 몸이 아니더냐. 그리고 새삼스레 니가 걱정하는 것도 상당히 우습다.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녀석이 중얼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확인 해볼 것도 있고” 그 말에 돌리려던 몸을 멈추고 방 한가운데 서서 날 물끄러미 보고 있는 류인이를 보았다. “확인이라니?” 그런데.. 눈을 빛내고 음침하게 살짝 한쪽 입 꼬리만 올리는 모습이라니. “아.. 뭐..” 그러면서 또 피식. 저자식 도대체 뭘 생각하길래.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갔어야 했지만 그놈의 호기심이 뭔지 주춤거리며 신발을 벗고 들어섰다. “앉아라.” 언제 챙겼는지 류인이가 연고를 들고 쇼파에 앉아 옆을 툭툭쳤다. 난 점퍼를 벗어 팔걸이에 걸친 후 류인이 쪽으로 살짝 몸을 돌려 앉았다. “야, 거울이나 내놔. 내가 할테니까.” “거울 없어.” 그리고 손위에 연고를 짜고 나서 탁자위에 놓고는 비어 있는 손으로 내 턱을 살짝 잡아끌어 당겼다. 아.. 왠지 좀 어색한데. 난 살짝 시선을 그의 어깨 너머로 돌렸다. 공원에서 내 자크를 올려주던 일도, 지금도 그렇고 오늘따라 녀석이 좀 달라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내 입술에 발라져야할 약이 느껴지지 않아 눈을 류인이에게로 돌렸다. “왜..” 안 바르냐라는 나머지 질문은 차마 나오지 못했다. 류인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녀석에게로 돌려진 내 시선을 잡고 턱을 잡았던 손에 힘을 가했으니까. 눈도 깜박이지 못 할 만큼 강하게 붙잡고 있는 그의 시선 때문에 너무 가깝게 있다는 사실조차 감각에 없었다. 시간감각 마저 사라진 지금 류인이의 숨결이 바로 내 피부에 와 닿는다고 느껴졌고, 그 찰나의 순간 내 입술 바로 근처에서 그의 입이 벌려졌다. “그거 탁자위에 올려 놔... 씨..ㅂ..” 탁자? 빠르게 사라진 녀석의 말끝에 정확하진 안지만 왠지 욕이 달려 에코로 울리는 것 같다는 느낌을 잠시 받았다. 하지만 순식간에 멀어지는 류인이의 얼굴을 보며 녀석이 한말이 무엇인지 멍해진 머리로 이해하는 게 먼저였다. 그런데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 마치 조금 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류인이 손에 묻혀 있던 연고가 입술에 와 닿았다. 그리고 그때 내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느껴졌고 정신을 차린 난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설마 누가...? “이것 좀 살펴봐라. 뭔가 속이는 것 같은데 장부는 완벽했거든.” ‘탁’하고 사각형의 플로피 디스켓이 탁자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걸 던지며 류인이에게 말한 주인공은 입에 담배를 꼬나물고 한손으로 젖은 머리를 넘기고 있는 이 집안의 장남 한 류민이었다. “어..” 아니 도대체 언제 와 있던거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갑작스런 그의 등장 혹은 좀 전 류인이의 그 이상한 접촉 시도 때문에 놀라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한류인 너 사시 맞지! 나랑 눈마주치고 있었으면서 형이 들어온건 어떻게 안거야? 어버버거리는 나에게 그 서늘한 눈을 돌린 류민형이 잠시 묘한 눈으로 날 바라보다 담배를 문 채 입 꼬리를 올렸다. “너 얼굴이 화려하다?” 아 예, 오늘 저희 학주선생님에게 사랑의 출석부 세례를 받아서요 라고 차근히 설명하려 했지만 내 눈을 꽤나 호강시켜주는 형의 놀라운 패션에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붉은색이 주를 이루는 호피무늬 쫄티에 검은 광택의 하늘거리는 바지(파자마로 의심됨)를 입고 묵직한, 약 12돈쯤으로 추정되는 금목걸이를 한 모습이... 카리스마 넘치게 잘 어울리는 저 괴물 같은 본판이라니. 근데... 신고계신 복실한 팬더 모양 털 실내화는 미스라고 충고해드리고 싶군요 형님. “어쩐지 오늘 그 맘 약한 녀석이 벽에 머리 박으며 울더니, 이유가 있었군.” 슬쩍 날 보더니 디스켓을 집고 있는 류인이에게 형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벽에 머릴 박는 사람이 과연 맘 약한 사람인가 라는 의문은 뒤로하고 마치 묘기부리는 것처럼 입술에서 담배를 떨어뜨리지 않고 말하는 모습이 신기해 보고 있는데 류인이가 무심히 답했다. “바보 같은 자식.” “야 야.. 걔 맘 여린거 다 알면서 실수 했다고 니가 막 윽박지른 건 아냐?” “아무 말 안 했어.” “잘 좀 해줘. 누구 땜에 걔가 거기까지..” “형!” 류인이가 낮게 부르자 말을 하다 멈춘 류민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알았다. 꼬맹아. 그런데 너 지금.. 이 하늘같으신 큰형님한테 눈을 부랄인 거냐? 응?” 눈은 살벌하게 쏘아보면서 입은 히죽 웃고 있는 류민형의 모습이 마치 류인이며 몇 년 후를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대놓고 잡는게 아니라 저렇게 교묘하게 이중적 모습으로 정신적 압박을 가하는 경지에 다만 류인이 녀석은 도달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 압박이 통하지는 않더라도 류인이는 큰형 말은 잘 듣는 편이라 형이 한마디 하자 인상을 쓰며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긴 큰 형이니까 저렇게 꼬맹이라 부르며 충고하지, 바로 위 류진형 같았으면 말 한마디 없이 바로 발차기가 날라오고 류인아가 바로 맞대응하는 형제애 가득한 집안이다. 그나 저나 누구 얘기였길래 류인이가 신경을 쓰는 거지? 궁금해 하는데 형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내려다 봤다. “넌 오랜만에 왔는데 자고 갈꺼냐?” “아뇨. 내일 학교도 가야 되는데 가야죠. 근데..” 난 손가락을 펴서 형의 바지에 붙어있는 정체모를 잎사귀들을 가리켰다. “형도 2층 창문으로 넘어 다녀요?” 정말 아무 사심 없이 순수한 호기심에 물어봤다. 그런데.. 묻는 사람 당황스럽게 표정을 굳히며 담배를 잡아 빼 던지는 폼이라니! “씨발..” “아니 전..” 도대체 나의 질문에 무엇이 문제인가 머리를 굴리며 몸을 뒤로 빼는데 형의 입에서 상당히 익숙한 단어가 튀어 나왔다. “그 악마새끼 때문에..” 그 말에 류인이가 고개를 쳐들며 격한 반응을 보여 왔다. “뭐야! 아직도 제이슨 그 악마새끼 2층에 넘나드는 거야?” 아.. 제이슨이라면.. 어머님의 보물단지 중 최근에 영입했다는 NO. 13의 검은 고양이가 아니더냐. “그래. 얍삽하고 악독한놈.. 2층으로 올라온다는 증거 잡으려고 나의 귀한 보물 중 캠코더 하나 꺼내 친히 계단에 설치하셨다. 씹.. 잡히기만 해봐.” 형의 말에 류인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두 대 더 설치해.” 투지에 불타올라 서로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두 주먹 불끈 쥔 두형제의 심각한 대화는 참으로... 어이없었다. 허나 그런 표정을 짓지 않으려 노력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역시 이집에 오는게 아니었는데.. “왜?” 주먹 쥔 포즈 그대로 날 돌아보며 류인이가 물었다. “집에 가야지.” “뭐야? 벌써 가냐 경민이? 오랜만에 이 형님도 봤는데..” 라며 나에게 다가오시지 말란 말입니다! 더구나 류인이와 비슷한 키로 내 어깨에 한 팔을 걸치며 그런 불길한 웃음을 지어 보이면 상당히 불안 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특.별.히. 내 사랑스런 애기들을 보러갈 기회를 주도록 하마.” 헉.. 나보고 그 기계들 한번씩 다 켜보고 설명 들으라고? 그럼 밤샐텐데? 별로, 전혀, 단연코 그런 생각이 없어 고개를 반쯤 젓는데... 표정이 굳으시는구나. “뭐야?” 형이 싸늘한 눈빛을 뿜으며 날 내려다보았다. “부푼 기대감에 가슴이 떨려서요.” 후후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날 끌고 가는 형 뒤로 왠지 웃음을 참는듯한 류인이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좋겠다. 사랑 받아서.” 씨발! 너나 받아! 밤새 노트북, PDA, 디지털 카메라 등 각종 기기들과의 과한 만남 덕분에 잠을 설친 난 내리 4교시까지 자고 말았다. 그래도 인체의 신비 덕분에 식사 때가 되자 부스스한 얼굴로 책상에서 고개를 들었다. “야, 너 어디 아프냐?” 멍한 얼굴로 책상에서 내가 일어나자 선호가 뒤돌아 앉으며 물었고, 그 질문에 난 옆에서 묵묵히 책을 챙기는 한씨 일가 막내를 노려보기만 했다. 아프냐고? 내 인생은 12년 전 저 녀석을 만난 이후 안 아픈 날이 없단 말이다. 그때 선호의 아프냐는 질문에 놀란 병국이가 내 팔을 잡으며 진지하게 물어왔다. “경민.. 결국 너도 닥터리의 치료가 필요하게 된 거야?” 그러면서 병국이는 급하게 명함을 꺼내려는 모션을 취했고, 난 그의 팔을 치우며 담담히 답해줬다. “널 보면 닥터리 전혀 신용 안가.” 충격에 싸인 병국이를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선호가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괜찮아? 너 얼굴 존나 많이 부었어. 씨발.. 그거 개소주가 그런거지?” “뭐.. 별로” 날 쳐다보는 류인이를 무의식중에 느끼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사투리가 도와줘서 그래도 쉽게 끝났지.” “뭐? 사투리가?” 선호가 유난히 얼굴을 찌푸리며 2학년 때 담임이 확실한지 되물었다. 아.. 선호는 사투리 별로 안 좋아했지. 원래는 선호도 착한 사투리를 좋아했었다. 음.. 학기 초에만. 자신의 영어 발음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절대적으로 본인만) 선호가 2학년에 올라와 담임이 영어, 더군다나 미국에서 몇 년간 살다 왔다는 네이티브 발음을 구사하는 선생님을 보곤 한순간 존경을 표하고 당신의 수제자로 받아달라며 강한 요청을 한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듣기에도 2학년 때 담임의 발음은 상당했기에 그 발음을 그대로 따라하며 주변인들의 괴로움은 무시한 채 자신의 성장에 즐거워하던 선호였으니까. 그러다.. 그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은 2학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바로 담임의 영어는 그가 몇 년간 살았던 미국 남부지방의 사투리였다는 게 밝혀진 것이였다! 당시 선호가 받았던 충격은 다음과 같은 그의 절규로 미루어 추측할 수 있다. “씨발 그럼 난 미국판 하일과 미즈노 교수 된거냐? 어!!!!” 뭐.. 그러한 비극적 연유로 사투리에게서 사제의 정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선호에게 그의 도움은 믿기지 않았나 보다. “암튼.. 그 일은 다 잘 풀렸어. 얼굴이 두 배가 되긴 했지만..” “근데 너 어디가?” 류인이가 자리에서 일어난 날 보며 물었다. “누구 좀 만나러. 니들 먼저 밥 먹어라.” “누구?” 약간 표정을 굳히며 류인이를 보며 잠시 대답을 할까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슬이.” “1학년 어르신 보러 간다고?” 의외로 내 대답에 표정을 푼 류인이와는 달리 병국이가 약간 놀란 듯 물어왔다. 그냥 어깨만 으쓱 해주고 뒤 돌아 서려는데 선호가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게 들렸다. “이~야~ 이경민. 이슬이라는 이름이 아주 내츄럴 나오는데? 어때 병국, 너의 생각은?” 그 질문에 곧바로 병국이는 예의 고민하는 자세인 엄지와 검지를 넓게 펴 턱에 가져다 대곤 낮게 중얼거렸다. “뭔가가 있어..” 저번에 병국이의 똑같은 발언에 화를 냈던 선호의 심정이 십분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저렇게 화가 치밀어 오르게 하는 것도 재주다라고 위안하며 겨우 억눌렀지만, 그 힘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야 했다. “그래, 어제만 해도 쉬는 시간마다 너 찾아와 사랑의 빵 공세를 펼쳤는데 오늘은 코빼기도 안 보인게 이상해. 어쩌면 우리 모르는데서 사랑의 밀회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진지하게 결론을 낸 병국이에게 선호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사랑의 밀회라 함은?” “후후...” 불길한 웃음을 터트린 후 류인이까지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걸 확인 한 병국이가 갑자기 옆에 앉은 선호의 품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경민 혀~어~엉. 여기 빵 500개 가져 왔어요오~ 형은 너무 몸이 약해서 이슬이는 슬퍼요.” 밥을 먹으러 가려던 반 이상의 아이들이 제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하지만 곧이어 병국이의 만행을 부추기는 선호의 행동에 몇몇은 입을 손에 막은 채 밖으로 뛰쳐나가야 했다. “이리와 귀여운 이슬. 니가 가져온 사랑의 우유 347개를 우리 같이 나눠 마실까?” “아이 혀~엉.” 차마 교실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아이들이 창문을 열고 임신초기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저 두 저주덩어리를 말릴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단지 부추기는 자만 있을 뿐. “야, 좀더 느끼하게 해봐.” 라며 아예 비위라는 것 자체가 없는 강철안면 한류인이 내뱉는구나. 제길.. 난 서둘러 교실을 빠져나가며 단지 사소한 한 가지만 바랄 뿐이었다. 제발 저 세 철면피들과 내가 같은 족속으로 보이지만 안게 해달라는 사소한 말이다. 1학년 8반에 이슬이를 만나러 오면서 만나지 못할꺼란 생각은 안했다. 학교 식당이 작은 편이라 점심시간에 애들이 몰리는 걸 막기 위해 암묵 간에 1학년은 10분 늦게 식당으로 향하도록 정해져있었기 때문에 난 당연히 그를 만날꺼라 예상을 했었다. 단지.. 그의 모습을 나에게 빵 주던 이슬로 생각했었다고 한게 착각이랄까? “야. 거기 앞에서 세 번째놈. 씹.. 누가 수업중간에 쪽지 돌리래? 어? 뒤에서 그거 때문에 신경 쓰여서 국사 34페이지 필기 못했잖아.” 반쯤 뒷문을 열다말고 들려오는 저 낮고 굵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명 나에게 혀엉을 외쳐대던 이슬군이 분명했는데.. 맨 뒤에 앉아 위협스레 반 애들을 노려보며 자신이 필기 못한 국사 34페이지에 대한 분노를 토로하고 있는 모습은.. 진정한 어르신의 모습이었다. 아니 이게 아니지. 난 머리를 흔들며 혹시 내가 사람을 잘못 본건 아닐까 했지만 저런 얼굴의 고등학생이 전국에 두 명일리는 없었다. 40대라면 몰라도. ‘쾅!‘ 책상이 부서져라 주먹으로 내리친 어르신의 행동에 나마저 깜짝 놀라 숨을 들이 쉬었다. “제길.. 다음부터 수업방해 하는 놈은 내 옆자리에 앉는 영광을 주겠어.” 1학년 8반 아이들의 움찔거리는 뒷모습을 보며 난 감탄했다. 너 정말 협박의 진수를 아는 놈이구나 하고. 그리고 순간적으로 내가 어제 이슬, 아니 어르신에게 한 행동들을 떠올려 보니 까딱하다간 1학년 교실에서 고등학교를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내가 간이 부었지.. 나 좋다고 형, 형 거릴때 잘 보일걸. 허나 후회는 과거 실천은 현실이다. 난 열었던 문을 조용히 닫으며 튈 준비를 했다. 사과도 일단 내 몸이 건사할 때 하는 것이... “어? 경민 형!!” 도대체 타이밍의 신이 내게 저주라도 내린 건지 왜 하필이면 문을 완전히 닫으려는 틈으로 어르신과 눈이 마주칠께 무엇이란 말이냐! “이거 드세요. 형.” 날 학교 뒷동산에 앉혀놓고 땀 흘리며 어딜 뛰어 갔다 온 이슬군이 내게 빵과 우유를 건냈다. “어.. 고마워..” 잠시 그가 떠난 사이 날 혹시 암매장 하려 삽 가지러 간 건 아닐까 의심했던게 미안해져 난 쑥스럽게 빵과 우유를 받았다. 서로간의 침묵이 어색해 난 생각나는 아무거나 질문해버렸다. “참, 니네 반에 선우 현 있지 않아? 안보이던데..” 그러자 이슬 군이 동작을 멈추고 날 빤히 바라보았다. “아파서.. 몇 일 못나온다고 하던데요.” 아 그래? 선우 현이 아프다고? 선우 윤은 어떻게 됐을까? 생각지도 않았던 두 인물에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겨우 옆에 누가 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도. 근데..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며 빵의 비닐 포장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이슬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많이.. 아프세요?” 그 말에 난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근데 아까는 못 봤는데 그의 이마 위쪽 중앙에 반창코가 붙여 있었다. “.. 난 괜찮아. 근데 넌 다친거니?” “아.. 이거요.” 보는 사람은 좀 섬뜩하지만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손가락으로 반창코를 문질렀다. “다친거 아니에요. 나 말고.. 형은 얼굴이 엉망이 됐어요.” 왠지 걱정스러운 눈빛이 보여 난 그에게 씩 웃어주었다. “사내놈이 얼굴 좀 다친다고 대수냐 뭐. 그리고 류인이 녀석하고 붙어 다니면서, 아 너도 알지? 나랑 같이 다니는 잘생긴 놈 말야.” 내 말에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걔랑 붙어 다니면서 쌈도 좀 하고, 많이 맞고 다나고 그랬거든. 보기엔 약골로 보일지 몰라도 의외로 맷집이 좀 있지.” “그래두.. 이쁜 얼굴이..” “이슬아.” 중얼거리듯 말하는 그의 말을 끊고 내가 부르자 숙였던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난 남자라 이쁘다는 말이 썩 기분 좋게 들리지 않는다. 여태껏 그런 말 해온 사람도 물론 없었고.” “죄송해요..” 다시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니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과받자고 온게 아닌데... 난 손에 들린 빵 봉지를 뜯으며 입을 열었다. “어제..” 옆에서 이슬이가 고개를 드는게 느껴졌다. “내가 너에게 했던.. 것들.. 변명하지 않을께.” 포장 비닐을 접어 빵이 들어 나게 한 다음 크게 한입을 베어 먹었다. 음식물이 입안에 들어오자 금새 침이 돌았지만 난 마치 돌덩이를 씹는 듯 빡빡한 빵을 우적우적 씹으며 목 안으로 넘겼다. “분명.. 나한테 실망했을테지만 내가 그런 놈인라. 아마 너 같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그 호모포비아가 날지도 몰라. 내 머릿속엔.. 정말 그지 같은 생각들이 들어있거든. 실은 나도 깨닫지 못했는데 그게 내 생각들이더라고.” 그지같은 생각. 그래, 난 그들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데 너에게 상처를 입혔지. 어제 내가 내친 손이 아마 내 부어터진 얼굴보다 백배는 더 아플지도 몰랐다. 속으로 깊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아무 말이 없는 옆을 차마 처다 볼 수 가 없었다. 마치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먹던 빵을 내려다 놓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는데 한참 만에 이슬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자기가 호모.. 포비아라고.” 난 고개를 돌려 살짝 입에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냐고? 난 아직도 호모포비아 인가? 분명 이슬이가 계기가 되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리긴 했지만 여전히 내 안에는 거부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남자가 남자를.. 난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다. 솔직히.. 내 생각들이 잘못 된거란 것도 알고 시선을 바꿔야 한다는 것도 아는데.. 동성애를 받아들이는 건 아니거든.”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동성애.” 난 그를 보며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옳지 못하다.. 정상적인게 아니니까 옳지 못하다? 아니 과연 동성애는 비정상적인 걸까? 무교인 나에게 일단 종교란 무의미하니 종교적 입장을 떠나서 생각해도 그게 비정상적이라 말할 수 있나? 신이라는 거대한 심판자가 없다면, 누가 판결을 내리는 것일까? 우리.. 인간들, 혹시 다수의 믿음이 극 소수의 정신행동을 비정상이라 치부하는 거라면 말이다.. 무엇이 옳은거지? 문득 전에는 이런 갈등조차 없이 단번에 해답이 나왔는데란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지금의 나의 생각에 맞는 단어를 내뱉었다. “어색해.” 두 팔을 뒤로 뻗어 상체를 뒤로 약간 젖힌 후 다리를 길게 뻗어 편안한 자세로 몸을 바꾸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내가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건 아직 이르다고 봐. 그 전의 생각들은.. 편견이었다고 치부한다면 말이야. 일단 동성애는 나에게 생소하고.. 어색하니까.” “내가 열 받는 사람들은요..” 이슬이도 나처럼 팔을 뒤로 뺀 후 다리를 쭉 폈다. “동성애를 다 이해한다는 듯 말하는 사람들이에요. 못마땅히 여기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개방적 사고를 가진 인간인척 동성애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라고 말로만 떠드는 거죠. 속으로는 썩어 문드러진 악취를 풍기며 아예 동성애에 대해 일말의 재고도 갖지 않으면서 말이죠. 그런 사람들은.. 생각이 바뀌질 않아요.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고 여기니까. 그러니까.. 나 형한테 실망 안 했어요.” 난 살짝 이를 들어내며 웃는 이슬이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형은 준비가 되 있잖아요.” 준비.. 어젯밤 류인이에게 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했는데 니가 답을 주는 거냐? “그리고 어젠.. 저도 죄송했어요. 갑자기 그렇게 말하는게 아닌데..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 좋아한다고 말하면 당황하고 화낼게 분명해요.” 아.. 잊고 있었던 문제가 떠올랐다. 이봐 이슬군.. 정말로 날 좋아하는 거야? 혀 끝까지 이 질문이 맴돌았지만 어떻게 물어야 할지.. “아, 근데 갑자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났거든요. 형이 묻는데... 할 수도.. 말하길.. 안된... 그렇다고.. 난.. 하긴.. 예전부터.. 그래도..” 말을 흐리더니 뭔가 꿍얼꿍얼 거리며 혼자 고민하는 이슬이를 보며 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이 안났다? 그건 혹시.. “에.. 그니까.. 날 좋아한다는 건..” 내가 묻듯이 말 끝을 올리자 이슬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해왔다. “뭐.. 형이 걱정하는 것처럼 덮치거나 그런 종류의 좋아함은 아니에요.” 순간적으로 두 주먹 불끈 쥐며 하하 웃으려는 걸 손가락에 힘줘 흙 파내는 걸로 겨우 참고 물었다. “그럼 역시.. 너의 좋아함이란 선후배간의 돈독한 우정이 밑바탕에 깔린 플라토닉적 사랑이라 정의 내려도 될까?” 내 말에 잠시 벙하던 녀석이 눈을 껌벅거렸다. “그치만 선배가 이뻐서 좋아하는 건 사실이에요. 단지 덮칠 정도는 아니라는..” 너..넌.. 좋아하는 기준이 덮치나 안 덮치나냐? 어? 이 어르신아! 뭐야? 내 얼굴보고 좋아한다는건 설마.. “혹시.. 덮칠 정도는 아니라지만.. 혹시 해서 묻는건데.. 내 얼굴이 맘에 든다는 건.. 너의 성적인 부분을.. 자극 시킬수도 있다는..?” 내 말에 이슬이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니야! 옆으로 돌려! 내 소리없는 절규는 모른 채 여전히 웃으며 그가 말했다. “걱정마요. 내가 의리 하나는 짱이라, 설마 남의 떡을 보고.. 합.” 남의 떡? 갑자기 자기 입을 막는 이슬이를 보며 내가 의심스럽다는 듯 보자 녀석이 실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내 말은.. 나랑 이어질 사람이 아닌걸 아니까.. 그냥 그런 의미로 남의 떡이란 말을..” 뭔가 껄끄러운게 있었지만 의외로 포기가 빠른 고마운 녀석이란 생각 때문에 의심은 금새 사라졌다. “그럼 날 포기한다는 거지?” “예.” 이런 경사가 있나! “그래도 계속 좋아할래요.” 제길.. 내 구질한 인생이 그렇지 뭐.. 공포증 - 17 점심시간 거의 끝나서 교실에 오니 류인이는 없고 선호와 병국이만 아직까지 그 비위등급 18세 미만 불가의 연극을 계속하고 있었다. “어? 경민이 왔다. 혀~엉~ 몸도 약한 우리 혀엉, 빵 많이 먹고 왔어요?” 비상시를 대비해 아껴두고 있는 육두문자들이 나오려는 걸 겨우 가라앉히며 난 무덤덤히 자리에 앉았다. “귀여운 이스을~ 빵을 너무 적게 준거 아냐? 응? 역시 500개 가지곤 모자랐던 걸까?” 서로의 대사에 낄낄거리는 두 녀석을 보며 잠시 어르신의 모습을 보였던 이슬군이 떠올라 두 사람에게 경고를 해줘야 할까 망설였다. 혹여 나중에 저런 재롱을 이슬이가 본다면.. 그러나 우리 우정의 두께가 창호지 만하다는 걸 깨닫고 무시라는 당연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류인이는?” 빈자리를 가리키며 묻자 선호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병국이가 답했다. “음.. 그게 비둘기 교장한테 불려갔어.” “비둘기가? 왜?” 약 2년 전 어느 화창한 날 열심히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설교를 하던 교장이 지나가던 비둘기의 하얗고 걸죽한 분비물을 머리위에 정통으로 맞은 후 비둘기 교장이란 귀여운 별명을 가지게 된 그가 왜 류인이를 불렀지? 내 의문에 약간 표정을 굳힌 선호가 답해주었다. “어제.. 류인이가 선우 현을 화장실로 끌고가 던져버렸다는 말이 있었는데 사실인가봐.” “선우 현을?” 이젠 이름만 들어도 불길한 기운이 엄습하는 1학년 후배.. 그런데 화장실이라니. 머릿속에서는 얼마 전 화장실 입구에서 패닉상태로 서있던 선우현의 모습이 돌아가고 있었다. “근데 그 화장실에서 재수없게 교장이 볼일을 보고 있었데. 뭐 선우 현을 패거나 한건 아니라는데.. 그 미친놈이 갑자기 기절해 버려서.. 얌채 같은 놈, 분명히 교장 앞인걸 알고 연기했을 꺼야. 아니고서야 화장실 바닥에 한번 내팽겨 졌다고 기절을..” 주저리 선우 현의 욕을 하는 선호의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화장실, 어제 류인이가 알아냈다고 한말.. 연관이 있는건가? 그런데 화장실공포증이란 건 있을리 없잖아.. 뭐지.. 그리고 오늘 선우 현의 결석과 몇 일 못 나올꺼라는 이슬이의 말도 함께 떠올랐다. 류인이 녀석.. 도대체 뭘 알아 낸거길래.. 온몸의 간 덩어리 화도 모자라 아예 손에 간으로 만든 요요를 들고 다니는 한 류인은 고3이라는 국가적 중차대한 위치를 망각하고 오후 수업을 내리 땡땡이 친후 담임 종례 전에야 들어왔다. 분명 6교시 끝나고 꼴에 친구라고 걱정을 빙자한 비웃음을 위해 선호, 병국이랑 교장실 앞에 찾아 갔을 땐 없었는데 도대체 어디 있다 온건지. 근데 문제는.. 이 녀석이 들어오자마자 책상에 엎드려 눈만 빼꼼히 내 놓은 채 나를 쳐다본다는 거다. 그런 너의 폼이.. 상당히 불쾌하구나. “뭐야?” 내가 기분 나쁘다는 오라를 방출하며 물었지만, 몸에 최강 쉴드를 둘렀는지 오히려 음침한 미소를 살짝 입가에 띄우고 쳐다보기(내 눈엔 단연코 야리기로 보이는)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 녀석답지 않은 반응에 더 기분 나빠진 나는 최대한 녀석과 떨어지려 노력하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야, 류인아 너 비둘기한테 뭔가 충격적인 얘기라도 들은거야? 응? 애 상태가 왜이래?” 병국이 역시 나와 심정이 같았는지 질겁한 표정으로 묻자 류인이가 책상에서 스윽 일어나 똑바로 앉았다. 여전히 그 미소 비슷한 걸 지우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 눈은 날카롭게 빛나며 날 쏘아보고 있었다. “너.” “응?”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뭐야 이 녀석 갑자기.. “보여줄 준비가 끝났다던 너의 동.성.애.적 사랑은 언제 볼 수 있는거냐?” “아.. 그건 말이지.. 하하..” 그냥 머쓱하게 웃으며 넘기려는데.. 녀석의 표정이 전에 닦달할 때와는 좀 달랐다. 여유가 있다고 해야 하나? 왜지? 좀 즐거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약간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아까 이슬이를 만나고 난 후 잠깐 생각했던 걸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며 나와 류인이를 살펴보는 선호와 병국이를 힐끔 보며 입을 열었다. “내일... 보여줄게” 내 말에 정말이냐는 듯 한쪽 눈썹을 올리던 류인이가 피식 웃더니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종례는?” 일어선 녀석을 올려다보며 내가 묻자 류인이는 큰 손으로 내 머리를 흩트리더니 몇 마디만 말만 하고 뒤돌아섰다. “잊지 말고 약 발라라.” 그렇게 류인이가 가고 난 후 우리 세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좀 이상하지?” 선호의 말에 나와 병국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둘기가 약 먹였나.. 원래 잘 안 웃지도 않던 녀석이 사람 홀리게 시리 저리 웃고 다니고..” “그래, 확실히 찡그리기만 하던 놈이라 저리 웃으니 보기 좋기는 한데.. 너 뭐 아는거 없냐?” 선호의 물음에 난 고개를 저었다. “근데 넌 어떻게 할 거야?” “뭘?” “동성애적 사랑 어쩌구하는 그거 말야.” 내가 그 말에 한숨을 푹 쉬자 병국이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내 책상을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내가 도와줄수도..” “뭐?” 내가 무슨 소리냐는 듯 묻자 병국이는 좀 난감한 표정을 잠깐 짓는다 싶더니 뭔가 결심한 듯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묻자. 너 동성애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도 없지?” 정곡을 찌르는 그 말에 난 움찔 했으나 살짝 고개를 저었다. “요샌 넘치게 생각하고 있다 임마.” “뭐 그래봤자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겠지 아니냐?” “무슨 말이야..?” “아.. 이 형님이 너의 이해를 도와주기 위한 자료를 제공하겠다는 거지.” 그 말에 나와 선호는 눈을 똥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자료라니? “병국이 너... 그럼 1월에 수술받은게.. 치질이 아니라..” 선호가 경악스럽다는 듯 중얼거리자 병국이의 왼손이 번개같이 올라 선호의 뒷통수에 달라붙었다. “아냐! 그거 치질 맞아!!” 야.. 그렇게 큰소리로 주장 안 해도 너 치질 수술 받은거 온 반애들이 다 알고 있단다 병국아. “알았어. 그럼 무슨 뜻이야?” 내 질문에 조금 흥분을 가라앉힌 병국이가 우리를 가까이 부르더니 낮게 말했다. “내가 남사스러워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우리 누나가 인터넷에 글 올린다고 전에 얘기 했었지?” 그 말에 선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그래서 맨날 컴퓨터 쓰다가 쫓겨나잖아. 씨발.. 너 저번에 게임하다 중간에 나가버리는 바람에 그 판 깨져서 나만 죽어라 욕 먹은거 알지?” “새끼야. 니가 우리 누나랑 살아봐. 나보다 키는 15cm나 작은데 몸무게는 더 많이 나가는 사람한테 한번 맞아봤냐? 그리고 우리 누나 통뼈란 말야.” 이러다 또 삼천포로 빠질 것 같아 난 요점을 찝어 주기로 했다. “그래서 뭐야, 결론은.” “아.. 그게..”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병국이가 머쓱한 듯 말했다. “우리 누나가 쓰는 소설.. 야오이거든.” 소설을 파일로 보내줄테니 야오이의 환상적인 세계의 빠져보라는 병국이의 말을 과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며 정류장으로 향하는데 옆에 갑자기 바이크 한대가 서더니 요새 자주 듣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경민!” 특특특 거리며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와중에도 민섭이의 목소리는 단연 돋보였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나도 아는 채를 했다. “그거 니꺼냐?” “당근... 아니쥐. 후배놈 껀데 내가 얼마나 잘 달리나 한번 시험해봐 주는 거다. 야, 태워줄까?” 내가 환호하며 태워줘라는 반응을 기대하는 것 같았지만 불행히도 어제 무려 5분이나 류진이 형 바이크를 목숨 걸고 탔기에 당분간 바이크 근처에는 가고 싶지도 않았다. “됐다. 너나 시험해 봐라. 나중에 빨간 색연필로 채점하는 것도 잊지 말고.” “크크크..” .. 저 웃음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고잉홈하고 싶은 강력한 욕구가 밀려와 인사를 하려 입을 떼려했다. 근데 민섭이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와 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야 근데 한류인 그 새끼는 요새 왜 그리 일학년들하고 친한거야? 선우 현 일당하고 맞붙지 않나, 오늘은 보니까 엄청나게 꿇어 보이는 일학년하고 수업 땡땡이 치고 얘기나 하고 말야.” “일학년?” “응. 자세히 못 봤는데. 옆에 있던 놈이 그러는데 거의 조폭 분위기 놈 하나 전학 왔다고 했는데 그놈 같다고 하더라. 뭐 나도 멀리서 봐서 확실치 않지만..” 조폭 분위기의 엄청나게 꿇어 보이는 일학년... 머릿 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한명밖에 없었다. 근데.. 둘이 만났다고? “둘이서 뭐했는데.. 혹시 싸우는거 같아보였어?” 내가 심각하게 묻자 민섭이가 고개를 저었다. “싸우긴.. 존나 친해 보이더만. 둘이서 우유 먹고 있더라. 한류인 그 자식은 생긴 건 안 그런데 이상한 짓 많이 한다니까? 우유가 뭐냐 우유가.” 친해 보여? 내가 있을 때도 두 사람은 전혀 한마디 안하던 사이였는데.. “너 사람 잘못 본거 아냐?” “몰라 난. 옆에 있는 놈이 그 일 학년이라길래 그런줄 알았는데. 왜 아니냐?” “아마 아닐 거야.” 그리고 가볍게 인사하고 뒤돌아섰다. 민섭이에게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이슬이가 누구라도 한번 보면 혼동하지 않을 만큼 강한 인상이란 걸 안다. 그럼.. 두 사람은? 류인이가 요새 들어 부쩍 나에게 비밀이 많아진 것 같다는 서운함을 뒤로 밀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녀석말처럼 일단 기다리자. 나중에 어찌되건 간에.. 현관문을 여는 순간 안쪽에서 사람이 딸려 나와 난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서야 했다. 근데 안에서 나오던 인물역시 상당히 놀랬던 모양이다. “으~악! 오빠 놀랬잖아!!” 그래 니가 놀래긴 놀란 모양인데.. 기집애가 으악이 뭐냐? 바로아래 이제 중 1이 된 여동생을 보니 언제 날 잡고 감탄사 공부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오빠로써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이 저녁때 어딜가?” 그러자 손에 들린 만화책과 엄마가 보던 잡지한권을 내밀었다. “이거 갔다주러. 잘됐다. 엄마도 없고 지금 한얼이 혼자밖에 없는데.. 오빠가 걔 밥 좀 차려줘라. 응?” “야, 넌 뭐하고 여태 한얼이 밥도 안차려 준거야?” “우이씨.. 나도 좀 전에 왔단 말야. 엄마는 또 큰 이모 병원 갔고, 아빠도 오는 야근이라 늦게오신다고 전화 와서 그냥 뭐 사먹으려고 했는데..” “했는데?” “민지가 전화 와서 자기 집에 오라구하잖아. 걔네집도 오늘 비었데. 나 책 가져다주고 민지네 갔다 올테니까 오빠가 한얼이 밥 좀 챙겨줘 응?” 난 인상을 쓰며 여울이를 잠시 내려다 보다 대답했다. “혹여 자고 올 생각하면 내가 쫓아갈테니까 알아서해. 여자가 아무대서나 자는거 아냐. 그리고 이따 올 때 전화해. 데리러 갈테니까.” “내가 무슨 어린애야? 데리러 오게.”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대는 녀석의 머리를 한대 툭 쳐주고 집에 들어서려는데 여울이의 손에 들린 잡지표지에서 내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야, 그거..” “어? 뭐?” “그 잡지.. 내가 갔다 줄테니까 놓고가.” 입에 숟가락을 넣으며 잡지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사진을 살폈다. 사진위에는 큰 글씨로 ‘CLI 그룹의 후계자는 과연 누구?’라는 제목이 써 있었지만 후계자 따위에 관심 없는 난 아래 하단에 실린 한 장의 가족사진과 그 옆 조그마한 설명을 보고 있었다. 무슨 행사장에서 찍힌 듯한 사진의 중앙에는 흰머리를 단정히 넘긴 근엄한 표정의 중년의 남성이 서있었고 그 뒤로 아들로 보이는 세 명의 젊은 남자가 서있었다. 그리고 그 세 명 중 한명은 내 눈에도 상당히 익은 사람이었다. 선우 윤. 사진을 보다 느낀건데 선우 윤이 나머지 두 형제에 비해 상당히 어리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녀석도 늦둥인가? 라는 생각은 의외로 복잡한 선우 가문을 조리 있게 풀어쓴 긴 기사내용 중간에 설명되어 있었다. 기사에 의하면 선우 윤은 두 번째 부인의 아들이라고 되 있기는 한데.. 내가 보기엔 바로 위에 형과, 잡지에 의하면 어머니가 같은, 전혀 안 닮아 보였다. 흔히들 말하는 바람펴서 난 자식인가 라는 속물적 생각을 순간적으로 한 나를 이해해달라. 아무래도 재벌들의 바람기에 대해 많이 풍문으로 많이 듣다보니.. 근데 기사의 내용은 그 세 형제간의 후계자 싸움이 아니었다. 의외로 세 형제간이 아니라 CLI 그룹의 지분을 상당 소유하고 있는 회장의 동생, 국회의원 선우 태원집안 과의 얽히고설킨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형제간이긴 하지만 회사를 물려받은 형과는 달리 머리 좋은 동생은 일찍이 정치로 뛰어들었는데 권력을 가지게 된 동생이 이제 회사의 경영에 조금씩 간섭을 해 두 형제간의 알력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국회의원 선우 태원이 자신의 큰아들을, 기사에 의하면 미국에서 공부 하고 온 수재, CLI 그룹에 입사시키면서 문제가 커지고 있다는 뭐.. 복잡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뒷 페이지에는 설명을 돕기 위한 선우태원과 그의 똑똑한 큰아들, 아직 고등학생인 둘째아들의 사진이 함께 실려 있었다. 그 둘째 아들역시 내가 아는 인물이었다. 선우 현. 근데 말이다.. 솔직히 나에게 이 집안의 알력다툼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 긴 기사를 단숨에 읽게 한건 바로.. 사진속의 녀석들 때문이었다. 스위치가 나가버린 선우 윤과, 자신의 형, 아버지 옆에서 딱딱하게 굳어있는 선우 현의 모습이 마치 내가 봐서는 안 될 녀석들의 약점을 봐 버린 것만 같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제기랄.. 항상 그렇게 자신만만한 모습들이더니.. 사진에 띌 정도로 저런 표정들은.. 왜 자꾸 내 눈에 약한 모습들을 보이는 거냔 말이다. 니들은.. 단지 재수 없는 부자 집 도련님으로 남으란 말야. “형, 밥 안 먹어?” 두 선우 녀석 생각에 잠겨있던 내 귀에 한얼이의 말이 들려왔다. “너 다 먹은거야?” 언제 다 먹은 건지 싹 비운 밥그릇에 숟가락까지 얌전히 놓고 날 보고 있었다. “응. 근데.. 이 누나 되게 이쁘다.” 한얼이는 언제 봤는지 내가 보고 있던 잡지위에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래 선우 현이 이쁘긴 하지. “누나 아니야. 이 새끼 남자야.” “정말? 그치만 이쁜데? 근데 형.. 어디 아픈가봐. 표정이 이상해.” 그 말에 난 다시 선우 현을 내려다 봤다. 그래.. 처음 보는 사람도 느낄 만큼 너의 그 딱딱하고 어색한 표정은 안 어울린다고... 선우 현. “뭐야..” 병국이가 보내온, 일명 누님의 최고 걸작 시리즈 파일을 여는 순간 내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다작과 정밀한 씬 묘사로 유명하다며 얼굴을 붉힌 채 말한 병국이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으나 압축을 풀고 여러 개의 제목들을 보는 순간.. 진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서방님은 왜 돌쇠의 옷고름을 잡았나.’ ‘꿀꺽, 형을 먹다.’ ‘불알친구의 합체’ ‘마왕과 왕자님(부제: 그들만의 2시간짜리 사정)’ ‘옥상이 최고야’ ‘음악실도 짱이야(옥상이 최고야 속편)’.... 차마 클릭할 엄두조차 없는 이 제목들을 보며 과연 내가 이것들을 봐야만 하는건지 조차 회의가 들었다. 제길 서방님이 돌쇠의 옷고름은 왜 잡는 건데? 그리고 불알친구가 메칸더 브이야? 합체는 무슨... 허나..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 했던가.. 호기심의 동물 인간이기에 난 천천히 떨리는 손으로 클릭을 했다. 예전 tv에서 ‘부시맨 홍콩가다‘를 방영했을 때 혼자 낄낄거리면서도 진짜 저렇게 놀랍게 생각할까 의심을 했었다. 일단 나로서는 이해가 안가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부시맨이 느꼈을 컬쳐 쇼크에 난 넋이 빠져 있었다. 남자들 간의 사랑이 이렇다고? 진짜? 다른 연인들하고 똑같잖아! 아니 솔직히 이런 충격은 잠시 였다.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생.생.한. 섹스를 묘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병국이 누나는 여자잖아! 아.. 처음 보는 아니 읽는 동성간의 섹스신은 가히 뒷머리에 10톤짜리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읽는 내내 나도 침이 꿀꺽 넘어갈.. 묘사는..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초반에는 거부감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익숙해지니.. 그래 젠장, 나도 꼴렸다구. 제길..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왕과 왕자의 2시간짜리 섹스신(장장 11페이지에 달하는)에 나도 모르게 손세탁 할뻔 했으니까. 나에게 있어 제일 충격은 이 모든 소설이 허구니까 치더라도.. 구역질 나올줄 알았던 동성간의 섹스신에 내 자신이 흥분했다는 것이다. 뭐야.. 나 지금 거부감 없는거야? 시커먼 남자놈끼리 거시기 만지며 소리 지르는 장면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거야? 아무렇지도 않은건 아니지 나도 좀 흥분했으니.. 아니 이게 아니야! 난 서둘러 창을 닫고 잠시 멍하니 벽을 쳐다보았다. 뭐 일단은 남자끼리도 잘 섹스 할 수 있다는 걸 알긴 했지만.. 굉장히 더러울꺼라 생각했던 그 항문성교장면을 서슴없이 읽어 내리다니.. 설마 나도 모르던 호모의 기질이 가슴깊이 숨어 있었던 거냐? 하하 그럴 리가.. 근데 왜 이놈의 손은 맘대로 다음 파일인 ‘꿀꺽, 형을 먹다.’ 열고 있는 거냐! 그나저나.. 마님은 왜 서방님과 돌쇠의 아름다운 사랑을 반대하는 걸까.. 윽, 미쳤구나 이경민. 혼자 자책하며 난 ‘꿀꺽, 형을 먹다.’를 읽기 시작했다. --; 충격적인 소설을 반쯤 읽고 있는데 누가 내 옷을 잡아당기는 게 느껴졌다. “헉! 뭐..뭐야 한얼아..” 내가 좀 화들짝 놀라며 옆에 서있는 한얼이를 쳐다보자 막둥이 녀석이 나와 컴퓨터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형 공부해?” “어?.. 어.” 그래 공부지.. 사회적 소외계층 문학의 탐구라고나 할까. “나두 여기서 책 읽으면 안돼?” 그러고 보니 집에 아무도 없었지. “대신 책 읽고 한글공부 내일꺼 미리 예습 해놔.” “그거 아까 다했어.” 짜식 누굴 닮아 이리 착실한지.. “한번 더해.” “응.” 그리고는 내 침대위에 폴짝 뛰어 올라가더니 한얼이의 작은 손으로 잡기에도 벅차 보이는 얇고 커다란 책을 무릎위에 올리고 펴기 시작했다. 근데.. 지금 읽고 있던 ‘꿀꺽, 형을 먹다.’ 때문이었는지 난 한얼이에게 뜬금없는 말을 해버렸다. “한얼아.” “왜 형?” “넌 말이지.. 아무리 형이 잘생기고, 멋져 보여도 절대 형 넘볼 생각 하면 안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지 한얼이가 고개를 갸웃둥 거리며 물었다. “넘볼 생각이 뭔데?” “그러니까 그건 말이지.. 막 형한테 뽀뽀하고 싶거나 안고 싶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면 안된다는 거지.” “왜?” “형이니까.” “그럼.. 딴 형한테는 해도 돼?” 딴 형이라니? “누구?” 내가 눈에 힘을 주고 물었지만 눈치를 못챘는지 한얼이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류인이 형아.” 뭐? 누구라고? 하하.. 내가 잘못 들었겠지. 난 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되물었다. “류인이? 형 친구 한류인?” “응” 저렇게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역시 내 시력이 잘못.. 이 아니잖아! 아니 이녀석이.. 도대체 무슨 말을.. “왜!” “류인이 형.. 이뻐.” “이쁘긴 쥐뿔.. 야, 그리고 그런 얼굴은 잘생겼다고 하는 거야.” “알아. 근데..” 한얼이는 무릎 위에서 떨어지려는 책을 고쳐 쥐고는 말했다. “류인이 형은 웃을 때 눈이 없어져. 그거 되게 이뻐.” “눈이 없어져? 아.. 눈웃음 치는거?” 류인이 눈웃음.. 하긴.. 꽤나 서늘하게 생겨서 평소에는 얼음장 같이 보이긴 하지만 가끔 한번씩 눈꼬리를 휘며 웃을 때는 상당히 사람마음 흔들리게 하지. 음.. 이쁘다라.. “글구.. 류인이 형은 입술도 되게 이뻐.” 야.. 너.. 난 잠시 한얼이의 발언에 형으로써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이녀석 벌써부터 남자를 밝히는 건.. “형은 안 그래?” 당연하지! 근데.. 류인이 입술이 이쁘긴 하지.. 아랫입술이 약간 도톰한게.. 헉 내가 무슨 생각을.. 이게 모두 다 소설 탓이라는 생각이 들어 난 얼른 보고 있던 ‘꿀꺽, 형을 먹다.’를 닫아버렸다. “한얼아 너 말이야..” 여자의 아름다움에 대해 일장 연설을 시작하려던 찰나 초인종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누구야?” 난 심각하게 집으로 쳐들어온 류인이에게 물었다. 어디서 싸우고 왔는지 옷은 엉망이고 입술에 약간 상처가 난 모습이라니. 나에 비하면 세발의 피지만 녀석이 몸에 손톱만한 상처라도 낫다는 건.. 상대가 꽤 쎄거나 숫자가 많았다는 걸텐데.. “그냥 오다 시비붙은 거야.” 내 침대위에 올라가 주인마냥 벽에 기대어 편히 앉은 녀석은 정말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답했다. “니가 시비 붙는다고 싸울 녀석이야? 그냥 내빼면 몰라도. 누구야?” “아이 씨..” 류인이는 내 질문에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히 욕을 했다. 도대체 저녀석 요새 뭘 하고 다니길래.. 고개를 흔들며 의자에 앉으려는데 다시 날 돌아본 류인이가 험악하게 말했다. “씨발.. 넌 약 안 발라주냐?” 앉으려다 어이가 없어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어버린 나에게 녀석이 재촉했다. “마데카솔 말고 후시딘으로 가져와.” 간신히 우리 집에는 마데카솔 밖에 없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약을 가져와 녀석 앞에 앉았다. 저 녀석 입속에 약을 들이 부을까라는 생각을 겨우 참으며 손에 약을 짜내는데 의외로 류인이가 조용히 있다는 생각에 살짝 눈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아까 소설과 한얼이와의 대화 영향일까? 조용히 눈감고 벽에 머릴 기대고 앉아있는 녀석의 얼굴이 새롭게 보였다. 뭐 원래 잘난 얼굴이긴 하지만.. 깨끗한 피부라던지, 긴 속눈썹, 그리고... 입술. 붉은끼가 도는 도톰한 입술만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탐스럽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들어 살짝 입술에 가져다 댔다. 번쩍. 그 순간 류인이의 눈이 갑작스레 떠졌고 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대로 얼어버려 손도 못 떼고 허망하게 류인이를 쳐다보자 녀석이 내 손을 입술에 덴 채 중얼거렸다. “바보. 약은 반대 손에 있잖아.” “어? 아.. 하하.. 그.. 그렇네..” 진짜 바보다 이 경민.. 스스로 딱딱하게 굳어지는 표정을 느끼며 일부러 세게 류인이의 머리를 한손으로 잡고 우왁스럽게 약을 발라줬다. 그리고 과장되게 녀석의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자 다 됐다. 누가했는지 치료한번 끝내준다.” 그리고 녀석의 팔을 토닥거리던 손을 치우려는데 갑자기 류인이가 그 손을 잡아 왔다. “경민아.” “왜?” 류인이에게 손을 잡힌 채 침대위에 엉거주춤 앉아 녀석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머리를 벽에 기댄 채 날 잠시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정말 준비 된거지?” 류인이가 묻는 준비는 분명 그 동성애적 사랑의 증명이여야 했다. 아니 그거밖에 없어. 근데 왜.. 내가 핑계 대었던 그 겉포장이 아니라.. 솔직한 나의 변화를 묻는 것만 같을까? 잠시 혼란을 느끼다가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일 보여준다고 했는데 왜 이런 걸 물었을까란 의문은... 한얼이가 이뻐 보인다고 했던, 그 눈이 없어지는 웃음을 내 눈 앞에서 짓고 있는 류인이 때문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정말.. 그 모습이 너무 예뻐 보여서..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공포증 - 18 4. Phallophobia (남성성기(性器) 공포증) 12년간 봐와온 얼굴이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같은 학교 여자애들이 녀석의 몸짓하나하나에 열광하는 것도 매일 봐왔고, 중 3때 그 유명한 ‘Perfect Ru-In'이라는 우스꽝스런 팬클럽 창단식에도 초대받는 어이없는 일이 있었던만큼 녀석이 잘난 얼굴이란 걸 안다. 그래서 그 얼굴이 잘났다는 걸 확인하는 건 나에게 있어 단지 밥은 하루에 세 번 먹는 것이(그래 네번!) 라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 독도가 우리땅이란걸 이제야 안 것처럼 새삼스레 그 얼굴 가슴이 떨렸다는 건 나에게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왜 그랬을까? 입술을.. 만져 보다니. 애써 어제 본 그 소설 때문이라 위안하지만 평소처럼 농담으로 넘어가지질 않는다. 그리고.. 가슴 철렁할 정도로 웃던 그 얼굴도. 제길, 이렇게 어색하고 반갑지 않은 걱정은 너한테 안 맞는단 말이다 이 경민. ’덜컹‘ 의자 끄는 소리에 난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다른 때보다 일찍 일어난 탓에 아니 실은 거의 못자는 바람에 그냥 학교로 일찍 온 거였기 때문에 아직까지 교실에는 네 다 섯 명의 애들만 있었다. “너.. 일찍 왔네.” “어..” 딱딱한 몸짓으로 자리에 앉는 병국이의 등을 보며 대답했다. 근데.. 이건 생각도 못했는데 왠지 이 녀석 얼굴보기가 좀.. 쑥스럽단 생각이 드는 건 역시 어제 내가 읽은 그 살아 숨쉬는 생생한 잠자리묘사 때문이겠지? 그걸 이 녀석도 읽었을 테고. 약간 굳어있는 병국이의 등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는데 가방을 내려놓은 녀석이 살짝 몸을 돌리고 시선은 맞추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얘기 좀 하자.” 왠지 고3 들어 뒷동산에 자주 올라오게 된다는 생각을 하며 말없이 병국이와 나란히 앉아있는데 한참 말이 없던 녀석이 역시 시선은 맞추지 않은 채 물어왔다. “.. 다 봤냐?” “... 응.” 힐끗 곁눈질로 살펴보니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전부.. 다?” “어.” “‘마왕과.. 왕자님’도?” 그 제목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달빛 비추는 호숫가에서의 11페이지짜리 잠자리 씬이 떠올라 좀 머쓱해졌다. “사실적인 묘사.. 상당히 인상적이더라.” 그 말에 병국이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글이 많던데.. 네 누나 꽤 오래전부터 썼나봐?” 내 질문에 병국이는 낮은 한숨을 쉬더니 체념 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벌써 4년이나 됐군.” 4년? 잠깐 병국이 누나는 우리랑 1살 차이니까 그럼.. 고 1때부터?!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희 누나.. ” 병국이가 고개를 돌려 날 봤다. “여자 맞지? 남자 아니지?” 이미 예상한 질문이었다는 듯 녀석은 아무런 동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것도 정말 진짜 궁금해서 묻는건데... 도대체.. 그거 하는 방법이나 기분 같은 건 어떻게 알고 쓰는거래?”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후 병국이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온갖 동영상과 기타 시각자료를 통해서. 그리고 남자들이 느끼는 그 기분은.. ” 병국이는 눈만 살짝 돌려 날 보고는 다시 앞을 향했다. “인간 마루타가 하나 있다. 우리 누나.” 인간 마루타라면.. 혹시.. “뭐야 너.. 그럼 역시 1월에 한 수술이 치질 때문이 아니라..” “아이 씨! 그건 치질 맞아!! 난 순결하다고!!” 짜식 흥분하기는. “제길.. 내가 이래서 니네한테 말 안 하려고 했던건야! 씨발.. 내가 너한테 그거 준다고 말 한거 나중에 얼마나 후회한줄 넌 모를 거야. 우리 누나가 씨.. 나 방에 가둬 놓고 야한잡지 던져준 다음에 딸이 치고 감상문 쓸 때까지는 못나오게 가둬두고.. 흑.. 또.. 나..나 치질 때문에 검사받을 때는.. 의사가 거기에 손가락 넣을 때 기분이 어땠냐면서.. 막.. 흑..” 끝내 오열을 하는 병국이의 어깨에 손을 올려 토닥여 주며 손에 휴지가 없어 녀석의 옷자락을 쥐어주었다. “그래도 자기가 아끼는 고양이랑 싸웠다고 아들 쫓아내거나, 한겨울에 김장독 학교 운동장에 묻고 오라고 삽 쥐어주며 땅 파라고 하는 집보단 낫잖아.” 내 말에 빨개진 눈으로 얼굴을 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실은 뻥이야, 니가 제일 심해!...라는 건 얄팍한 우정을 위해서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다. “야, 근데 따지고 보면 그 소설들 거의 니가 반 이상은 쓴거나 다름없는데 너한테 컴퓨터라도 한대 새로 사줘야 하는 거 아니냐?” 내 말에 움찔하던 병국이가 조그맣게 말했다. “수술비.. 누나가 댔다.” “.. 그러냐.” 또 한번 침묵이 우리사이를 흘렀고, 갑자기 좀 전까지 고민하던 문제가 떠올라 병국이에게 물었다. “근데 너.. 그 소설들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았어? 그러니까.. 이쁜 남자를 보면 안고 싶다던지..” “야! 이경민! 그거 치질수술 맞다니까!!” 화를 내는 니 심정은 알겠다만, 자꾸 강조하니 더 의심 가려한다. 친구야. --; “아니 그냥 단순하게 .. 그런 소설 보다보면 영향 받아서 남자하고도 키스 해보고 싶고 뭐 그런..” “절대 아닌데.” “그.. 렇겠지?” “응. 야, 너 같음 수염 난 놈 얼굴에 입술 부비고 싶냐? 그리고 안을려면 아무래도 가슴이 있는 쪽이 감촉도 좋단 말야.” “근데.. 선우 현 같은 놈은 여자보다 더 이쁘니까..” “뭐야? 너 선우 현 하고 뽀뽀해보고 싶은거야?” “아니.” 절대 아니지.. 그래 선우 현이 솔직히 류인이 보단 더 여자처럼 예쁘지만.. 그렇다고 입술이 탐스럽다는 생각은 안했지. 뭐.. 악감정이 깔려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럼 왜 류인이는 그렇게 신경이 쓰였던 거지? 병국이 이놈도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데.. “혹시 선우 현이 너 괴롭히냐?” “뭐?” 내가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병국이가 심각하게 날 바라보았다. “실은.. 너한테 말 안 했었는데, 저번에 류인이 과학실 사건 있기 전에 누가 류인이한테 쪽지 전해주고 갔었지. 우리가 막 러브레터냐고 놀리던거.” 아.. 그 선우 현 똘마니로 추정되는 비리한 1학년이 주던거. 내가 눈썹을 찌푸리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약간 주저하더니 병국이가 입을 열었다. “나 그때 뒤에서 그 내용 얼핏 봤었는데, 무슨 협박장 같더라고.” “협박장?” “응. 근데.. 니 이름이 있었어.” 내 이름이라.. 그럼 저번에 선우 현이 말한게 맞았군. 왜 나 혼자 나왔냐고 두리번 거리던 연극이 사실이었단 말이지. 그런데 다음 병국이의 말은 내 생각을 뒤집는 거였다. “그 내용 말이야.. 널 따라오면 약점이던가 암튼 뭔가를 사실로 알고 폭로한다는 거였어.” 약점? 뭐야.. 진짜 있는거야? 내가 모르는 류인이의 뭔가가.. 근데.. 머리썼군 선우 현. 뭔지 몰라도 류인이에게 확인 받는 것과 나와 녀석 사이의 이간질을 동시에 거머쥐었으니. 잠시였긴 하지만. 제길.. 아무리 이뻐도 너한테 꼴리는 일은 절대 없을꺼다. 근데 도대체 내가 알면 안 되는 그 약점은 뭐지.. 머리가 아프군. 오른손을 들어 이마를 짚으며 내가 얼굴을 찌푸리자 병국이가 생각났다는 듯 물어왔다. “참, 내가 애써 너에게 자료까지 제공했는데 오늘 증명은 어떻게 할껀데?” “아.. 그건..” 이슬군을 통해서 해볼까 한다라는 뒷말은 얼버무리고 그냥 살짝 웃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이슬이한테 이따 나와 달라고 말은 안했네. 병국이와 교실로 오는 길은 교사 동 뒤쪽을 돌아 오는게 빠르기 때문에 슬슬 일대구가 들어올 시간이 되어 걸어가고 있는데 우리 맞은편에서 비둘기교장이 어떤 잘생긴 젊은 남자와 걸어오고 있었다. 보는 학생들로 하여금 당시 비둘기 사건을 떠올려 절로 웃음 짓게 만드는 비둘기 교장에게 예의 나와 병국이는 입가에 미소를 짓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옆의 남자에게 신경 쓰느라 교장은 우리의 인사를 못본 채 지나갔고 나도 곧 고개를 들어 내 옆을 스쳐가는 두 사람을 무신경하게 보고는 걸었다. 그런데.. 비둘기 옆에 있는 남자 어디서 본듯한데.. “야 왜 그래?” 자리에 멈춰선 나를 보고 병국이가 돌아서며 물었다. “너 먼저 들어가라.” 나에게 뭐라 말하려는 병국이를 뒤로 하고 난 교장과 남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스스로도 왜 그 둘을 쫓아가는지에 대한 자신이 좀 못마땅했지만, 궁금했다. 선우 현에 관해 무슨 얘길 하러 왔을까하고. 저 잡지에서 본 선우 현의 똑똑하다는 형님께서 말이다. 교장실 바로 옆에는 따로 손님들을 마지하기 위한 조그마한 방이 있었다. 작긴 하지만 전망좋은 큰 창에 좋은 가구로 배치되어 있는 이 방은 일명 하얀 봉투의 방이었다. 아마도 교장실에서 당당히 봉투를 받다가 누군가 불쑥 들어올 것을 염려해 만든 방이긴 하지만 높지 않은 창턱 탓에 살짝 발만 들어도 밖에서 아무나 안을 살펴 볼 수 있다는 건 전혀 염두해 두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창문까지 열어두면 대화도 들리고 말이다. “걱정하시는 학교 폭력 같은 건 전혀 아니니까 너무 염려 마십시오. 같이 있던 3학년 학생은 공부도 잘하고 모범적인 학교생활을 하는 아이라 저희 쪽에서도 둘이서 싸움 같은 걸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단지.. 그때 왜 선우 현 군이 쓰러졌는지는..” 비둘기가 말하는 공부 잘하고 모범적인 3학년 학생의 정체가 누군인지 깨달았을 때 내 귀에는 보청기가 들어있다라는 심정으로 창문으로 뛰어 들어 사실을 밝히고 싶었으나 타고난 자제력을 동원해 겨우 진정했다. “교장 선생님.” 차분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들어 옆모습만 보이는 선우 현의 형을 보았다. 선우 현만큼 이쁜 얼굴은 아니지만 깔끔한 인상에 차갑지 않는 부드러움이 있었다. “저희 현이 실은.. 결벽증이 좀 있습니다.” 결벽증? 난 좀더 소리를 가까이 듣기 위해 창문으로 다가갔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님이 좀 엄하게 키우셨는데, 그게 스스로에게 부담이 되었던 건지 결벽증으로 나타나더군요. 옆에서 잘 챙겨주지 못한 제 탓이 커 항상 미안하죠. 그런데 이미 제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는 증상이 더 심각해져서 남들이 사용하는 특히 화장실 가기를 꺼려합니다. 아마.. 그 3학년 학생이 모르고 현이를 화장실에 데리고 갔다가 일이 커진 것 같습니다.” “아.. 그런 사정이..” 그런가? 결벽증이라.. 그래서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갔다. 단지 화장실에 사람이 있는 걸 본 것 만으로 기절할 만큼의 결벽증이라면 길가다 사람하고 스치는 것에도 똑같이 그래야 하는거 아냐? 하지만 곧이어 말하는 선우 형의 말 때문에 그런 의심을 뒤로 미뤘다. “형으로써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을 책망하는 듯한 말투와 동생을 걱정 하는게 여실히 들어나 보여 그의 말이 이상하다 생각이 들어도 차마 반박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좋은 형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 하얀 봉투를 꺼내 비둘기에게 내미는 그가 보였다. 그래, 비둘기한테는 좋은 학부형도 되겠군. “야.” 헉! 너무 가까이서 들리는 류인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상체를 뒤로 젖히고 놀란 눈으로 류인이를 보았다. “o..왜?” 나의 과민 반응에 이놈이 약 먹었나라는 표정으로 잠시 보더니 습관처럼 내 어깨에 한팔을 걸쳐 올리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너 3번 문제 풀이 다 적었지? 중간에 좀 이상한게 있어서.” 책상위에 올려진 내 노트를 바라보며 류인이가 말했지만, 녀석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또 그 입술.. 너무 가까이에 있는 류인이 얼굴에서 오직 그 입술만이 보였다. 눈을 감고 속으로 미친놈을 세 번 외친 후 눈을 떴는데 녀석이 숙여서 노트를 보던 고개 그대로 눈만 들어 날 보고 있었다. “뭐가.. 이상한데.” “3번. 그리고 너.” “내.. 내.. 내가 뭐가 이상해!!” 녀석의 팔을 탁 쳐내고 의자를 뒤로 빼내며 떨어져 소릴 지르자 반 아이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나도 모르게 당황스러워 욕이 나오려는데 류인이가 잠시 날 보다 무심히 어투로 말했다. “너 필기 하나도 안했어.” 필기? 그제서야 난 펼쳐진 내 노트를 보았다. 수학선생님이 저번에 칠판에 써주신 문제만 있고, 오늘 풀이된 해설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반갑구나 노트야, 오늘 니 주인의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애용해주지 못했단다라는 농담 따먹기는 제발 시간과 장소를 가려서 나오란 말이다! “뭐야 경민, 드디어 너도 우리처럼 수학2의 포기자 대열에 끼기로 결정한거냐? 콩그레츄레이션이다 하하.” 타고난 눈치의 소유자인 선호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쓸데없는 말을 해왔다. “너나 혼자 셀프 콩그레츄레이션 해라.” 너의 기쁨을 위해 수학2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란 다짐을 하는데 평생가야 티끌만한 도움이 될까말까한 선호가 문제의 발언을 해버렸다. “짜식.. 쑥쓰러워하긴. 근데 너 누님의 필생의 역작이라는 그 야오이 소설은 다 읽었냐?” 순간 뒤돌아 앉은 병국이와 나 둘 다 숨을 멈추고 잠시 동안 얼어버렸다. “야오이?” 옆에서 류인이가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그 눈치가 빛을 발하는 선호가 끼어들었다. “너 야오이 모르냐?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동성애 소설. 그거 병국이가 경민이한테 참고하라고 보내줬잖아. 근데 뭐야, 안 읽은거야?” “야, 장선호 ..” “참고라니?” 선호에게 한마디 하려는데 류인이가 흥미롭다는 듯 한쪽입가를 살짝 올리며 그 특유의 건방진 표정으로 물어왔다. “하하.. 아니 그냥.. 요새 내가 동성애에 관심이 많아져서 말이지.. 하하..” “어땠어?” 어떻긴, 그렇게 물어본다고 내가 그거 읽고난 후 니 입술만 보면 요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고 말 할줄 알았냐? 근데.. 요상한 기분이라니.. 내가 무슨 생각을.. “별로 뭐..” 내가 최대한 무관심하다는 표정을 애써 지어내며 말하자 선호가 실망하는 얼굴을 하더니 아직까지 굳어있는 병국이를 툭 쳤다. “야, 니가 말해봐. 넌 많이 봤을거 아냐?” “많이 못 봤어.” 병국이의 심드렁한 대답에 선호가 뭐라 하려하는데 류인이가 조용히 물었다. “근데 왜 병국이 니가 그런 소설을 가지고 있는건데?” “하하.. 얘 누나가 야오이 소설 작가랜다.” 그러자 ‘그래?’ 라는 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더니 류인이는 보는 사람 상당히 불안하게 하는 그 짧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병국이 넌 누님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았겠군.” 좀 겁먹은 듯한 눈으로 병국이가 류인이를 돌아보자 녀석이 씨익 웃어보였다. “역시 1월달 수술은...” “아냐!! 그건 치질 수술 맞아!! 난 치질이야 치질!! 제발 좀 믿어라 이놈들아!!” 이미 전교생이 다 알고도 북한 아오지 탄광까지 소문날 외침에 반 아이들은 또 발광하는 구나란 표정으로 병국이의 발악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 원인을 제공했던 류인이가 병국이의 절규에 알았다는 듯 툭 한마디를 던졌다. “먹혔군.” ‘쿵’ 결국 그대로 실신한 병국이를 옮기느라 우정으로 똘똘 뭉친 우리 넷은 나란히 다음 수업을 제꼈다. “지금요?” 7교시가 끝나자마자 찾아온 내가 사람 없는 강당 뒤쪽으로 나와 달라 하니 이슬이는 좀 놀랜 눈치였다. “아니, 너 아직 종례 안 했잖아. 청소랑 다 하고.. 좀 부탁할 일이 있어서.” “예. 나갈께요.” 꽃 웃음을 날리는 이슬이의 그 얼굴과 표정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나를 보니 역시 득도를 위해선 계룡산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주변에 어르신 같은 인물만 하나 있다면 말이다. “고맙다.” 인사를 하고 뒤돌아섰는데 바로 앞에서 낮 익은 얼굴이 다가오다 날 보고는 멈칫하는게 보였다. 난 별로 아는 채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손에 붕대감고 멍 투성 얼굴에 부어있는 한쪽 볼을 보니 그냥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너도 선우 윤따라 원정 다니는 거냐 순남아? 내가 말없이 쳐다보고 있는데 그냥 갈 줄 알았던 순남이가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얘기... 좀 할 수 있어요?” 의외의 말에 난 굳은 표정으로 이유를 물으려 하는데 갑자기 순남이가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약간 겁먹은 표정인데.. 시선이 뒤쪽? 난 고개를 돌려 내 아직 내 뒤에 서있는 이슬이를 보았다. 근데 저.. 어르신의 표정은 정말 몇 번을 봐도 공포심에 존대말이 우러러 나오게 만드는 위력을 가지고 있구나. 살벌한 표정을 하고 있던 이슬이는 내 시선을 눈치 채고는 금새 원래의 그로 돌아와 털털하게 웃었다. “아.. 형 나 지금 그냥 나갈껀데 같이 가요.” 왜 그 순간 이슬이와 류인이가 만났었다는 민섭이의 얘기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난 이슬이를 가만히 쳐다보다 몸을 돌렸다. “청소는 하고 와라.” 그리고 앞에서 꿈쩍도 못하고 있는 순남이의 팔을 살짝 잡았다. “5분만이다.” 가까이서 보니 멍의 색깔이나 입술이 터진걸로 보아 바로 얼마 전에 얻은 상처 같았다. 나보다 몇센치 더 큰 순남이를 보다 손으로 시계를 가리켰다. “5분 내내 그러고 서있기만 할꺼냐?” 내 말에 혼자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날 바라봤다. “한 류인.. 현이한테 넘겨주세요.” 축하한다 류인아 너 졸지에 배구공 됐다. 널 토스해 달라는 이 발언을 녹음해 들려주지 못하는게 심히 아쉽구나. “선.배.라고 불러라.” 그 말에 잠깐 인상을 썼지만 다음에 나온 내 말에 인상을 더 구겨야했다. “그리고 류인이는 넘겨주고 싶어도 못 넘겨.” “그렇지만 안그러면 현이..” “너 바보냐?” 내 무표정에 비해 목소리가 너무 차갑게 나왔다. “한 류인을 몰라? 걘 지 하고싶은데로만 하는 놈이야. 내가 아무리 12년 넘게 그녀석과 붙어다녔더라도 넘겨주고 말고의 권리는 전혀 없단 말이다.” “하지만.. 안 그러면 현이 너무 다쳐요.” 어딘가 모르게 아픈듯해 보이는 눈 때문에 난 튀어나오려던 욕을 간신히 참았다. 그놈 때문에 다친 나한테 걱정하길 바라는 건 정말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 너도 한몫 했는데 기억 좀 해보라고. “자업자득이야. 다치길 바라지 않는다면 그놈을 설득해서 류인이한테 떨어지라고 해.” “이미..” 희미하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다쳤어요. 류인 선배 만나고 현이.. 겨우 치료할 수 있을 꺼라고 좋아했는데, 여기서 더 다치면 회복 못해요. 그래서 말릴 수 없어요.” 치료라.. 확실히 결벽증은 아니야. “뭔가 잊었나 본데, 자기 치료하자고 남 협박하는 놈 불쌍히 여길 수는 없어. 류인이는 내 친구다. 내가 얻어터지고, 맘 상하는 건 참지만 내 친.구.를 괴롭히는 놈 동정할 수 없어. 어차피 그 치료란거.. 선우 현이 가지고 있는 공포증을 없애고 싶은거 아냐? 그래서 극복하는 모습을 보이는 본보기가 필요한 거였고. 웃기는 짓꺼리 하지 말라고 전해. 그런걸 대리만족이라고 하는 거야. 자기가 원하는 대로 류인이가 공포증 극복하는 모습을 본다 해도 결국 선우 현 자신의 공포증은 절대 치료 못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나의 보이지 않는 질문에 순남이는 씁쓸한 표정을 지어왔다. 그래, 결국 모두가 결말을 아는 거라고. 선우 현 본인만 모를 뿐. “현이가 극복 못해도.. 희망을 얻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해요.” 희망이라.. 얼마나 대단한 공포증이길래 남을 보며 희망을 얻어야만 하는 건지 웃음이 나오려했다. 정말 웃긴건.. 난 아.직.도.이 대화에서 제일 중요한 선우 현과 류인이의 공포증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거다. 젠장. “류인 선배를 넘겨주지 못한다면.. 그냥 옆에서 떨어져 있어 주세요. 현이의 방법이 잘못 됬긴 하지만, 경민선배한테 상처 입힌 거 때문에 류인 선배가 그렇게 열 받을지 몰랐어요. 설마 지금처럼 현이를 몰아 붙일지도 몰랐구요.. 이대로 가다간..” “무슨 말이야?” 나 때문에 류인이가 열 받았다고? 선우 현을 몰아붙여? “현이가 그랬어요. 류인선배 자기 직접적으로 못 건드린다고. 그랬다간 류인 선배 집안에 문제가 생기니까. 그래서 주변에서부터 현이를..” 분명히 한국말인데 도대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은 거의 없었다. 온통 의문투성이인 녀석의 말에 내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해봐. 선우현을 류인이가 몰아 붙인다는게 무슨 뜻인지. 어떻게 한다는 건지 구체적으로 말하란 말야.” 내 말에 주저하는 눈빛을 보이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류인 선배가 현이의 공포증이 뭔지 알아냈어요.” “그건 나도 알아. 덧붙여 선우 윤도.” 그러자 그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실텐데요.. 류인 선배가 그걸 어떻게 이용했는지.” 제기랄.. “몰라. 난 그 두 녀석이 어떤 것에 공포를 느끼는지 모르니까.” 류인이가 대충 그걸 이용해 겁을 줬다는 건 추측할 수 있지만 .. “뭔지.. 말하면 류인선배 말리고, 설득시켜 주실래요? 현이.. 도와달라고.” 날 불안하게 내려다보는 순남이에게 난 천천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싫어.” 불행히도 극복하지 못할 엄청난 공포증을 선우 현이 가지고 있다 치더라도 말이다.. 잘못된 방법이라도 목적을 위해 쓰려는 놈을 도와주라 말할 수 는 없어. 잠시 실망한 듯 보이는 순남이가 신기하단 눈길로 날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류인 선배 말 허풍이 아니었어요. 약하지 않으니 해볼테면 해보라던..” “입 다물어.” 약하지 않다니? 누가? 그의 뒷말에 집중하려고 하는데 중간에 들린 뜻밖의 목소리 때문에 난 뒤를 돌아봐야 했다. “싫다잖아. 귀 먹었어?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꺼져.” 류인이는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오며 시선은 순남이에게 향한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류인이의 위협 때문이었을까 날 보며 진지하게 얘기하던 순남이는 얼굴이 하얗게 변한 채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머리에 더 많은걸 얹어준 순남이 덕분에 용량초과인 뇌를 회전을 시키느라 생각에 빠져있는데 류인이가 팔을 잡아끌었다.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하지만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날 끌고 가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 저딴 녀석들.” “...” 내 팔을 여전히 잡고 앞서 가던 녀석이 걸음을 멈추고 뒤 돌아 보지 않은 채 날 불렀다. “이 경민.” 바람이 류인이의 검은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고 지나가는 걸 말없이 바라보았다. “말했지. 너한테 속이는 거 없다고. 그러니까 기다려. 그리고 지금은 나한테만 집중해. 다른 문제들은 다 버려.” 류인이가 몸을 살짝 틀어 날 돌아보았다. 하지만 너무 복잡해. 두통으로 구역질이 날 만큼 내가 이해 못하는 무언가가 날 둘러싸고 있어. 그런데 신경 쓰지 말라고? 내 눈을 흔들림 없이 보던 녀석이 단호하게 덧붙였다. “이게 해답이야.” 해답? 난 묻듯이 녀석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래.. 나만 봐.” 공포증 - 19 류인이 특유의 낮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을 나에게 심어주려는 듯 내려다보는 녀석의 눈빛에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 복잡한 문제들의 해답을 제시해주는 고마운 눈앞의 인물을 그냥 따라가라 동조하고 있었다. 정말 그럴까? 훗... 난 쓴웃음을 내뱉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개소리 하지마. 무슨 자다 컴퓨터 부킹하는 소리하고 있어. 너 내 머리가 단순 돌덩인 줄 알아? 해답을 너한테 들을 만큼 대단한 고민을 한다해도 그건 내가 찾아 새끼야. 그리고.. 내가 너 일이년 본줄 알아? 누구한테 무겔 잡고 나만 보래. 너나 선우 현 일에 끼어들지 말고 나만 봐!” 잠자코 듣고 있던 류인이가 내 말이 끝나자 마치 다 말했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살짝 이를 갈며 내뱉었다. “병신.. 부킹이 아니라 부팅이야.” 엥? 부팅? 내가 언제 그.. 이런.. 제길. 나도 무게한번 잡고 녀석 기 좀 죽이려고 간만에 내뱉은 소리였는데 거기서 삑사리가 나다니. 허나 당황한 표정을 감추고 나 역시 눈썹을 치켜 올리며 내뱉었다. “저스트 키딩이었다.” 알아서 들어 먹을 것이지, 거기서 꼬리를 잡기는.. “저스트 미스테이크였겠지.” 눈에서 강력한 ‘넌 바보다‘광선을 내뿜으며 말하는 녀석에게 발끈할 뻔 했지만 그러면 녀석과 함께 보내온 내 인고의 세월이 물거품이 되기에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너 잘났다.” 그리고 녀석에게 씩 웃어 보이며 아주 아주 가끔 녀석이 잊어버릴만 하면 써먹는 강력 펀치를 날렸다. “꼬.맹.아.” 류민형님의 전용애칭인 꼬맹이란 말에 눈을 부릅뜨며 열 여덟을 외치는 녀석의 팔을 이번엔 내가 잡아끌며 앞으로 향했다. 물론 입가에는 미소를 띄우고. 그렇게 몇 걸음 걸어가다 조용히 내 손잡고 따라오는 류인이에게 말했다. “선우 현 일은 나도 무시하고 싶지만, 만약 나하고 연관되어진다면 나도 나설꺼다.” 내가 잡은 팔에 힘이 들어가며 류인이가 걸음을 멈추는 게 느껴졌다. 난 뒤돌아보며 강하게 말했다. “하지만.” 무표정하게 날 바라보고 있는 녀석을 보며 한글자 한글자 정확히 발음하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그것 이외의 모든 경우에는 기다린다. 궁금해 미치겠고, 너한테 물어볼게 태산같지만 니가 말한데로 기다린다고. 바보같은 네놈이 나 몰래 어떤 일을 하고, 당하던 간에 니가 기다리길 원한다면 백년이고 천년이고 꾹 참을테니까... 다치지나마라.” 이 얘기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하는건지 알 수 없는 눈을 보며 덧붙였다. “더 이상 마데카솔은 없다.” 내 말에 류인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내 손을 놓고 오른쪽 옆으로 와서 섰다. 그리고 버릇처럼 어깨에 손을 둘렀고, 앞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진작에 후시딘으로 바꿀 것이지.” 제기랄.. 난 녀석을 살짝 째려보며 구겨지는 인상을 피기 위해 노력했다. 도대체 나의 진지한 농담조차 전혀 통하지 않고 재수 없게 대꾸하는 상대를 뭐가 재미있다고 12년간이나 만나왔던 것이란 말이냐! 이러니 내 조크실력이 제 자리 걸음 일 수 밖에. 나의 고상한 언어적 유희의 방해요인으로 녀석을 제1의 적으로 단정 짓고 있을 때 저 멀리 강당 뒤쪽에 서있는 이슬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알아차리고 나에게 나직이 알려주는 류인이의 말도 함께. “씹... 저 자식은 왜 와 있는거야?” 무표정하지만 다년간의 경험으로 상당히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느끼 수 있는 류인이를 뒤로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있는 이슬이에게 물었다. “혹시 괜찮다면 너의.. 성적인 정체성에 대해 류인이에게 알려줘도 될까?” 내 질문에 나와 류인이를 번갈아 보더니 도대체 무슨 일이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요 무슨..” “이슬이는 동성애자다.” 류인이와 이슬이 사이에서 몸을 반쯤 돌린 채 류인이에게 입을 열었다. “니가 증명해보라던거. 내가 정말 동성애를 너한테 말한 것처럼 진짜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지에 대해 어떻게 증명, 아니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 많이 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뭐 니 말처럼 널 상대로 시험해 보이고 그냥 넘어갈까 싶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더라. 실은 조금은 핑계.. 삼아 너한테 한 말이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었거든. 근데 요 몇 일.. 좀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있어서..” 그러면서 난 이슬이를 살짝 쳐다보았다. “너한테도 확실히 알려줘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도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녀석에게 나의 생각을 알리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진심을 담은 눈으로 녀석을 보고 있자, 간단히 물었다. “어떻게?” “니가 전에 그랬지, 생긴 것과 달리 난 꽉 막힌 구석이 있어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먼지만한 크기라도 마음을 내줄 녀석이 아니라고. 그때 아마 내가 말하길..” “마음은 모르지만 오는 여자가 있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한다, 남자만 아니라면.” “그..그래.” 기억력도 좋은 놈. “그 남자라는 단서가 지금은 바뀌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거지.” 그리고 난 몇 걸음 떨어져 있는 이슬이에게 다가갔다. “비록 두 팔 벌려 환영은 아닐지라도..” 내가 어깨에 한 손을 올리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날 내려다보는 이슬이에게 살짝 웃어 보이며 류인이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그 마음은 받아 주는거.” 그리고 살짝 발돋음을 해 빠르게 이슬이의 볼에 내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쪽 소리도 안 날만틈 금새 닿았다 떨어진 후 난 한발자국 물러서 입 만 벌린 채 얼어있는 이슬이에게 말했다. “고맙다. 좋아해줘서.” 자 어떠냐 나의 이 동성애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변한 모습에 너 역시 감동받아 친구를 따라 동성애에 대한 시각을 바꾸게 될 것이...라는 뿌듯한 심정으로 몸을 돌렸는데.. “에?” 소리 나올 만큼 한류인의 얼굴이... 심히 좋지 않았다. 뭐..야? 저 험악하게 변해가는 표정은! “야, 류.. ” 헉! 녀석을 이름을 부르려다 주먹진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는 모습에 그만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야 했다. 저 자식 왜 저래!! 살기어린 류인이의 모습에 얼어 있는데 뒤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더니 이슬이 역시 류인이의 모습을 봤는지 내가 뽀뽀한 볼에 한손을 댄 채 울먹이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이 이봐.. 나 좋아한다고 했잖아. 이런 일에 끼어들게 한거 미리 말 안한건 미안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면 내가 미안.. “으잉~ 난 몰라!!” 얼굴, 목소리와 말투가 전혀 매치 안되는 대회에 나가면 당당히 금메달을 차지할 이슬이가 저런 귀엽고, 끔찍한 말을 큰소리로 내뱉으며 여전히 볼을 한손으로 감싼 채 뛰어가 버렸다. 잠시 류인이는 잊고 굵은 목소리로 울리던 ‘으잉~ 난 몰라!’를 오토리버스하며 충격에 싸여있던 내게 녀석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경민.” 고개를 돌리니 이제 그 주먹의 목표가 나를 향할 것 같은 포즈로 노려보고 있는 한류인이 있었다. 앗.. 순간 나도 이슬이처럼 ‘으잉’과 같은 충격적인 감탄사를 내뱉고 류인이가 얼어있을 사이 도망가 버릴까하는 생각이 0.1초동안 스쳐지나갔다. 허나.. 이미 내 눈을 옭아매고 있는 녀석의 시선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너..” 겨우 화를 억누르는 듯이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으며 류인이는 한걸음 다가왔다. “.. 감히 내 앞에서..” 니 앞에서? 화를 내는 부분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녀석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는데 류인이가 입을 다물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노려봤다. 그래, 니 앞에서 뭐? “누가.. 딴 사람한테 증명하라고 했어.” 뭐야.. 그냥 단지 너한테 하라고 했던 말을 이행 안 했다고 화를 내는 거냐? 어차피 너도 날 골탕 먹이자는 심정으로 장난삼아 했던 말이었을 게 아니냐고. 진짜로 했으면 아마 날 반 죽여놨을지도 모르는데, 나의 진심을 담아 널 설득하게 위해 엄헌 놈 볼에 뽀뽀까지 한 나를 칭찬해 주지는 못할망정 .. “귀먹었어? 너 머릿속에 돌덩이만 굴러다니냐? 씨발.. 나한테 하라고 했지!” 뭐? 돌덩이? 이 자식이.. 열심히 머리 굴려 고민한 내 몇 일 간의 노력을 고작 돌덩이 취급하는 거냐? 어? 그리고 내가 정말 너한테 뽀뽀라도 하면 그게 증명이 될 것.. 잠깐. 순간 내 머릿속에 번쩍하고 천둥, 번개가 휘몰아쳤다. “맞아.” 난 류인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확히 녀석의 입술을. “뭐?” 갑자기 달라진 내 표정변화와 말투 속에 담긴 강한 의지를 느낀건지 녀석이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날 내려다봤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꼬박 하루 동안 고민해야 했던 문제의 해답을 지금 찾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내가 왜 류인이 입술을 보고도.. 끌려야 했고, 두근거림까지 느껴야 한건지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데. 그리고 지금 녀석은 도와주려 하잖아? 내 기분이 한때의 야오이소설로 인한 영향이었다는 걸 증명할수 있는, 아니 그래야만 하는 중요한 문제를 말이다. “그래, 니 말대로 하면 알수 있을 거야.” 내 말에 류인이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다가 내가 녀석에게 빠르게 다가가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하지만 내 눈은 그 탐스런(제기랄!) 입술에만 시선을 둔 채 아까 이슬이에게 했던 것처럼 한 손을 류인이 어깨위에 올렸다. 그리고 발돋음을 하면서 나머지 손을 녀석의 뒷목에 가져다 대고 약간 얼이 빠져있는 녀석의 머리를 살짝 숙이게 했다. 그래, 모르면 그냥 해보면 되는거다. 그것도 변태 소리 안 듣고 확인 할 수 있는 이런 기회가 온건 천우신조가 아니더냐? 통통하던 이슬이의 볼살 대신 두개로 갈라져 도톰하게 올라온 따듯한 살들이 내 입술에 닿았고, 순간 힘을 주어 입술을 눌렀다. 내 손아래 놓인 류인이의 몸이 경직되는 걸 느꼈지만 그걸 인식할 여력도 없이 머릿속에는 온통 닿는 순간 찌릿하게 심장을 감전시킨 느낌과 점점 그 따듯한 입술의 온도에 녹아버릴 것 같은 기분으로 가득 차 버렸다. 굉장히 짧은 시간 입술을 누르고 있었다고 생각이 들지만, 충격적인 느낌들 덕분에 100만년은 지난 것 같은 시간감각으로 천천히 눌렀던 입술을 떼어 내었다. 숨소리조차 내고 있지 않은 류인이는 일단 내 사고 밖이었고, 나는 이 전혀 기분이 좋지 않아야할 키스가 반대의 결과를 나았다는 사실에 대해 고민하느라 녀석에게 손을 올린 상태 그대로 얼어있었다. 둘 다 잠시 그러고 있는데 스윽하고 내 등 뒤 허리 위로 올라오는 무언가가 느껴져 난 퍼뜩 생각에서 깨어나 류인이를 올려다 보았다. 살짝 내리깔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생각을 담은 채 날 내려다보고 있는 녀석의 눈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그 순간 내 허리위에 올려졌던 류인이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내 몸을 확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난 균형을 잡기 위해 본능적으로 목 위에 어정쩡하게 올려놨던 손을 미끄러트려 류인이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야, 너 뭐하는..” “증명을 하려면..” 내려오는 녀석의 얼굴에 내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뒤로 젖히려는 순간 류인이의 한손이 내 뒷머리를 잡아 홱 하고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기울여? 어 하며 눈을 한번 깜박하는 사이 내가 부딪친 강도와는 전혀 상대도 안 되는 강한 충격이 내 입술을 짓눌렀다. 뭐야 이게.. 너무 놀라 어정쩡하게 굳어있는 사이 내 입술은 순식간에 빨아 당기는 녀석의 입술로 인해 침으로 젖어버렸다. 잠깐, 지금 녀석이 하는 건 단순한 뽀뽀의 수준이 아니라.. 뒤늦은 충격으로 난 녀석의 어깨를 잡았던 손에 힘을 주어 밀며 떨어지라고 말하려 했다. 허나.. 밀어제낀 몸은 꿈쩍도 안하고 섣불리 벌렸던 입안으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무언가 물컹한게 들어와 내 혀를 감아버렸다. 물컹한 거라면.. “!” 난 거의 가사상태에 빠질만큼 심한 정신적 충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대로 녀석의 입술을 받아들이고 있어야만 했다. 내가 녀석을 더 이상 밀지 않는걸 알았는지 뒤에서 날 가둬두고 있던 손이 천천히 내 등위를 움직였고, 강하게 내 입술을 물고 혀로 난입하던 그의 거칠은 키스는 조금 가라앉은 듯 속도를 줄여나갔다. 하지만.. 천천히 숨 내쉴 틈을 주며 살짝 벌려진 내 입술 위에 배회하는 류인이의 따뜻한 온도는 오히려 내 사고를 더 마비시키고 있었다. 온몸의 감각세포가 입술에만 몰린 듯 녀석이 주는 감촉이 너무 크게 와 닿아 혼돈스럽고 경악해야할 모든 걸 뒤덮었다. 그래서 천천히 내 입술 위에서 떨어져 눈을 뜨고 날 내려다보는 류인이의 모습을 보아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마 굉장히 바보같아 보일, 입은 반쯤 벌리고, 눈은 똥그랗게 뜬 내 모습을 보며 류인이가 속살이듯 중얼거렸다. “이 정도는 되야지.” 뭐..가? 멍해있는 머릿속에 겨우 의문을 하나 떠올릴 때 내 등을 조이던 류인이의 팔이 스르르 풀렸고, 내 몸은 자연스레 녀석에게서 떨어졌다. 한참을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류인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니가 알려주고 싶어 하던 생각은 접수했으니까 과학실의 범인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참고할게. 그러니까..” 녀석의 말을 머릿속에서 새기기만 하고 해석은 못한 채 바보같이 보고 있는 날 잠시 내려다 보다 뒷말을 이었다. “확실히 내 생일까지 범인 넘겨.” 그리고 내 어깨를 툭 치곤 옆으로 지나갔다. 류인이의 발자국 소리가 희미해지고 얼핏 멀리서 철퍼덕 뭔가 엎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의식하지 못했다. 그렇게 썰렁한 공터에 나만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되기까지 상당히 오래 걸렸던 것 같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 않아있었으니까. 애써 머리를 굴리며 녀석의 말을 이해하고 상황을 정리하려 노력하며 난 아직까지 녀석의 온기가 느껴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일단 제일 급한 문제는 녀석이 말한 범인의 이름을 과연 어떻게 넘기느냐와 왜 류인이 자식과 키스를 했는데 어째서 훗 하며 코웃음 한번으로 넘어가지질 않느냐 따위여야 했다. 그래 이 말로만 듣던, 수많은 영상으로만 봐와오던 설왕설래를 직접 체험해본 입장으로 당연히 불알친구와의 진한 스킨쉽에 대한 결과를 레포트로 제출해 당장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하지만.. 지금 내 모든 명령은 당장 한군데를 향하고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소리치고 있었다. 난 절대 전력질주로 100m 달리기를 한게 아니란 말야. 착각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제발.. 그 급한 펌프질 좀 멈춰! 이 망할 심장아!!! 공포증 - 20 토요일. 이 얼마나 기분 좋은 단어란 말인가. 비록 오전 수업이 있긴 하지만 다로 다음날이 일요일이라는 기대감과 흥분을 느낄 수 있는 요일이기에 어떠한 불행한 상황에서도 항상 기쁨을 주는 단어이자, 즐거워해야 할 요일이것만.. 선호, 병국이와 평소처럼 농담 따먹기를 하는 류인이를 노려보며 좀비처럼 앉아있는 나에게 토요일은 이미 저 멀리 200만 광년 우주너머에 있었다. 그리고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류인이를 보면서 내가 여태껏 녀석에 대해 아는 건 진짜가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중이었다. 녀석의 무신경함과 뻔뻔스러움이 일반인에 비해 상당하는 것은 다 거짓이었다. 이 놈은... 이미 상당한 것을 뛰어넘어 은하계 제일인 것이다. 이봐 너..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거냐? 응? 너랑 12년간 농담 따먹기 하던 친구랑 ㅋ....를 했는데 말이다. 제길.. 단어조차 나오질 않는군. 그래, 니가 과학실에서의 사건 후 그 단어 말 못한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가는구나. 제길.. 수학여행때 술마시고 노느라 이틀연속으로 밤을 샌 이후 어제 정말 간만에 밤을 새며 뜬눈으로 해뜨는 걸 바라보았다. 그래도 수학여행땐 술기운에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어제는 맨 정신에 심각한 자아정체성의 탐구와 우정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을 하느라 지금 얼굴 꼴이 말이 아니었다. 분명 눈은 빨갛게 충열 되있을 테고 밤새 쥐어뜯은 머리는 아직까지 제멋대로 뻗쳐있겠지. 문제는 밤새 고민을 하고도.. 결론이 나지 않는 다는 거다. 아니 결론은커녕... 내가 류인이와의 접촉에 두근거림을 느꼈다는 것에 대한 확인만 더 늘어났지. 그리고.. 내가 인정해야 할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함께. "휴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와 내쉬고는 고개를 드는데 언제부터 였는지 세 놈이 말없이 날 보고 있었다. “뭐야?” “너야 말로 아침부터 웬 한숨이야?” 병국이의 물음에 곁눈질로 류인이를 잠깐 본 후 어깨를 살짝 으쓱해보였다. “젊음의 고뇌였다.” “웃기네. 젊음의 망상이었겠지. 곧 죽어도 폼 잡기는.. 야, 빨리 옷이나 갈아입어.” 선호의 재촉에 생각해 보니 1교시가 체육이었고, 벌써 반 애들 몇몇은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어그적 거리며 일어나 사물함에서 체육복을 꺼내 교복 남방을 벗고 윗도리를 집어 드는데 눈에 류인이의 맨다리가 들어왔다. “너 엎어지기라도 했냐? 무릎이 왜 그래?” 난 체육복에 한 팔을 꿰며 류인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녀석이 잠깐 움찔하는가 싶더니 표정이 험악하게 변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이였다. “씹.. 엎어지긴 누가 엎어져! 그냥... 부.. 딪친거야!” 아니 엎어진게 아니면 말 것이지 소릴 지르긴 짜식.. 내가 약간 어이없단 표정으로 녀석을 쳐다보는데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은 선호가 내 말을 듣고 류인이의 다리를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 한류인. 니가 바보같이 부딪칠 때도 다 있고, 뭐 좋아하는 사람이랑 찐~한 키스 하는 생각이라도 하면서 걸은거냐?” 순간 나머지 한쪽에 팔을 넣던 나와 바지를 입고 막 체육복 윗도리를 집던 류인이 모두 그대로 동작을 멈춰버렸다. 류인이 녀석이야 단지 선호의 황당한 말에 멈춘 건지도 몰랐지만, 난 그 키스라는 단어에 기억과 감촉이 생생하게 떠올라 버려 갑자기 뇌 기능이 정지하고 피가 얼굴로 몰리는 듯한 기분이었으니까. 아.. 제기랄..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되는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거지? 정말 속으로 미치겠군을 연발하며 겨우 고개를 숙이고 삐그덕 거리는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천천히 가슴께에 걸려있던 옷을 정리하며 내리는데 이번엔 병국이가 입을 나불댔다. “참 근데 경민이 너 어제 증명 한다던 건 어떻게 됐냐? 한 류인, 얘가 증명 잘 하디?” 또 다시 몸이 굳어 버렸다. 반쯤 내리다만 옷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얼어있는데 아무소리가 들리지 않아 살짝 눈동자만 굴려 앞을 보니 허리를 숙이고 떨어진 교복마의를 잡은 상태 그대로 역시 정지해 있는 류인이가 보였다. “뭐야? 니들 뭔 일 있었어? 반응이 왜이래?” 선호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서둘러 옷을 내리고 하하 거리며 웃어주려 마음 먹었다. 그래, 마음을 먹었지, 그런데 도통 이놈의 몸은 왜 말은 안 듣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것이냐 대체! 그때 다행스럽게도 천천히 몸을 일으킨 류인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이거 다행 맞아? 설마 저 녀석 어제 우리가 ㅋ..를 했다고 말하지는.. “장 선호.” 무거운 음성으로 부르자 선호가 무슨일이냐는 듯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류인이를 바라봤다. “옷 반대로 입었다.” “뭐?” 류인이의 말에 선호가 급히 입고 있는 체육복을 둘러보더니 인상을 썼다. “무슨 소리야? 제대로 입었잖아!” “그래? 난 하도 목이 쪼이길래 니가 뒤판을 앞으로 입은 줄 알았지. 어디 그래서야 숨 막혀 체육시간에 제대로 뛰겠냐?” “뭐?!!!! 너... 너... 야, 임 병국. 니가 보기에도 목이 쪼여보여?” 거의 얼굴이 터질것처럼 뻘개진 선호가 흥분하며 병국이에게 묻자 심각한 표정으로 변한 병국이가 유심히 선호를 살피며 대답했다. “응!” 그 간결하고 강력한 대답에 뒷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고 쓰러지려는 선호를 병국이가 받치며 걱정스레 말을 이었다. “솔직히 너 체육복 입을 때마다 질식사 하는건 아닐까 심히 친구로써 걱정됐었다. 이제와서 말인데.. 처음 봤을 때는 너 자살하려는 줄 알았어.” 책상위에 대짜로 뻗어 남자다운 목의 굵기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선호와 계속 자살의 부당성에 대해 설교하는 병국이를 뒤로 하고 난 몸을 돌렸다. 일단 류인이 덕분에 저 녀석들의 관심이 돌려진 건 다행인데.. “나가자.” 평소처럼 무표정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류인이의 뒷모습을 잠시 보면서 혹시 저 녀석도 상당히 어제 일에 대해 신경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말 녀석 답지 않게 말이야... “봤냐?” 병국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와 선호에게 확인하듯 물었고,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8조로 나눠서 조 별로 농구하라고 한 후 어디론가 사라진(변비로 추정-병국이 의견) 체육선생의 말씀을 착하게 실행한 우리는 방금 게임을 끝내고 스탠드에 앉아있는 중이었다. 2조에 속한 우리 셋과 달리 5조에 속한 류인이는 이제야 게임을 시작하고 있었고, 땀을 식힐겸 앉아 류인이의 활약을 지켜보려던 우리의 눈에 지금 등교를 하는 건지 얼마 전 나와 병국이를 옥상에서 묵사발 만들어 놓던 일학년 몇 명이 눈에 띈 것이었다. 은혜는 하루만, 복수는 100년간이란 모토로 똘똘 뭉쳐진 우리가 단번에 녀석들을 알아본 건 당연한 거였는데, 문제는 어디서 맞고 왔는지 얼룩덜룩한 얼굴에 붕대를 몸에 칭칭감은 녀석들이 그 멀리서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갑자기 뒷걸음치더니 도망을 가버린 것이였다. 이 황당한 상황에서 잠시 침묵만이 우리 사이를 흘렀고 병국이가 자신의 눈이 의심스럽다는 듯 우리에게 물었던 것이다. “저 새끼들 혹시 우릴 류인이로 잘못 본거 아냐?” 선호의 말에 나와 병국이는 물끄러미 녀석을 바라보았고,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럴 가능성은 0.00001%도 안된다고 주장하고 싶다. 특히 선호 너는.” 나를 야리는 선호를 무시하고 병국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우릴 보고 도망간거 맞지?” “그래. 꼴 보니 누구한테 크게 당한거 같은데 왜 우릴 보고 저리 내빼는 거야? 거참 어이 없구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병국이를 보다 멀리서 종횡무진 활약을 하고 있는 류인이를 바라보았다. 뭔가가 있다면.. 당연히 너겠지?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아는데 왜 난 니가 손을 쓴거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어제 널 보고 내빼던 순남이도 그렇고.. 걔가 말한 것처럼 니가 선우 현의 공포심을 이용했다는 것도.. 모두 마음에 걸렸다. 넌 도대체 나 모르는 곳에서 무엇을 하는 걸까? 나의 시선을 알아차린건지 드리블 하던 녀석이 살짝 내 쪽으로 눈을 돌리는게 보였다. 날 본건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다시 게임에 열중하며 골대로 공을 몰아가던 류인이가 상대편의 등 뒤로 패스를 하는게 보였고, 패스를 받은 같은 편이 바로 골대 아래서 점프를 했다. 하지만 아깝게 골이 링에 맞아 튕겼다. 그런데 포물선의 정점에서 떨어 지는 공을 향해 누군가가 튀어 오르는게 보인다 싶더니 그대로 볼을 잡은 채 골대가 부서져라 밀어 넣었다. “이야~” 옆에서 병국이의 감탄을 들으며 나도 볼 때마다 저런 감탄사가 나오는 류인이의 덩크에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큰 키도 있지만, 저렇게 강하게 골대가 아직까지 흔들릴 정도로 내리 칠 수 있는 건 웬만한 점프와 힘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확실히 능력만큼은 대단한 녀석이라는 건 멍하니 류인이를 바라보며 경기할 생각은 저 멀리 날아간듯 보이는 운동장의 애들을 보면 알 수 있겠지. “도대체 저 녀석이 못하는 건 뭐야?” 아까 류인이의 체육복 발언이 가슴에 남아있는건지 선호가 약간 시기어린 말투로 투덜거리자 내가 답해줬다. “번지점프, 스카이 다이빙, 패러 글라이딩..” “야..야.. 하나도 위로 안된다. 저 녀석 고소 공포증이라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지만 저렇게 그 이외에서 모두 잘하는 거 보면 그래도 역시 잘난 놈이란 생각이 드니까. 얼굴만 못생겼어도..” 그래, 눈에 확 띄는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났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녀석. 맞는 말이지. 더구나 얼굴도 저리.. 음.. 저렇게 땀에 젖어 이마에 몇 가닥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모습조차 섹시해 보이니까. 뭐? 섹시? 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미쳤군.. “기죽기는 짜식. 안경빨이긴 하지만 너도 못생긴건 아니니 기운내라 경민.”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병국이의 손을 느끼며 난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는 안되겠어. 자꾸 어제 녀석과 한... 가 생각나는 것도 그렇고, 저 녀석을 보며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도 싫고.. “너 저번에..” 내 말에 병국이가 손을 내리고 날 쳐다봤다. “너 아는 여자애가 나 보고 마음에 든다고 했었지?” “너를? 아... 우리 옆집 사는 순이.” “그..그래 순이.--;” “걔 왜?” 그래, 어쩌면 내가 너무 폐쇄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일지도 몰라. 주변에 여자없이 저렇게 외모가 근사한 녀석이 눈앞에 항상 어슬렁거리니.. “나 소개시켜줘.” 담담하게 내 뱉은 나의 말에 병국이와 선호와 눈을 크게 뜨고는 날 쳐다봤다. “잠깐 순이라면.. 그 눈 똥그란 귀여운 병국이네 옆집 305호 순이? 야, 이경민. 너 왜 그래? 여태껏 소개팅 한번 안 하며, 여자한테는 관심도 없던 놈이.” 선호가 내 쪽으로 당겨 앉으며 물었고, 난 병국이에게 재촉하는 눈빛을 보냈다. “너 진짜야?” “응.” “뭐.. 나야 상관없지만. 진짜로 순이 소개시켜 달라고? 흠.. 순이가 들으면 기쁨의 댄스 페스티발을 벌이겠군. 좋아, 내가 당장 연락해서 이번주 일요일에라도 순이와..” 그래 순이와..? 그 뒷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병국이의 안색이 하얗게 변하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뭐야? 순이와의 아름다운 미래를 계속 설계해주란.. “무슨 말이야?” 갑자기 내 위로 음침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싶더니 그에 상응하는 낮고 차가운 류인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더니 바로 위에서 류인이가 날 날카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요일 날 뭘 한다고? 임.병.국?” 질문은 분명 병국이에게 한 것일텐데 어째서 살벌하게 날 노려보는 것이냐 이놈아.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눈빛이 따갑다고 느낄만큼 날 쳐다보던 류인이가 털썩하고 내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옆집 순이와 일요일 날... 소개시켜 주려고... 선호를! 하하하..” 하하하란 단어를 정확히 발음하며 어색하게 웃는 병국이는 옆에 앉은 선호의 어깨를 툭툭쳤고, 병국이의 이해할 수 없는 갑작스런 말바꿈에 선호는 입에 수박이라도 들어갈 듯 크게 벌리며 소릴 질렀다. “진짜냐? 순이 나 해주는 거야? 내가 해달랬데는 그렇게 튕기더니 너 진짜지? 나 해주는거 맞지? 어?” 이 어이없는 상황에 내가 인상을 쓰며 병국이를 보자 내 눈치를 살피며 병국이가 주춤주춤 선호를 끌어당기며 일어섰다. “하..하.. 잠깐 나랑 선호는 화장실에 좀..” 졸지에 순이와의 만남이 약속되어 광란의 몸짓을 하는 선호를 병국이가 끌고가는 걸 보며 내가 중얼거렸다. “저놈이 약 먹었나..” “야.” “왜?” 두 팔을 뒤로 뻗어 상체를 뒤로 젖힌 류인이를 보며 내가 묻자 녀석이 날 가만히 보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냐.. 씹.” “뭐야?” 내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채근하자 녀석이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막 운동을 끝내 땀에 젖은 얼굴과 약간 헝클어진 머리, 하지만 차분하게 가라앉은 녀석의 표정을 살피며 참 이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저 얼굴. 그것 때문인지도 몰라. 단지 말야. 그리고 그 이쁜 입술이 천천히 열리는게 보였다. “조심해.” 순간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다짜고짜 조심하라니? “뭘?” 그런데... 어째서 대답대신 음침한 미소를 짓는 것이냐? 내가 살짝 뒤로 물러나며 녀석을 경계하자 입술의 굴곡을 더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졸업할 때까지는 기다린다는 건 무리야. 그지?” 그러니까 뭐가? 너 아까 덩크하다 골대에 머리 부딪쳤냐? 왜 자꾸 헛소리야? 제발 앞, 뒤 잘라 먹지 좀 말란 말이다. “뭘 기다리는데?” 하지만 내 대답대신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은 손으로 내 머리를 한번 헝클어트리더니 뒤돌아 섰다. 또 모를 말만 남겨둔 채. “이제야 살맛 나겠군.” 종례시간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 있다며 이마의 두가락 머리를 휘날리며 교실로 달려온 일대구에게 모든 반 아이들이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한번 만족스런 얼굴로 쓰윽 보던 그가 들뜬 목소리로 그 소식을 전했다. “기뻐해라! 바로 다음주에..” 다음주에? 그토록 바라던 급식 대 개편이 있는 것인가? 아님 드디어 50년간 긴장으로 팽팽히 지내온 정전협정이 깨지고 전쟁이 발발해 올해 수능은 없다라는 꿈같은 소식이란 말인가.. “첫 모의고사가 있을 예정이다 하하하하~” 일직이 일대구의 인간성을 파악해 모든 기대를 버리고 있었던 류인이 녀석만 빼고 나머지 반 애들 모두 좆 됐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 한마디만 하고 간악한 웃음을 흩날리며 아무런 종례 없이 사라진 일대구의 어이없는 모습에 모두들 담임을 바꿀 수 있는 대책들을 서로 논의하는 분위기가 연출됐고, 가장 충격을 받은 것 같은 선호가 뒤돌아 앉더니 울분을 토해냈다. “씨발.. 일대구 너무 썰렁한거 아냐? 지금 저걸 코믹 퍼포먼스라고 하고 간거냐?” “글쎄... 내가 보기엔 가슴깊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 같던데.” 내 말에 병국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진심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웃음소리야. 아주 심금을 울리더만.” “제길.. 근데 류인이 넌 아무렇지도 않냐? 담주가 벌써 시험이라는데.” 뭔가를 생각하듯 책상 위를 샤프로 톡톡 두드리던 류인이가 선호의 말에 고개를 들더니 우릴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 오늘 내일 모여서 공부할까?” 그 말에 우리 셋은 동시에 뜨악하는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재수없게도.. 우리 중에 공부는 제일 잘하면서 언제나 공부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아 보는 이로 하여금 의욕상실과 마약과 맞먹는 컨닝욕구를 느끼게 하던 놈인데.. 스스로 공.부.를 하자고 하다니.. 역시 니 놈도 드디어 고3이란 걸 인식한거냐? “너.. 한류인 아니지? 이놈 입에서 공부란 단어가 나오다니.. 야, 이놈 얼굴 껍질 벗겨봐. 아직 담임의 퍼포먼스가 남아 있는게 분명해.” 믿지 못하겠다는 선호를 뒤로 하고 내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진짜야? 너 우리가 같이 공부하자면 코웃음 치면서 그런건 공부 못하는 애들이나 하는 거라고 했잖아.” 그러자 류인이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확실히 니들이 공부를 못하긴 하지.” 흥분하는 병국이와 선호를 부여잡고 내가 녀석을 노려보자 한쪽 입술을 씩 올리며 녀석이 덧붙였다. “그러니 내가 도와주겠다는 거야.” 녀석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사이 병국이가 물었다. “어디서 하게?” 그런데.. 더 놀라운 말이 류인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집.” 또다시 눈을 똥그랗게 뜬 우리 세 사람은 웬만해선 자기 집에 부르지 않는 녀석의 말에 정말 담임이 류인이로 변장해 아직까지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선호의 주장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 진짜야? 너 농담 아니지?” 병국이가 되묻자 류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셋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다 다시 류인이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류인이네 집은 크기도 그렇거니와 혼자 따로 지내는 독채는 여러모로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일단 누구의 간섭도 없고, 냉장고만 열면 산해진미까지 아니더라도 음식이 가득 들어있으며, 가장 중요한... 어서 어서 놀아달라 손짓하는 최신형 게임기와 CD들은 모여서 놀기에는 딱이었다. 물론.. 공부를 할 꺼다. 아마도.. “그렇다면 우리야 너의 부.탁.을 받아들여 친히 너희 집에 납셔주도록 하지. 움하하~” 선호의 저 거만한 발언에도 무표정하게 있는 류인이를 의심스런 눈초리로 내가 바라보는데 병국이도 좋은지 실실 웃으며 물었다. “야, 그럼 끝나고 니네 집으로 바로 고잉투 할까?” “그러던지.” 그리고 멍하니 녀석을 보는 내게 물었다. “너도 올꺼지?” “나는.. 가야지.” 선호와 병국이가 간다는데라는 뒷말은 생략하고 녀석들을 보니 이미 표정은 류인이 집에 가있는 상태구나. “우리 모처럼 모이는 건데, 저녁 때 삼겹살 꾸워 먹을까? 응? 거기다 소주도 한잔 캬~” 이미 소주 댓 병은 걸친 것 같은 정신상태의 선호가 의견을 내자 류인이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삼겹살은 안돼.” “왜!!” 강력한 선호의 반발에 류인이가 무표정하게 간단히 내뱉었다. “형이 고기 싫어해.” 에? 거기서 형 얘기가 왜 나오는데.. 그리고 류민형이 고길 싫어했나? 아닌데.. 고길 싫어한건... 헉! 난 갑자기 멈춘 심장을 부여잡고 류인이 녀석을 경악스럽게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야.. 혹..혹시.. 그 형이란 건..” 나의 반응에 선호와 병국이가 의아스러워 했고, 류인이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고 있었다. “응. 오늘 둘째형 휴가 나와.” “....” “....” “....” 제..기랄.. 지금 누가 뭘 나온다고? 숨쉬는 것 마저 멈춰버린 우리 셋은 모두 귓구멍이 잘못된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설마 니가 말하는 그 둘째형이.. 바이크에 광적으로 미쳐있는 얼굴 이쁘신 성질 더러운 형님을 말하는 것이냐? 응? 얼굴색이 상당히 안 좋게 변한 병국이와 선호를 슬쩍 보다 내가 다시 확인했다. “오늘 류.진.이 형이 휴가를 나온다고?” “그래.” 또 한번 정적이 우리 네 사람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럼 그렇지, 이 녀석이 웬일로 자기 집에 오라 그런다 했더니 우릴 고문하려 하는구나라는 당연한 생각은 뒤로하고 일단.. 어떻게 하면 류민형과의 만남을 피할 수 있나 고민하는데 선호가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아직까지 창백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흠흠.. 생각해보니 내가 오늘 너희 집에는 못갈 것 같구나.” 속 보이는 녀석의 말에 난 선호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번엔 고.조. 할아버님의 제사냐?” 그렇게 말하면 죽인다를 내포한 나의 물음에 선호 역시 날 살짝 야리더니 갑자기 주머니에서 하얀 쪽지를 몇 개 꺼내 팔랑거려 보이며 목소리를 깔기 시작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야? 응? 니들도 알다 싶이 토.요.일. 아니냐! 토요일! 야, 뼝국 너 내 인생의 캐치프레이가 뭔 줄 알지?” 그러자 병국이가 선호의 필통을 집어 들며 포스트잇에 써서 붙여 놓은 사구체 가사를 읊었다. “인생한방 로또일등 수능불필 기부입학” 병국의 읊음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선호가 손에 들린 로또 번호가 찍힌 영수증을 흔들며 강조했다. “오늘 저녁 8시 45분 SBS에서 로또 추첨이 있다.” “그래서? 그걸 지금 이유라고 대는 거냐?” 나의 어이없다는 질문에 선호가 표정을 굳히며 심각하게 말했다. “경민. 너도 알다싶이, 나의 로또에 대한 열정으로 저번 49회 방송에서 5등을 차지할 수 있었던 건 다 방송시작 5시간 전부터 정성스레 목욕재계하고, 심신을 맑게한 결과였지 않느냐. 난 꼭 대학가야 된다 경민아.. 니가 이해해라.” 저절로 독베이비란 욕이 나오려는걸 간신히 참으며 누가 그딴 웃기지도 않는 이유를 믿을 것 같으냐라고 소리치려 했다. 허나.. “또 5등 되면 한턱 쏴라.” 라며.. 부추기는 한류인을 잊었다. 제기랄.. 난 어딘가 과거의 한 장면이 다시 연출되는 듯한 이 상황에 불길함을 느끼고 재빨리 병국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역시나 좀 전의 하얗던 얼굴과는 달리 여유로운 부처의 미소를 입가에 띄고 있는 폼이.. 상당히 불안한데.. “너 병원 안가는 날 인거 다 아니까 닥터 리 핑계대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내가 힘주어 말하자 병국이가 의외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후후... 하지만 오늘 그분이 오신다.” 뭐? 그분이라면.. 한달에 한번씩 기가 약한 5대독자 병국이를 위해 할머님께서 친히 보내신다는 기치료의 대가 백두도인이 아니신가! 허나 도인이라 부르기엔 어딘지 안 어울리는 뱃살과 기치료를 빙자한 몸 더듬으로 인해 병국이가 항상 경계대상 1호로 지정한 인물이었는데.. 그래서 솔직히 백두도인 덕분에 우리가 병국이의 수술을 오인한 계기도 없지 않아 있고 말이다. 난 닥터 리의 치료 이후 또 한번 포기해야 하는 아픔을 담아내며 내가 녀석에게 답했다. “치료 잘해라.” “후훗~” 너의 웃는 모습을 백두도인이 보시면 두팔 벌려 환영하시겠구나. 제길.. “혹시 500원짜리 있어?” 내가 장난감 자판기 앞에 서서 선호와 병국이에게 묻자 병국이가 주머니를 뒤져 500원짜리 하나를 꺼내줬다. “또 한얼이 갔다주게?” 병국이의 질문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동전을 넣고 손잡이를 돌렸다. 동그란 플라스틱 공안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작은 모형 장난감들을 애들이 모으는지 한얼이도 곧장 저거 하게 해달라고 조르곤 했었다. 뭐,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동물 인형 같은거 말고 잘 고르면 로보트나 정의의 용사 캐릭터가 나온다는데 그걸 노리고 자꾸 하는게 마음에 안 들어 한번 크게 혼내 준적이 있었다. 나중에 선호같은 놈으로 자라면 안 된다는 형으로써의 걱정이랄까. 하지만 유치원의 같은 반 애들은 다 가지고 있다고 울먹이는 게 은근히 마음에 걸려 나도 모르게 자판기가 있으면 돈 넣고 돌려 보지만 열 받게도 진짜 좋은 건 하나도 안 걸린다. ‘타닥..’ 배출구로 공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집어 드는데 옆에서 선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편의점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확실히.. 뭔가 이상해.” “뭐가?” 토요일에 자주 그러는 것처럼 헤어지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라면하나씩 먹은 다음 우리는 먼저 나와 기다리는 중이었고, 안에는 류인이만 남아서 담배를 계산하고 있었다. “저 계산하는 여자말야.. 내가 여기 자주 다녀서 아는데 평일에는 전혀 안보이다가 꼭 우리가 들르는 토요일에만 나와서 일한다니까?” 손안에 든 플라스틱 볼을 쪼개며 난 고개 짓으로 안의 여계산원을 가리켰다. “그래서 뭐야, 일부러 류인이 보려고 나온다는 거야?” “그렇쥐. 존나 얍삽하지 않냐? 잘생긴 놈 얼굴 보겠다고 토요일에만 잠깐 일하고.” “야, 확실하지도 않은데 그렇게 말 하지마. 그리고.. 얍삽한 걸로 따지자면 너랑 병국이도 할말이 없을텐데.” 내 말에 순간 병국이와 선호가 발끈하며 날 쳐다봤다. “너 설마 우리가 류인이네 집에 안가는 이유가지고 그런거면.. 니놈이 그럼 안 돼지.” “그래, 병국이 말이 맞아. 야, 너 같으면 류진이형 온다는게 가고 싶냐? 어? 젠장.. 난 1학년때 내가 잠깐 그 바이크 만졌다고 발차기 날라온거 아직도 눈앞에서 생생히 영상이 돌아가는 사람이야.” 선호의 울분어린 목소리에 병국이가 크게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난 어쨌는데. 그거 한번 태워달라고 말 잘못했다가 자그만치 4시간 38분을 바이크 타고... 씨.. 바이크 타고 오바이트 한 놈 있음 나와 보라고 해! 그놈의 바이크는 뭐 태양열로 간데? 왜 쉬지도 않고 달리냐고! 솔직히 그거 때문에 내 치질이 악화 된거다 씨바.” 녀석들의 한심한 말들을 들으며 은근히 동감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뭐.. 나도 이미 여러 번 당한일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나도 또 당할지도 모르는 일을 혼자 당하는 건... “그러니까 너 혼자 희생해도 되는 일에 우리까지 끼어들게 하지 말란 말이다.” 선호. 니 입에서 다시 한번 의리란 단어 나오면 기필코 네 녀석의 입을 딱 풀로 붙여 놓으리. 분노의 게이지를 점점 높이며 두 놈을 바라보는데 병국이가 생각난 듯 말했다. “맞아. 그리고 내일 어쩌면 순이와 미팅..” “순이라니?” 언제 나왔는지 편의점 유리문 앞에 서있는 류인이가 방금 산 담배 곽을 손바닥에 툭툭 두들기며 우릴 야리고 있었다. 그러자 표정이 굳은 병국이가 선호의 팔을 잡으며 중얼거렸다. “순이는... 305호에 살지.” 라는 애매한 말을 하며 선호를 끌고 그대로 가버렸다. 두 녀석의 어이없는 퇴장에 잠시 넋이 나가 있는데 내 어깨에 익숙한 무게가 느껴졌다. 역시나 슬쩍 눈을 돌려 옆을 보니 녀석의 팔이 습관처럼 올라와 있었다. 그때 내 오른쪽 귀에 따뜻한 입김이 와 닿았고 내가 흠칫 놀란 사이 류인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자고 가라.” 속으로 정신 차리라고 연발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붉어지는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는데 류인이가 내 손바닥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뭐야?” 난 손안에 놓인 조그마한 장난감을 보며 중얼거렸다. “정의의... 용사.” 용감한.. 내가 되고 싶은. “형, 저 잠깐만 내릴께요.” 신호대기에 걸려 서있는 바이크 뒤에서 내가 앞에 앉은 류진이 형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얘기하자, 형이 고개를 돌리며 잠시 날 바라보더니 바이크를 길가 쪽으로 가져가 세웠다. 그리고 멋들어지게 헬멧을 벗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날 뒤돌아보는데 보기에도 상당히 멋있어 보였다. 단지 그 긴 금발머리가 가발이어서 맞을 때 정말 아팠다는 것만 빼고는. “왜?” “잠깐 아는 사람이 있어서요. 금방.. 5분요.” 내 말에 형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헬멧을 쓰고는 나보고 내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정확히 5분. 여기 서있어라.” 고개를 끄덕이는 날 보지도 않은 채 형이 부릉거리며 바이크를 타고 떠났고 번화가 한가운데에 남은 난 좀 전 바이크 위에서 보았던 녀석을 향해 신호등을 건너 다가갔다. 10차선의 제법 큰 도로 양쪽은 모두 번화가로 밤이 되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불야성을 이루는 곳이었다. 덕분에 낮처럼 사람들의 모습 하나하나 잘 보이는 이곳에서 내가 본 것은 건물 한켠 튀어나온 턱 위에 걸터앉아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었다. 아마 신호에 걸리지 않았다면 결코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우연찬게 보게 된 녀석의 모습. 별로 내가 원하지 않는 그 스위치가 꺼져버린 선우 윤, 그였다. 도대체 뭘 보는지 알 수 없는 목적 없는 눈동자가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있었고, 혼자 생각에 빠져있는 건지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는건지 가끔 지나가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멈추며 속삭일 때도 녀석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엉망으로 변한 얼굴도 아마 내가 녀석에게 다가가게 된 원인 중 하나겠지. 니가 이끌고 다니던 녀석들처럼 망가진 모습 말야. 자꾸.. 류인이가 연관되어 지는.. “설마 어린놈이 벌써부터 집에는 독서실 간다고 하고 여기서 땡땡이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녀석의 옆에 걸터앉으며 놈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고 마치 친한 후배에게 말걸 듯 평범하게 물었다. 근데 내가 봐도 좀 웃기는군.. 선우가라면 치가 떨려야 하는데, 마치 친한 후배에게 말 걸기라.. 훗.. “...” 녀석이 날 돌아보는 게 느껴졌지만 난 여전히 앞을 주시하며 얘기했다. “시계 좀 보고 다녀. 벌써 12시 다 됐다.” “그럼 니가..” 여러 번 듣지만 들을 때마다 기분 나빠지는 반말에 난 고개를 돌려 다시 스위치가 켜진 눈으로 날 뚫어지게 바라보는 선우 윤을 마주 보았다. “내 시계 해...” “머리 위에 막대기 얹은 인간 해시계라도 되길 바라냐?” 내 말에 녀석의 눈이 살짝 가늘어 졌다. 거의 표정이 없는 놈인 건 알겠는데 그래도 몇 번 보다 보니 감정 표현을 자주 눈의 움직임으로 하는 것 같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이놈은 뭐든 눈으로 표현하는군. 누가 엑스맨 아니랄까봐. “얼굴은.. 누구의 작품인지 참 이쁘게 됐구나.” 농담조이긴 했지만 긴장이 섞인 나의 말에 녀석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고맙다고 전해줘. 한류인한테...” “...” “덕분에... 애들 모두 병원이란 곳에 가봤지.” “그럼 넌 병원에서 탈출했나 보군.” 녀석의 한쪽 입 꼬리도 마저 살짝 올라갔다. 근데 너 참.. 웃는 모습이 어색하구나. 보는 사람이 아니라.. 하는 니가 어색해 보이는 그런거 말야. “이틀이나 입원할 만큼은 아니었어.” 이틀?.. 그럼.. 한밤중에 찾아와 대뜸 약 발라 달라고 했던 그 날이군.. 정말 그녀석 답지 않게 너무 힘을 쓴 것 같다는 걱정에 골몰하는 데 선우 윤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하지만.. 현이는 좀 오래갈 거야.” 난 살짝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야? 설마 선우 현한테도.. “놀랠거 없어. 현이한테는 손 못대니까.” 역시 그 순남이가 말했던 류인이가 집안 때문에 못 건드린다는 그 말? 선우 현의 집안이 대단하긴 한가보군.. “근데 왜 입원을..” 그러자 선우 윤이 손가락으로 왼쪽 가슴을 톡톡 쳤다. “심장이.. 멈출 뻔 했거든. 현이..” 류인이가 선우 현의 공포증을 이용했다더니 그것 때문에? 얼마나 큰 공포증이길래.. 왜 어째서.. 류인이 녀석 그렇게 험하게 나가는 거지? “가지고 있는 공포증이라면.. 아무리 무섭더라도 이미 많이 접해봤을 텐데.. ” 왜 심장이 멈출뻔하냐고.. 뒷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내가 봐도 좀 변명처럼 들리는 말이란 걸 안다. 공포증.. 병으로 까지 가지고 있는 강박관념이라면 극복하지 못한 두려움이란걸 아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걸 이용했다는 게 류인이란게.. 내 친구란 것 때문에 변명처럼 항변하고 싶었다. 그래, 녀석도 한번 옥상에 올라오는 일을 당했으니까.. 류인이 방법이 잘못 된걸 알지만 그건 선우 현 자업자득이라고 자신을 설득하며. 그런데 이런 나의 생각과 다르게 선우 윤의 입에선 다른 말이 나왔다. “맞아. 익숙한 공포에 심장 따위가 멈출리 없지. 그랬다면.. 더 좋겠지만.” 그게 아니야? 단지 공포증을 유발시켜 기절시킨게 아니라고? 난 멍하니 다물어버린 입술로 날 쳐다보고 있는 선우 윤을 바라보았다. 아니 재촉했다. 무슨 소리야! “한 류인이 한건.. 바로.. ” 뜸을 들인 후 마치 속삭이듯.. 선우 윤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열려졌다. “그 공포증을 일으킨 주범을... 현이가 떨고 있는 장소에 부른 거였어.” 선우 현에게 공포증을 준 사람? “도대체.. 선우 현이 가지고 있는 공포증이 뭐야..?” 어색하게 들릴 정도로 내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모든 원인은 결국 이거 하나에 집중되는거 잖아. 마치 몇 개 안남은 퍼즐조각처럼 하나를 집어넣으면 윤곽을 알 수 있듯이.. 그런데 선우 윤은 다시 입을 다물고 혼란스러워 하는 내 눈을 응시하기만 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입술이 열렸을 때는 내가 원하던 대답이 아닌 다른 말이 나왔다. “인간이 공포심에 극한으로 치닫으면 어떻게 될까? 정신이 나가버려 한류인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옥상에 올라올 수 있게 되는 걸까? 아니.. 이건 차라리... 축복받은 거야. 그렇지 못한 어떤 사람은.. 그 공포를 여실히 느끼며..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그 속으로 뛰어 들어 가버릴지도 몰라...자기 발로.” 선우 윤의 말은.. 나에게 경고처럼 들렸다. 아니 실은 .. 경고로 포장한.. 애원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내가 어떻게? 선우 현이 극심한 공포감으로 쓰러져.. 자기발로 그 공포 속에 다시 뛰어든다 할 지라도.. 난 남인걸. 이 일의 주역이 아니야. 그런데 왜.. 자꾸.. 날 찾아왔던 순남이처럼 너도 나에게 부탁을 하고 있는거지? 니들은 사람을 잘못 보고 있다고! 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쪽에서는 자꾸 류인이의 말을 들으라고, 녀석 말처럼 모두 잊고 류인이만 기다리라고 외치고 있었다. 난 관계없는 일이야. 왜 신경써? 난 잠시 눈을 감고 내가 걸터 앉았던 턱을 한손으로 짚었다. 그래, 거짓말 하지마. 넌 알고 있었던 거다. 이 모든 것의 마지막 퍼즐엔 내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고, 믿을 수도 없는 사실이기에 거짓말과 망상이란 이름으로 줄을 매달아 보이지 않는 벼랑 끝에 던져두고 있었다. 이미 알아차리고 있던 일은.. 사실을 확인하기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막고 있었겠지. 언젠가는 줄을.. 건져 올려.. 마지막 퍼즐을 확인해야 해야 될꺼야...이 경민. 난 반쯤 뒤돌아서며 선우 윤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는?” 내 물음에 녀석이 한쪽 눈을 치켜뜨며 의문을 표했다. 너.. 지금은 이렇게 살아있는 눈으로 스위치를 키고 있는 너도.. 극단으로 치닫는 거냐? “니 공포증 때문에 너도 뛰어들꺼냐고.” 내 말에.. 녀석이 나른하게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아니..” 그리고 다시 한 손가락으로 심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난 이미.. 심장이 멈춘 상태거든.” 어쩌면 극단으로 치닫는다는 선우 현보다.. 이 녀석이 더 위태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순간적으로 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녀석에게 던져 주었다. 갑작스런 내 움직임에도 용케 두 손으로 받아낸 선우 윤이 손에 쥔 그걸 보며 묘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정의의 용사. 악의 무리로부터 지구의 평화를 수호하고.. 행복을 가져다준데.” 뒤돌아서는 내 눈에 이번에는 확연히 보이는 녀석의 눈웃음이 보였다. 화낼줄 알았던 류진 형이 의외로 말없이 헬멧을 건내주자 오히려 불안해진 내가 조심스레 사과를 해야 했다. “죄송해요.. 좀 늦었죠?” 형이 건내 준 헬멧을 쓰는데 내 쪽으로 몸을 반쯤 돌리고 있던 형이 말없이 날 보다 조용히 물었다. “너.. 선우가 막내 놈하고 아는 사이냐?” 바이크에 올라타려다 동작을 멈춘 난 형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형은 어떻게 알아요?” “너부터.” “학교.. 후배에요.” 내 말에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곧 무표정하게 변하며 뒤돌아 앉았다. “형도 대답해야죠.” 내 말에 흘낏 뒤를 돌아보더니 툭 내뱉었다. “거래하는 놈들 집안정보는 기본이지.” 거래? 내가 좀 놀랍다는 듯 입을 벌리고 쳐다보자 형이 다시 몸을 반쯤 틀어 날 봤다. “너 혹시 우리집 하는 일이 뭐 아줌마들한테 일수나 찍고, 건물 세나 받아먹고 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에요?” “맞아.” 내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자 갑자기 내 머리를 툭 쳤다. “바보냐? 아줌마들 이자만 받아먹고 사는 집안이 왜 조직은 거느리며, 여러 다른 이름의 대출회사나 리스회사를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해본거야?” 뭐? 조직을 거느려? 그냥 협력하는 정도가 아니고? 그리고.. 대출회사니 리스회사는 또 뭐야? 내가 놀라는 사이 형은 한숨을 쉬며 짤막한 설명을 계속 해 나갔다. “뭐.. 워낙 위장이 많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웬만한 큰 기업이나 큰 손들은 다 우리 거래처라고. 그리고 그런 위험이 따르는 거래에 집안사정까지 조사하는 건 기본이지.” “그럼.. 류인이도 알고 있는거에요?” 형은 정말 내가 바보가 아니냐는 눈빛으로 보더니 대답했다. “당연하지. 자료까지 관리하는게 그녀석이니까. 쬐그만게 머리는 잘 돌아가서는..” “혹시 그 조사라는 거에.. 그 집안 식구들의 약점 같은 것도.. 있어요?” 그러자 형은 내 머리를 한대 더 치더니 운전대 쪽으로 뒤돌아 앉았다. “아마 꿰고 있을꺼다. 믿을 수 있는 저장장소는 자기 머리 속 뿐이라고 애늙은이 같은 소릴 하는 녀석이니. 밥만 디지게 많이 먹는 자식.. 영양소가 다 뇌로 가나..” 그럼 선우 현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야? 한 류인? 근데.. 그거 어찌보면 너희 집 비밀인데 니가 유출한거잖아. 혹시 선우 현이 말한게 이거였어? 니가 더 이상 건들지 못할꺼라는건.. 아 머리가 복잡하군... 의외의 충격에 멍해 있을 때 갑자기 형이 바이크를 출발 시켜 난 서둘러 형의 허리를 잡았다. “이제 가자. 류인이 자식이 너 딱 2시간만 빌려준다고 아주 협박을 하더라. 개노무 자식.. 가자마자 발차기를..” “형!” 한창 동생 욕을 하고 있는 류진 형을 부르자 형이 앞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왜?” “...” “뭐야?” “형... 가발 묶음 안돼요? 눈 앞이 하나도 안보여요!” “씨발.. 니가 지금 라이더의 생명을 불사르겠다는 거냐 어? 너 달리는 바이크에서 낙하하게 해줄까?” “형!” “썅! 뭐야!” “하하.. 조크였어요..” 내 주위를 파도처럼 넘실대는 금발머리에 속으로 욕을 해대며 이집 형제에게 비굴해 질 수 밖에 없는 내 인생을 한탄하고 형의 등짝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이대로 가면 이집 제일 싸가지 없는 막내까지 후식으로 기다리고 있지 아마? 웃기게도 내가 두근거리는 녀석이 말야.. 제기랄... 말세다. 이제는 정말 이민을 계획해야 할 때가... 도래했군. 공포증 - 21 정확히 두 시간을 채운 드라이브 덕분에 약간 얼얼해진 엉덩이를 만지는데 문득 아까 병국이가 외쳤던 ‘...솔직히 그거 때문에 내 치질이 악화 된거다. 씨바’란 말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몸이 굳어 버렸다. 나에게 절대로 생기지 않을 일이라고 믿고 있지만 주변에서 자꾸 떠들다 보면 생각이 물드는 것같이 병국이가 자신의 지병에 대해 떠드는 것에 혹시 나도 일까란 생각이 드는 건.. 확실히 온몸에 소름이 돋는 일이다. ‘주온’을 봤을 때보다 더한 공포감이 발끝부터 차고 올라오는 것 같아 난 머리를 흔들며 인상을 썼다. “두전증이냐? 왜 머릴 흔들고 그래?” 두전증? 시기적절한 너의 어휘 구사능력과 신조어 창조에 박수를 쳐주고 싶으나 지금 내 상황이 여의치 못한게 미안하구나. 쓰벌놈아. 그리고 고개를 돌리니 류인이가 손에 옷가지를 들고 나에게 내밀고 있었다. “바이크의 진동이 아직까지 남아 좀 떨쳐내려 그랬다.” 제발 니 형의 그 바이크에 사람 태우는 버릇 좀 말려줘란 말은 보너스로 나의 강한 눈빛에 담아 녀석을 봤지만 류인이는 무심한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했다. “다음엔 제파 말고 레이서로 타.” 이봐 친구.. 우리의 12년간의 우정이 고작 이런 것이었냐? 어? 겨우 3년간 교류해온 비디오 가게아저씨도 나의 눈빛만 보면 단번의 의중을 간파하고 입가에 모나리자의 미소를 띄우며 각종 부인시리즈를 내어 주는데 말이다. 비디오 가게 주인과 손님의 관계에도 못 미치는 우리의 우정에 한탄을 하며 나의 많은 뜻이 내포된 눈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딴소리하는 녀석에게서 옷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화장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바로 어제의 일 때문에 고민하느라 밤을 새질 않나, 우연으로도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류진이 형을 류인이의 계.획.하에 만나질 않나.. 또.. 선우 윤도.. 선우 윤과의 대화가 떠올라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를 믿고 기다린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지를 지금처럼 경험해 본적이 없었다.류인이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당장 이 껄끄러운 문제들을 해결해 보려.. “에?” 생각하는 와중 무의식적으로 손에 든 옷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와 버렸다. 이.. 이건.. “야.” 내가 좀 어이없다는 듯 녀석이 빌려준 옷을 꽉 쥐며 부르자 부엌으로 향하던 류인이가 고개를 돌렸다. “너.. 지금 이거 나 입으라고 빌려준거 맞냐?” 내 말에 손에 들린 옷을 한번 보더니 심드렁하게 답했다. “너 체육복 좋아하잖아.” 제길 누가 체육복을 좋아한다는 거냐!! 이 세상 중고등학생들한테 물어봐, 학교 체육복 좋아하는 놈 있는지! 내가 아무리 집에서 편하다는 이유하나만으로(물론 싸다는 이유도 있다) 체육복을 입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너한테서까지 체육복을 빌려 입을 만큼 체육복 중독증환자인줄 알아? 어? 내 미적센스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더구나.. 이건.. 중학교 때 꺼잖아! “그래서 일부러 중.학.교.때. 체육복을 버리지도 않고 고이 모셔둔거야? 나 때문에?” 지는 비싼 메이커 T들만 입는 주제에 그건 빌려주기 싫더냐! 란 말을 눈빛에 담아 또 한번 녀석에게 컨택을 시도했다. 그러자 나의 눈빛을 알아차린 걸까? 류인이가 천천히 내 눈을 바라보며 걸어오며 미소 짓더니 살짝 내 머리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짜식.. 감동 먹긴.” 이 어이없음에 황당해 해야 했는데.. 녀석이 진심으로 뿌듯한 표정을 지어 아무 말도 없이 뒤 돌아 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한 류인 너 정말.. 고단수다. “안 잘 거야?” 녀석의 중학교 때 체육복이 몸에 꼭 맞는 바람에 자존심이 유통기한을 넘겨버린 내가 샤워를 하고 나오며 류인이에게 물은 말이었다. 토요일 밤을 화려하게 불태운 간만의 드라이브로 이미 시간이 새벽 1시가 가까워져 있었기 때문에 바로 잘꺼라 예상했는데 침대 아래 깔린 러그 위에 앉아 있는 류인이 앞에는 맥주캔 몇 개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이미 하나는 류인이 손에 있었다. 나의 질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류인이의 머리가 천천히 들려졌다. 침대에 등을 기대어 앉아 맥주를 든 한 팔은 구부린 무릎위에 올린 녀석의 포즈가 참 편안해 보였다. 그런 그가 내 아래위를 잠깐 훑어 보더니 녀석이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와.” 근데 난 그의 말에 걸음을 멈춰버렸다. 언제 벗었는지 나체인 류인이의 상반신이 저번처럼 신경에 거슬려서가 아니라 그 자체, 류인이가 문제였다. 오늘 하루 어제의 일에 대해 많이 고민한 부분만큼 일면에는 류인이와의 관계가 어색하지 않길 바라는 조바심이 차지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한 키스였고, 류인이의 말처럼한 증명이니까 웃으면서 지나갈, 오랜 친구간의 대수롭지 않게 일어난 사건으로 넘겨야 한다고 명령을 내리고 있지만 심장이.. 가슴이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 조바심.. 단지 녀석과 친구관계가 깨질까하는 걱정이 섞인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경계에 대한 조바심이었다. 지금같이.. 니 모습에 맥박이 빨라지는 나의 경계 말이야. “앉아.” 내가 가만히 서있자 턱으로 살짝 자신의 옆을 가리키며 류인이가 말했다. 평소처럼 무표정하게 올려다보는 녀석이었지만 긴장한 듯 조이는 내 근육들은 평소와 같지 않아 짜증이 밀려왔다. 나답지 않은 것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색함. 이것들 때문에 난 살짝 이마를 찌푸리며 류인이 옆에 주저 않아 아무 말 없이 맥주 캔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마시면서 옆을 힐끔 보니 뻗은 손 끝의 맥주 캔을 천천히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류인이와 술 마신게 참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모두의 예상대로 모범생인 우리들은 고3 들어서면서 학업을 위해 술은 자제하자고 결심했었다. 물론 치질 수술로 음주가 어려워진 병국이가 한 몫했지만. 마지막으로 마신게.. 2학년 겨울방학이 막 시작된 작년 12월이었으니 4개월 만이네. 오랜만이긴 하지만 왜 갑자기 술을 꺼낸걸까? 다시 캔을 입에 대고 혹시 녀석이 나에게 할말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는데 나지막한 류인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제 키스말야.” “풉..!.. 컥...켁.... 쿨럭 쿨럭..” 너무 뜻밖의 그리고 너무 직설적으로 나온 류인이의 말에 난 마시던 맥주를 그대로 내뿜었고 그나마 입안에 있던 맥주는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쿨럭.. 윽..” 얼굴이 뻘게지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기침을 하는데 등을 두드리며 류인이가 무덤덤하게 물었다. “키스 하던거 떠올렸냐?” “야!” 아직 붉은 얼굴로 녀석에게 소리치자 내 등을 두드리던 손을 치우며 날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내 눈을 쳐다보는데.. 정말 말이 안나왔다. 겨우 숨이 가라앉자 난 한숨을 쉬며 눈을 돌렸다. “그런 얘긴 좀.. 예고라도 한 다음에 해라.”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임마. 난 아직 준비가 안되있단 말야. 손에 들고 있던 맥주 캔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멀리 밀어놓았다. 얼마나 흡수당하고 싶었는지 식도뿐 아니라 기도로 까지 넘어가 까딱하면 저승 갈 뻔하게 한 맥주는 오늘 밤 더 이상 마시고 싶진 않았으니까. “왜 그래야 되는데?” 그 말에 난 또 발끈해 녀석을 홱 돌아다 봤다. 어색하잖아! 우린 친군데.. 그런 진한 스킨쉽을 하고도 멀쩡하게 넘어갈 만큼 우린 가깝지 않은 사이가 아니니까. 가족 같은 말이다. 아.. 근데 바보같이 녀석의 얼굴을 보자 또 속에서 외쳐대는 말들을 할 수 가 없었다. 무표정하지만 날 빤히 바라보는 눈을 보니 흥분하며 소리 질러야 할 말은 모두 지워지고 다시 단어를 고르고 있는 나만이 남았다. 난 무심결에 혀로 입술을 적시며 담담히 말했다. “난 말이야.. 그렇게 무덤덤한 사람이 못돼.” “우리가 키스한 게 신경 쓰인다는 거야?” 야.. 제발 그 단어는 좀 삼가 해 주련? 니 말처럼 그 장면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단어 자체가 날 압박하는 것 같단 말야. 마치.. 그 단어를 인정하고 내뱉으면 내가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튀어 나올 것처럼. “그래.” “어떻게 신경 쓰이는데?” 난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이 녀석이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질문들을 할까 알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대답을 안하고 무표정한 류인이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녀석의 한손이 천천히 올라오더니 내 머리 옆쪽에 손을 살짝 얹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거의 나한테 닿을 듯 말 듯 내려와 손가락 끝으로 내 귀의 곡선 진 외형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너무나 천천히.. 거의 솜털만 건드리듯 살짝 와 닿는 그 느낌에 나도 모르게 몸을 굳히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런데 류인이가 내 시선을 잡으며 입술을 약간 벌려 그의 낮고 조금은 허스키한 소리를 내었다. “가만.” 달래는 듯한 그의 말에 눈도 깜박이는 걸 잊고 류인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검은.. 동공과 그에 동화되듯 어둡게 빛나는 주변의 홍채가 흔들림 없이 내 시선을 받아내었다. 이상해.. 지금 각막에 투영되는 내 모습이 뚜렷이 보이지만, 내 눈에는 그 안 검은 바다같이 날 끌어당기는 너의 어두운 동자만 인식되니 말야.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어. 내가 아닌 너를 보는거라. 아마 눈을 감는데 더욱 힘이 들겠지. 나중에 날 대견해 할지도 몰라 지금 눈을 감고 있는 스스로에 대해. 나 왜 이럴까.. 왜 갑자기 12년이 지난 지금 너에게 반응하는 내 심장을 발견해 버린걸까? 내가 남자를 사랑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한 순간 왜 넌.. 내 앞에 있었던 거야? 그리고.. 왜 난 아무것도 모르는 건지.. “떨지마.” 너무 가깝게 들리는 류인이의 목소리에 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바로 눈앞에 와있는 류인이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운 채 한 팔은 바닥을 짚은 채 나머지 한손은 내 귀에서 내려 목덜미에 얹고 있었다. 떨다니 내가? 눈을 한번 깜박이며 입김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와있는 류인이를 바라보다 알아차렸다. 가늘게 떨고 있는 나를. 그리고 그런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류인이가 내 목덜미와 어깨사이를 가만히 한손으로 쓰다듬더니 천천히 내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겠다. 따듯했다. 어제처럼 찌릿한 심장을 울리는 느낌보다 입술에만 감각이 몰린 듯 사람의 체온이라 믿겨지지 않는 뜨거운 온기가 먼저 와 닿았다. 그때 원형을 무너뜨리기 싫은 듯 내 입술 위에만 대고 있던 류인이가 천천히 힘을 주고 눌러오며 자신의 입술을 살짝 열었다. 그 사이로 잠시 류인이의 기운이 느껴진다 싶었는데 곧 물기를 머금은 혀가 내 다물어진 입술 사이를 가로로 핥으며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입술이 조금 벌어졌고, 류인이가 자신의 입술로 벌려진 내 아래 입술을 물고 살짝 빨아 당기었다. 어제처럼 강하게 밀어붙이지도, 빠르게 입술을 놀리는 것도 아니데 난 정신이 몽롱해 지는 것을 느껴야했다. 이미 입술에만 몰린 감각세포들은 그의 온기와 움직임에 날 들뜨게 했고, 내 목 언저리에 놓여있던 손이 어느새 강하게 내 뒷목을 받치며 이제 벌려진 내 입안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그를 지탱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었다. 갑자기 당해 어제 느끼지 못했던, 작은 심장의 떨림과 입안을 감아오는 혀의 짜릿한 감촉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류인이의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도 한참을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난 좀 전의 감각을 잊지 않고 자꾸만 기억하려는 몸의 자연스런 반응에 대항하듯 애써 머리를 다시 작동시키려고 노력했다. “왜..?” 눈을 감은 채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생각을 하려 애썼지만 온통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이 단어 하나였으니까. 어째서... 왜..? 아직까지 내 목 뒤를 받치고 있던 류인이의 손이 없어지자 난 눈을 떴다. 이번에 눈을 떴을 때는 니 표정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무언가를 외치는 그 검은 눈동자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거야? “알고 싶었어. 아직도.. 신경 쓰여?” “그..래.” 내 대답을 해석하듯 살짝 눈을 내리 깔았다가 다시 치켜떴을 때 녀석의 눈은 잔잔히 가라앉아 있었다. “왜 신경쓰이는지 알아?” “모르면 니가 가르쳐 주게?” 조금은 차가운 듯한 나의 말에 류인이가 몸을 침대에 기대며 옆으로 앉아 날 보았다. “그럴수도 있지.” “뭐?” 조금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내가 묻자 녀석이 처음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살짝 웃었다. “난 니가 생각하는 것 만큼의 내가 아냐.” “내가 널 모른다는 소리야?” “응.” 난 가만히 류인이의 말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팔을 뻗어 바닥을 짚으면서 몸을 기대었다. “내가 너에 대해서 모르는게 뭔데.” “가장 중요한 걸 모르지.” 가장 중요한거? 순간 녀석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내가 모르는 공포증이 생각났다. “이해가 안돼. 넌.. 있는 그대로 숨기지 않고 보여주는 녀석이야. 내가 모르는 가장중요한거란 건.. 만약 그런게 있다면 배신감이 느껴질 것 같다.” 친구로써. 뒷말은 차마 나오지 못했다. 좀 전의 미묘한 키스 때문일까? 아니.. 모르겠어. “전에 나한테 물었었지. 다른 식구들은 다 한가지 씩 집착을 보이는 무언가가 있는데 난 그게 뭐냐고. 내가 그때 뭐라 대답했는지 기억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아버지와 닮았다고 했지.” 그러자 다시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묻지. 넌 우리 아버지가 집착하는 대상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거야.. 돈.. 이 아닐까? 여태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건데 막상 녀석이 물으니 입을 열수가 없었다. 그 당연시 여기던게 지금 답이 아니라고 미리 선수쳐 비아냥거리는 저녀석 때문에. “바로 그거야. 니가 모르는 나의 가장 중요한 것.” 난 눈을 깜박이며 녀석을 쳐다보았다. 내가 모르는게.. 니가 집착하는 대상이라고? 하지만.. 12년을 봐왔어. 그동안 니가 집착을 보인게 있다면 모를 리가 없잖아? 혼란스러운 마음이 얼굴에 들어났을까? 류인이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고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열 내지마. 그걸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내 탓도 있으니까.” “표현하지 못했다니.” 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묻자 다시 피식 웃어보였다. “준비가 안 되 있었거든.” “니가?” 그러자 류인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둘 다.” “그럼.. 지금은 준비가 되있다는 거야?” “몰라. 하지만 상관 안하기로 했어.”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한글자 한글자 정확히 말했다. “내가 너무 원하니까.” 불안감을 동반한 어떤 거대한 실체가 나에게 한걸음씩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열면 안 돼지만 마지막에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일말에서는 그 실체를 맞이하라고 용기를 북돋고 있었다. 과연.. 그 실체를 확인하면 난 후회하게 되는걸까 아님.. “너의..” 난 마치 오랫동안 다물었던 입을 여는 것처럼 어색하게 들리는 내 목소리를 느끼며 실체를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버지가 집착하는 대상은.. 혹시.. ” 다시 무표정하게 돌아온,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묘한 흥분이 도는 녀석의 얼굴을 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어머님이셔?” 그래, 돈이 아니라고.. 사람. 그 아버지를 닮은 네가 나에게 알려주고 싶은건 그럼 이거였던 거야? 그 대상.. 내 말에 침대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키며 녀석이 살짝 입을 벌렸다. 그리고 말 하려는 순간, 대답은 뜻밖의 곳에서 나왔다. “이야~ 너 어떻게 알았냐?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미쳐있는걸?” 라고.. 들리는 이 목소리는? 난 심장이 떨어질 만큼 놀라 홱 몸을 돌려 뒤를 돌아봤다. “이럴줄 알았어. 형, 내 말이 맞지? 이 두 녀석 안자고 술 퍼 마실 줄 알았다니까?” “꼬맹이들. 한창 크는 시기에 알콜은 무슨 알콜이야 새끼들.. 귀엽게 놀긴.” 뭐..야 도대체!! 어째서 나란히 복실한 팬더와 토끼 실내화를 나란히 신고 계신 두 형님이 여기 계신 겁니까! 더구나 손에 든건.. 양주병이야? 갑작스레 등장한 두 사람에게 놀라 내가 입만 벌린 채 멍하니 형들을 쳐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조그맣게 류인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씹.. 이민을 가던가..” 뭐 이민? 개인적으로 상당히 익숙한 단어이기에 난 내 귀를 의심하며 몸을 틀어 무표정하게 형들을 노려보고 있는 류인이를 보았다. “너 문 안 잠궜어?” 내가 돌아보는걸 알았는지 작게 류인이가 물었고, 아까 들어올 때 상황을 생각하느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런거.. 같은데..” 그러자 이번엔 눈을 나에게 돌려 원독 어린 눈빛을 쏘아내는 류인이 녀석이 보였다. 헉.. 그렇게 노려보지 말란 말야! 평소에 너도 문 안 잠그잖아! 라는 항변은 유난히 억울해 보이는 녀석의 표정 때문에 나오질 못했다. 야.. 나도 껄끄러운 건 싫다고.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너랑 다시 ㅋ..를 한거에 대해 매듭짓고 싶은 사람이야 이거 왜이래.. 나 역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응대하는데 턱하니 내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올라와 고개를 돌렸다. “oo 중학교? 너 중학교로 다시 가고 싶냐? 왜 중학교 때 체육복은 입고 있어?” 류진형의 질문에 당황한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구요..” “아~ 류진이 넌 모르지? 경민이 얘가 체육복 메니아란다.” 아니, 류민형님 누.. 누가.. “정말? 짜식.. 취향한번 독특하네. 아, 창고에 찾아보면 내 학교때 체육복 있을지 모르는데 가져다 주랴?” 졸지에.. 메니아로 등급 업 한 나는 가지고온 술과 안주로 판을 벌리는 형님들 틈에 껴서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만약 여기서 술 달라고 한마디 하면 알콜중독자로 찍힐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맞아, 야 꼬맹아.” 류민형이 양주를 따면서 류인이를 부르자 띠껍다는 표정으로 류인이가 건방지게 형을 올려다봤다. “너 귀염둥이 팼다며? 새끼.. 그 깜찍한 놈 팰 때가 어딨다고 패? 가뜩이나 누구땜에 고생하는 건데..” “귀염둥이라니? 아니 설마 고 귀여운 녀석 말하는 거야?” 류진이 형이 묻자 류민형이 설명하려는 듯 입을 여는데 갑자기 류인이가 형 팔을 붙잡더니 노려봤다. “아.. 씹. 형!” “뭐야? 아.. 알았다. 새꺄. 이 녀석이 의외로 부끄럼이 많아요.” 그러면서 류민형이 류인이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옆에서 자꾸 궁금한지 아직까지 그 금발머리 가발을 쓰고 있는 류진형이 계속 ‘뭔데’를 외치며 소란에 합류하고 있었다. 눈을 치켜뜨고 두 형을 노려보느라 바쁜 류인이를 구경하다 시선을 돌렸는데 내 눈에 류민의 형의 화려한 쫄티 위로 목에 걸린 소형 장치가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핸드폰은 아니고 손가락 크기만한 검은 것인데.. “형, 그게 뭐에요?” 그러자 가지고 온 잔에 술을 따르던 형이 동작을 멈추고 천천히 눈을 들어 나를 봤다. “탐지기 작동 알림장치.” “네?” 무슨 뜻인지 몰라 다시 물으려는데 인상 구긴 채 앉아있던 류인이가 눈을 빛내며 형에게 먼저 물었다. “그 탐지기 입수한거야?.” “후후.. 그래.” 만족스런 웃음을 입가에 짓던 형이 들고 있던 유리잔을 꽉 쥐며 이빨 사이로 내뱉었다. “제이슨.. 이번엔 꼭 잡는다.” 어떤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이 되었다. 하지만 생각을 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기에는 아직 잠에 취해 멍한 내 머리로는 당장은 무리였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울리던 그 소리가 사라지고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와중에 그 소리가 바로 내 핸드폰 소리란 걸 알아차린 건 한참 뒤였다. 천천히 눈을 살짝 뜨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무언가에 눌린 듯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확인하기 위해선 고개를 들어야 하는데 그것조차 귀찮아 그냥 손만 뻗어 더듬더듬 침대 옆 탁자 위를 짚어갔다. 겨우 내 핸드폰이 손에 들리자 눈을 몇 번 껌벅거린 후 찍혀있는 발신자 번호를 보기 위해 눈앞에 핸드폰을 들이 댄 후 번호를 보니.. 집이었다. “아..” 몸이 찌뿌둥해 핸드폰을 들었던 팔을 쭉 피고는 몸을 일으키려는데 아까 느꼈던 내 몸을 누르고 있는 뭔가가 아직 남아있다는 걸 발견했다. 살짝 고개만 든 채 내려다 보니.. 내 허리께에 누군가의 팔이 얹어져, 아니 감겨져 있고 내 옆구리에 몸을 구부린 채 누워있는 그 팔 주인의 옆모습이 보였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얼굴을 덮어 누군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난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한 류인.. 너 언제 온거냐? 분명 내 마지막 기억에는 술을 한참 마시다가 내 정신이 거의 끊어져 갈 무렵 류민 형의 목에 걸려있던 그 탐지기 작동 알림장치라는 이름을 빙자한 단순한 호출기가 삑삑거리며 울렸고, 갑자기 세 형제가 벌떡 일어서더니 알콜 기운을 등에 없고 기세등등하게 타도 제이슨을 외치며 나갔던게 내 마지막 영상이었다. 그 후 어떻게 올라온건지 난 침대에서 자고 있었는데.. 내 왼팔에 얼굴을 뭍고 몸을 옆으로 꾸부린 모습이 순간 고양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움직이는 가슴의 근육도, 유연하게 굽어진 등의 맨 살을 쓸어보고 싶게 만드는 약간 갈색 빛의 속살에도 말이다. 역시 막내라는 생각에 난 손을 들어 살짝 녀석의 머리칼을 얼굴에서 치워냈다. 입을 살짝 벌리고 무방비한 녀석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그의 입술에 손을 가져갈 뻔 했다. 그래, 변태같이 너의 입술에 집착하는 나를 너는 눈치챘던 거겠지? 어제.. 다시 했던 키스에서 주저함이 없었던 걸 보면 말야. 그리고.. 너의 그 당당함이 마지막 내게 알려주려했던 중요한 사실과 연관되어 묘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구. 이제 사실을 안다는 건 별로 중요치가 않았다. 문제는 그 이후 어떻게 변하고, 대처해야 할 내가 있나에 관해 고민해야 겠지. 하지만 말야.. 난.. 그때 손에 들린 핸드폰이 크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수화기를 통해 다급한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왔고, 난 표정을 굳히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지금 갈께요.” 전화를 끊자 누웠던 포즈에서 고개만 들고 있는 류인이가 보였다. “무슨 일이야?” 난 서둘러 내 허리께에 놓인 류인이의 팔을 치우며 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병원에 계신 큰 이모가 의식불명이시래.”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서둘러 옷을 벗고 탁자위에 올려놓았던 내 옷을 집어 입기 시작했다. 급하게 1분도 안되는 사이에 옷을 다 갈아입은 내가 가방을 집어 들기 위해 쇼파로 향하자 아직 멍한 눈으로 자리에 앉아 일어난 류인이가 날 불렀다. “이 경민.” 가방을 어깨에 메며 녀석을 쳐다보자 잠에서 덜 깬 얼굴과는 반대로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뚫어지게 날 바라보는 녀석의 눈동자가 보였다. “나중에..” 현관으로 걸어가며 내가 말하자 녀석이 자신의 머리를 한번 손으로 넘기더니 내 뒤를 따라 현관으로 걸어왔다. “전화할게.” 내가 신발을 신는 사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류인이가 말하자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얼굴을 돌려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어깨에 얹어있던 손가락 중 하나가 올라오더니 내 뺨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고, 내가 멈칫하는 사이 그의 손은 금새 떨어져 나갔다. “핸드폰 꼭 켜놔.” 류인이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난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자신과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큰 이모를 엄마는 종종 외할머니 보다 큰 이모가 더 어머니 같았다고 나에게 말씀하시곤 했다. 그래서 지금 산소 호흡기를 끼고 누워계신 큰이모를 보고 말도 못하신 채 울고만 계셨다. 의사가 어쩌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큰이모네 가족들은 심각하게 임종준비까지 하는 듯 보였다.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고 해서 한얼이까지 데리고 난 대기실 의자에 앉아 나머지 식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어머니를 살피기 위해 뛰어다녀야 했다. 그래서 병원에 오자마자 정신없이 보낸 덕분에 핸드폰을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점심때가 지나고 겨우 5시가 가까워 올 무렵 난 한얼이를 옆에 의자에 앉힌 후 한숨을 돌리고,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들었다. 부재중통화 3건. 폴더를 열어 번호를 확인하니 모두 류인이었다. 익숙한 번호. 손으로 통화버튼을 눌러야 했지만, 버튼을 누르면 몇 일 사이 날 불안하게 하고, 미치게 만들었던 나의 떨림의 이유와 류인이의 중요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것 같아 멍하니 번호만 보고 있었다. 감(感) 이란 건 단지 감일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추측들이 사실이라 믿겨지더라도 실제 사실은 정 반대일 수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이 모든 건 잘못된 걸 수도 있어. 그래서 사실을 확인해야 하지만.. 두렵다. 모든게. 난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폴더를 닫았다. “경민아.” 고개를 드니 사촌 형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큰 이모 좀 어떠세요?” 그러자 어두운 표정으로 사촌 형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자, 형이 옆에서 tv를 보고 있는 한얼이를 가리키더니 말했다. “한얼이 데리고 집에 가라고 막내 이모부가 그러시더라. 여울이는 아까 집에 갔지?” “네.” “너도 얼른 한얼이 데리고 가라. 이제 고 3이니 공부해야 될텐데 여기까지 와서 고생이다.” “제가 무슨요. 고생은 형이.. 더 심하죠” 내 말에 씁쓸하게 미소 짓더니 손을 내저으며 사라졌다. 잠시 그렇게 형의 뒷모습을 보며 서있는데 내 옷깃이 당겨지는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형, 우리 이제 집에 가는거야?” “그래. 집으로 가자.” 그리고.. 류인이 한테도. 집에 와 한얼이 밥을 챙겨주고 여울이에게 맞긴 후 내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앉아 손에 들린 핸드폰을 보며 앉아있는데, 생각해 보니 참 바보같다고 느껴졌다. 그 오랫동안 만나오면서 한번도 어렵다거나 주저하는 마음이 든적 없는데 이렇게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며 긴장하는 내 모습이 마치 처음 사귄 애인에게 전화하려는 놈 같아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막상 전화를 하려고 마음먹고 폴더를 열려는데 전화기에서 먼저 벨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모르는 번호여서 누구지 하는 의문으로 묻는데 상대편에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누구세요? 전화를 했으면 말을..” “안녕하세요. 경인 선배.” 한순간에 피가 식는 느낌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린 목소리는 좀 전의 내 긴장을 모조리 사라지게 할 만큼의 위력이었으니까. 정말 대단하다 선우 현. “무슨 일이야?” 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묻자 수화기 너머 살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너무 무섭네요.” “용건이나 말해.” “음.. 그럼 직접 얼굴보고 말할까요?” “뭐?” “나오세요. 지금 선배 집 앞이니까.” 집 앞 골목을 조금만 돌면 내가 어렸을 때 놀았고, 아직까지 동네 꼬마들이 이용하는 오래된 놀이터가 하나 있다. 7시가 가까워 져서 그런지 벌써 어두침침해진 하늘 아래 사물들의 경계가 흐릿해져 가는 걸 느끼며 난 놀이터에 한 발을 내딛었다. 그네 앞에 무릎보다 조금 더 높은 높이의 철봉 턱이 있는데 나에게 면담을 요청했던 인물이 그 앞에 기대어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살짝 고개를 숙이는 선우 현을 보며 저 예의가 자기도 모르게 몸에 베어버린 냄새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건은?” 그러자 선우 현이 손목을 올려 시계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용건을 빨리 말씀드려야 겠군요.” 그리고 입술 양 끝을 올리며 웃어 보이며 손에 들고 있던 쪽지를 나에게 넘겼다. “초대장이에요.” 난 녀석이 내민 손을 바라보기만 했다. 초대장? 왜 또 날 어떻게 해보려고? 무표정하게 고개를 드니 녀석이 미소 짓고 있는 입을 벌렸다. “걱정 마세요. 선배 다치게 하는 일은 없을테니까. 이번엔 제가 도움을 드리려는 거죠.” “도움이라니?” “선배가 궁금해 하는 것들이요. 아.. 미치겠지 않나요? 도대체 저놈은 왜 사이코처럼 류인이를 쫓아다니는 걸까? 왜 나를 괴롭히는 걸까? 후훗.. 이런거 말이에요.” “...” “받으세요.” 녀석의 재촉에 난 천천히 손을 뻗어 그 종이를 받아 쥐었다. “알려 드릴께요. 내가 왜 류인선배가 필요한지. 경민 선배를 왜.. 류인선배 곁에서 떼어내려 하는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지만 전혀 웃고 있지 않은 눈 때문에 나는 마주보며 웃어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나를 노려보는 눈이 아파 보인다는 거였다. 빌어먹을. “왜.. 내가 알아야 하지?” “그래야.. 내가 사니까.” “...” “또 말씀드릴까요? 난 류인선배가 필요해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비웃을지 몰라도, 난 그한테 반했어요. 아.. 정말이에요. 장님처럼 살다가 번쩍 눈이 뜨여 세상을 본 기분이죠. 그만 있으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을꺼에요. 그가.. 그 자체로만 모든걸 이겨내고 내 옆에 있어준다면. 그런데..” 기대었던 철봉에서 몸을 떼며 나에게 한발자국 다가왔다. “당.신.이 있었어. 너무 의외였지. 그가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다는걸 알 때보다 더 실망했으니까. 하지만.. 괜찮아. 실망이 크면 클수록 보답 받는 기쁨도 클테니까.” 내가 있다.. 류인이와 나 사이의 막연한 경계가 선우 현의 말로 천천히 물위로 들어나는 듯 했다. 그래, 니 말대로 난 아무것도 모르니 알려준다는 니 호의를 받아들여야 겠지. 이제 도망치지 않아. 류인이를 핑계로 기다리지도 않고. “도대체.. 니가 가지고 있는 공포증이 뭐지?” 이제는 완전히 어두워져 노란색의 가로등 불 아래 검은 음영을 드리우는 선우현을 바라보며 나지막히 물었다. 그러자 선우 현은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깨끗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학명 Phallophobia.” 내가 뜻을 묻듯 눈을 살짝 찌푸리자 미소를 더 짙게 하며 말했다. “남성성기 공포증이라고 하죠. 특히 발기되는 것에 관한.” 머릿속이 갑자기 텅 비는 듯했다. 이해할 수 없는 처음 듣는 생소한 단어에 그저 멍하니 있자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선우 현이 무덤덤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남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공포증이 아닐까요? 일단 자기 몸 조차에도 공포심을 느끼는 거니까.” “너..” 진짜냐고 묻고 싶었다. 어떻게 그런.. 이런건 류인이가 가지고 있는 고소공포증 따위와는 차원이 완전 다른 거잖아. 그리고.. 도대체 나에게 뭘 더 알려주겠다는 거지? 난 내 손에 들린 쪽지를 움켜쥐며 굳어버린 입을 벌려 소리를 냈다. “날 초대해서 뭘 보여주겠다는 거지?” “노력하는 모습이요.” 노력? 무슨? 너의 공포증을 극복하는거? 설마.. “류인 선배의 말이 옳아요. 극복하고 싶다면 알아서 노력하라고 했거든요. 그동안은 용기가 부족했지만.. 류인 선배 덕분에 최고의 공포를 맛봐서요.. 훗.. 이젠 더 이상의 공포는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스.스.로. 치료를 해볼까 하구요.” 그리고는 다시 시계를 내려다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 늦었네요. 선배에게 나의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면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오셔서 응원해주세요. 그리고..” 얼굴에서 웃음을 지운 후 낮게 중얼거렸다. “제발 꺼져버려.” 걸어가는 녀석의 등 뒤로 선우 윤의 말이 떠올랐다.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자기발로 뛰어든다.. 너는 지금 불속을 향해 가는 거니? 쪽지에 적혀있는 곳은 다행히 집에서 몇 십 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별로 어렵지도 않은 길이어서 중간에 헤맬 일도 없었다. 왜냐면.. 학교였으니까. 익숙한 장소를 골라준 녀석의 친절한 배려에 씁쓸한 감사를 보내며 천천히 운동장을 가로질러 체육관으로 향하는데, 재미있게도 어떻게 녀석이 체육관 열쇠를 가지고 있을까란 쓸데없는 궁금증이 떠올랐다. 선호라면 또 몰라도. 피식.. 복잡한 머릿속이 파업을 해버린 걸까? 선우 현이 가고 난 후 녀석이 던진 말에 충격을 받아 혼자 오랫동안 그네에 앉아 있었었다. 일단 생각했던 것에서 너무 벗어난 녀석의 공포증도 충격이었지만.. 나에게 마지막 말을 하고 돌아선 모습은.. 손을 들어 잡았어야 했다는 기분이 들게했다. 아무 일도 아닐지 모르지만, 단지 쓸데없이 예민하게 구는 내 신경 탓일 수도 있지만.. 한 켠엔 후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못하게 선우 현을 막았어야 했다고.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렇기에 난 그 초대를 받아들여 녀석이 노력하는 모습을 원하는 대로 응원해줘야겠지. 그리고 지금.. 운동장의 끝에 거의 와 닿은 상태에 나는 파업을 해버려 시무룩히 앉아있는 고민들 덕분에 덤덤한 기분이었다. 이봐.. 고민들, 그렇게 앉아있지 말라고. 이제 곧 선우 현이 알게 해준다잖아? 이제 너희들하고도 안녕해야 할지 모른다고. 저기 어둠 아래 괴물처럼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체육관에 들어서면 말이야. 체육관을 50m 남겨놨을 때 주머니에서 진동으로 해 놓은 핸드폰이 울렸다. 난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보지 않고 그냥 베터리를 빼버렸다. 만약 류인이라면 이대로 발걸음을 돌려 버릴 것 같았으니까. 기다린다고 내가 그랬지? 다만 내가 관련이 없다면. 하지만 저기 커다란 체육관의 철문을 넘어서면 나의 관계 여부를 알수 있겠지. 설명해 준다고 약속했으니 말야. 실은 어쩌면 지금 난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왜 관계되어 있고 선우 현의 미움을 받는지 말야. 단지.. 감일 뿐이라고. 언제나 그렇듯 모든 감은 확인을 해야 해. 체육관 문에 거의 다가섰을 때 어둠에 익숙해진 내 눈에 문 옆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한 인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뜨며 누구인지 자세히 보려고 애쓰는데 익숙한 외모란 걸 깨달았다. “왜 그러고 앉아 있어?” 내 말에 순남이가 세운 무릎사이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날 봤다. 처음엔 나 인줄 못 알아보는 것 같았으나 천천히 벽을 집고 일어서는 녀석에게 다가서자 날 알아보았다. “여기... 왜.. 왜 왔어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려는 것 같은데 희미하고 뿌연 등 아래 보인 녀석의 부은 눈은 별로 주인의 뜻대로 따라주고 있지 않았다. “초대 받았지.” “혀.. 현이한테요?” 정말 놀랬는지 입을 반쯤 벌린 채 있는 녀석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자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며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오면 안돼?” 그러자 다시 고개를 들어 날 보는데.. 그 부은 눈 아래 촉촉해진 눈동자로 주저하는 빛이 보였다. “모르겠어요.. 왜.. 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그건 지금 확인해 보면 알겠지. 어깨를 늘어뜨린 채 멍하니 서있는 순남이를 지나쳐 두꺼운 철문을 밀자 체육관의 불은 모두 켜진 듯 환한 빛이 날 맞이했다. 어두운 곳에 있다 들어서니 적응이 되질 않아 체육관에 완전히 들어서고도 잠시 동안 눈을 깜박이며 안의 밝기에 적응하려고 노력해야했다. 그런데 그 잠깐 사이 내 신경을 자극하는 소리가 들려와 나도 모르게 찌푸려진 눈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곳을 향했다. 그리고.. 내 각막에 투시된 광경에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해 버렸다. “헉..헉..으윽....하아..” 기분 나쁘게 울리는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자크만 내린 채 벌거벗은 남자의 다리 사이에서 피스톤질을 하고 있었다. 높은 체육관 천정에 달린 환한, 너무 밝은 인공의 하얀 빛 아래 힘을 잃고 흔들거리는 다리는 지금 땀을 흘리고 신음 소리를 내며 허리를 놀리고 있는 남자의 팔에 걸쳐져 있었다. 차가운 갈색의 바닥위에 맨몸으로 누워 사내를 받고 있는 남자, 아니 소년의 눈은 멍하니 한곳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핏기가 모두 빠진 얼굴에는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온 거품으로 뒤범벅이였다. 그리고 양복을 입은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뒤로 밀리는 상체는 바닥과의 마찰로 인해 이미 뻘겋게 변해 있었다. “헉.. 으아.. 악.. 헉.. 헉..” 이제 곧 절정에 다다르려는지 이마에 땀까지 흘리는 남자는 소년의 다리를 추슬러 팔위에 다시 걸치더니 몸을 더 바싹 밀어 붙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 씨팔.. 빨리해. 꼴려 죽겠어.” 소년의 머리 위에 앉아 움직이지 못하도록 어깨를 붙잡고 있던, 똑같은 검은 양복을 입은 노랑머리의 남자가 소릴 질렀고, 그의 말에 개처럼 헐떡이던 남자 뒤에 서있던 몇 명이 웃음을 터트렸다. “썅.. 진짜 장난 아니다. 보는 것 만으로 싸겠어. 아주 물건이야, 물건.” 문 앞에서 겨우 몇 걸음도 떨어지지 못한 채 경악으로 이성이 마비되어 서있던 난 그들의 대화에 겨우 한발을 내딛었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한가지 생각은 바로 선우 현이 불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성이 나간 듯 보이는 녀석을 남자 다섯이 둘러싸고 희희덕 거리며 개처럼 엉덩이를 흔들고 있었다. 뜨거운 불속에서 스스로를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어. 망치로 머리를 두드려 맞듯이 떠오르는 이 한가지 생각에 난 다시 한발을 내딛었다. 뭐야 선우 현.. 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리고 순식간에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 나도 모르게 소릴 질렀다. “제길, 선우 현!!!” 나의 외침에 아직 더러운 움직임을 하고 있던 남자를 제외한 네 명의 사내가 날 쳐다봤지만, 내 눈에는 오직 정신이 나가 보이는, 하지만 기절은 안하고 모든 걸 인식하고 있는 선우 현만이 보였다. 뭐야.. 니가 말한게 이거야?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이게 치료야? 어? 말해보라고!! “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선우현! 씨발 개새끼들 당장 안 떨어져!!” 소리를 지르고 앞으로 나서려는데 아무런 빛도 감정도 없던 선우 현의 눈이 나를 향했다. “... 져...” 입 주변을 뒤덮은 지저분한 거품이 힘겹게 소리를 내는 녀석의 말을 더 저해하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선우 현이 다시 내뱉는 말에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엿다. “.. 떨어.. 져..” 그 말의 의미를 멍하니 풀이하려고 애쓰는데 평소 녀석의 목소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갈라지고 낮은 말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류인.. 선배한테.. 떨어 져..” 심장이... 내려앉았다. 극심한 공포로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고 사고마저 불가능해 보이는 선우 현의 입에서 겨우 나온 말은 날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걸 노린거니? 응원해 달라는 건 절대 거절할 수 없는 너의 말을 이행하라는 거였어? 어? 지금.. 자신의 최악의 모습까지 보이며 말이다. 또 다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단지 류인이에게서 떨어지라는 그 말만이 내 심장을 난도질 하고 있었다. 내 대답을 듣겠다는 듯 단 한가닥 남아있는 의지로 내 시선을 붙잡고 있는 선우 현을 눈을 보며 도저히.. 아무것도.. 그런 와중에도 선우 현에게 자신의 성기를 밖아 대던 남자가 떨어져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남자가 선우 현의 다리사이로 기어들어 왔다. “그만.. 해.” 나의 이 말이 눈앞에 보이는 이 더러운 짓꺼리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내 시선을 집요하게 붙잡고 놔주지 않는 것에 대한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처음 접하는 인간의 극단적인 모습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으니까.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몸을 움직여 이 자릴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었나 싶게 모든 건 그저 바램 뿐이고 충격으로 인해 나 역시 선우 현처럼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문소리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쾅’하며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의 발소리가 바로 내 뒤에서 멈춰서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드디어 내 원대로 나는 선우 현의 시선에서 떨어져 몸을 돌렸다. 아니.. 누군가의 강한 손에 의해 내 몸이 돌려졌다. 곧 내 등을 감싸는 팔이 느껴진다 싶더니 한 손이 내 목을 조심스레 잡고 날 끌어안았다. 순간 느껴지는 류인이의 향기에 난 나도 모르게 류인이 손을 따라 고개를 녀석의 어깨에 가져 다 대었다. 뛰어왔는지 약간 숨을 거칠게 쉬는 녀석의 심장이 바로 내 가슴 위에서 느껴졌고, 귀를 통해 나지막히 들리는 속삭임이 있었다. “미안.. 늦었어.” 진정제처럼 날 안심시켜주는 녀석의 말에 난 온몸의 긴장을 풀며 류인이의 몸에 내 몸을 기대었다. 하지만 곧 들려오는 선우 현의 목소리는 나의 휴식을 오래가지 못하게 했다. “주연이.. 다 모였네요. 훗..” 그 말에 내가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류인이의 손이 내 머리를 감싸며 그대로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쇼 그만하고 집에가 잠이나 자.” “하? 쇼라구요? 나의 이런 노력을 알아줘야 하는 건 바로 선.배.라구요. 왜냐면..” 갈라져 나오던 선우 현의 목소리가 잦아들었고, 곧 원망이 가득담긴 목소리로 되돌아왔다. “날 이렇게 몰아붙인 건 한 류인 당신이니까.” 그 말에 난 류인이의 손을 밀쳐내고 한발자국 떨어져 류인이를 바라보았다. 선우 윤에게서 들은 말이 있었지만 난 류인이에게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니가 정말.. 저 애를 불속으로 뛰어들게 한거냐고. 나의 이런 물음이 담긴 표정을 이해한걸까? 묵묵히 날 내려다보던 녀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나지.” 선우 현에게 한 대답이었지만 날 보는 시선에는 그 답에 대한 무심함이 들어있어 날 혼란스럽게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거야? 넌.. 저런 선우 현을 보고도? “그럼.. 이제 한 가지만 남았네요.” 선우 현의 말에 난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혼자 누워 그 하얀 나체를 그대로 들어 낸 채 날 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이미 눈치 챘죠 선배? 이 모든 문제의 중심에 서있는 건 바로 이.경.민 당신이야. 선택해. 날 떨쳐낼 수 있으면 해봐. 평생 그럴 자신 없다면 한 류인에게서 떨.어.져.” 다시 내 팔을 잡아당기는 류인이가 느껴졌지만 나 녀석을 쳐다보지 않았다. 평생이라고? 제길 선우 현.. 대답하기 이전에 난 아직 알아야할 중요한 것이 있단 말야. 류인이의 마음과 .. 바로 나의 마음. 바닥으로 향했던 시선을 들어 류인이를 바라보려는데 갑자기 체육관의 육중한 철문이 벌컥 열리고 익숙한 외모의 사람의 뛰어 들어왔다. “형! 어떻게 된거야? 설마 또 저 사이코 녀석이.. 헉! 겨.. 경민 형..” 난 새로 등장한 이슬이를 차분히 바라보다 류인이에게 시선을 돌렷다. 그래, 두 사람은 아는 사이였어. 민섭이가 목격한건 사실이었던 거야. 그런데.. 어떻게 둘이 아는 사이가 된거지? 그 대답은 약하게 소리를 내고 있는 선우 현에게서 나왔다. “선배의 그 힘 좋은 부하는 내가 불렀어요. 덕분에 내 친구들이 많이 다쳤죠. 놀라워요. 나도 감쪽같이 속을 뻔 했으니.. 날 감시하기 위해서 우리 반에 전학까지 시킨 건가요? 이렇게 까지 관심을..” “씨끄러.” 선우 현의 짧게 끊은 류인이가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보호하고 싶었어.” “뭐?” 내가 어이없다는 듯 묻자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너.. 지켜주고 싶었어.” “너야 말로 입 닥쳐. 누가 누굴 지켜.” 하지만 나의 이런 반응을 이미 예상한건지 류인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난 잠시 녀석을 쳐다보다 고개만 살짝 돌려 선우 현을 내려다보았다. “미안하지만. 난 이녀석 곁에서 안 떨어져. 그러니 계속... 이런 식으로 너 자신을 망가트리고 나에게 위세를 떨어도.. 효과를 보긴 힘들 거야. 극복하고 싶다면 원인을 찾아서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해봐.” 그 말을 남기고 류인이를 지나쳐 문을 여는데 뒤에서 선우 현이 씁쓸한 듯 중얼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원인을...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으면 류인선배가 필요하지도 않았겠죠.” 문을 닫고 어둠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서있는데 앞에서 인기척이 들려 고개를 들었다. “너.. 왜.. 말리지 않았어?” 내 질문에 순남이가 고개를 떨궜다. “어쩌면.. 이게 방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비슷한 상황에 처해 다시 당한다면 .. 그 극한 상황에서 출구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다시 당해?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그 말에 난 서둘러 물었다. “비슷한 상황이라니.. 무슨 뜻이야? 설마 선우 현이 공포증을 가지게 된게..” 내 말에 주춤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순남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간.. 당했어요. 현이는..” 갑자기 검은 파도가 날 집어 삼키며 숨을 졸아 메는 기분이 들었다. 강간이라면.. 그럼.. 류인이가 선우 현이 공포에 떨 때 불렀다는 사람이 바로 녀석을 강간한 사람이었단 말이야? 선우 윤이 말한 건 그거였어? 나의 충격 받은 표정을 살피던 순남이가 작게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류인 선배가.. 현이 공포증을 확인하고 전화로 부른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현이를... 강간한 범인이었어요. 저도 몰랐는데.. 그때 현이의 표정이.. 산 사람이 아니었어요. 문제는.. 그 강간한 놈은 그날 현이가 바로 그런 공포증이 있다는 걸 안거죠. 그리고 그걸 안 그 남자가..” 아픈 눈으로 날 바라보며 순남이는 나머지 말을 내뱉었다. “.. 웃었죠.” 그 섬짓한 말과 동시에 내 등 뒤로 닫쳐있던 체육관 문이 열리고 류인이가 나왔다. 밝은 빛을 등에 지고 날 바라보다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오는 녀석을 보며 난 쥐어짜듯 목소리를 내었다. “너.. ” 내 말에 류인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러 수가 있어? 선우 현 강간범을 저 자식 눈앞에 끌어다 놨었다는게 사실이야? 어? 그게 정말이냐고!!” “그래.” “뭐? 넌 그렇게 태연스럽게 대답이 나와? 한류인... 사람이 아무리 밉고, 싫어도 해서는 안될 선이 있는거야. 저 자식 저렇게 미쳐 날뛸걸 뻔히 알면서.. 어떻게 니가.. 그런짓을 할수 있어!!” 너 그렇게 독한 놈이었어? 사람의 약점을 가차 없이 짓밟고 뭉겔만큼 잔인한 사람이었어? 내가 알던 너는 단지 반쪽이었던 거야? 나의 수많은 물음들에 관해 녀석은 대답 없니 날 바라보다 짧게 답했다. “상관없어.” “상관.. 없다니..?” “저런 녀석따위 망가지던지 난 상관없다고.” “그럼 도대체 니가 상관있는게 뭐야? 도대체 그게 뭐길래 그렇게 잔인하게 저 녀석의 가슴을 망가트린거야!!” 나의 외침에 처음으로 류인이의 표정에 변화가 왔다. 항상 기분을 알 수 없던 그의 무표정이 씁쓸한 웃음으로 변했다. “너.” 그래.. 결국이 이거였던 거야. 확인을 받아야만 했던 나의 불안한 추측 말이다. “너만 중요해.” “그렇더라도 니가 한 행동들에 대한 변명은 될 수 없어. 넌 선우 현에게 너무 극단적인 방법을 썼단 말야!” 나에게 한걸음 다가서며 류인이가 속삭이듯 말했다. “무서웠거든.” 너무 뜻밖의 말에 난 눈을 크게 뜨고 류인이를 올려다봤다. “니가 다칠까봐. 그리고..” 류인이의 한손이 올라와 내 얼굴로 다가왔지만 난 움찔거리며 뒤로 살짝 피했다. 그러자 녀석이 그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물러설까봐.” 말도 안돼.. 내가 무섭다고? 다칠까봐, 너에게서 물러설까봐? 선우 현의 협박에 한 대응이 바로 나 때문이었다고? 이건 니가 아냐. 전혀 너답지 않다고. “말도 안돼..” 나의 중얼거림에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온 류인이가 낮은 목소리로 정확하게 말했다. “왜냐면 난 아주 지.독.한. 이경민공포증 환자니까.” 공포증 - 22 5. Leekyoungmin-phobia 중학교 3학년 겨울, 집에 아버지가 안 계시는 상황에서 이제 돌 지난 한얼이가 한밤중에 열이 심하게 오른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상당히 당황하셨는데, 그때 난 뛰쳐나가 새벽이란 것도 잊고 약국을 향해 달렸다. 다행히 바로 세 번째 찾은 약국 2층이 약사가 살고 있는 집이어서 약을 사오긴 했는데 밤새 차가운 거리를 뛰어 다닌 덕분에 다음날 아침에는 내가 열이 오르고 말았다. 몸이 안 좋아 학교를 안 가려 했는데, 그날이 기말고사 마지막 날이라 아픈 몸을 이끌고 학교에 가야했다. 가는 내내 어지러운 머리로 정말 시험만 아니면 결석하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었다. 그리고 3년 만에 처음으로 같은 생각을 지금 하고 있었다. 멍하니 천정을 바라다보며 머릿속에서 울리는 생각은 단지 피하고 싶다라는 생각 뿐. 다시 선우 현을 만나기 몇 주 전으로 돌아가 장난처럼 서로에게 눈을 흘기고 싱거운 농담을 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불과 3주. 천정의 모서리 끝은 예전의 하얀색이었을 벽지가 누렇게 변해 있었다. 손을 앞으로 뻗어 살짝 그 부분을 가렸다.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 처음과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벽지의 색이 바래는 것처럼 내가 관계하는 모든 것들, 사람, 사물.. 외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결국에 가서는 소멸이라는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안다. 가까이 이제 사실 날이 얼마 안남은 큰 이모처럼 내 옆에서 사라지실지도 모르지. 간단한 진리다. 나도 알고 있고, 의식하지 않더라도 모든 상황에 대해 적용되는 이 것을 느끼고 있단 말이다. 그런데.. 알고 있지만 류인이와의 관계가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어. 그래 3주 전까지는 상상도 못한 일이지. 힘없이 떨어진 손 위로 누런 벽지가 조롱하듯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변화자체를 아예 피하고 싶고, 고민하기를 거부하는 나를. 그래봤자 언젠가는 결국 결론을 내야해. 지금처럼 학교를 가야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부터. 평소와 같이 책상위에 엎어져 자고 있는 녀석의 등을 애써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의자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았다. 언뜻 눈에 헝클어진 머리와 구겨진 교복이 보였지만 그런 사소한 신경도 배제하기 위해 계속 아무 생각하지 말자란 주문을 외웠다. 자리에 완전히 앉자 다른 날과 다름없이 아직 오지 않은 선호와 달리 병국이가 뒤를 돌며 나에게 인사를 했다. “왔냐, 경민.”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에서 교과서를 꺼내는데 손가락에 낀 샤프를 흔들며 병국이가 급하게 물어왔다. “너 수학숙제 했어? 생각해 보니까 오늘이 나 딱 걸리는 번호야. 야, 했음 좀 보여줘.” “안 했어.” “뭐?” “안 했다고.” 고개를 들진 않았지만 아무 말이 없는걸 보니 병국이가 꽤나 놀란 듯 했다. “니가 숙제를 안 해? 너 없으면 나랑 선호는 누구꺼 보라고!” “니가 해.” 고개를 들지도 않고 책을 보며 내가 중얼거리자 다시 한번 병국이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경민아.. 너 무슨일 있어?” 조심스레 물어오는 병국이의 음성이 들려왔지만 멍하니 글자들을 보는 내 눈도, 대답을 해야 할 내 입도 마취된 것처럼 자기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 “뭐?” 겨우 내 입에서 나온 이 한마디 물음에 제발 녀석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줬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이경민공포증이라니. 그래 예상하고 있던 사실을 확인받은 거지만, 더 믿을 수 없게 되버렸다. 저 녀석 입에서 나온 대상은 내가 아닌 것만 같았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한 구석에서 외쳐댔다. 안 그러면.. 여태껏 유지되어온 우리의 그 같잖은 12년간의 우정은 깨지는 거니까. 깨져? 갑자기 복잡했던 머리가 쉬익 하고 거품이 빠져나가버렸다. 차가워지는 심장을 느끼며 날 두렵다고 말하는 눈앞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정신 차려. 너의 그 열렬한 고백은 접수 못해.” 아니.. 그러면 안돼. “만약 친구로써 날 돕기 위해 선우 현에게 저런 짓을 했다면 난.. 널 두둔하지 않을 수 없어. 하지만.. 내가 두렵다고? 너에게서 물러설까봐? 병신새끼 잘 들어. 12년간 니가 날 어떻게 봐왔든 내 눈에 넌 그저 고소공포증에 고양이 싫어하는 친.구.야.” 그래 친구. 나의 비밀스럽고 확실하지 않은 마음을 들어 내지 않아도 되는 친구지. “강조 하지 마.” 무표정으로 돌아온 류인이가 지금 어둠과 어울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최면 같은 걸 걸지 말란말야. 직시해 이경민.” 그러지마.. 난 혼란해지는 건 싫어. “나를 똑바로 봐.” “...” “우리사이에 ..친구는 없어.” 언제나 넌 해답을 가지고 있구나.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도 넌 항상.. 니가 원하는 걸 분명히 알고 있어. 하지만 난 니가 아냐. 그렇기에 내가 원한다 해도, 그걸 해답이라고 말 할 수 없어. 난.. 너처럼 주변을 무시할 수 없거든. 날 자극하는 선우 현도, 너와의 관계를 새롭게 인정할 때 일어날 주위의 반응도. 그리고.. 중요한건 내 마음이 확실한지 모르겠다는 거겠지. “그건 니 생각이고. 나한테 강요할 생각은 하지마” 난 시선을 돌려 괴물처럼 보이는 체육관건물을 응시했다. 선우 현 너도 마찬가지야. “당분간.” 난 녀석이 간신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속삭였다. “아는 채 말자.” 그리고 내 망막에 비친, 무뚝뚝한 녀석의 표정과는 반대로 상처 입은 눈을 한 류인이를 마음속에서 무시한 채 몸을 돌렸다. 나의 저기압에 선호와 병국이도 하루 종일 조용히 내 눈치만 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고개한번 들지 않고 계속 엎드려만 있는 류인이의 눈치도 같이 보는거겠지만. 생각보다 길지 않았던 하루 수업을 모두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오는데 병국이와 눈빛을 주고받던 선호가 나를 따라왔다. “경민아.”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어가자 내 옆으로 오더니 조급하게 물었다. “야, 나 좀 봐봐.” 내 팔을 잡아채는 선호의 힘에 나도 모르게 몸이 돌려졌다. 입을 다물고 선호를 물끄러미 보자 녀석이 혀로 입술을 축이더니 주춤거리며 물었다. “너... 류인이랑.. 싸웠어?” “아니.” “그럼 뭐야. 너도 하루 종일 저기압이고 류인이 녀석은 아예 고개도 들지 않고.” “궁금하면 저 녀석한테 물어봐.” “류인이가 뭐.. 너한테 잘못했어? 야.. 너도 류인이 성질 알잖아. 웬만하면 니가 화풀고..” “장선호.” 억양없는 나의 말투에 선호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나 화난거 아냐.” “그럼.. 왜 그런건데?” 왜 그러냐고?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류인이에게 화가 난 건 아니다. 선호 말처럼 녀석의 성질을 아니까 나에게 미쳐있다고 말한 그 웃기는 이경민공포증도 시간이 지나니 녀석 답다라는 생각이 드니까. 화가 나는 건.. 나야. 애매하고 모호함으로 가득 찬 내 마음. 확실한건 아무것도 없고, 녀석을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소심하게 겁만 먹고 있는 나 말야. “내가.. 한심해서.” “왜 그래? 니가 뭐가 한심하다고 그래? 너 맨날 우리가 못났다고 장난쳐서 진짜로 그렇게 믿냐? 아냐 임마.. 너 똑똑하고 잘난 놈이야. 누가 너한테 뭐라고 해?” 난 말없이 선호의 손을 풀어내고 몸을 돌려 걸었다. 뒤에서 선호가 걱정스레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아무하고도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터벅터벅 버스정류장에 거의 도착했을 때 주머니속의 전화가 울렸다. 걸음을 멈추고 전화를 받으니 어머니가 우는 목소리로 큰이모의 부고를 알려 오셨다. 거의 쓰러지실 것 같이 다 쉬신 어머니의 목소리에 정신이 확 든 나는 서둘러 택시를 잡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말이다.. 이 불행한 소식에 당연히 먼저 큰이모를 생각하며 애도를 해야 하는 내가 아주 우습게도 안도를 하고 있었다. 슬픔이전에 회피할 수 있는 출구가 생겼다는 것에 먼저 숨을 돌리고 있는 나의 이기심을 깨달은 것이다. 최악이군. 언제부터 난 이렇게 나약해 진걸까? 문제를 정면으로 맞닥뜨리지 못하고 피할 수 있는 구실에 안도하다니. 여태껏 자라오면서 내가 남들에게 보여지길 원하던 외향적 모습은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이 둘 있는게 영향이 되어 당연한 듯 내 몫으로 돌아오는 의무감을 아무 내색 없이 행해야 한다는 어린시절 강박관념이 지금은 남들에게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으로 보상받길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책임감 있고, 문제를 피하지 말아야 할 내가 지금 큰이모의 부고를 방패막이로 삼고 있다. 순간 소름이 돋을 뻔 했다. 평소 건들지 못했던 나의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치명적인 단점을 찾아낸 기분이었으니까. 그래, 난 이기적이고 나약한 인간이다.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 따위는 거품 투성이었던 거다. 어려운 난관 앞에서 여지없이 발가벗겨진 나의 본모습에 실망을 해야했다. 그리고? 흔히들 바닥까지 떨어지면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들 하지. 하지만 올라가는 게 얼마나 힘들지 알고 포기한다면 어쩔꺼지? 택시에서 내려 병원 영안실로 향하면서 난 비겁한 나에게 유예시간을 주기로 했다. 언제까지 류인이를 피할 수는 없지. 그래도 그 힘든일을 잠시만.. 뒤로 미루자고. 나에게 실망하더라도. 잠시만. “308호 환자 보호잔데요. 지금 깨어나셨는데 뭐라도 드셔야 할 것 같아서요.” 내 말에 차트를 보던 간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맞고 있던 링겔은 다 끝났나요?” “아뇨. 근데 계속 어제부터 드신게 없어서요.” “쇼크상태로 쓰러지신거라.. 갑자기 드시면 위에 무리도 있으니까 잠시만요, 선생님께 여쭤보구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수화기를 드는 간호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핑계가 아니고 지금 난 정말로 학교를 이틀이나 빠지게 되버렸다. 큰이모가 돌아가신 날 거의 멈추지 않고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가 다음날 아침 쓰러져버리신 거다. 갑자기 쇼크 상태로 쓰러진 어머니를 서둘러 병원에 입원시키고, 난 집에 들리지도 못한 채 근처 외삼촌 내에서 옷을 갈아 입은 뒤 바로 뒷수습에 들어가야 했다. 큰 이모부가 안 계셔서 장례문제를 외삼촌과 도맡아 하고 있는 아버지 때문에 내가 어머니를 돌보고, 한얼이 여울이를 책임지느라 이틀이 어떻게 지나 간지도 모르게 가버렸다. 오늘 저녁 발인이 있을 예정이고, 어머니도 좀 안정되셔서 한시름 놓긴 했지만 덕분에 완벽하던 개근인생에 오점이 남게 되었다. 아.. 학교가기 싫어라며 우울해하던 내가 맞나? 란 생각을 하면 좀 우습기도 하지만 말이다. 내일은 목요일.. 일대구가 진심으로 기뻐한 모의고사가 있는 날이라 학교에 가야하니 일단 오늘 저녁은 집에 들러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 생각없이 보냈는데 벌써 삼일이나 지나다니, 그 동안 난 조금의 준비는 되있는 걸까? “경민아.” 고개를 돌리니 사촌 누나가 날 부르고 있었다. “막내 이모는 좀 어때?” “깨어나셨어.” “어유.. 니가 고생이다.” 그 말에 내가 고개를 흔들자 사촌누나가 내 팔을 툭툭 쳤다. “어렸을 때부터 애어른 갔더니 여전하구나. 참, 누가 너 찾으러 밑에 와있어.” “나?” “응. 같은 학교라고 하던데.. 선생님이신가봐.” 에? 선생님? 아니 혹시 일대구가 정말 큰이모 돌아가신건가 해서 감찰나온건가? 난 고개를 갸웃둥 거리며 누나가 말한 학교선생님을 만나러 1층 로비로 내려갔다. 당연히 일대구일꺼라 의심하지 않으며 내려갔지만, 로비에 서서 불안한 듯 왔다 갔다 하는 그를 보는 순간, 겉보기 등급이 남들보다 월등한 한사람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르신.. 참으로 오랜만이군요. “마셔라.” 내가 캔커피를 손에 쥐어주자 이슬이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두 손으로 받았다. 뭔가 할말이 있는 듯 내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손에 든 캔커피만 보고있는 그를 보다 난 손에 든 캔커피를 따서 입에 가져다 댔다. 실은 나도 이슬이에게 물어볼 말이 많았다. 류인이와 알고 있었다는 것도 그렇고, 날 보호한다는 말이 무었인지도 궁금했으니까. 그런데.. 정신없는 이틀을 보내면서 마음의 여유랄까? 조금 내 문제에 대해서 관망하는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처럼 조바심 내어 먼저 묻지 않아도 될만큼. “저..” 캔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 한참 만에 열린 이슬이의 입은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말을 풀어냈다. “제가 왜 왔는지... 아시겠죠? 형. 그게.. 일요일 날 있었던, 그니까.. 거기서 절 봤던건요..” “류인이하고 아는 사이라고?” 내 말에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들고 날 봤다. 물론.. 난 보는 순간 아직 적응되지 않은 표정이 있다는 사실과 함께 움찔 뒤로 물러서는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실은 얼굴에 난 약한 멍도 한 몫했다. “알고 계셨어요?” “아니.” “그럼..”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눈치채지 않을까?” 그러자 ‘하긴’ 이라고 중얼거리며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형을 속이려고 했던건 아니구요... 류인형 말처럼.. 형이 그 선우싸이코 자식한테 혹시 해코지라도 당할까봐.. 저보고 자기가 못 보는 상황은 지켜봐 달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그 싸이코놈하고 친한척도 하고..” 또 한번 듣는 말이지만 정말 자존심 상하는 말이군. 내가 물끄러미 녀석을 무표정하게 쳐다보자 화가 났다고 생각한건지 이슬이가 급히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니 절대 형이 약해서 그런게 아니구요, 그러니까 류인형은 .. 단지 그냥 워낙 그녀석이 싸이코다 보니까 예방을 하자는 차원에서..” 갑자기 예전에 선우 현과 류인이가 하는 대화를 듣고 화내며 나오던 중 이슬이를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이해 못 할 미안해란 말을 했었지. 니가 미안하다며 죄인 같은 표정을 지었던 건 날 지키지 못했다는 소리였어? 참.. 한류인 사람 여러 가지로 놀라게 하는군. “그래서 예방이 된거야?” 나의 말을 빈정거림으로 들은건지 이슬이는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실은 별로 도움도 못되고.. 난 형만 따라다니면 될꺼라 생각했는데.. 그 싸이코 자식이 형 가방에 뭘 넣어놨을 줄은 몰랐어요.” “그럼 나한테 했던 말은 다 거짓말이겠군. 좋아한다며 고백하던 건.” “아니 형 그건..” 다시 고개를 들어 날 보는 이슬이가 뭔가 애타는 듯 날 보더니 시선을 피했다. “거짓말... 아니에요. 예전에 류인이 형이 경민 형 사진 보여줬을 때부터 꼭 한번 형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물론.. 류인 형이 좋아하는 거 아니까 난 그런 마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약 류인형이 좋아하는 사람 아니었으면 형한테 대쉬 했을지 몰라요.” 핑계일지 모르지만 쑥스러움을 동반한 그의 말에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 대쉬라는 단어에 철렁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려 하는 손을 겨우 억제하느라 바빴다. “내 사진을 보여줬다는 건 무슨 말이야? 너 류인이네 집안하고 얼마나 가까운 사인데?” “사진은 류인이 형이 방에 모아 놓은거 제가 억지로 보여 달라고 해서 본거였어요. 류인이 형한테 화내지 마세요.” 내 사진을 모아놔? 난 조금은 단조로운 녀석의 방을 생각하며 이마를 찌푸렸다. 요새는 자주 안 갔지만 그래도 녀석의 방에 뭐가있다는 건 대충 아는데 내사진이 있다고? 내가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자 이슬이가 서둘러 말했다. “류인형 방에 가면 박스로 하나 가득 형 사진 있어요. 으.. 제가 이런 얘기 했다는거 류인이 형한테 말하지 마세요.” 박스라니! “너.. 그 사진 언제 처음 봤어?” “아.. 초등학교 6학년 때요.” 머리를 긁적이는 녀석을 보며 허탈한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막았다. “저희 아버지가 류인이형네 조직에서 일하시거든요. 그래서 예전부터 류인이네 형들하고 잘 놀았어요. 특히 제가 귀엽다고 다들 좋아하셔서..” 라는 말 끝에 베시시 웃는 이슬이를 보며 뻥치지마! 라고 가슴깊이 우러나오는 사자후를 내뿜을 뻔 했지만 미적 감각이 특출난 그 집안 형제들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내 자신이 더 무서워졌다. 제길.. 그러고 보니 나 있을 때 몇 번 나왔던 귀염둥이가 그럼.. 제발 한번 정해진 언어의 약속을 깨지 말고 뜻 그대로 사용했으면 하는 언어학자의 심정으로 타칭 귀엽다는 소릴 듣는 이슬이를 다시 한번 유심히 쳐다보았다. 한씨집안 형제들이 찾은 그 무언가를 나도 발견하고 싶어서. 허나.. 알다 싶이 난 범인이기에 특별한 몇몇에게만 보이는 절대미가 나에게 보일리는 만무하다. “저.. 용서해 주실꺼죠?” “뭘?” “형한테 아무 말 안 한거요.. ” 난 물끄러미 녀석을 쳐다보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용서 안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전 형한테 미움 받기 싫어요.” 아.. 미움 말고 두려움은 좀 가지고 있다만.. “그리고.. 류인형이랑 잘 되셨음 좋겠어요.” “미안하지만 그건 니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알아요. 그냥요.. 류인이 형이 경민 형 되게 오랫동안 좋아했거든요.. ” 그러고 보니.. 니가 알고 있는 정도면.. “혹시.. 류민 형이랑 류진형도 알고 있어?” 설마라는 말투로 물으니 고개를 크게 끄덕여 나에게 충격하나를 더 얹어 주었다. 뭐야.. 그 집안 도대체. 동생이 남자를 좋아한다는데.. “그럼.. 류인이 어머님이랑 아버님도..?” 내가 눈을 크게 뜨며 묻자 이슬이가 바로 대답했다. “그럼요. 형은 걱정할거 하나도 없어요.” 바로 그게 걱정이다. 미치겠군.. 도대체 말려야 하는게 정상아냐? 자기 아들이 호모의 길로 빠지겠다는데 그걸 알고도 그냥 놔두다니. “하아..”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고 있던 반쯤 남은 커피를 옆에 놓았다. 정말 트루먼 쇼에서 짐캐리가 나중에 자신이 살던 곳이 바로 거대한 세트장이란 걸 아는 순간의 기분이랄까? 도대체 한씨 집안 식구들은 그동안 날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친구라며 왔다 갔다 하는 날 비웃은건 아니겠지만 재밌다고 생각했겠지? 참.. 이제 화도 안나는군. 이틀간 기력을 소모한게 내 화에도 영향을 미쳤나보다. “안 미워할테니까 그만 가봐라.” 시계를 보니 9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어서 집에 가기 전 한얼이와 여울이를 맡아주고 있는 막내 외삼촌댁에 들리려면 지금 일어서야 했다. “아 저..”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이슬이가 다급한 표정으로 날 불렀다. “실은 여기 온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요..” 다른 이유? 내가 눈으로 묻듯 쳐다보자 좀 가라앉은 눈으로 날 마주 보았다. “류인이 형.. 일요일 저녁에 나간다음부터 집에 안 들어왔데요..” 일요일 저녁? 하지만.. “월요일 날 학교에서 봤어.” 멀쩡히... 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루 종일 엎드려있는 모습으로. “예. 알아요. 근데 어제부터는 학교도 안나오고.. 류민형이 연락 안 된다고 저보고 아냐고 묻길래 전 혹시 형 찾아오지 않았나해서..” “아니. 여긴 오지 않았어.” 그러자 이슬이는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연락 오면 집에서 다들 화나셨다고 좀 전해주실래요? 특히 어머니가..” 이 자식 도대체 어디 처박혀 있길래.. “그래.” 난 간단하게 대답한 후 문 쪽으로 나가는 이슬이를 배웅했다. 류인이 어머니 한번 화나시면 장난 아닌데, 말도 안하고 외박이라니.. 좀 걱정스런 마음에 멍하니 이슬이의 등을 보며 서있는데 몇 걸음 나아가던 녀석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세웠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들자 심각하게 굳은 표정으로 변한 이슬이가 날 쳐다봤다. “선우 현 싸이코 자식 조심하세요.” “걔.. 그날 어떻게 됐니?” 물론 괜찮냐는 의미는 아니었다. 거의 심신이 망가져 유일하게 류인이만 바라보던 한줄기 의식만 남은 놈이었으니 아마 그날 그 우스꽝스런 노력을 한 후 또 망가졌겠지. 문제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정도냐다. 정말 위태로운 놈이라는 생각에 씁쓸해지는 마음을 어쩔수 없었다. “그 놈.. 독한 놈이에요. 사람 돈 주고 사서 그런 짓이나 시키고.. 형은 먼저 나가서 모르겠지만 끝까지 눈만 살아서 류인이 형 노려보고 있었죠. 문제는 경민형이 자기 뜻대로 반응을 안보였다고 생각한건지.. ” 말을 끊더니 날 걱정스레 쳐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류인 형한테 떼어내지 못하면 없애면 된다고..” 뭐.. 예상은 했던 일이었다. 선우 현에겐 미안하지만 난 별로 동정심이 많은 것도, 이해심이 넓은 사람도 아니였기에 아마 나의 반응에 실망했을 것이다. 없앤다.. 선우 현의 바닥은 어디쯤일까? 강박관념이 이미 자신의 사고를 뛰어넘었다면 바닥은 보이지 않는 걸까? 선우 현은 떨어지고 있다는 감각을 잃고 있는 거겠지. 이제는 누군가 잡아도 회복되기 힘들만큼 말야. 그래도 잡아주라고 류인이를 보내야 하나? 하긴 보낸다고 갈 놈도 아니고.. “알았어. 조심할게. 말해줘서 고맙다.” 내가 인사하자 이슬이는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리고 나도 병원을 나서며 외삼촌 댁으로 향했는데, 이틀 만에 나온 세상은 별로 변한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묻어두었던 문제를 해결할 시간이기도 하고. 집에서 가까운 큰길에 있는 버스 정류장 말고 뒤쪽 초등학교 너머에 있는 좀 멀리 있는 정류장이 있는데, 11시가 넘어서는 시간 내가 내린 건 바로 이 뒤쪽 정류장이었다. 그래서 주택가와 낮은 빌라들로 이루어진 골목을 지나 집으로 내려가는 길은 상당히 조용하고 음침한 기분까지 들었다. 드문드문 서있는 가로등의 탁한 불빛을 의지하며 주택가 골목을 지나다 좀 더 빨리 가기 위해 전에 선우 현을 만났던 놀이 터 바로 옆 작은 공원을 질러가기로 결정했다. 말이 공원이지 거의 놀이터 두 세배 크기 밖에 안 되는 이 곳은 명색이 공원이란 말에 부합하려 애쓰는 듯 벤치가 몇 개 놓여있었다. 중앙 넓은 공터에는 운동장처럼 아무것도 깔리지 않은 맨땅으로 오래된 축구 골대가 두개 서있는데, 일요일 아침이면 가끔 조기축구회 사람들이 5분마다 한번씩 환호성을 질러가며(절대 골을 넣은 것은 아니다) 운동을 하곤 한다. 부드러운 흙에 발이 닿아 내 발자국 소리가 사라지는 걸로 공원에 들어선 나는 빠르게 집 쪽으로 걸어갔다. 바로 전방의 직각으로 꺾여진 골목만 지나면 우리 집이 있는 4층짜리 빌라가 있고, 공원 맨 왼쪽에서 걷는 내 위치에서는 이미 빌라의 맨 끝 부분, 한 줄로 늘어선 창들이 보였다. 그리고 거의 다 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흙바닥을 지나 막 보도블럭으로 올라서려 할 때였다. 길게 옆으로 세워진 낡은 벤치에 누군가 앉아 있다는 걸 깨달았고 걸음을 멈춘 건. 시 예산의 부족으로 오래된 가로등을 교체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전에는 별로 신경을 써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가끔 나중에 여자친구 생기면 남몰래 그 희미한 불빛 아래서 키스도 할 수 있겠구나란 다분히 내 나이에 맞는 상상을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저 밝지 않은 가로등 아래 앉아 있는 녀석을 보는 순간,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지금 저 녀석의 지저분하고 초췌해 보이는 몰골이 과연 흐릿한 가로등 때문인지 확인 할 수 없었으니까. “당분간은 끝난거야?” 몇 걸음 다가가지 않았지만 나를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숙인 채 있는 류인이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히 오랜만에 성대를 쓰는 듯 갈라진 목소리가 마치 어두운 회색처럼 내 귓가를 울렸다. 당분간이라... 아는 채하지 말자던 내 말을 기다린 거였어? 하지만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날 올려다보는 녀석의 표정은 평상시와 같았다. 근데 도대체 니 꼴은.. 설마.. “너 혹시.. 삼일동안 여기서..” 대답은 없었지만 내 시선을 피하지 않는 녀석의 눈을 보면서 난 황당함과 당혹스러움이 교차하는 심정을 맞아야 했다. 실은 아까 이슬이가 놈이 없어졌다고 했을 때 나 몰래 병원에 왔다간 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근데.. 이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바보야. 겨우 숨을 들이쉬며 난 입을 벌렸다. “일어나. 어디서 거지꼴은 해가지고..” 녀석에게 퉁명스레 내뱉으며 몸을 집 쪽으로 돌렸는데 바로 눈앞에 살짝 보이는 빌라의 맨 끝 창이 바로 내 방이란 걸 깨달았다. 환한데서 보니 정말 어디서 몇 일은 굶었는지 갸름한 얼굴이 더 날카로워 보였고, 입고 있는 교복은 먼지투성이에 온통 구겨져 웬만하면 우리의 경쟁상대인 oo고교의 뺏지를 달라고 충고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씻어라.” 갈아입을 옷을 던져주며 화장실을 가리키자 그때까지 마루에 서서 나만 죽어라 쳐다보던 녀석이 그제서야 집안을 둘러보며 조용히 물었다. “아무도 안 계셔?” “큰 이모 돌아가셔서 부모님은 아직 병원에 계시고, 동생들은 당분간 외숙모가 돌봐주시기로 했어.” 대답을 하고 부엌으로 향하는데 녀석이 아무런 미동이 없자 난 몸을 돌렸다. “너 지금 하나도 안 이뻐. 내가 반할정도로 깨끗이 씻고 나와 얼른.” 내 말에 녀석이 살짝 한쪽 입 꼬리를 올리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난 뒤적거리던 냉장고에서 허리를 펴고 녀석이 들어간 화장실 입구를 쳐다 보았다. 처음 벤치에 앉아있던 녀석을 본 순간 놀란 것 이면에는 뭔가 가슴을 저리는 것이 있었다. 묻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녀석이 3일간 앉아 있었을 그 자리에서 불이 꺼내 내 창을 바라 본거겠지. 넌.. 그렇게 날 오랫동안 봐 온 거야? 내 창처럼 너에게 불 꺼진 나의 마음을? 뭐든지 당당하고 하물며 약점조차 숨기지 않는 류인이가 말 못하고 오래 기다렸다는 건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 어쩌면 넌 정말 날 두려워하는지 모르겠지. 낌새조차 내비치지 않고 내 옆에서 있었던 것 이면에는 가슴 조리는 공포심이 있을지도. 내가 끓여준 라면을 두개나 먹고, 찬밥까지 말아먹은 것도 모자라 한얼이 간식으로 사다놓은 파이를 7개나 해치우는 녀석의 식성을 보면서 안쓰럽다는 마음보다는 이자식 이러다 우리집 살림 거덜 내겠다는 걱정이 먼저였다. 도대체 지 입으로 고백이라면 고백인 것 까지 하고 우리 집 앞에서 먼지투성이로 기다린 건 다 뻥이었다는 듯 화장실에서 나온 녀석은 뻔뻔스럽게 밥을 요구하며, 김치가 쉬었다는 둥, 내가 끓인 라면이 너무 물이 많았다는 등 헛소리를 서슴없이 내뱉어 도로 벤치에 끌어다 놓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이경민공포증? 내가 무서워? 웃기지마 내가 보기에 니가 가지고 있는 건 이경민업신여김증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니가 지금 그 두꺼운 낮 짝으로 감히 내 침대에 대짜로 누워 디저트로 딸기를 요구할 수는 없지 않겠니? “그딴거 없어.” 말 앞뒤에 살포시 욕을 넣어 줄까하는걸 겨우 참으며 악 다문 이사이로 내뱉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녀석이 바로 말했다. “그럼 오렌지.” “야! 우리 집이 무슨 과일농장인줄 알아? 먹고 싶으면 직접 경북 고령으로 달려가 하우스에서 딸기를 따다 먹든, 캘리포니아로 날아가 오렌지를 경작하던 니가 알아서 해!” 열 내며 소리치는 날 물끄러미 침대에 편한 자세로 누워 바라보던 녀석이 옆으로 몸을 돌려 팔로 머리를 지탱한 후 날카롭게 물었다. “도대체 있는 과일이 뭐야?” “없어! 우리는 밥만 먹어 밥! 그리고 니 입으로 사라진 7개의 파이는 한얼이 일주일 간식이란 걸 알고 있냐?” “너도 하나 먹었잖아.” 뭐? 그래 내가.. 하나 먹긴 했지만 7개를 해치운 너랑 비교하면.. 한창 열 내며 다시 한번 소리쳐줄까 하는데 녀석이 자리에 일어나 앉더니 나를 보고 웃기 시작했다. 눈이 반쯤 접히고 꼬리에 주름이 잡힐 만큼 소리 없이 웃는 녀석의 얼굴을 보며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게 이쁘게 웃지마.. 멍하니 서있는데 녀석이 입을 벌리더니 작게 말했다. “돌아왔다.” “...” “이제.. 너 같아.” 머리통 굵은 녀석이란 걸 눈 앞에 있음으로 아는데 류인이의 말은 반대로 유치원생이 잃어버린 엄마를 찾은 듯 안심하는 말투여서 아무런 대꾸를 해줄 수 가 없었다. 그리고 녀석을 바라보다 난 침대 끝에 앉았다. 나의 동작 하나하나를 살펴보던 류인이에게 시선을 맞추자 그제서야 웃음을 풀고는 마주 바라보았다. 난 천천히 손을 뻗어 긴 손가락을 가진 녀석의 손을 살짝 잡았다. 순간 류인이가 움찔하는게 느껴졌지만 힘을 주어 잡자 곧 몸에 힘을 풀었다. “...무서웠냐?” 침대 머리맡에 있는 알람 시계의 초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만큼 정적이 방안을 지배했다. 아까 내 말처럼 씻고 나와서는 예전의 미모를 되찾은 녀석의 얼굴은 도로 무표정이 되어 버렸지만 난 볼 수 있었다. 불안하게 날 바라보는 녀석의 눈을. 예전에는 결코 보지 못했었다. 어쩌면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금세 알 수 있었을지도 몰랐을 일인데. 질문 끝에 한 가지를 더 첨부해야만 하겠군. 아직도 무서운지.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내가 잡은 손끝이 내손을 감아오는 게 느껴졌다. “언제나 그래.” “...” “내 마음을 알고 물러설까봐, 언젠가 떠나는 건 아닐까.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모든 걸 알고 나서도.. 날 받아들이지 않는 건 아닐까.” 무덤덤하게 들릴 만큼 평소와 다름없는 건조한 말투였다. “니가 내 눈앞에 보이지 않을 때, 가끔씩 숨이 막혀. 책상에 엎어져 있을 때 옆에서 네 숨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불안한 기운이 날 덮쳐서 질식해 버릴 것 같아.” 류인이가 나에게 잡혀 있지 않은 한손을 들어 내 이마에 늘어져있는 앞 머리카락에 가져 다 댔다. “한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을 내 욕심이 두려워.” 천천히 내려가는 류인이의 손에 시선을 따라가며 난 중얼거렸다. “고맙다. 말해줘서.” 눈을 들자 여전히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니 말대로, 널 잘 아니까.. 난 뒷걸음질칠지도 몰라. 아마 넌 알고 있겠지만..” 마치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류인이가 잡은 내손에 힘을 주었다. “난 동정심으로 네 마음을 받아들일 수도 없어.” “그래.” 내 말에 녀석이 피식 웃으며 내뱉었다. “넌 그런 면에서 냉정하니까. 그래서 선우 현이 너에게 협박이나 애원을 하더라도 넘어가지 않을꺼라고 생각했어. 근데.. 그게 나한테도 적용된다고 생각하면 심장이 도려내지는 것 같다.” “칭찬이냐? 왠지 욕처럼 들리는데?” 내가 장난스런 말투로 묻자 대답은 안하고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류인.” “...” “내가 너에게 거리를 두자고 했던건 네 말을 생각해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내 마음을 알려고 그랬던 거지.” 류인이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이 살짝 움직였으나 끝내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어. 그리고... 아는데 오래 걸릴지도 몰라.” 내 말을 받아 들인건지 모르겠지만 류인이는 잡고 있던 손을 풀더니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날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안 잘 거야?” “야..” “왜?” “너 바닥에서 자. 이 비좁은 침대의 주인이 나란걸 잊었어?” “난 침대 체질이야.” “그럼 난 구들장 체질이냐?” 다시 뻗어 오는 열을 느끼며 뻔뻔스런 낮 짝으로 누워있는 녀석을 노려보는데 갑자기 류인이가 내 팔을 잡더니 휙 침대위로 넘어뜨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 허리를 팔로 감아 자신 쪽으로 끌어 당겼다. “야! 너..” “기다릴께.” 허리와 가슴을 옭아맨 녀석의 팔을 풀기 위해 버둥대다 난 동작을 멈췄다. 등 뒤 목덜미에 얼굴을 파 뭍은 채 귓가에서 속살이는 류인이의 목소리가 왠지 기쁜 듯 느껴져 몸에 힘을 풀어져 버렸다.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 정말 오래 걸릴지도 몰라. 공포증 - 23 가끔 난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삼일 만에 학교로 나온 나와 류인이를 걱정스레 쳐다보는 선호와 병국이를 볼 때까지만 해도 친구란 건 이래서 좋구나란 생각을 하며 비록 창호지 두께만한 우정이지만 그 감동에 잠깐 손가락을 담가야 했으니까. 허나 그 걱정이 채 5분을 넘기 지 못하고 저렇게 내 앞에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주접을 떨어대는 꼴을 봐야하는 지금 녀석들을 과소평가 한 자신을 탓해야 했다. “어잉~ 혀엉~ 제가 가져온 우유 육십 삼만 칠천 구백 팔 개를 먹고 시험 잘봐야 해요오~” “으허허허.. 이스을~ 우유 육십 삼만 칠천 구백 팔개 가지고는 너의 사랑을 표현하기에 너무 턱없이 부족한 숫자인걸? 푸하하하..” 징한 것들.. 서로 낄낄대며 즐거워하는 녀석들의 웃음소리에 경건한 마음으로 시험을 준비하던 3학년 7반 애들은 모두 똥 밟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의 소멸을 돕기 위해 창문을 열어 재끼고 있었다. 아침에 류인이가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온 듯 보이는 이슬이가 날 찾아와 엎어져 있는 류인이 쪽을 한번 보고는 나에게 시험 잘 보라며 우유 네 개를 주고 갔었다. 그러자 바로 기다렸다는 듯 두 녀석의 쇼가 시작된 것이다. 마치 경박한 웃음소리로 경쟁자들의 시험성적을 저조하게 하려는 거대한 음모라는 듯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반 애들의 따가운 시선에 내가 조용히 경고했다. “우유 안준다.” “뭐? 너 지금 너의 사랑하는 이슬이에게서 그깟 우유 받았다고 유세 떠는거냐?” 발끈하는 선호를 보다가 병국이가 조심스레 내 손을 잡더니 말했다. “그럼 나 두개 줘.” “씨발 임병국 얌생이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병국이의 변절을 성토하려던 선호는 갑자기 뒤에 어두운 그늘을 만들며 나타난 방해꾼 때문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장선호, 장선호...” 언제 들어도 김치 100포기가 절로 생각나게 하는 일대구의 호명에 선호가 눈을 똥그랗게 뜨더니 뒤를 돌아보고는 마치 전설의 증조부님이 살아온 듯 일대구의 팔을 잡았다. “썬생님! 이 녀석들이 지들만 우유 먹으려고 해요.” 그 어이없는 고자질에 할말을 잃은 나와 병국이를 쓰윽 훑어 본 일대구가 ‘그럼 안돼지’라고 중얼거리며 우유 네 개를 집어 들었다. “이건 압수다.” “앗 선생님! 전 아침도 못 먹고 와서 우유 꼭 먹어야 되요.” 놀란 병국이가 외치자 유연하게 두 가닥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돌아선 일대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빈속에 우유 먹으면 설사한다. 니가 변비환자라면 또 모르지만.” 이라며 조용히 병국이의 기절을 야기시킨 후 천천히 교탁으로 걸어가셨다. 그런데 가는 도중 쓰러진 병국이를 보고 비웃는 선호를 손가락으로 불러냈다. 왜라는 표정으로 선호가 쳐다보자 씩 웃으며 우유를 내미셨다. “친구를 고자질하다니. 벌로 이거 네 개 원샷해라. 10초 준다.” 라고 말한 뒤 재빨리 학급 임원들에게 눈치를 줘 뜨악하는 얼굴로 변한 선호를 양쪽에서 붙잡게 했다. 이미 좀 전에 있은 방정맞은 웃음사건으로 원한을 가지게 된 아이들 몇몇이 입에 연필을 물려야 한다는 주장을 내뱉는 와중, 흡사 장희빈이 사약 받는 포즈로 꿇어 안쳐진 선호는 원하던 이슬이의 우유를 원 없이 마시며 헛구역질까지 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시험이 끝나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예상대로 시험 망쳤다는 표정으로 선호와 병국이를 은근히 노려보고 있었고 당사자인 두 사람은 아침 일에 대한 충격으로 역시 일생 최저 점수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일대구의 변비발언과 우유파동으로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린 두녀석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점심도 거르고 시험 내내 책상에 엎드려 잠만 자던 류인이의 등이 보였다. 어제도 침대에 눕고 얼마 안 있어 골아 떨어진걸 보면 삼일동안 별로 자지도 못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학교에 와서 시험도 안보고 엎드려 잠만 자는 녀석을 깨우지 못했다. 잠시 잠든 녀석을 보다 선호와 병국이에게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한 후 교실 밖으로 나왔다. 이슬이가 병원에서 전해줬던 선우 현의 말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누군가 나를 제거하겠다는데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무섭고 떨리는 건 당연하겠지. 근데 선우 현은.. 일단 불쌍하다는 생각부터 먼저 들어서 그런지 두려움은 덜했다. 그의 공포증이 얼마나 힘든건지는 잘 모르지만 그 공포증에 먹혀들어가는 선우 현 자체는 불쌍한 인간이니까. 교실을 나와 몇 걸음 걷는데 갑자기 누가 뒤에서 팔을 잡아 당겨 몸을 돌리게 했다. “어디가?” 언제 깼는지 류인이가 자다 만 부스스한 얼굴로 내 팔을 잡고 있었다. “선우 현 좀 보러.” 그러자 인상이 대번에 찡그려 지며 낮게 위협하듯 말했다. “씨발 니가 왜 그 자식을 만나.” “그럼 니가 만날래?” “그래. 그러니까 넌 그딴 놈 잊어버려.” 그 말에 화를 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내 팔을 쥐고 있는 녀석의 손을 풀었다. “날 없애겠다는데 가서 방법이라도 물어야 대비를 할 것 아니겠어? 이건 내.일. 이니까 넌 교실로 가서 잠이나 자. 그리고..” 난 경고하듯 녀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혹여라도 선우 현을 아예 없애버리겠다는 생각은 버려. 그럼 나 너 다시는 안본다.” “씹..”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한거였는지 류인이는 내 말에 미간을 좁히며 날 노려봤다. “왜 그 그지같은 새끼를 신경써야 하는데?” 글쎄.. 원수진 인연으로? 난 혼자 피식 웃으며 류인이에게 한마디 하고 돌아섰다. “우리 후배잖냐.” 멋들어지게 선우 현 만난다고 내려오긴 했는데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순남이의 말에 씁쓸함과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 설마 일요일 날 그 일로 아직까지 못나오는 건가 생각하다가 들어가려는 순남이를 붙잡고 선우 윤이 몇 반인지를 물었다. “윤이 만나시게요?” “응. 걔라도 얘기해봐야지.” 그러자 순남이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윤이는 말을 거의 안 해서요.. 아마 만나도 들을 수 있는 얘기는 없을꺼에요.” 말을 거의 안 한다고? 설마.. 예전에 류진이 형 바이크 타다 만났을 때는 나름대로 수다를 떨던데. 걱정스런 얼굴로 있는 순남이를 뒤로하고 선우 윤이 있다는 1학년 2반으로 갔다. 아직 1학년이라 그런지 중학생처럼 쉬는 시간에 뛰어다니며 노는 애들도 몇 명 보였다. 그러다 문 밖으로 나오는 한 녀석을 붙들고 선우 윤을 찾자 깜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바로 뒷문 옆에 앉아있는 녀석을 가리켰다. 이 녀석도 1분단 메니아인가 라고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한 후 녀석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자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녀석의 눈이 날 알아보고는 반짝 스위치가 켜지는 게 보였다. “나와라.” 전에 이슬이와 얘기를 나눴던 동산위에 나란히 앉은 후 난 시계를 보며 물었다. “수업 좀 늦게 들어가도 되지?” 문장은 의문형이었지만 억양은 거의 강조를 내포하고 말하자 녀석이 고개를 돌려 날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대신 혼나줄꺼야?” “당연.. 아니지. 그냥 이것도 경험이라 생각하고 대세로 받아들여라.” 녀석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하자 선우 윤의 눈이 살짝 접히는게 보였다. 녀석의 분위기가 좀 풀린 것 같지만 아쉽게도 지금 꺼내야 할 얘기는 딱딱한 거라 속으로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근데 선우 현은.. 오늘 왜 안 나온거야?” “알텐데.” 역시.. 일요일 사건으로 몸저 누운건가? “그거 확인하려고 부른거야?” 말 끝에 그게 아닐텐데라는 뉘앙스가 풍겨 나와 난 잠시 주춤거렸다. 그래 그게 아니지. “류인이의 공포증은 절대 극복될 수 없을 거야.”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며 계속해보라는 듯 날 쳐다봤다. “아마 내가 녀석을 떠나든 옆에 남던 그 놈은 한 가지만 죽어라 바라보는 특이한 유전인자가 피 속에 흐르고 있어서 니들이 원하는 것처럼 두려움 없는 완벽한 인간으로는 탈바꿈하지는 않을꺼다.” “.. 고백했군.” 왠지 씁쓸한 듯 들리는 선우 윤의 말을 들으며 과연 그게 고백이었나 생각을 해봤다. 글쎄 고백보다는 그 낮은 목소리로 말한 절규였겠지. “돌아가라. 늦지 않았으니까 선우 현을 데리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원인을 찾아내서 고치란 말야. 니들이 완벽해 지고 싶다면 스스로 상처를 치료하는 고통쯤은 각오해야지.” 삭막하게 들릴 정도로 무덤덤히 내뱉은 내 말에 녀석이 입술에 곡선을 만들며 웃어 보였다. “냉정하군. 현이를 보고도 고통을 각오하란 소리가 나와?” 그 말에 나도 녀석에게 마주 미소지어 보였다. “애들처럼 칭얼대지마.” 녀석의 눈이 살짝 커졌다. “너는 당해보지 않은 고통이니 쉽게 말한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힘들어? 과거에 생각도 못할만큼의 끔찍한 경험을 니가 어떻게 알겠냐고? 그딴 소린 다 개나 줘버려. 세상에 극복하지 못할 공포증을 가진 사람은 적겠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 없이 산다고는 생각하지마. 그럼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무서운 걸 극복하며 산다고 생각해? 잘들어. 대부분은 받아들이고 인정하는거야. 좆같이 심장 떨리게 싫고 무서운 일이 닥쳐 숨고 싶고 미쳐버리겠지만 그냥 사는거야. 그러면서 나름대로 공포를 넘기는 방법을 터득해 나간다고. 너희 둘은 생각이 글러먹었어. 공포를 극복하려는 마음 보다 나의 공포는 너무 크다는 과대망상에 속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정신 차리고 냉정히 잘 생각해봐. 정말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한 자신인가하고.” 나의 긴 말을 소리 없이 듣던 선우 윤이 말이 끝나고 한참을 나만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다. “전에도.. 많이 듣던 말이야.” 아.. 준비해서 말한 사람 굉장히 무안하게 저리 말할 것은 무엇이란 말이냐. 나도 좀 통상적인 충고란 건 알고 한 말이지만, 그렇다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 걸 웃으며 그러냐고 응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녀석의 시선을 피하며 표정이 굳어버렸을 나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선우 윤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자 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생각해 보지.. 그 말. .” “아..” 눈을 깜박거리며 녀석이 말한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렇다는 건.. 내 말을 이해하고 이제 우리에게 상관 안하겠다는 거겠지? “하지만 현이는.. 나도 말릴 수 없어.” 차분히 말하는 녀석의 갈색 눈 속이 어두워 보여 난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 졸린지 류인이가 좀 느린 걸음으로 우리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선우 현이 과연 날 정말 어떻게 하려는 걸까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병국이가 나를 툭툭 쳤다. “니네 화해 한거야?” 고개를 드니 양 옆에 병국이와 선호가 서서 내 입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싸운거 아니었어.” “그럼 뭐야? 저놈은 왜 이틀간 학교를 안나온 것이며, 넌 월요일날 왜 그리 저기압이었는지 우리가 납득할 수 있도록 읊어봐.” 난 선호를 살짝 보다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별일 아냐.” 그러자 대번에 인상이 찌푸려지는 두 녀석이 보였고, 난 달래주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저 교문 앞에 떡하니 주차되어 있는 차 옆에 건방진 포즈로 서있는 남자는 아무리 봐도 눈에 익은데 말야..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주시하자 선호와 병국이도 나의 시선을 따라 앞으로 향했다. “어?” 선호도 알아봤는지 걸음을 멈췄고, 병국이는 아직 눈치 채지 못했는지 우리에게 물었다. “왜 그래? 어라 저 남자 옷이 왜 저래?” 그러자 선호가 얼른 병국이의 입을 막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잘 봐.. 저런 패션을 과연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 그리고 병국이는 선호가 말한 저런 패션을 정말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약간 광택이 나는 재질의 양복을 걸쳐 입은 장신의 남자는 반짝거리는 시계가 돋보이는 손으로 담배를 피우며 차 지붕에 나머지 한 팔을 걸쳐 올리고 기대어 서있었다. 여기서 문제는 바로 그 양복이었다. 몸에 딱 맞춘 듯 몸매를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짙은 감색의 양복은 보기에도 꽤나 비싸 보였지만 엉덩이의 굴곡이 들어 날 만큼 딱 맞는 바지라던지, 쓰리 버튼으로 얌전히 채워진 윗도리는 전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단지.. 어째서, 왜, 그 윗도리 안에 아무 것도 안 입은 것이냔 말이다! 갈색의 그을린 맨살이 바로 노출되고, 오직 목에 걸린 두꺼운 금 목걸이만 반짝이는, 도저히 눈 둘곳을 찾지 못할 이 패션은 도대체.. 너무 색스러워 바로 뒤에 지나가는 할머니도 당장에 입덧 할 만큼의 위력이었다. 이미 소년의 티를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우리학교의 순진한 학생들이 그를 보며 뜨악하는 표정으로 우리는 멀었어란 절규를 하며 빠져나가는 걸 봐야 하는건 모두 한류인 때문이겠지. 안그래? 너의 큰 형이 오신거니까. “야.. 모른 채 하자.” 겨우 류민형을 알아본 병국이가 재빨리 선호와 나에게 제안해 왔고 우리는 모처럼 만에 마음이 맞는 역사적인 순간을 맛보며 재빨리 류인이에게서 벗어나 운동장 구석탱이로 눈에 안띄게 사라지려 했다. 허나.. “거기. 경민이와 나머지 둘.” 이라며 우리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하고 계신 형님이 있구나! 형님의 부름에 나와 나머지 둘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다가가자 뒤에서 류인이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형, 그 옷..” 뒤를 돌아보니 류인이가 인상을 쓰고 형을 아래 위로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래 너도 형제지만 이해가 안가지? 좀 말려.. “맨 처음 단추는 하나 풀러야 멋있는 스타일이야.” 제길.. 니가 부추김 대왕임을 잠시 잊었다. “추워서 잠갔다.” 형의 말에 우리 셋은 오십보 백보다라는 중국의 고사성어를 이야기 해드리고 싶었으나 범상치 않게 풍겨 나오는 카리스마와 더불어 별로 심기가 편치 않아 보이는 표정으로 인해 마음속에만 간직하기로 했다. “꼬.맹.이.” 형이 나직하게 류인이를 부르자 잠깐 뭔가를 생각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류인이가 무표정하게 얼굴을 들었다. “내가 왜 왔는지 알지? 너 누가 맘대로 연락도 없이 3일동안 집에 안...” “잘 왔어 형.” “뭐?” 혼내려고 마음먹고 온 것 같은 형은 뜻하지 않은 류인이의 반응에 놀란 눈치였다. 뭐 나도 놀랬다. 집에 가면 이제 죽을 목숨인걸 알고 포기한건가? “가. 아버지 만나야겠어.” 그리고는 형을 옆으로 밀치고 차문을 열었다. 별로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는지 약간 멈칫하던 형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차 앞을 돌아 운전석 쪽으로 갔다. “먼저 가라. 경민이 넌..” 류인이는 창문을 내리고 바보 삼형제처럼 멍하니 서있는 우리에게 말하더니 나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집으로 곧장 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이 말만 하고 류인이가 창문을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부웅 하며 빠르게 눈앞에서 차가 사라졌다. 잠시 침묵만이 우리사이를 흘렀고 병국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이름까지 불리고 걱정도 한 몸에 받은 경민이 넌 집으로 곧장 가고 나머지 두놈은 남아서 떡볶이라도 먹고 가야겠다.” 그 말에 선호가 고개를 끄덕였고, 곧장 두 녀석은 홱하고 나에게서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야!” 내가 불러도 자신들을 관심 받지 못했다는 것에 삐졌는지 대답을 하지 않자 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떡볶이 내가 쏜다.” 떡볶이를 맛있게 먹고 나온 우리 사이에 약간의 다툼이 있었다. “그렇다고 진짜 떡볶이 값만 내면 어떻게 해!” “내가 언제 순대까지 쏜다고 그랬냐?” “뭐? 그럼 순대랑 튀김 시킬때 말렸어야지!” “누가 그렇게 많이 시키래?” “이경민 니가 이렇게 얌생이처럼 굴다니 이건 아침에 일대구가 우리에게 했던 고문과 맞먹은 행위야 알아?” 2:1로 한참을 피가 아닌 침 튀겨 가며 싸우다 보니 어느새 버스 정류장에 왔있었다. 그리고 시험 때문에 일찍 끝났었는데 떡볶이 먹고 나오니 보통 하교 시간과 마찬가지가 되어버려 시간의 허무함을 잠시 느껴야 했다. 또다시 정류장 의자에 앉아 한참을 내 행위의 정당성과 일대구의 고문과의 연관관계를 논하는데 갑자기 우리 앞에 떡하니 차가 두 대 섰다. 버스정류장에서는 주차금지라는 걸 상기시켜 줘야 하나 고민하며 고개를 들었는데 차 문이 열리고 바로 정면, 차 안에 앉아있는 선우 현과 눈이 맞았다. 순간 놀라 눈썹을 찌푸리는데 선우 현이 우리 셋을 보며 웃더니 한마디 내뱉었다. “이사람 들이에요.” 그리고 차 두 대에서 내린 건장한 아저씨 5명이 우릴 에워쌌다. 평소 같으면 납치인생에 대한 회고록이라도 써서 돈이라도 벌어볼까 라며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약 30분정도 시내 외각으로 달려와 멈춘곳에는 1.5층 정도의 높은 천장, 안에 있는 거라고는 몇 개의 기둥만 있는 그야말로 빈 건물, 아니 창고가 기다리고 있엇다. 여태껏 우리가 잡혀온 곳 중 가장 소설에 나올법한 곳이었지만, 문제는 상대해온 남자들이 우리또래의 아이들이 아니라 진짜 조폭(아마도) 6명라는 거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붙들려 온 다음 바로 맞은 몇 대 덕분에 우리 셋 모두는 지금 바닥을 이불삼아 쓰러져 있는 중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좀 대항할까 했으나 한방 맞고 난 후 이 놈들은 진짜다란 생각에 대항하는 걸 포기하고 일찌감치 모두들 한 두 대 맞고 뻗는 척을 한 것이다. 비록 우리의 연극이 너무 어설퍼 아저씨들이 약간 의심을 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찬 바닥에 엎드려 있으니 온몸에 한기가 올라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이 짓도 두 번할 건 아니다란 생각을 하며 가만히 엎드려 눈을 뜨고 보니 병국이와 선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기절한 척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눈만 굴리지 말고 얼굴도 들어 보시죠?” 선우 현의 웃음기 어린 말에 난 누운 상태로 고개를 돌려 선우 현을 올려다봤다. “저 녀석들은 상관없잖아?” 그러니까 보내주라고 씹새끼야. 울컥 욕이 나오려는 걸 아까 욕하다 한대 더 맞은 선호를 생각해 겨우 참았다. “그죠. 근데.. 선배가 내 말을 잘 안 듣는 것 같아서요. 효과 좀 보려고 데려왔죠.” 녀석의 말에 시선을 돌려 선호와 병국이를 보니 병국이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였고, 선호는 가늘게 눈을 뜬 채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날 쳐다보고 있었다. 괜히 나 때문에 애꿎은 녀석들까지 당했다고 생각하니 미안해졌다. “소용없어.” 난 선호에게 미안한 감정을 담아 쳐다보며 선우 현에게 대답했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이해해 주겠지? 니들은 상관없다는 듯한 나의 대답을. 본심은 그게 아니야. “어디 우리 가족, 아니 전국의 이씨는 다 잡아다 족치지 그래?” 빈정대듯 말을 내뱉으며 선우 현에게 시선을 돌리자 차갑게 굳는 녀석의 표정이 보였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류인 선배.” 그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날 노려보았다. “여기 선배의 사랑스런 경민선배가 있는데 오실껀가요? ...아 물론 혼자 오셔야죠. 아니면 아시다 싶이 선배집안의 큰 고객인 아버지께 말씀드려 거래를 끊는 것은 물론이고 전에 막아주셨던 몇몇 일을 터트릴 수도 있으니까요. .... 훗 죄송해서 어쩌죠?” 선우 현은 통화를 하면서 내 앞에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선배가 오던 말던 이미 경민선배의 안전은 무너 졌다구요. 어쩔까요? 선배가 와도 경민선배는 다치고, 안와도 마찬가지에요. 걱정마세요, 뼈하나 부러지지 않게 해서 곱게 오늘 안으로 돌려보내드릴 테니.” 몇 마디 장소에 대해 말을 더 하고는 전화를 끊은 선우 현이 나를 보며 물었다. “아마 당신들의 그 알량한 우정을 파악해 본다면 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사랑하는 경민선배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더더욱 모습을 들어내지 않을 수도 있죠. 자기 혼자 나타나봤자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모두 아니까 실리대로 행동할 지도. 자 그럼 여기서 질문, 경민선배 역시 류인 선배가 혼자 나타나 맞는 걸 보느니 안 나타나는 걸 바랄텐데.. 그게 현실로 다가와도 정말 아무런 상처가 안될까요?” 모든 경우는 반반이다. 녀석이 나타나 내 눈앞에서 얻어 터진다하면 속상하겠지만 한쪽에서는 그래도 구하러 와줬구나 하는 다분히 개인적인 기쁨이 있겠고, 안 나타난다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있겠지. 글쎄.. 날 없앤다는 건 결국 어느 상황이던지 마음에 상처를 입히겠다는 건데.. 그래도 마음에 여유가 있는 건 결국 열쇠는 내가 쥐고 있기 때문 아닐까? 니가 이렇게 전전긍긍해 하는 것 모두 말야. “아무리 그래도..” 나 역시 녀석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꾸했다. “난 류인이한테서 안 떠나.” 선우 현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버렸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날 내려다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그럼 나도 모든 걸 포기할까?” 내가 무슨 뜻이냐는 듯 올려다보자 녀석이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내뱉었다. “가질 수 없다면 존재를 아예 사라지게 하는거지. 한 류인이란 사람을.” 심장이 저 바닥 아래로 무서운 추락을 했다. 생각조차 안 하던 일이었다. 그럴 가능성이 없었으니까. 식은땀이 날 만큼 충격적인 그 말에 난 겨우 숨을 쉬려 노력하며 선우 현의 의도를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안돼. 류인이를 사라지게 하는 건 안 된다고. 차라리 계획대로 날 없애버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절규에 나 스스로 놀라고 깨달았다. 류인이가 없다는 건.. 있을 수 없어. 왜? 절박함만이 가득 채우는 가슴 한켠에서 물어보고 있었다. 나를 대신해 버릴 정도로 류인이의 존재를 원해? ... 그래. 원해. 류인이가 내 곁에서 떠나질 않길, 사라지지 않길 원해. 짧은 시간 죽음과도 같은 공포에 잠겨 숨을 쉴 수 없었던 나는 독한 눈으로 선우 현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러던가. 할 수만 있다면.” 내 말에 가는 눈으로 날 내려다보던 선우 현이 이를 악 물었다. “당신은 정말 선배 옆에 있을 자격조차 없어. 어디.. 지금부터 구하러오지 않는 배신감을 느끼며 계속 그 생각이 유지되는지 보자고.” 그리고 아저씨들에게 신호를 주자 기다렸다는 듯 하나 둘씩 엎어져 있는 우리 셋을 향해 몰려왔다. 이런.. 오스카상 감인 우리의 연기가 막을 내려야 하다니 좀 안타깝군. 씁쓸한 마음을 달래고 천천히 다가오는 아저씨들을 보며 우리 셋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지났을까? 1시간, 2시간? 얼굴이 입가에 케찹 바른 호빵맨처럼 변한 병국이가 제일 먼저 나가떨어지는 걸로 시작해 선호와 내가 일어서지도 못할 만큼 바닥에 넝마처럼 널부러졌다. 케찹 바른 호빵맨이라니.. 나도 참. 이 와중에도 고통 속에 피어난 한떨기 유머를 발휘해 내는 스스로에게 잠시 박수를 쳐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여태껏 맞은 그 어떤 구타보다도 효과가 강력한 펀치들 덕분에 신음소리를 내기 바빴다. 이제 정말 손가락 하나 까닥할 기운이 없다고.. 왼쪽 눈은 맞은데가 부은 듯 잘 안 떠지고 발차기를 맞아 바닥에 뒹구는 바람에 부딪친 팔뚝은 이제 아프다 못해 감각을 못 느끼고 있었다. 다행인건 우리 셋이 진짜로 넉 다운 되자 더 이상 때리지는 않는 다는 거였다. 거의 반 죽음 상태지만 선우 현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려는 건지 진짜로 뼈는 안 부러뜨리는 건가? 혹시 모르지 극한의 고통으로 이미 조각난 뼈들을 눈치 못 채고 있는지도. 시멘트 바닥에 쓸린 얼굴이 껍질이 벗겨졌는지 무지 쓰라려 와서 난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바로 시야에 앉아서 멍하니 날 보고 있는 선우 현이 눈에 들어왔다. 저 녀석.. 생각 같아선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아구창을 날리고 싶지만 무서운 아저씨들을 감안해 그냥 노려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안 오네요..”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선우 현의 말이 들려왔다. 그런데 너 류인이가 안 오길 바란거 아냐? 왜 실망하듯 말하는 거야. “왜 안 올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맞고 있는데..” 사랑이란 말에 순간 닭살이 돋아 하늘로 승천할 뻔 했지만 일단 무시하고 갑자기 독기가 빠져버린 녀석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혹시 우리 맞는 사이 저 녀석도 한대 맞은거 아냐라는 의문을 강하게 제기하면서. “이해가 안돼..” 마지막 말은 거의 입술을 열지 않고 말해 알아듣기가 힘들었지만 내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그러니까 니가 지금.. 오지 않는 류인이에게 실망을 하고 있다는 거야? 차가운 공기가 천정 높은 창고의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있었고, 덕분에 난 열기를 좀 식히며 선우 현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가 원하는데로 난 죽을만큼 맞았고, 류인이도 오지 않아 나에게 상처입힌다는 녀석의 계획도 성공했다. 그런데 오히려 상처 입은 건 선우 현이다? 그렇다는 건.. 난 으드득거리는 몸을 일으켜 아프지 않은 한 팔로 상체를 지탱한 후 나무 박스같은데 앉아있는 선우현과 거리를 좁혔다. 아마도 녀석은 나를 류인이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악을 쓰는 일면에 자기도 모르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다. 내가 녀석의 제1의 적이 됨과 동시에 날 자신이라 생각하며 대입하고 자신도 모르게 기대감을 즐기는 것처럼 말이다. 류인이가 날 배신하지 않는 것을 바라는, 구하러 와주는.. 어쩌면 미래의 자신에게 해줄 녀석의 모습을 꿈꾸며. 그건 사람인 내가 류인이의 가장 큰 공포증이란걸 알면서부터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나에게 집착하고 떨어지길 바라며, 그와 함께 기대감도 커지고.. 지금 실망하는 녀석의 모습이 나의 모습과 같지 않다는 것에 다만 기뻐해야 할까? 인간의 약한 모습을 보는 건 정말 유쾌한 일이 아니다. 내가 도움 줄 생각이 전혀 없다면 더더욱. “왜..” 선우 현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원망하지 않아? 정말로 .. 그가 오지 않기만을 바라는 거야? 거짓말. 속으로는 오길 바라는 거잖아. 그가 다친다 해도.. 자신을 구해주러.” 난 대답 대신 뒤에서 개구리 포즈로 뻗어있는 선호와 정말로 기절한건지 눈을 감고 있는 병국이를 크게 불렀다. “장 선호! 임 병국!” 돌아보지 않았지만 스르르 몸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선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파 죽겠는데 왜 부르고 난리야 씹새야. 야, 임병국 연기 그만하고 대답해. 경민이가 부르잖아.” 조금의 침묵 뒤 곧 병국이의 목소리도 들렸다. “어.. 야.. 나 진짜 기절했었어.” “개뻥치지마! 너 누워있을 때 눈꺼풀 아래로 눈깔 막 돌아가는 거 내가 다 봤어. 나의 2.0 시력을 니가 감히 욕보이려는 거냐?” “웃기네. 1.0인거 다 알아. 누구한테 구라를..” “합하면 2.0.” 얌전히 누워 기절한 게(연기일수도) 언제였냐는 듯이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몸으로 입만 살아 수다를 떠는 녀석들을 보니 또 삼천포로 빠지겠다 싶어 두 녀석 사이에 끼어들었다. “니들.” 고개를 돌리니 나에게 눈만 돌린 채 두 녀석이 보고 있었다. “류인이 안와서 실망했냐?” “실망? 당근이지.” 선호가 대답했고 병국이도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둘에게서 시선을 돌려 선우 현을 바라보며 건조하게 말했다. “그렇다는데.” 그러자 선우 현이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근데.. 왜 똑같이 실망한 너랑 우리는 다르냐고?” 눈이 살짝 커지는 녀석의 예쁜 검은 동자를 바라보며 난 살짝 웃어주었다. “우리는 그게 전혀 상처가 안 되거든. 녀석이 의례 그런 놈이라는 이유가 아니라 그런 일에 상처받을 만큼 사람을 못 믿고, 약한 심장을 가지지 않았으니까. 평.범.한. 우리는.” 입술이 빨개지고 피가 날만큼 심하게 깨무는 걸 보며 결론을 내줬다. “넌 너무 약해. 약해 빠져서 자신이 모습을 보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말로는 공포증을 고치고 싶다고 하지만 넌 평생 그 시작도 못할 거야. 그 약한 마음으로 절대 극복 할 수 없거든.” 단호한 나의 말에 선우 현의 눈이 상처를 입은 듯 보여 마음이 약해지려 했다. 하지만 독하게 마음먹고 녀석에게 내뱉었다. “넌 초점을 잘못 맞추고 있어. 완벽? 웃기지마. 보통 사람부터 되라고 병신아.”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흔들리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며 선우 현이 어렵게 입술을 열었다. “나.. 난..” 그러나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곧 입을 다물며 하얀 관절이 보이도록 두 손을 꽉 마주 잡았다. 내가 천천히 녀석이 안정되길 기다리며 보고 있자 시간이 좀 지난 후 다시 말을 꺼냈다. “나..한테.. 훈계 하지마. 당신 같은 사람은 몰라. 그렇게 말로만 떠드는 거 누가 못해? 내 고통을.. 만 분의 일도 모르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말란 말야!!” 말이 끝남과 동시에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섰고, 선우 현이 앉아 있던 나무 상자가 큰 소리를 내며 뒤로 나뒹굴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더니 드문드문 앉아서 지루하다는 듯 우릴 보고 있던 남자들을 향해 말했다. “다치는 거 상관 말고.. 없애버려요.” 녀석의 말에 인상을 쓰며 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젠장, 그럼 지금 다쳐서 피칠하고 있는 이 얼굴은 화장한 거였냐? 위험스레 다가오는 남자들을 경계하며 난 천천히 몸을 끌고 선호와 병국이가 누워있는 곳으로 갔다. 이왕 다치는 거라면 나 혼자면 되겠지. 근데.. 한류인은 정말 뭐하고 있는거야? 속으로 녀석의 욕을 막 하는 순간 갑자기 ‘콰당!’ 소리와 함께 문이 힘차게 열리고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밝은 창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직 갈아입지 않은 어두운색의 교복을 입고, 뛰어 왔는지 헝클어진 머리와 약간 땀이 베어나는 이마, 그 아래 날카롭게 빛나는 눈을 보며 정말 구세주라도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혹시 녀석이 내 마음을 읽은 건가 싶게 소설처럼 너무나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난 류인이는 쓰러진 선호와 병국이 그리고 위태롭게 서있는 날 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낮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씨발.” 아.. 영웅처럼 등장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말에서 깨는구나. 녀석의 언어순화 필요성에 친구로써 안타까워 하는데 류인이 뒤로 한사람이 더 걸어 들어오는게 보였다. 저 많이 본 등치는.. 내가 눈에 힘을 주며 뒤따라온 사람의 정체를 파악하려 할 때 류인이가 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더니 손에 끼기 시작했다. 뭐야.. 가죽 장갑 아냐? 처음 보는 녀석의 행동에 내가 놀라는 사이 류인이가 손을 뒤로 뻗었다. 그러자 불빛아래 모습을 들어 낸 험상 굳은 표정의 이슬이가 자신의 등 뒤에서 기다란 무언가를 꺼내 류인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뭐지? 죽도인가 라고 생각했으나 곧 착각임을 깨달았다. 물건을 받아 든 후 류인이가 팔을 내리자 자연스럽게 바닥에 닿아 ‘카강!’ 거리며 마찰음을 내는 물채는.. 검은 칠을 한 쇠파이프였다. 그런데 저거 잡는 폼이 상당히 익숙해 보이는데 말야.. 처음 보는, 아니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류인이의 거칠고 험악한 그 모습에 난 눈을 있는대로 크게 떴고, 나와 마찬가지 기분이었는지 아래에서 선호와 병국이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있는 사람 모두를 얼리겠다는 듯 차가운 눈으로 쓱 훑어보던 류인이가 쇠파이프를 들고 한걸음 앞으로 나서서 눈앞의 여섯명에게 시선을 두며 낮게 말했다. “죽어.” 마치 못난이 인형을 보는 것처럼 부어터진 흉측한 얼굴로 나란히 벽에 기대어 앉아있던 우리 세 사람은 아까 기절한 척을 할 때보다 지금 더 숨을 못 쉬고 있었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등장에 범상치 않은 무기를 손에 든 두 사람을 보고 범상치 않은 아저씨들이 흥분을 하며 덤벼드는 게 시작이었다. 그리고 죽으라고 아저씨들에게 조용히 권유하던 류인이는 도움까지 주겠다는 확실한 의지를 보이며 복병 이슬이와 함께 아저씨들을 차례로 골로 보내고 있었다. 이건.. 이미 우리가 아는 수준을 넘어선 싸움이었다. 얼굴이 부어터지고, 입술이 찢어져서 피나고 맞아서 나뒹굴었던 우리는 저들에 비한다면 유치원 말싸움이겠지. 류인이가 아래서 올려친 쇠파이프는 이미 앞쪽으로 기울어 쓰러져 가던 남자의 배를 때리고 턱을 쳐 올리며 허공을 날랐다. ‘캉!’ 빠르게 내려짐과 동시에 기둥에 부딪쳐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고는 다시 류인이의 뒤를 덮쳐오는 다른 남자의 팔을 막았다. 동시에 류인이의 몸이 살짝 회전했고, 이미 앞쪽의 공격자를 제거한 녀석은 쇠파이프에 막혀있던 남자의 머리통을 잡아 사정없이 끌어당겨 바로 옆, 조금 전 쇠파이프가 부딪쳤던 기둥에 박았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자는 이마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하지만 충격에 눈을 깜박이는 남자는 미쳐 바닥에 닿기도 전에 류인이의 발에 가슴을 걷어차이며 뒤로 나가 떨어졌다. 그러나 거기서 끝난 건 아니었다. 마치 상당히 익숙한 듯 류인이가 그 쓰러진 한명에게 걸어가자 이슬이가 나서며 나머지 사람들이 류인이에게 못가도록 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잠깐 사이 류인이는 이제 막 지면에 엎어지려던 남자 가슴에 정확히 위에서 발로 강하게 짓밟아 버렸다. “으악!!” 듣기에도 소름끼치는 비명소리와 함께 남자는 숨조차 쉴 수 없는지 입을 크게 벌리고 거칠게 공기를 들이 마시며 손으로 가슴을 감싸 앉으려 했다, 하지만 류인이의 발이 다시 남자의 옆구리를 걷어찼고, 옆으로 몸이 굴려진 남자는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며 입만 벌린 채 고통 속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일그러지고 얼굴, 순간적으로 맺혀지는 이마의 땀들이 피와 범벅이 되어 피부위에 번지면서 남자의 아픔이 얼마나 심한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참혹한 모습에 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옆에서 헉하며 급하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고, 조그맣게 병국이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진짜.. 죽겠다..” 병국이의 말에 나조차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 명을 처리한 후 곧바로 쇠파이프를 들고 이슬이를 넘어 자신에게 향하는 상대에게 돌아선 류인이는 구경꾼인 내가봐도 너무 무서우리만치 잔인했으니까. 이미 처음 공격에 머리와 다리를 맞고 쓰러진 두명을 제외하고 자신들의 일행 중 또 한명이 쓰러진 걸 안 나머지 3명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며 조금씩 주춤하는 게 보였다. 나 같으면 도망 갔다구요 아저씨들.. 도저히 내가 아는 한류인이 아닌, 12년간 알아온 녀석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는 공.포. 그자체인 녀석은 여전히 차가운 냉기를 뿜으며 무표정하게 또다시 다른 먹이에게로 서슴없이 다가가고 있었다. 도망가요! 나도 모르게 외칠 뻔 했다. 류인이의 시선을 받으며 움켜쥔 주먹을 앞으로 내밀어 보지만 이미 떨리고 있는 건 감출 수 가 없었다. 그리고 순간 류인이의 쇠파이프가 가차없이 남자의 왼쪽을 파고들었고, 주먹을 쥐고 있던 남자는 빠르게 스텝을 옮겨 오른쪽으로 피했다. 하지만.. 이미 파이프를 거두고 있던 류인이의 왼발이 정확하게 뻗어 나와 남자의 살짝 구부러진 무릎 옆 관절을 마치 축구공 차듯 차 올렸다. 파이프를 휘두르고 있었는데 언제 남자의 위치를 따라잡은거지? 라는 생각은 곧 움짐임에 거슬리지 않게 파이프의 중앙을 잡고있는 손모양을 보고 깨달았다. 처음 파이프로 남자의 왼쪽을 날렸던 건 허수였던 것이다. 애초 파이프의 목적은 지금처럼 무릎을 꿇은 남자의 얼굴을 아래에서 쳐올리는 거겠지. ‘퍽’ 소름끼치도록 들리는 살과 뼈의 뭉게지는 소리에 난 나도 모르게 흠칫 떨며 뒤의 벽에 몸을 더 붙였다. 류인이의 몸에 가려 자세히 보이지 않은게 다행일까?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천천히 앞으로 쓰러지는 남자를 보지 못한 건. 아니.. 소리만으로도, 파이프에 흘러내리는 피를 보는 것으로 충분히.. 난 무섭다고. 그래서 굳어버린 머리에는 널 말려야 한다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아. 어느새 이슬이가 한명을 해치웠고 남은 한명은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남자 한명 뿐이었다. 공포로 눈이 크게 뜨인 그는 다가오는 류인이와 이슬이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 살려줘..”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류인이의 발이 허공을 지나 남자의 목 바로 아래 가슴을 차버렸다. “쿨럭.. 켁..” 숨이 막히는지 쓰러져 기침을 하면서도 남자는 간절한 시선을 담아 류인이를 올려다봤고, 류인이는 그 남자의 바램대로 손을 내렸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 발길질이 날라 와 남자는 기침조차 할 수 있는 여력을 잃어버렸다. 마지막 한명이 쓰러지고 고요만 남은 넓은 창고 안에서 유일하게 울리는 소리는 높은 천정에 매달려 있는 형광등이 ‘지이~’하며 희미하게 들릴듯 말 듯 하는 마찰음을 내는 소리와 ‘뚝.. 뚝..’ 거리는 작은 뿐이었다. 그 뚝 뚝 떨어지는 소리가 류인이와 이슬이의 쇠파이프에서 흘러내리는 피란걸 안 우리는 그대로 숨쉬는 걸 멈춰버렸다. 누구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은 적막 속에서 류인이의 몸이 천천히 움직였고 넋이 나간 듯 앉아있는 선우현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더 돌려 우리 세사람, 정확히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날 보는 순간 좀 전까지 얼어붙어 있던 눈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듯 빛을 띠기 시작했다. 난 돌아온 녀석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대로 나와 눈을 마주치며 내쪽으로 걸어오던 녀석이 천천히 자신의 윗도리를 벗더니 나에게 정확히 던졌다. 얼결에 류인이의 마의를 받은 내가 멍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녀석이 작게 중얼거렸다. “덮어.” 덮으라고? 왜? 내 꼴이 흉해서? 그건 아닐텐데.. 나의 의문 섞인 눈을 본건지 류인이가 갈라지는 허스키한 소리로 대답했다. “떨고 있어.” 떨고 있다.. 그래, 난 지금 떨고있지. 그런데 추워서가 아니야.. 그건.. 씁쓸하게 변한 류인이의 눈동자를 보며 녀석이 이미 내 생각을 알고 있다는 걸 알았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 그리고.. 그건 류인이가 무서워하는 나의 모습이겠지. 순간 녀석이 상처받았다고 느껴졌다. 어쩌면... 나를 구하는 일은 류인이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잔인함을 보고 이렇게 비 맞은 강아지처럼 두려움에 떠는 내 모습을 보는 건 말이다. 그리고 그를 도와줄 수 있는 건... 나겠지. 난 선우 현에게 걸어가는 류인이의 뒷모습과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는 남자들을 번갈아 보았다. 정신 차려 이 경민. 류인이가 던져준 마의를 잡고 힘겹게 일어선 나는 눈이 얼굴이 하얗게 변한 선우 현의 모습에 서둘러 녀석을 불렀다. “한 류인.” 나를 돌아보진 않았지만 류인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지 마. 선우 현을 건드리면.. 너희 집 안 좋아진다며.” 류인이 고개가 살짝 숙여졌고 선우 현과 눈을 마주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선우 현의 얼굴이 더 하얗게 변하고 눈이 커지는 걸 보면. 그래 너도 무서웠겠지. 너의 그 완벽함이 되어줄 표본이 이렇게 잔인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내가.. 늦게 온건.” 그때 문 밖에서 ‘끼이익’하며 차가 급하게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고, 곧 차 문이 열리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허락을 받기 위해서였어.” ‘철컹’ 소리와 함께 창고의 문이 열렸고, 선우 윤과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모습을 들어 냈다. “선우 현을 건드려도 된다는.” 그리고 류인이는 선우 현에게 한발자국 더 다가섰다. 잠시 창고안의 살벌한 풍경에 멈칫하던 선우 윤이 선우 현에게 다가가는 류인이를 발견하고는 그를 향해 뛰며 소리쳤다. “멈춰!” 하지만 이미 선우 현 앞에 다다른 류인이는 녀석의 멱살을 집어 올려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만..” “내가 방법을 알려주지.” 두 사람 옆으로 뛰어와 말리려던 선우 윤의 말은 낮은 류인이의 목소리에 다 나오지 못했다. 방법? 창고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류인이의 입에 시선이 향했고, 선우 현의 두려움과 간절함이 섞인 눈을 바라보며 간단히 내뱉었다. “그냥 잘라버려.” 순간 류인이의 말 뜻을 이해 못해 당황하던 나는 단번에 일그러지는 선우 현의 얼굴을 보며 그 뜻이 바로 거세를 의미한다는 걸 알아차리고 충격에 휩싸였다. “시.. 싫어.”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는 선우 현의 말에 류인이가 피식 웃는 게 옆에서 보였다. 마치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는 녀석의 표정에 선우 현의 얼굴이 굳어갔고, 둘을 바라보던 선우 윤이 녀석의 팔을 잡았다. “가자.” “이거 놔!” 악에 받친 듯 소리를 지르며 거칠게 선우 윤의 팔을 떼어 놓은 선우 현은 류인이를 올려다보며 얘기했다. “그건.. 방법이 아니야. 최악으로 떨어지는 인간의 모습일 뿐이라고.” 그러자 류인이가 건조하게 내뱉었다. “이미 넌 최악이야.” 차가운 녀석의 말에 선우 현은 굳어버렸다. 류인이는 그런 선우 현에게서 냉정하게 시선을 돌려 조금 떨어진 선우 윤에게 물었다. “연락 받았어?” 무슨 연락을 의미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물음에 의아해 하며 난 대답을 망설이는 선우 윤을 보았다. “... 그래.” 그러자 류인이가 갑자기 들고 있던 쇠파이프를 선우 윤을 향해 빠르게 던졌고, 갑작스런 상황에 선우 윤은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그걸 받아냈다. 그리고 그 잠깐 사이 류인이가 여전히 잡고 있던 선우 현의 멱살을 끌어당기더니 오른쪽 주먹을 정확하게 얼굴에 꽂았다. “윽..” 짧은 신음소리가 들리고 선우 현이 몸을 못가 눈 듯 잠시 휘청거렸는데 류인이가 멱살을 놔주지 않아 힘없이 매달리게 되었다. 그걸 본 선우 윤이 류인이를 향해 손을 뻗는데 그의 앞을 이슬이가 가로막았다. “비켜.” 선우 윤이 날카롭게 말하자 이슬이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나 먼저 쓰러트려.”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선우 윤의 주먹이 이슬이에게 날아갔고, 빠르게 고개를 왼쪽으로 숙이고 두팔로 앞을 보호하며 이슬이가 살짝 뒷걸음질 쳤다. 그 사이 류인이는 방해 꾼 없이 자신의 손에 매달린 인형처럼 변한 선우 현에게 다시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으윽..” 고통스러운 듯 내뱉는 목소리에 류인이가 멱살을 잡아 끌며 선우 현의 얼굴가까이에 대고 나직이 물었다. “아퍼? 그래,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맞는다는 건 네 상상 이상으로 아프겠지.” 간신히 눈을 반쯤 뜬 선우 현이 류인이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어디 너의 그 비교할 수 없는 대단한 공포만 하겠어?” 그리고 이번엔 주먹을 선우 현의 배에 꽂아 넣었다. “오늘..” “허억... 윽..” 선우 현의 벌려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침과 함께 숨을 들이키려 애쓰는 소리가 나왔다. “또 다른 공포도 있다는 걸 알려주지.” 류인이의 평상시와 같은 하지만 너무나 차갑게 들리는 그 말에 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갑자기 어디서 용기가 솟았는지 지금이라도 멈춰야겠다고 결심했다. 저러다 선우 현이 심하게 다치면.. 어쩌면 류인이는 정말로 선우 현과 끊을 수 없는 고리가 연결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아까 나의 말에 상처 받고 지금 류인이에게서 또 한번 상처 받은 녀석의 생각은 어디로 향할지 아무도 몰랐으니까. 말려야해. 손에 땀으로 촉촉한 걸 느끼며 난 떨리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선우 현과 류인이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막 비틀거리는 선우 현의 멱살을 놓고 한걸음 뒤로 물러 선 뒤 꽉 쥔 주먹을 크게 뒤로 젖히는 류인이의 폼을 보며 뛰었다. 제기랄.. 너 오늘 너무 힘쓰고 있다고! 뒤에서 선호와 병국이가 뭐라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정신이 없는 나는 몸이 막 둘 사이로 가로 막으며 류인이에게 멈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얼굴에 느껴지는 너무 강한 충격에 바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한류인.. 너... 진짜 졸라 쎄다. 공포증 - 24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보이는 낮선 풍경에 난 당황하지 않았다. 뭐 당연히 병원일꺼라 예상한 나의 선경지명 탓도 있지만, 눈 뜨자마자 시끄럽게 떠드는 주변 인물들 때문에 그런 의문을 가질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 오빠 깼어요!! 오빠 나 누군지 알아? 응? 내 얼굴 보여?” “으앙~ 형아... 형아.. 흑.. 큰이모 처럼 눈 안 뜨는 줄 알았어. 형아.. 이잉~” “이 자식!! 고 3이나 된놈이 공부는 안하고 무슨 쌈질이야! 쌈질이!! 그리고 싸웠으면 맞지는 말아야지 이게 무슨 꼴이야!!” “아빠! 지금 깨어난 오빠한테 왜그래요!!” “흑.. 아빠 나뻐!!” “참 나.. 그래도 동생들이라고 챙겨주긴..” 귀의 이상으로 다시 검진을 받아야 할만큼 소음도가 높은 가족들에게 난 괜찮다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형..흑.. 형.. 많이 아파?” 침대에 매달려 서서는 날 보며 울고 있는 한얼이를 보담아 주려는 생각에 침대위로 끌어 올리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오른쪽 팔이 나아가다 뭔가 걸리는게 있어 봤더니 링겔바늘이 연결되어 있었다. “어디 아픈것도 아닌데 이런건 왜 했어요?” “아픈게 아니긴 임마! 니 얼굴을 봐라.” 아버지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치자 난 두리번거리며 거울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냐?” 거울을 찾지 못한 내가 여울이를 보며 묻자 여울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색깔은 슈렉이고 모양은 골룸 됐어.” “젠장..” “이제 너 깨어났으니 아빠는 엄마한테 들렸다 회사 간다.” 아.. 아직 어머니 큰이모 때문에 몸 안좋으신데 나까지 사고쳤구나란 생각이 들어 얼굴을 찌푸리자 아버지가 내 머리를 한대 툭 치셨다. “사고는 봐가며 쳐라.” 어색하게 머리를 문지르며 아버지 나가시는걸 보는데 교복을 입고 있던 여울이도 이제야! 학교를 간다며 따라 나갔다. 그렇게 나가는 두 사람을 잠시 보고 있는데 손에 무언가 와닿는 느낌이 들어 시선을 내렸더니 한얼이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침대위에 있던 내 왼손을 그 쬐그만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형아..” “아.. 이리 올라와.” 그러자 말 잘 듣게도 밑에 있는 낮은 보호자용 침대를 받침삼아 으샤으샤 침대위로 기어오르더니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녀석이 귀여워 한 팔로 안아주자 날 올려다보며 얘기했다. “근데.. 류인 형아는 왜에 형 때렸는데 왜 운거야?” “뭐? 누가 울어?” 거의 경악에 가까운 나의 말에 한얼이가 손가락을 척 들더니 옆을 가리켰다. “저 형아들이 그러던데.” 그리고 난 손가락을 따라 휴양을 온건지 병원에 입원을 한건지 느긋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과자를 까먹고 있는 그 건너편 형아들을 보았다. 이런.. 너희들과 같은 병실이었다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선호, 병국아. “가족상봉은 끝난거냐?” 병국이가 보던 만화책을 내려 놓으며 묻자 옆에서 선호가 거들었다. “야, 눈물나 죽는줄 알았다.” 라며 과자를 까먹는 폼은 전혀 눈물난 상태로는 보이지 않았다. “무슨 말이야? 류인이가 울었다니?” 그러자 침대가 붙어 있는 두 녀석이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울었지. 안 그러면 눈이 빨겠을 리가 없잖아?” “확실히 운거야. 뭐.. 눈물은 안나왔지만.” “야! 무슨 소리야!” 답답한 내가 소리를 지르자 병국이가 몸을 내 쪽으로 내밀며 진지하게 물었다. “너.. 류인이한테 고백 받은 거야?” 그 물음에 내가 대답을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자 선호 역시 엉덩이 걸음으로 침대 앞으로 나오며 나에게 물었다. “류인이가 너 좋대?” “야.. 니들..” “우리도 눈치는 있다고. 어제 잡혀갔을 때 들은 말로 대충 꿰어 맞춘거긴 하지만.” 병국이의 말에 나의 신경을 자극하는 단어가 있었다. 어제? 잠깐 그럼 내가 얼마동안.. 그리고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11시였다. 저건.. 분명 오전이겠지? 이렇게 환하니까. “어제 너 류인이한테 뒈진 후에 기절해서는 지금 깬거야.” 그렇게 친절히 설명 해준 건 고맙지만 선호야, 누가 누구한테 뒈졌다는 거야 지금. 물론 한방에 나가떨어지긴 했지만. 난 내 대답을 기다리듯이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두 녀석을 보며 할 수 없이 선우 현과 얽힌 이야기를 대충 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럼 그 자식은 뭐야? 1학년 짱녀석 말야.” 얘기를 한참 듣더니 선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누구 선우 윤?” “어라 선우현하고 이름이 비슷하네.” “선우 현 사촌이란다.” 그러자 갑자기 선호가 웃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촌이래도 그렇지 이름이 우윤이가 뭐냐 우윤. 크크.. 우유도 아니고..” 잠시 난 저 녀석이 도대체 뭔 소리를 하나 5초 동안 선호를 쳐다봐야 했다. 우윤이라니.. 설마 너.. 그럼 선우 현도 이름이 선 우현인줄 알았단 말야! 내가 점점 경악스런 표정으로 변해갈때 옆에서 심각하게 병국이가 중얼거렸다. “그 집안은 가운데 우자가 돌림이구나.” 정정...을 해줘야 하나란 잠깐의 고민은 이미 널리 알려진 우리의 마이너스에 가까운 우정수치 대로 그냥 오해하게 놔두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뭐.. 나중에 지들이 알아서 쪽팔림을 당하겠지. “근데 그자식이랑 넌 무슨 관곈데?” 한창을 우윤이란 발음에 즐거워하던 선호가 갑자기 물어왔고, 난 그 말 뜻을 이해 못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관계 아닌데.” 그러자 선호와 병국이가 또 서로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날 유심히 살폈다. “어제.. 너 류인이한테 한방 맞고 쓰러질 때 그자식이 어..르신과 싸우다 말고 너한테 뛰어갔어.” “뭐?” “진짜야.” “선우현한테 가려고 한거겠지.” 내가 아닐 거라는 듯 고개를 젓자 병국이 역시 고개를 홱홱 저었다. “아냐, 그 녀석이 쓰러지는 니 팔을 하나 채던걸. 아마 류인이가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손 떼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그 녀석이 너 엎고 갔을지도 몰라.” 무슨 말이야 도대체.. 내가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있자, 선호가 한숨을 쉬었다. “니가 이리 답답한 놈이니 류인이만 불쌍하지. 임마, 너 어제 쓰러지고 진짜 내 평생 한류인이 그렇게 당황해하고 놀라는 건 처음 봤다. 진짜 쓰러진 너 들쳐 엎고 병원까지 뛰었다니까. 물론.. 중간에 차를 타긴 했지만, 암튼.. 너 류인이 마음 알았으니까 잘 좀 해봐. 그 우윤이 놈은 잊어버리고.” 마지막 선우 윤을 잊으란 말은 당체 이해가 안 갔지만 선호의 말을 들으니 왠지 얘네들이 이미 알고 있던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내 얘길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으니까. “니들.. 혹시.. 알고 있었어?” 내 말에 둘이 뜨끔 하는 표정을 지었고, 병국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확실한건 아니었고.. 대충 눈치만 채고 있었지.” 바로 옆에 있는 나도 몰랐는데 니들이 어떻게란 의문은 선호의 다음말로 풀어졌다. “뭐 생각해보면 류인이 그자식이 너한테 하는 행동으로는 절대 좋아한다고는 볼 수 없지. 씨발.. 까놓고 말해서 경민이 니가 그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냐? 더불어 우리도. 근데..” 침을 한번 꿀꺽 삼키던 선호가 병국이를 한번 보더니 나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 가끔 너 보는 눈이 굉장히 진지했거든. 1학년 때는 그냥 멍하니 널 보는건가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석이 너 보다가 니가 고개 돌리면 막 시선 돌리고, 아니면 험한 소리나 하는 게 왠지.. 좋아하는 사람 몰래 쳐다보다가 들켜서 쪽팔린 거 있잖아? 그런 거 같더라고.” 그 녀석이 날 보고 있었다고? 내가 놀라서 아무 말 못하자 병국이가 이어서 말했다. “확실히 안 건.. 1학년 말에 민섭이 자식이랑 싸움 붙어서 우리 옥상에 올라갔을 때 있잖아. 그때 니가 류민이형 노트북 들고 있어서 류인이 녀석 옥상으로 올라와 애들 다 뭉겠던거.. 왜 니네 둘만 옥상가고 내가 류인이한테 말하러 갔었잖아. 실은 말야..” 병국이는 약간 뜸을 들이며 입술을 축였다. “내가 그때 정신이 없어서 니가 류민이형 노트북 가지고 있단 말 안 했거든. 근데.. 그 자식 니가 엄청 두드려 맞아 쓰러졌다고 하니까 눈빛이 확 변하면서 뛰어 간 거였어.” “야, 또 있잖아.” 옆에서 선호가 부추기자 병국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주 전에도 니들 옥상에서 싸울 때 류인이한테는 니가 다쳤단 말밖에 안 했었어. 어차피 난 니가 류민이형 PDA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고. 솔직히 류인이 PDA가 걱정이었으면 나한테 자기 가방 어디 있냐고 먼저 물었을 거야.” 난 병국이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좀 이상한건.. 류인이가 담배 피는거, 니 말로는 녀석이 멋있어 보일려고 길거리에서 담배 핀다지만..” 병국이가 동의를 구하는 듯 선호를 잠깐 보다가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녀석 니가 있을 때만 담배 피는거 아냐? 혹시 뭐 니가 길거리에서 담배 피는 사람 좋다고 한적 있어?” 담배?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말은 한적 없는데.” “그래? 암튼 그것도 좀 이상했어.” “...” “야.” 병국이 옆에서 조용히 있던 선호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날 불렀다. “왜?” “어쩔 거야?” 글쎄다.. 나도 그녀석이 없으면 안 될 소중한 존재란 걸 깨닫긴 했는데.. 어떤 식으로 이걸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근데.. 니들은.. 상관없어? 류인이가 날 좋아한다는데.” “응. 뭐.. 솔직히 니들 둘은 그림이 되잖냐. 비쥬얼 적으로는 문제없지.” “그지. 뭐 일대구와 선호만 아니라면 누구나 인정받을 수 있는 문제랄까?” “뭐야? 너 그게 무슨 망발이야 임병국!” “후후.. 속이려 해도 소용없어. 너와 일대구의 사이는 이미 만천하에 공개..” “죽어!!”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도 잊은 녀석들의 재롱을 보며 난 어느새 옆에서 잠이 든 한얼이 위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돌도 소화시킬 왕성한 나이라고 칭찬한 의사선생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정말 그 아픈게 다 꾀병이었다는 듯 뼈하나 금간 곳 없이 너무 멀쩡하다는 진단이 나와 버려 당장 내일 아침 퇴원하라는 조취를 받았다. 물론 병국이와 선호가 전치 2년의 타박상이라며 버텼지만 녹녹하지 않은 의사선생님은 허허 웃으며 바로 간호사에게 특대 사이즈의 주사기를 가져오라 명령해 두 녀석의 주장을 간단히 말소시켰다. 그리고 의사선생님의 진단은 몸에 좋다는 건강식은 모두 싸들고 온 병국이네 가족과 학교 매점에서만 유일하게 판매하는 걸 본 ‘그믐달’빵(매점 자체 제조이란 소문도 있다.) 세 개를 들고 병문안 온 준호형을 당장에 컴홈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허나 가지고온 음식을 모두 가지고 간 건 정말 비극이었다. 할 일이 없이 침대에 누워있으니 답답해 난 병실 밖으로 나왔다. 저녁을 먹자마자 아까 잔 낮잠은 연기였다는 듯 또다시 잠들 수 있는 두 놈을 부러워하며 난 병원 안을 배회하다 옥상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문이 잠겨 있지 않아 좀 쌀쌀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난간으로 걸어갔다. 얇은 환자복 하나만 입고 온 게 후회될 만큼 좀 추웠지만 계속 실내에만 있어서인지 그래도 야외라 머리가 개운해 지는 느낌이 좋아 조금 더 있다 가기로 결정했다. 내 가슴께에 올라오는 난간에 두 팔을 얹고 8층 아래의 세상을 내려다 봤다. 반딧불처럼 여기저기 불규칙하게 퍼져있는 불들을 보니 내가 참 오랜만에 옥상에 올라와 내려다 보는거 라는 걸 깨달았다. 류인이 덕분에 나도 옥상이나 높은 곳은 자주 안 가게 되어 위에서 내려다본 세상이 이렇게 예쁘다는 걸 잊고 있었다. 갑자기 녀석에게도 이걸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 녀석이 고소공포증을 가지게 된지는 모르지만 내가 이미 기억하는 과거에는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류인이가 있다. 생각해보면 참 긴 인연이다. 초기에는 그저 특이한 놈이다란 생각만 있었고, 철이 들 무렵에는 악연이니 뭐니 해서 녀석과 붙어 다니며 얻은 상처들을 한탄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난 손을 들어 가슴에 얹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심장처럼 이젠 나도 녀석의 마음을, 내 마음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기다려달라고 말했지만, 주저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생각해 그 말을 취소하고 싶기도 하다. 가족들의 눈과 사회에서의 편견, 앞으로 군대도 가야하는데 2년 동안 떨어져 있으면서도 계속 서로를 향해 심장이 뛸 수 있을는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우리의 결정에 후회는 하지 않을까란 것까지. 이 감정을 10대의 한낱 어린애 같은 열정으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어리니까 자신의 감정을 잘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이미 우리는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고,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도 생각할 수 있으니까. 그래.. 나도 이런데 류인이도 많은 생각을 했겠지? 녀석은 얼마나 많이 고민했을까? 아니 어쩌면.. 하나밖에 모르는 녀석에게는 너무 간단한 문제였을지도 모르지. 난간위에 올린 팔 위로 턱을 얹으면서 역시 좀 춥군이라고 생각할 때 뒤에서 삐걱~ 하며 문 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옥상에 오래 있은 탓인지 밝은 안쪽에서 문 손잡이를 잡고 옥상에 한발만을 내 딛는 사람의 모습을 한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시력보다 먼저 내 육감이 말해주었다. “야.. 여기 옥상이야.” 내가 좀 놀랐다는 듯이 말하자, 문 손잡이를 꼭 잡은 채 류인이가 대답했다. “알아. 대신.. 반만 들어왔잖아. 그리고.. 밤이라 잘 안보여.” 아.. 잘 안보이면 그 꽈악~ 잡고 있는 손잡이는 좀 놓고 나머지 반쪽도 들어와 보지 그래? 라고 말했다가는 죽는다. 대신 난 농담을 빙자한 떠보기류의 말을 던졌다. “그럼 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여기 있는데 한번 들어와 보지 그래?” “언제 내가 좋아한다고 했어.” 어라? 니가 나한테 고백을... 하긴 했는데.. 좋아한다는 말은 못 들었군. 제길.. 쪽팔려. “그럼 아니냐?” 내가 좀 삐졌다는 듯이 말하자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녀석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런 거 몰라. 그냥 너만 내 옆에 있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아도 지금 불어오는 찬 바람에 닭살이 돋으려 하는데 너까지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하면 난 날개 달고 승천할지도 몰라. “근데.. 뭔가 대가가 있다면 너 있는데로 걸어갈 수도 있어.” “무슨 대가?” 내가 바람 때문에 눈앞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치우며 물었다. 그러자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이란.. “키스.” 넌.. 정말 내가 인정한 삼중 강철안면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말을 얼굴도 안 붉히며 당당히 말할 수는 없다고. “내가 그리 간다.” 간단히 말하며 내가 녀석 쪽으로 걸어가는데 류인이가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 아.. 내 귀를 의심할 뻔했다. 내 평생 류인이 입에서 누군가에게 미안하다란 말을 들은게 이번이 처음이라면 아무도 못 믿을테니까. 난 걸음을 멈추고 이제 더 자세히 보이는 녀석의 얼굴을 쳐다봤다. “다친 거 때문에? 그래, 너 때문에 아퍼 죽겠고, 이 잘나신 외모에 멍이 웬 말이란...” “무서웠지?” “...” “미안해. 다시는.. 너 무섭게 하지 않을께.” 근데 말이다.. 그건 니 모습이야. 나에게 안 보여주려 해도 니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모습이라면.. “무서워.” 어둠에 동화되어 더욱 검은빛을 발하는 녀석의 눈이 정확히 내 눈을 보고 있었다. “근데.. 감추지 마. 너 나한테 속이지 않는다고 했지? 그 말 지켜. 나도 피하지 않을테니까.” 말을 하며 더 류인이에게 다가가자 모처럼만에 환한 웃음을 짓는 녀석이 보였다. 사건은 언제나 뜻하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긴 예상한 일이라면 사건이 발생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문제의 시작은 이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 내가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고 나서였다. 목요일은 요일의 중간쯤이라 그런지 유난히 힘이 들어오자마자 가방 던져놓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큰집에 다녀오신다며 한얼이를 맡겨 놓고 가셨고, 난 고개를 끄덕인 것까지 기억난다. 그 후에는 그냥 자버렸으니까. 근데 한창 자다가 신경을 자극하는 소리가 들려 깨보니 세상에.. 한얼이 녀석이 내 문가에서 큰소리로 울고 있었다. “으앙~ 아파.. 아앙~ 형아, 형아..” 놀란 내가 벌떡 일어나 녀석에게 다가가자 한얼이의 코가 심하게 부어 있는 게 보였다. 내가 코를 살펴보려 하자 한얼이는 자지러지게 놀라며 못 만지게 뒤로 물러서기만 했고, 귀청을 울리는 울음소리에 난 한얼이를 들쳐 엎고 병원을 향해 뛰었다. 그런데 저녁 8시가 넘은 시간이어서인지 동네 병원은 다 문을 닫았고 난 할 수없이 택시를 타고 응급실이 있는 큰 병원으로 가야했다. “너 또 한번 그런 짓 하면 진짜 형한테 맞을 줄 알아? 어?” 내 손을 꼭 붙잡고 계속 훌쩍거리는 한얼이를 내려다보며 내가 무섭게 말하자 우리 집 막둥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별일 아니어서 다행이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진료비를 계산하기 위해 1층 원무과 카운터로 걸어가는데 문 쪽으로 걸어가려고 하는 익숙한 사람의 모습에 걸음을 멈추었다. 순남이가 여기 있다는 건.. 그와 연관된 한사람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어 난 그에게 다가갔다. “야.” 내가 부르자 순남이를 돌아봤고, 곧 놀란 듯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여기.. 웬 일 이세요?” “그러는 넌 무슨 일이야?” 내 질문에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주춤거리며 입을 열었다. “여기에... 현이 입원해 있어요.” 이슬이에게 이미 들어서 선우 현이 계속 학교에 안나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입원해 있는줄은 몰랐다. 솔직히 류인이 주먹이 쎄긴 하지만 이렇게 오래 입원할 정도는 아니니까. 안그러면 수많은 구타에도 하루만에 퇴원 판정을 받은 우리 세 사람이 억울하잖아. “그 녀석.. 어디 아파?” 이번 질문에도 순남이는 바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슬픈 표정으로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형은.. 좋은 사람 같아요.” 내가 뜬금없이 무슨 뜻이냐는 듯 쳐다보자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현이의 일을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으실꺼죠?” “.. 그래.” “그리고.. 형도 현이 때문에 많이 당하셨으니까.. 제가 말했다고 해도 현이.. 화 안 낼꺼에요.” 도대체 어디가 아프길래.. “현이.. 스스로... 자기의 성기를 잘랐어요.” 708호. 호수를 나타내는 작은 숫자 아래에는 1인실 병실임을 알리는 것과 나란히 환자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선우 현. 내가 한참을 문 앞에 서서 그 이름만 보고 있자 한얼이가 내 손을 잡아 당겼다. “형.. 집에 안가?” “아.. 그래. 잠깐, 형 아는 사람 좀 만나고.” “형 아는 사람이 많이 아파?” “응.” “어디가?” 아마도.. 가슴이. 난 천천히 손을 들어 노크를 한 후 조용히 문을 열었다. 소리 없이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넓은 병실 바로 맞은편 침대에 누워있는 선우 현의 모습이 보였다. 차마 병실 안쪽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허락을 구하듯 문 앞에 서있자 천천히 창문을 향해있던 선우 현의 메마른 얼굴이 이쪽으로 돌려졌다. 나의 등장에 좀 놀란 듯 했으나 곧 표정이 풀렸다. “들어오세요.” 그런데 생각보다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라 난 좀 안심을 하고 병실로 들어서서 침대 가까이로 걸어갔다. “누구에요?” “아.. 내 동생.” 그러자 상체를 세웠던 선우 현이 몸을 수그려 한얼이의 한 손을 잡았다. “우와.. 되게 귀엽다.” 선우 현이 활짝 웃자 한얼이가 부끄러운지 내 다리 쪽으로 붙으며 빼꼼이 눈만 내놓고 선우 현을 바라봤다. “야, 너 귀엽다잖아.” 내가 슬쩍 한얼이의 어깨를 밀자 한얼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쁜 형아다..” “풋... 정말? 나 이뻐?” 선우 현이 웃음을 터트리며 묻자 한얼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랑 닮았네요.” “이 녀석이랑? 아서라. 지금도 사고 쳐서 병원 온거야.” “왜요? 어디 아파요?” 선우 현의 질문에 난 약하게 한얼이의 머리를 쥐어 밖으며 설명해주었다. “아프긴. 코에 동전 넣은 거 빼러 온 거였어. 야, 니 코가 무슨 저금통이야? 다신 그딴 거 코 속에 집어넣기만 해봐.” 그러자 다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조그맣게 웃고는 한얼이에게 눈웃음을 쳐주었다. “정말로.. 좋은... 형이네요. 그렇지 꼬마야?” “별로.. 좋은 형까지야. 그냥 보통이지 뭐.” “아니에요..” 나에게 눈을 돌린 선우 현이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보통이 되는 것도 대단한 거라구요. 선배가 저한테 그랬잖아요. 보통 사람부터 되라고.” “그건..” 그냥 욱하는 심정이 담긴.. 별로 내가 해서는 안 될 충고였지. 상대방의 반응을 생각도 못하고 내 멋대로 지껄인 거였으니까. “그렇게 할께요. 그래야.. 지금 최악으로 변한 자신에게서 탈출 할 수 있을테니까요.” 난 조심스레 차마 묻지 못할 것 같던 질문을 던졌다. “혹시.. 너 .. 류인이가 한 말 때문에..” “아니에요.” 선우 현이 의외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류인 선배 때문에 이런 짓 한거 아니었어요. 걱정 마세요. 이건.. 다 제 탓이에요. 처음부터.. 극복하지 못할 공포증이라면... 어쩌면 이 방법을 먼저 택해야 했을지도 몰라요.” 그건 아니야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아무런 독기도 없는 선우 현의 편안한 얼굴을 보니 녀석의 선택을 비난 할 수 없었다. “완벽하지 못하다면.. 예. 전 완벽한 인간이 아니죠. 형처럼..” 형? 난 전에 학교에서 봤던 선우 현의 형을 떠올렸다. 잡지 기사에서도 아마 뛰어난 수재며, 잘생긴 외모.. 등등 완벽한 사람으로 표현했었지 아마. “우리 집안은요, 완벽하지 않으면 바로 낙오자가 되요. 능력뿐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최고가 되지 않으면 이루어 놓은 것을 지킬 수가 없거든요. 덕분에 같은 형제끼리라도 경쟁자가 되버리죠. 최고는 언제나 하나뿐이니까요. 그래서.. 나와 윤이는.. 두 집안의 버려진 걸레짝이나 마찬가지죠.” 걸레라는 선우 현의 표현이 마음에 거슬렸지만 표정으로 들어내지 않으려 애썼다. “특히 윤이는.. 그 집안의 두 형제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많이 당했어요. 어머니가 다르다는 것도 이유긴 하지만..” 마치 옛날 얘기라도 하듯 따듯한 표정으로 말하던 선우 현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저도.. 친형한테 강간을 당해 이지경이 되긴 했지만요.” 도대체.. 어디까지 놀라야 하는 걸까? 선우 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만 내 귀에 들린 얘기는 절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일이었다. 친형이.. 강간을 하다니. 그럼 류인이가 불렀다는게.. 난 좋은 형의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던 선우 현의 형을 떠올리며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 동생이 어떤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학교로 찾아와 웃으며, 걱정스러운 척 가증을 떨었단 말야? 제기랄.. 나의 심각한 표정을 본건지 선우 현이 고개를 저었다. “동정은 싫어요.” “그런 건 안 해. 너의 얘기가 충격적이긴 하지만.. 내가 모든 사정을 아는 것도 아닌데 채 5분도 듣지 않은 얘기에 남을 동정할 만큼 오지랖이 넓지는 않으니까.” “훗.. 역시.. 류인선배가 좋아할만 하네요. 그거 아세요? 내가 선배를 괴롭힌다고 했을 때 류인선배가 뭐라고 했는지.” 내가 고개를 흔들자 차분한 표정으로 답했다. “나보다 강한 놈이니 해볼테면 해보라고여.” “...” “그런데.. 진짠거 같아요. 선배는.. 참 강해요. 아.. 어쩌면 제가 목표를 잘못 잡았나 봐요. 류인 선배가 아니라 선배로 할 걸.” 마지막 말은 농담이라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난 마주 웃어줄 수가 없었다. 나에게 그렇게 못된 짓을 하고 한동안은 꽤나 미워했던 놈인데, 지금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 병원에 있다고 그 악감정들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난 그렇게 착한 놈이 아니니까, 녀석의 불행한 과거에 마주 웃어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약해진 선우 현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말도 절대 아니다. 그 정도로 독하지도 못하니까. 다만.. 녀석의 뜻대로 동정하지 않고 한발자국 물러서서 그냥 선우 현을 봐주는 정도만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겠지. 내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자 선우 현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물어왔다. “혹시 놀라셨나요? 미친놈처럼 집착하고 괴롭히던 애가 갑자기 180도 변해서 나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니 하고.” “아니 ... 별로.” “그럼 제 얘기 조금만 더 들어주실래요? 혼자 계속 있었더니 너무 심심하네요. 전요.. 가끔.. 돈은 없지만 평범한 집에서 태어났으면 어떻게 됬을까 생각해요. 그러면.. 학교에서 재미있게 애들하고 놀다가 집에 가면 엄마가 차려주는 밥먹고.. 선배처럼 귀여운 동생이 코에 동전을 넣으면 혼내주기도 하구요.” “니가 원한다면..” “...” “그럴 수 있어.” 내 말에 선우 현이 서글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럴까요?” “그래.” “그래요.. 이제 완전히.. 최악으로 떨어져 버려, 집안에서 확실히 버림받았으니.. 어쩌면 내가 가끔 원하던 평범한 일상을 만들 수 있을지 몰라요. 정말..” 선우 현은 내 눈을 바라보며 나에게 확신을 구하듯이 작게 물었다. “할 수 있을까요..?” “응.” 나의 말 역시 소리가 작았지만 선우 현은 개의치 않는 듯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과.. 해야겠죠. 근데.. 그거 나중으로 미뤄도 될까요?” “무슨 뜻이야?” “나중에.. 지금보다 정상인 모습으로 사과드릴께요. 지금 미안하다고 하면 아마.. 순간적인 내 기분에 사로 잡혀일꺼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잖아요. 안정되고.. 여유가 생겨서 벌을 받을 준비가 되면 그때 할께요.. 허락하실래요?” 솔직히 사과는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녀석에게 당한 약 3주간의 고통은 내 평생 기억에 남을 일이긴 하지만 그만큼 잊고 싶은 기억이기도 하니까 더 이상 연관지어지는 무엇도 가지고 싶지 않다는 게 내 본심이었다. 그런데.. 녀석의 말 속에 왠지 사과의 약속을 담보로 치료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들어있는 것 같아 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이왕이면 몸도 좀 살찌워서 와. 그래야 나도 때릴 맛이 나지.” 내 말에 선우 현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경민선배. 그리고.. 류인 선배랑은 꼭 잘되길 바래요.” 아.. 그 말은 정말 듣기에 거북하다고. 마치 그 말을 하는 사람마다 이제 장가가서 잘 살아라라는 듯한 어조로 들려 이제 겨우 19살의 공부에 치중해도 모자를 난 은근히 부담스러워. 내가 좀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는지 선우 현이 손으로 살짝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웃지 마라.” “아.. 저.. 괜찮으시면 사과하러 오는 것 말고.. 미국에서 계속 연락해도 될까요? 이건 정말 절대 또 괴롭힌다거나 하자는 건 아니에요.” 미국? 이 녀석 미국가나 라는 생각에 아무 대답을 안했다. “제가.. 너무 뻔뻔했죠? 죄송해요.. 그냥 전..” “연락해.” “...” “내 핸드폰 번호 알지? 미.. 국에서 전화하면 전화세 많이 나오니까 문자로 e-mail 주소 보내.” “감사해요.” 난 고개를 저었다. 별로.. 너에게 감사받을 만큼의 일은 한 게 없다고. 나도.. 너를 지금의 최악으로 몰고 간 사람 중 하나일지도 모르니까. “근데 미국은..” “류인 선배가 말 안하던가요?” “아니.” “류인선배 참 대단해요.. 선배 구하려고.. 아마 집안에 도움 얻어서 저희 아버지한테 압력을 넣게 하신 것 같아요. 솔직히 제가 했던 협박은 다 거짓말이었거든요. 덕분에.. 윤이하고 같이 미국으로 쫓겨 가게 됐지만 류인선배가 뒷수습까지 확실히 해준 덕분에 저희 둘... 집안 형제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됐어요. 저희가 원 할 때까지. 저 대신 인사 전해주세요. 제가 직접 하고 싶지만.. 아마.. 싫어 하실꺼에요.” 류민형이 찾아왔을 때 아버지를 만나겠다고 한건.. 이 일을 수습하려고 한거였군. 그때 옆에 있던 한얼이가 내 옷을 잡아 당겼다. “형.. 나 졸려..” 이미 눈이 반쯤 감겨 내 다리에 몸을 기대고 있던 한얼이의 말에 난 얼른 번쩍 안아 들었다. “가봐야 겠다.” 인사를 하자 선우 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서는 이제 못 뵐꺼에요.” 그럼 여기가 마지막이란 소리군. “건강해져라. 그래야 나중에 나한테 사과하러 오지.” “예. 선배두요.” 잠시 선우 현을 보다 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으로 걸어가다 뭔가가 생각나 몸을 반쯤 돌렸다. “그런데 선우 윤은.. 뭘 두려워 하는거야?” 내 말에 선우 현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윤이는...” “...” “... 혼자 있는 걸 무서워해요. 굉장히. 어두운 것과 상관없이..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자신을 가둬버리죠. 또 학명으로 소개하자면.. 거지같은 의사는 Isolophobia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윤이가..” 선우 현은 말을 해야 할지 주저하듯 입을 떼었다. “경민선배를.. 아.. 아니에요..” 뭐지? 나에대해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보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냥요.. 잘... 해주시겠어요? 윤이도.. 이제 저랑 같이 미국가면.. 한국에 형들이 남아있는 이상,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는 이상은 못 돌아올지도 모르거든요.” 잘 해주다니.. 내가 어떻게? 그리고 만날 일도 없는걸. 하지만 난 선우 현의 간절한 눈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자마자 싸우자고 덤벼들지는 않으마.” 그리고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선우 현을 뒤로 하고 병실을 나섰다. 선우 현과 만난이후 처음으로 한 대화다운 대화여서 그런지 왜 일찍 얘기를 나눠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저 녀석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같은 결론을 도출하는 건 말렸을 테니까. 녀석은 완벽을 포기하고 공포증을 치료하기 위한 한발을 내딛었다. 항상 원하는 것 모두를 얻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선우 현의 대가는 너무 컸다. 선우 현의 바뀌어 잘 됬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우울한 기분이 앞서서 어두운 표정을 하고 병실 문을 닫았는데 뜻밖의 사람이 복도에 서있었다. “너....” 내가 한얼이를 고쳐 안으며 다가가자 선우 윤이 벽에서 몸을 떼며 바로 섰다. “나 때문에 못들어 온거야?” 선우 윤은 나의 질문에 대답은 안하고 한참을 한얼이를 보다가 고개를 들더니 다짜고짜 한마디를 내뱉었다. “손.” “뭐?” 이놈이.. 내가 개냐? 손이라고 하면 내가 손을 너에게 바로 줄주알았.. 하지만 내가 주는 데신 녀석은 직접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쌌다. 덕분에 한손으로 한얼이를 안게 된 나는 한얼이 엉덩이 아래 걸친 오른팔에 힘을 주어야 했다. “너 뭐하는..” “따듯해.” 따듯하다고? 그 말.. 전에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약간 인상을 쓰며 녀석을 보자 내 손을 잡은 채 한발자국 다가왔다. “내 얘기.. 들었어?” 니 얘기라면.. 공포증을 묻는거야? “미국... 가는 거.” “아.. 응.” 그러자 내 손을 한번 꽉 쥐더니 다시 원 위치였던 한얼이의 등으로 가져다 놨다. “기다려.... 이거... 돌려주러 올테니.”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내가 전에 줬던 정의의 용사 장난감을 꺼냈다. 너도 꼭 돌아오겠다는 담보를 나에게 맞기는 거야? 선우 현의 사과처럼. “그래. 그거 없어서 내 동생 엄청 울었다.” 내 말에 녀석이 눈을 접으며 소리 없이 웃어보였다. “역시...” 역시? “돌아와야 겠어.” “그래. 꼭 돌아와라. 내가 생각하기에 아메리카는 언젠간 빈라덴 형님이 접수할 것 같거든.” 그러자 여전히 눈웃음을 풀지 않고, ‘응’이라고 작게 말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모습이 왠지 애 같아 보여 나도 마주 웃어주었는데 녀석의 웃음이 풀리더니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뭐야? 나도 내 조크에 좀 웃겠다는데. 웃긴 얘기 하고 혼자 웃은 사람처럼 뻘쭘하게 되어버려 난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아.. 난 가봐야겠다. 이 녀석의 점점 무거워져서. 음.. 미국 잘 가고, 가서도...” “나한테...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봤어.” 내가? 나 잘 웃는 편인데.. 하긴 너랑 만났던 사건들이 좀 웃을 일들은 아니었지. “한 류인한테 전해줘..” 반쯤 돌린 몸 상태로 녀석을 보자 진지하게 변한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 “가지러.. 오겠다고.” 가지러 오다니.. 류인이한테 뭐 맞겨놓은거 있어? 내가 눈썹을 찡그리며 보자 다시 씩 웃더니 손을 흔들고 병실 안으로 사라졌다. 공포증 - 25 END 집에 와보니 연락을 받으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다. 내가 한얼이를 내려놓고 별이 없다고 말씀드리자 그제서야 안심을 하시며 한창 자고 있는 한얼이의 머리에 교대로 꿀밤을 놓으셨다. 그리고 깨어난 한얼이에게 아버지가 500원짜리 동전을 들이미시면서 이것도 한번 집어 넣어 보라며 입에 거품을 물고 협박을 하시는 가족애가 물씬 풍기는 모습에 뿌듯한 마음으로 보다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조용한 곳에서 생각하니 기분이 참 묘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누군가 미워했다면 최고로 뽑을 선우 현을 오늘은 정 반대의 기분으로 만났으니 말이다. 그가 한 일에 많이 놀라긴 했지만, 선우 현의 선택이었으니 내가 관여해서는 안 되겠지.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조금 더 일찍 자신이 더 망가지기 전에 올바른 방향의 극복을 찾지 못 한거 말이다. 누구에게나 선택을 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만 적당한 때는 자주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선택이라.. 난 언제 하게 될까? 지금.. 솔직히 학교에서 류인이와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농담을 하지만 내 속에서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하루하루 녀석의 얼굴을 보는 건 이미 이전과 달라진 채 새로운 류인이의 면들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날 중독 시키지. 과연 적당한 때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혹시 난 내 마음을 알고도 용기가 부족해 그 때를 지나쳐 버리는 건 아닐까? 주저하는 마음을 내보이고 있는 건 내 마음속 겁쟁이일지도 모른다. 내일은 류인이의 생일이었다. 녀석이 항상 물어오던 생일 선물의 의미를 안 지금 난.. 무어라 대답할까? 한참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습관처럼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무심결에 든 시선에 이쪽으로 걸어오는 제임스 딘이 보였다. 오래된 저 포스터.. 잠깐.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포스터를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수그렸다. 그리고 머릿속을 번쩍하며 지나가는 무언가에 정말 유쾌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한 류인 정말 넌..” 난 책상에 몸을 기대고 한참을 웃다가 얼른 시계를 보았다. 11:03분. 지금 나가면 아마 12시 이전에 류인이를 만날 수 있을 거야. “헉...헉..” 류인이의 집까지 뛰고 있는 지금 빨리 도착하고 싶다는 생각에 차오르는 숨 따위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전에는 짧게만 느껴졌던 이 길이 오늘은 참 길다라는 생각을 하며 혼자 피식 웃었다. 한산한 밤거리에는 아주 드문드문 사람들이 지나갈 뿐 거리 변 상가의 불 마저 모두 꺼져 마치 나 혼자 이 길을 뛰라고 만들어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거의 류인이네 까지 5분정도만 남겨놨을 때, 찻길가로 오토바이 폭주족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힐끗 화려한 그 무리들을 보다가 순간 얼마 전에 탄 류진이 형 바이크가 생각나 걸음을 멈출뻔했으나 불굴의 의지로 다시 근육들에게 채찍을 가했다. 그렇게 다시 뛰는데 갑자기 지나갔던 오토바이중 한대가 돌아오더니 내 옆에 끼이익 하고 바퀴와 노면의 시끄러운 마찰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난 ‘뭐지?‘ 라는 생각에 뛰던 걸 멈추고 쳐다보자 바이크에 탔던 두 사람 중 앞의 운전자가 헬멧을 벗어들고 인사를 해왔다. “오랜.. 만이다.” 난 거의 일 년 만에 보는 세현이의 모습에 눈을 크게 뜨고 반가움을 표했다. “야! 진짜 오랜만이다. 너 왜 연락도 안하냐?” “너도.. 안 했잖아.” 노란 탈색 머리에 1년 만에 더 어른스럽게 변한 세현이는 천천히 헬멧을 들고 바이크에서 내려섰다. 눈앞에 우뚝 서는 세현이를 보니 이놈도 참 키가 컸지란 새삼스런 기억이 떠올랐다. “무슨 소리야. 난 했어.” 그러자 세현이가 보기 좋은 짙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니가 언제?’ 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난 연락을 자주했다.. “꿈에서.” 그러자 그가 약간 얇은 입술을 살짝 말아 올리더니 중얼거렸다. “꿈에서라면.. 나도 자주 연락했지.” “그러냐? 어쩐지 요새 내가 악몽을 자주 꾼 건 너 때문이었구만.” “여전히.. 썰렁하다.” “너도 여전히 내 조크를 이해 못하는 메마른 감성을 버리지 못했구나.” 그리고 둘 다 서로를 보며 씨익 웃는데 바이크 뒤에 앉아있던 외소한 사람이 헬멧을 벗으며 손으로 세현이의 옷을 잡았다. “세현아.. 안가?” 좀 이쁘장하게 생긴 남자아이 였는데 우리보다 어려보이는 외모였다. 약간 조르는 듯한 그의 말을 들으며 난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라 생각하는데 세현이가 그 아이의 손을 떼어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너 저리 가있어.” “왜!” “어서.” 세현이가 차가운 표정으로 명령하자 남자애는 나를 한번 쏘아보더니 입을 내밀고 툴툴거리며 뒤쪽에 나머지 바이크 군단 쪽으로 걸어갔다. 아 이거 왠지 내가 미안해 지는데.. “야, 나 때문이라면 그러지마. 이제 나도 가봐야 되고..” “아냐. 상관하지 마.” “그래. 음.. 근데 누구야? 후배냐?” 그러자 내 눈을 가만히 살피던 세현이가 무덤덤하게 답했다. “애인.” 밤이라 환청이 들린게야라는 생각은 나를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는 세현이 덕분에 깨어졌다. 애인이라.. 분명히 남자 맞지? 난 고개를 돌려 무리들 앞쪽에 서서 팔짱을 끼고 이쪽을 쳐다보는 그 애를 보았다. 그리고 문득 그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 냈다. “아! 전화!” “뭐?” “너.. 한 열흘쯤 전에 우리학교 선우 윤이라는 1학년 하고 붙은 적 있지? 공원에서.” “... 응.” “그때 너한테 전화 했어는데 누가 울면서 받더라고. 이제보니 니 애인이었구나..” 내가 손바닥 위로 주먹을 내리치며 나의 기억력에 감탄을 하고 있자 세현이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더니 물어왔다. “아무렇지도.. 않아?” “응 뭐가?” “내 애인이.. 남자라는 거.” 물론.. 충격이지. 그런데.. 말야. 내가 지금 너한테 뭐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거든.. 설명을 해줘야 했지만 대신 난 씩 웃어보였다. “뭐, 잘 어울리는 걸. 그리고 왠지 낯설지 않은 인상도 마음에 들고.” “그래? .. 누구랑 닮은거 같지 않아?” “응.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네.” “... 너야.” 에? 난 이번엔 정말로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쪽을 계속 주시하고 있는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나랑 닮았다고? 내가 눈만 껌벅거리며 있자 세현이가 내 팔을 툭 치며 중얼거렸다. “농담이야.” “그.. 그래.” 근데.. 정말 나랑 닮은 것 같기도 한데.. “혹시 류인이 만나면 저번 선우 윤하고 싸울 때 도움 줬던 건 하나도 안 고마웠다고 전해줘.” 다시 바이크에 올라타며 세현이가 말했고 난 살짝 눈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그 자식이.. 나 얻어터질 때 나타나서는 선우 윤을 끌고 버려진 매점 건물로 들어갔었거든.” 아.. 그때. 내가 잠시 공원에서의 상황을 떠올리고 있는데 세현이가 나에게 손가락을 구부리며 다가오라고 했다. 몇 걸음 다가가자 세현이는 갑자기 장갑을 벗고는 손을 들어 살짝 내 왼쪽 눈가를 만져왔다. 내가 흠칫 뒤로 물러서려 하자 씁쓸하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조직에 배신자를 처단하느라..” 피식 웃으며 농담을 던졌지만 농담 던진 사람 또 무안하게 웃지도 안으며 날 쳐다보기만 했다. “류인이 한테 한 가지 더 전해줘.” 바이크에 시동을 걸면서 세현이가 나머지 말을 꺼냈다. “내가 맡겨 놓은 물건에 또 상처내면 졸업 후가 아니라 당장 찾으러 간다고 말야.” 너도 맡겨 놓은 물건이 있냐? 도대체.. 류인이 이 녀석은 나 몰래 집안의 가업을 잇는 사업을 개인적으로 열심히 하고 있던 건지.. 선우 윤에 이어 세현이 까지라니. 좀 벙쩌하는 나를 뒤로 하고 세현이가 요란한 바이크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잠시 시끄러운 그 바이크 무리가 사라지는 걸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어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 30분이었다. “앗.. 늦겠다.” 간신히 숨이 턱이 찰만큼 뛰어 류인이네의 거대한 대문 앞에 도착한 나는 문 옆 기둥을 한 손으로 잡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도대체 이 시간에 어떻게 초인종을 누르나라는 걱정을 함께하며 말이다. 한 류인 이 녀석 뭘 하길래 전화는 꺼져있고, 방 전화는 받지도 않고.. 정말 초인종을 눌러야 하나?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는데.. “비켜라.” “헉!”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혼자 고민하고 있는 와중 뒤에서 들린 갑작스런 목소리에 난 떨어지려는 심장을 부여잡고 말 그대로 귀신이라도 본 양 화들짝 놀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뒤에는 나만한 키의 그 늘씬하신 미모의 어머님이 밤처럼 검은 옷을 입고 가슴에는 검은 고양이를 안은 채 서계셨다. 그런데 그 고양이는 많이 본.. No. 13의 제이슨이 아닙니까! “비키래도.” “앗.. 예. 어머니.” 내가 얼른 문에서 옆으로 물러서자 고개를 살짝 끄덕이시며 지문으로 열리는 감식기에 손을 가져다 대셨다. 곧 챙하고 경쾌한 금속음이 들리면서 문이 열렸고 안으로 들어가시던 어머님이 몸을 돌리고 물어오셨다. “안 들어올꺼니?” “아 들어가야죠.” 이 밤중에 왜 왔냐고 묻지도 않으시는 어머님은 이미 나에겐 익숙했지만 한밤중에 검은 고양이를 안고 왜 밖에 나와게셨을까는 많이 궁금했다. “어디 다녀 오신거세요?” “산책.” 산책이라고... 말씀하신다면야 믿어야죠. 다만.. 그런 산책을 유럽에서 했다면 현대판 마녀사냥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상상을 하며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어머니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앞서가던 어머니가 작게 중얼거리시는게 들렸다. “요새 우리 애기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아...” 음.. 제이슨의 컨디션이 안 좋은 이유라면 이집 삼형제와 연관이 있을것이라는 99%의 확신이 저에게 있는데요.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러다 가족의 평화가 끝날지도 모른다는 사명감에 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본가 옆 류인이가 거주하는 집이 보이자 난 걸음을 멈췄다. “먼저 들어가세요 어머니. 전 류인이 보러 이만..” 그러자 몇 걸음 앞서 가시던 어머니가 반쯤 몸을 돌리시더니 손가락으로 본가를 가리키셨다. “류인이는 여기에 있어.” “예? 하지만 불이 켜져 있는데요.” “지금은 이슬이가 머물고 있지.” 아.. 이 집안의 귀염둥이. 근데 왜..? “학교 때문에 당분간 머물기로 했다. 그리고 류인이는 벌 받는 중이지.” “벌이요?” 혹시 몇 일 집에 안 들어왔던 것 때문에..? “건방지게 집안의 힘을 써서 어떤 일을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거든.” 집안의 힘을 써서.. 란 말이 오늘 저녁 선우 현에게 들었던 류인이가 한 일과 맞물리는 것 같았다. 근데 말야.. 벌 받을 걸 알고 한일이라면 왠지 녀석에게는 너무 안 어울려.. 특히 선우 현의 일에 그렇게 나섰다는 건.. 역시 나 때문인가? 좀 미안한 기분이 들어 어머님을 쳐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저.. 그 일 때문에 집안에 피해가 많았나요?” “아니. 전혀.” 란 단호한 대답은 좀 당황스럽습니다 어머님! “류인이가 벌을 받은 이유는.. 부탁을 했기 때문이야. 그렇게 살지 말라고 가르쳤거늘.” 실로 대단한 어머님의 교육관에 내가 잠시 넋이 나가 있자 날 재촉하셨다. “어서와라. 우리 애기 잘 시간이야.” 난 고개를 끄덕이고 아직 눈빛이 생생하기만 한 제이슨을 흘낏 보며 어머니 옆으로 걸어갔다. “근데..” “네?” “이 시간에 왔다는 건 중요한 얘기를 하기 위해서겠지?” “아.. 예.” “류인이 받아들이기로 한거니?” 순간 넘어가던 숨이 턱 막히는 걸 느끼며 어렵게 고개를 돌려 어머님을 바라보았다. 지금.. 저 말은.. 물론 다 알고 계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어떻게 대놓고 저런 걸 물으시다니. “왜?” “아니.. 이상하지 않으세요? 저희는 둘 다 남자인데..” “예전에.” 현관 앞에서 걸음을 멈추신 어머니가 내 쪽으로 몸을 돌리셨다. 류인이 눈과 색깔이 비슷한 빠져들 것 같은 검은 눈동자로 조용히 날 쳐다보시며 차분히 말씀을 시작하셨다. “네가 나에게 왜 검은색과 흰 옷만 입냐고 물은 적이 있었지.” 기억나요. 아주 어렸을 적.. 어머님이 색맹이시란 걸 모르고 물었던 말이었다. 그때 아마.. 대답하시길.. “내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라고 난 대답했었지.” “예. 기억나요.” “그때 네가 나한테 뭐라고 한줄 아니?” 내가 고개를 흔들자 드물게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이시며 말씀하셨다. “그럼.. 이제 나도 검은 옷만 입을래요, 그래야 진짜 저를 볼 수 있을테니까요... 라고 했지. 그리고 정말 그 후 몇 년간 넌 항상 검은색과 흰색 옷만 입고 왔었어. 내가 그만두라고 할때까지.” 아.. 정말 난 누구 말대로 애어른이었나 보군. 좀 머쓱한 감이 없지 않아 머리를 긁적이자 어머니가 현관문 쪽으로 몸을 돌리시며 다시 건조하게 돌아온 말투로 말씀하셨다. “몇 년 전에 일본에서 두발로 걷는 로봇이 나왔을 때 기계에 미쳐있는 류민이가 그 로봇하고 결혼하겠다고 난리칠까봐 은근히 걱정했었단다. 그렇게 무생물에 미쳐있는 두 놈도 있는데 설마 우리가 널 싫어하겠니?” 찰칵 하고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시면서 어머니가 2층을 가리키셨다. “방으로 가봐라.” 그리고 제이슨을 안고는 유유히 어두운 복도 너머로 사라지셨다. 속으로 감사합니다를 작게 웅얼거리며 난 어머니가 말씀하신 그 2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오늘도 학교에서 실컷 본 녀석인데 새삼스레 심장은 왜 이리 떨리는 건지, 난 심호흡을 크게 한 후 ‘똑 똑’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안에서 아무소리가 나지 않았고 약간 기다리다 나는 살며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환하게 불이 켜진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던 건 아니고 침대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 짚어 쓰고 누워있는 류인이가 있었다. 반쯤 열린 창문에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고 있지만 그리 춥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데 왜 이불을 저렇게 뒤짚어 쓰고 있나싶어 난 조용히 다가가 놀래킬 생각으로 훌쩍 녀석의 몸 위로 내 상체를 날렸다. “야! 형님 오셨다.” 그리고 이불을 확 들쳤는데.. 한 류인.. 너 성형수술 한거니? 응? 드디어 너의 초은하계적 미적 감각을 믿고 귀엽다고 생각하던 이슬이의 얼굴과 똑같이 만든거.. 는 절대 아니고! 넌 진짜 이슬이잖아! “야! 니가 왜 여기.. 읍..” 갑자기 내 입을 틀어막는 솥뚜껑만한 이슬이의 손에 난 하던 말을 다 할 수 가 없었다. “조용히 하세요. 저 걸리면 죽어요..” 겨우 이슬이의 손을 떼어내고는 방안을 한번 살핀 후 녀석에게 물었다. “류인이는 어디 가고 왜 니가 여기에 있는거야?” “류인 형은.. 저기 원래 지내던 곳에 있어요. 여기서 자면 고양이들 때문에 돌아버릴지 모른다고.. 이거 절대 아줌마한테는 비밀이에요!!”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 다 대며 비밀을 강조하는 이슬이의 끔찍, 깜찍한 동작 때문에 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류인형 만나러 오신거에요?” “응.” “그럼 저기 창문으로 해서 나가세요.” “...” “왜요?” “꼭 창문으로 나가야 하냐?” “당연하죠!” 라며 표정은 안 그러면 밀어 버린다의 협박이 들어있는 것 같아 굳은 몸을 이끌고 꽤나 높아 보이는, 휘잉 하며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창가로 다가갔다. 역시나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집 안은 약한 스탠드 불 하나만 켜진 채 다른 불은 다 꺼진 상태로 좀 어두웠다. 천천히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며 주위를 살폈는데 방안 어디에도 류인이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혹시 어두워 잘 못 본 건가 해서 침대 쪽으로 다가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무언가가 내 어깨를 홱 잡아챘다. “헉!” 오늘 정말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날 강하게 끌어당기는 사람에게 순간적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막 내 팔을 강하게 잡는 게 느껴진다 싶더니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해.” 날 거의 가슴에 끌어안다 싶이 하고 가만히 있는 녀석을 따라 나도 입을 다물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그러자 천천히 류인이가 내 팔을 풀어왔다. “웬 일이야?” “아...” 내가 여긴 온건 말이지.. 근데 여기 너무 어둡지 않냐? “야, 불 좀 키면 안될까?” “응.” “왜?” “걸리면 난 죽어.” 아.. 벌 받는 중이라고 했지. 근데 이리로 도망온거냐? 이 간 큰 녀석아. 난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럼 좀 앉으면 안될까?” 니가 잡은 팔과 어깨가 상당히 아프다만.. 그러자 류인이가 묘한 눈빛으로 변하더니 중얼거렸다. “난 지금이 좋은데.” 야, 야... 어디서 그런 느끼 대사를 감히.. “나 갈까?” 그러자 쳇 하고 내뱉더니 내 팔을 잡은 채 쇼파로 데리고 갔다. “어디 갔다 온거냐?” 여전히 팔은 절대 안 놓은 채 앉은 나를 아래 위로 훑어보며 류인이가 물었다. “아.. 병원에 한얼이가 좀 아파서. 근데 어떻게 알았어?” “체육복이 아니길래.” 너무나 당연한 듯 대답하는 녀석의 말에 고백이고 뭐고 당장에 뛰쳐나갈까 했지만 이미 녀석 옆에서 인내심이 거의 신선 경지에 다다른 난 조용히 대꾸했다. “다음부턴 꼭! 체육복 입고 와주마.” “그러던지.” 저..저.. 심드렁한 말투란! 가끔 선호와 병국이가 류인이의 한마디에 뒷목을 잡고 쓰러 지는거 정말 가슴깊이 이해한다. “한얼이는 괜찮아?” “아.. 응.” 한얼이는 괜찮았는데.. 다른 사람을 만났지. 난 표정을 가라앉힌 후 류인이 쪽으로 몸을 살짝 돌렸다. “실은 병원에서 선우 현을 만났어.” 류인이가 무표정하지만 사나운 눈빛으로 날 내려다봤다. “그 새끼는 왜 만나.” “그냥 우연히 만난 거였어. 병원에 입원해 있더라고.” “알아.” 알아? 그래.. 하긴.. 너희 집안과 거래가 있는 집이랬지. 그래도.. “근데 아무렇지도 않아?” “왜? 동정이라도 해야 해?” “그건 아니지만..” “정신 차려 이경민. 그 녀석은 우리가 상관할 만큼의 관계가 있는 놈이 아니야. 착각하지 말라고. 어설픈 감정을 보이는 건 오히려 그 새끼한테 해가 될 뿐이야.” “넌 정말 가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너무 냉정할 때가 있어.” “그래야 하니까. 그게 나야.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듯이 나에겐 이게 정석이야. 그래서.. 싫어?” “아니.. 물들까 걱정이다.” 그러자 피식 웃더니 표정이 가라앉으며 물었다. “근데 그자식이 또 무슨 일 한건 아니고?” “응. 좀.. 변했더라. 독기도 다 빠지고.. 너한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던데?” “그 밖에 다른 말은 안 했지?” 선우 현과 e-mail 주고받기로 했다는 말은 절대 너한테 하면 안 되겠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잠깐 고개를 숙이고 선우 현을 생각하는데 가까이에서 류인이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내가 고개를 들자 바로 10c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류인이의 얼굴이 있었다. “이제 하고 싶은 말 해.” 하고 싶은말.. 그래. 너한테 할 말이 있었지. 난 녀석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그대로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제임스 딘은..” 류인이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벽지가 뜯어져서 붙여놓은 거였어. 니가 나한테 물었을 때.. 멋있어서 붙여놨다고 했던 말은 실은 거짓말이었지.” “...” “수고했다. 덕분에.. 길거리에서 담배 피는 멋진 모습들 보여줘서.” 녀석은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조용히 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 니가 박스로 모아 놓았다는 내 사진들도 언제 한번 보여줘. 내가 일일이 뒤에다 싸인이라도 해줄테니.” 그러자 류인이가 낮게 내뱉었다. “이슬이 이 자식.” “혼내지 마. 그래도 그 얘기 들으니까 니가 정말 날 좋아하는 구나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아, 좋아하는 건 아닌가? 아직 듣지도 못한 말인데.” “듣고 싶어?” “음.. 솔직히 그렇긴 한데.. 니가 말 안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러자 손을 올려 손등으로 살짝 내 볼을 스치더니 속삭였다. “부족하니까.” 류인이의 손이 닿은 자리가 불에 데인 듯 뜨겁게 느껴졌다. “그런 말로는 절대... 알릴 수 없거든.” 손가락이 내 입술 근처에까지 왔다. 천천히 얼굴의 곡선을 기억하려는 듯 입술 주변을 배회하다가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천천히.. 알려줄게. 니가 무서워하지 않도록.” 피부에 닿았던 온기가 사라지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입을 벌렸다. “무섭지 않아.” 그러자 녀석이 살짝 눈웃음을 쳤다. “그래.” 마치 칭찬하는 듯 들리는 류인이의 말을 들으며 난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나.. 너한테 고백할게 있어.” 그러자 의외라는 듯 녀석의 표정이 변했다. “과학실 키스사건.” 아.. 이건 정말 모험인데.. 과학실이란 말에 표정이 살짝 굳는 류인이를 보다 두 손을 들어 녀석의 얼굴을 잡았다. “그건..” 그리고 그대로 머리를 움직여 살짝 내 입술을 가져다 댔다. 부드러운 살이 내 입술 끝에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원래 내 자리로 돌아온 나는 날 뚫어지게 바라보는 녀석에게 말했다. “나였어.” “알아.” “뭐!!!”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류인이는 달래듯 다시 내 팔을 잡고 주저 앉혔다. “너.. 너 어떻게..!!” 그러자 어깨를 살짝 으쓱해 보이더니 한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쓸어내렸다. “처음부터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어.” “이상하다니?” 역시 내 연기가 어색해 다 간파했던 것인가? “그 키스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거든.” 에? 내가 눈을 똥그랗게 뜨자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이제는 내 귓불을 살짝 살짝 어루만졌다. 물론 난 충격에 빠져 어찌 보면 에로틱한 녀석의 행동을 저지할 생각도 못하고 있다는 게 현실이었다. “그래서 확인해 보려고 한거였어.” “스킨쉽.” 내가 억울하다는 듯 말하자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공원에서 니 냄새 맡는 순간 깨달았지. 그때 날 묘하게 흥분시켰던 것 중 하나가 바로 그 냄새였다는 거.” 계속 얼이 빠진 나에게 류인이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확실히 너와 키스를 다시하면 확인할 수 있을꺼라 생각했는데..” 말끝을 흐리며 묘한 눈으로 날 보는 류인이에게 내가 재촉했다. “그랬는데?” “확인 할 수가 없었어.” “왜?” “그게..” 내 귀를 만지던 류인이의 손이 목 뒤로 옮겨지면서 조심스레 내 머리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조금 전 내가 했던 키스와는 다른, 느리지만 강하게 내 입술을 자극해오는 류인이의 뜨거운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두 입술위를 배회하던 류인이의 입술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물기를 머금은 혀가 조심스레 약하게 다물어진 내 입술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 감촉에 나도 모르게 몸을 떨면서 그의 혀를 받아 들였다. 불만스러울 만치 천천히 내 입안으로 들어온 류인이의 혀가 곧장 내 혀를 휘감았고 그 사이 류인이의 한 팔이 내 등을 감싸며 조심스레 쇼파 위로 날 눕혔다. 금세 내 몸 위로 류인이의 기분 좋은 무게가 느껴진다 싶더니 등을 감쌌던 팔을 올려 녀석의 얼굴과 맞다아 있는 내 얼굴 옆선을 지나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 머리를 어루만지며 그 속도만큼이나 내 입안에서 뜨거운 혀를 움직였다. 나도 모르게 류인이의 혀를 건드리며 반응하자 내 머릿속에 있던 류인이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위에서 더 날 온몸으로 눌러왔다. 갑자기 받게되는 힘에 내가 살짝 몸을 뒤틀자 류인이가 금세 몸에 힘을 빼고는 키스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잠시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던 우리 사이의 적막은 내가 무의식중에 혀로 입술을 핥자 갑작스레 류인이가 몸을 일으키는 걸로 깨어졌다. 녀석의 갑작스런 행동에 내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어나서 보자 류인이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왜... 그러지? 난 내가 무슨 잘못을 한건가 멍하니 녀석만 쳐다보고 있는데 류인이가 낮게 말했다. “이렇기 때문에.. 알 수가 없었어.” “무슨.. 말이야?” 내 목소리가 아닌 듯 갈라지고 허스키하게 나오는 목소리에 류인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그런데.. 류인이의 눈이.. 전에는 보지 못했던 욕망으로 가득 찬, 한순간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듯이 보여 난 침을 꿀꺽 삼켰다. “너랑 키스하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거든.” 류인이의 손이 살짝 올라와 방금 전 온기를 나누었던 내 입술을 엄지로 쓸어 내렸다. 근데.. 니말이 맞는 것 같다. 나도.. 두뇌활동이 정지되어 버리거든. 그때 류인이가 작은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참아야 되는데..” 갑자기 웃음이 나올 뻔 했다. 참아야 된다고? 정말 너답지 않게 너무 귀여운거 아니냐? 난 살짝 이를 들어내며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정확히 12시. “실은.. 주고 싶은게 하나 있어.” 그러자 고개를 약간 돌리고 있던 류인이가 나를 돌아봤다. 불이 밝지 않아 얼굴 반쪽은 어두운 음영으로 가린 류인이를 올려다보며 혀로 입술을 살짝 축인 후 난 조심스레 말했다. “생일 축하한다.” “아..” 류인이는 내가 좀 전에 봤던 시계를 보더니 12시가 넘은걸 알고는 피식 웃었다. “고맙다.” “받고 싶은 선물은?” 그러자 놀랍게도 이 녀석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입을 살짝 벌린 멍한 표정이 되는 게 아닌가!! 사진기라도 있으면 찍고 싶은 녀석의 정말 드문 표정에 난 살짝 웃으며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정말 놀란 듯 아무 말도 못하고 나만 바라보던 녀석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너.. 설마..” “얼른 말해. 이번 생일에 꼭 받고 싶은 선물.” 류인이는 마치 내 의중을 떠보는 듯 한참을 쳐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마치 그 모습이 기도를 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려왔다. 그리고 눈을 뜬 류인이는 확고해진 눈빛으로 날 보며 정확히 말했다. “전부.” 두 손을 내 어깨위로 올려 날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네 전부를 가지고 싶어.” 이렇게.. 누군가 나를 간절하게 원한다는 게 가슴이 벅찬 일인 줄은 몰랐다. 숨이 막힐 듯 날 들뜨게 하는 일인 줄도 몰랐어. 이건 어쩌면 악연이 아니라 축복일지도 몰라. 너를 만나건 말야. 지난 12년간 이것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게 억울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줄게.” 또다시 커지는 류인이의 눈동자를 보며 살짝 녀석의 입에 키스를 했다. “전부..” 류인이의 입술위에서 작게 중얼거리자 환하게 미소 짓는 녀석이 느껴져 나도 같이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떼어냈다. 굉장히 예쁘게 웃는 네 모습.. 고백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 너무 좋아하는 녀석을 보다 문득 궁금한 게 생각나 질문했다. “참.. 근데 너 나 몰래 애들한테 뭐 빌려주고 그러냐?” “무슨 말이야?” “아.. 아까 선우 윤하고 세현이를 만났는데 말야...” . . . . . . 그렇다... 어이없게도 싸가지 없는 포비아 덩어리 한류인과 나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 End - 공포증 - Epilogue - Epilogue < 1 > 초등학교 입학식장에 온 한씨 집안의 막내아들인 한 류인은 지금 상당히 불편한 심기를 감출수가 없었다.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한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주변의 아이들, 게다가 울기까지 하는 꼴불견까지. 한손으로 지긋이 아픈 머리를 짚으며 한 류인은 이 난장판 같은 입학식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랬다. 그런데 바로 옆줄에 서서 흘러내리는 코를 손등으로 닦고있던 불청결의 대표 인물이 갑자기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한 문제가 발생했다. “으앙~~ 엄마~ 으앙~~” 한 류인은 어머니에게 배운대로 절대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표정을 하고는 몸에서 액체를 뿜어내고 있는 꼬마를 내려다봤다. 보아하니 바로 뒤에 서있던 녀석이 장난질로 계속 머리카락을 잡아당긴 모양이었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운다고? 기가 차서 코웃음이 나오려는걸 겨우 참은 한 류인은 기분 나쁨을 표현하기 위해 살짝 옆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속으로 계속해서 빨리 졸업식이나 끝나라고 주문을 외울 때였다. 누군가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싶더니 한 녀석이 쓰러진 코흘리개의 옆에 앉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한 류인은 잠깐 고민에 잠겼다. 어째서? 왜? 쓸데없이 남을 도와주려고 하는 거지? 고민하는 사이 뒤통수만 보이는 그 녀석은 코흘리개를 다독거리며 말하고 있었다. “울지 마. 남자는 함부로 우는 거 아니야.” 맞는 말이다. 그래도 이 녀석은 조금은 자각이 있구나라고 생각하는데 뒤이어 하는 말은 또다시 한 류인을 고민에 잠기게 해야 했다. “내가 자리 바꿔 줄테니까 앞으로가서 서있어.” 쓸데없는 도움. 얼굴을 찡그리는 사이 코흘리개는 훌쩍이며 떠났다. 허나 그딴 녀석은 이미 관심 밖이었다. 대신 한 류인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인간의 면상을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녀석을 뚫어지게 보았다. 자신과 비슷한 키에 얼핏 촌스러운 바가지 머리를 한 녀석이 몸을 돌렸고 순식간에 한 류인의 눈이 이상한 아이의 얼굴이 확 나타났다. “안녕.” “...” 이를 살짝 드러내며 부드럽게 웃고 있는 붉은 입술, 긴 속 눈썹 아래 보이는 밝은 갈색의 눈동자. 그리고 그 갈색의 커다란 눈을 더 돋보이게 하는 하얀 얼굴. 한류인은 대답대신 자신의 왼쪽 가슴에 손을 얹으며 뒤로 한발자국 물러섰다. 이상해! 심장의 뛰는 소리가 귀에 들리고 있어! 처음 겪는 이 두려운 상황에 한 류인은 자신에게 계속 미소 짓는 녀석의 얼굴에서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너무 무섭다! 어째서 저 녀석이 웃는 모습에 온 몸의 힘이 빠지고 아픈 것처럼 심장이 빨라진 걸까? 이 처음 맞닥뜨린 상황은 그에게 있어... 공포였다. 조용한 저녁 식사시간. 달그락거리며 숟가락과 젓가락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는 와중 이 집안의 가장이자 세 아들의 아버지가 밥 먹기를 중단하고 막내아들에게 물었다. “왜 안 먹어?” 아니나 다를까 한 숟가락도 입에 대지 않은 채 식탁의 진수성찬만 바라보고 있던 막내아들, 한류인이 아버지의 질문에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늘 무서운 사람을 발견했어요.” 순간 밥을 먹던 어머니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 모두는 경악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지금 자신의 귀에 들려온 말이 사실인가 잠시 확인절차를 걸쳐야했다. “뭐야! 네 담임이야? 아니면 상급생?” 한 류인의 큰 형인 한 류민이 젓가락을 움켜쥔 채 큰소리로 물어보자 한류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누구야? 어떤 놈이 무섭다는거야?” 평소 집안에 자주 들락거리는 험악한 인상의 조폭들에게 조차 두려움은커녕 모든 사람을 자신의 아래로 보던 인물의 발언이었으니 어머니를 제외한 식구들의 충격은 가히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모두들 이제 막 대답하려 벌어지는 입술에 주목했다. “같은 반 애에요.” 순간 아버지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씹... 뉘 집 자식이냐.” 분명 자신의 경쟁상대인 비둘기파의 집안 놈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아버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몰라요.” 뜻하지 않은 대답에 삼부자가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우아하게 식사를 하던 어머님이 물으셨다. “그 애 이쁘니?” “예.” 그리고.. 좀 전보다 더욱더 경악과 충격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변한 삼부자가 이날 저녁 다시는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는 건 전설로 남지 않았다. 한 류인 8세- 이경민공포증 생김. < 2 > 따듯한 6월 오후. 유치한 율동과 음악에 맞춰 춤을 추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역시 불편한 심기를 가지게 된 한류인은 표정을 감추고 선생님이 사라진 사이 아이들이 모여 있는 나무그늘 밑으로 갔다. 약간의 운동으로 땀을 식히고 있는데 아이들 중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 아이가 가지고 온 탱탱볼로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한 아이가 던진 볼이 한 류인을 향해 날라 왔고, 순간적인 민첩함을 동원하며 한류인은 그 공에 강한 펀치를 날렸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공은 나무 위로 빠르게 올라가 그만 나뭇가지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치게 되었다.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자 한 류인은 어머님의 당부도 있고 짜증스러움을 그대로 얼굴에 표현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그 표정을 본 같은 반 아이들이 뒷걸음질 쳤고 차마 공을 어떻게 해달라는 말은 꽉 다물어진 입안으로 삼켜야 했다. 특히나 탱탱볼을 가지고 온 아이는 자신의 공, 탱돌이를 이제 영영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탱돌이 주인의 예상과는 달리 한 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무에 매달려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른 몸통 두깨만한 나무를 두 팔로 껴안고 힘겹게 탱돌이가 걸려있는 나뭇가지 사이로 간 한 류인은 손을 뻗어 가볍게 탱돌이를 주인의 품안으로 떨어트렸다. 아래에서 아이들이 ‘와~’ 하며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 살짝 내려 봤던 한류인은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고개가 뿌러져라 올려다보는 아이들의 무리들 중에 바로 그애가 있었다! 지난 1년간 그에게 정체모를 공포를 안겨주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석처럼 자신도 모르게 그 애의 몸에 손을 가져 다 대게 하는 무서운 아이!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고 그 아이를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한 류인은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갑자기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가 부러졌고, 한류인은 낙하라는 아버지가 군대이야기를 할때 자주 나오는 단어를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다행히 별로 높지 않은 곳에서 떨어져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떨어진 자세 그대로 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바로 그가 떨어지며 개구리 포즈로 엎어지는 순간 귓가에 그 아이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웃음. 이것은 태어나서 처음 겪는 수치였다. 병원으로 호송되는 중간 한류인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는, 죽어도, 높은 곳에 올라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아주 강력한 주문을 걸었다. 높은 곳은 곧 죽음이다! 한 류인 9세 - 고소공포증 생김 < 3 > 화창한 오후. 오늘도 즐겁게 학교에 다녀온 한 류인은 가방 속에 강제로 빼앗아온 아이의 연필에 뿌듯해 하며 집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하얗고 오밀조밀한 손으로 잡고 있던 연필로 얼른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신발을 벗고 한달음에 방으로 달려갔다. 일단 방문을 열면 그가 하루 중 가장 신성시 하는 일과인 그 아이의 사진을 보며 오늘 하룻 동안 그 아이와 있었던 일을 돌이켜 보며 즐거워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허나.. 살짝 열려있는 방문이 마치 앞으로 있을 어두운 미래를 암시하듯 불길한 전조를 보였다. 한 류인은 어머님의 당부도 잊고 인상을 찌푸리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평소 그와 앙숙관계에 있던 No. 3가... 그의 보물 상자를 긴 발톱으로 마구 헤치고 있었다!! 순간 충격에 휩싸인 한 류인은 무작정 돌진했고, 재빨리 옆으로 피한 No. 3는 제처 둔 채 그의 심장을 떨리게 하는 아이의 사진들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미 불길한 전조가 있었듯 사진의 다수는 이마 No. 3의 잔혹한 발톱 아래 운명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대로 주저앉아 이 믿기지 않는 사실에 넋을 놓고 있던 한 류인은 고개를 돌려 주범인 No. 3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역시 녹녹치 않은 No. 3는 자신의 손을 혀로 닦으며 마치 ‘니가 어쩔꺼냐’라는 비웃음이 담긴 몸짓으로 한 류인을 자극하고 있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한 류인은 순간 자신의 머릿속에 ‘뚝’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뚝 하고 이성이 끊긴 그는 인간과 동물간의 5시간에 넘치는 사투를 벌이며, 공존할 수 없는 두 종족의 처참한 말로를 고양이 다리의 기부스를 통해 표현해 내고야 말았다. 정신이 들고 눈을 떴을 때는 심각한 표정의 가족들이 옆에 있었다. “어머니한테 말씀드렸다. 그동안의 No. 3의 악행에 대해서.” 큰 형의 말에도 한 류인은 계속 무표정하기만 했다. 그런 동생을 쳐다보는데 옆에서 착잡한 어조로 이 집안의 둘째 아들이 말했다. “결국.. 어머니가 내보내기로 결정하셨다.” 의외의 말에 한 류인은 두 형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그리고 힘겹게 맨 뒤에 서있던 아버지의 입이 열렸다. “나가라. 막내야.” 전화위복. 비록 No. 3와의 혈전은 그에게 가슴에 큰 상처를 남겼지만(사진의 손실은 실로 막대했다!) 이번 일로 고양이만 보면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뚝’ 소리가 들리게 된 그로써는 다행스럽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사를 도와주겠다며 찾아온 아이가 등 뒤에서 가슴떨리는 말을 하고 있었다. “와.. 너 혼자 여기 사는 거야? 나 맨날 놀러 와도 돼?” 겨우 표정을 감춘 한 류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싸늘한 표정으로 대꾸해주었다. “올려면 돈 내고 와... 이 경민.” 한 류인 11세 - 고양이 공포증 생김 ------------------------------------- - Someday (외전) 상체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아래쪽에만 추리닝 바지를 입고 있는 남자가 침대에 옆으로 누워 자고 있었다. 잠결에 그랬는지 이불은 무릎 아래로 내려가 있었고, 엉덩이께로 살짝 내려간 바지는 아슬아슬하게 그의 골반에 걸쳐져 있어 가는 그의 허리라인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같이 칭얼대며 얼굴아래 손을 받치고 자는 모습과는 반대로 그의 자세는 상당히 섹시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를 침대 옆에서 눈을 완전히 가릴 만큼의 긴 앞머리를 가진 남자가 묘한 눈으로 바라보며 서있었다. 잠옷을 입고 바라보던 그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침대위의 남자위로 몸을 숙였고, 자고 있는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으응..’ 이란 소리와 함께 침대위의 남자가 깨어났다. 그걸 알아차린 키스를 하던 남자는 두 손으로 상대방의 얼굴을 붙잡고 더욱더 깊은 키스를 나누었다. 이제 완전히 몸을 침대위로 올려 온몸으로 덮어버린 남자는 자신의 아래에 깔린 이제 막 잠이 깬 남자의 귀 쪽에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혀를 내밀어 애무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애무에 금세 얼굴이 달아오르고 신음하듯 눈을 감고 쾌감을 음미하던 반 나체의 남자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몸을 움찔거리자 애무를 하던 혀는 그의 목을 지나 점점 가슴 아래로 내려와.... “제기랄.. 임병국 이 자식.” ‘탁’하고 내가 던진 만화책이 책상 다리에 맞고 떨어지는걸 보며 난 붉어진 얼굴을 좀 식히기 위해 고개를 떨어진 만화책 반대쪽으로 돌렸다. 뭐가 슬램덩크냐 슬램덩크! 오늘 병국이 자식이 슬램덩크의 외전 격이라 할 수 있는 동인지 만화라며 집에 가려는 날 붙잡고 내 가방 속에 녀석 마음대로 집어넣었던 걸 점심 먹고 이제야 꺼내서 본건데... 세상에 이럴수가! 도대체 어떻게 강백호와 서태웅이 그런.. 그런.. 사이로 그려진 삐리리한 만화책인줄 누가 알았겠냐고! 병국이 자식이 음흉한 미소를 지을 때 눈치 챘어야 하는 건데.. 난 고개를 돌려 기다란 책장 맨 마지막 칸에 고이 모셔둔 희대의 역작 슬램덩크 시리즈를 보았다. 아니야, 이건 말도 안돼. 서태웅이 강백호에게 사랑한다고 말 할리는 없어! 생각해봐, 백호는 소연이를 좋아하잖아? 안 그래? 머리를 쥐어뜯으며 와중 나의 이상적인 슬램덩크 세상을 무너뜨린 병국이 놈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 소리를 쳐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내가 반응을 보이면 더욱더 즐거워할 녀석이란 걸 알기에 난 두 주먹을 불끈 쥐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올 학기 초 선우 현이란 1학년 신입생으로 인해 여러 사건이 벌어지고 나와 류인이는 서로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라고 내입으로 말하니 정말 어색하군. 아무튼 수능이 끝난 지금까지 우리는 별 문제없이 지내 왔다는 게 정상이지만 불행히도 한번 잘못사귄 친구로 인해 인생이 얼마나 비참해 질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두 녀석의 존재 때문에 정작 별 문제없는 나와 류인이의 관계는 많은 사건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바로 장 선호와 임 병국. 허구헛날 나와 류인이의 진도(?)에 대해 묻는 건 이제 아침인사가 되어버렸고, 사귀기 이전과 다름없이 보내는 우리를 못마땅해 해 강렬한 바디 컨택이 필요하다며 자칭 ‘깨어나라 이경민’ 프로젝트를 만들어 지난 1년 동안 나를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갔다. 녀석들의 말에 의하면 류인이가 나에게 베드인 하자고 요구하지 않는 건 전적으로 나의 탓으로 돌렸는데(그렇다. 못 믿겠지만 우린 아직 순수한 관계다) 그건 아직까지 동성 섹스에 대해 내가 부담감을 느껴 류인이가 날 위해 배려를 해주는 거라는 상당히 재수 없는 이유를 붙여가며 말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녀석들은 단지 내가 만만해서 날 붙들고 늘어지는 거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아.. 딱 한번 5월 달에 우리가 아직 잠자리를 같이한 사이가 아니란 걸 처음 알고 경악을 금치 못한 병국이가 류인이를 흥분시켜야(?) 한다며 녀석에게 누님의 씬 모음 컬렉션을 직접 프린트로 뽑아와 학교에서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한 류인이 누구던가. 녀석은 강철안면인간답게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걸 속독으로 쓰윽 읽어 내리더니 한마디 던졌다. “오타 열라 많아.” 그 뒤로 목표가 나로 바뀐 두 녀석의 짓거리를 책으로 내면 브리테니커 사전 시리즈 못지 않는 양이 대작이 나올 것이다. 가장 큰 사건은 바로 여름방학때 있었던 금동이 구출작전. 방학 때 학원과 독서실을 전전하는 나를 붙잡고 1박 2일로 놀러가자고 먼저 제의한건 선호였다. 말로는 네 명의 우정굳히기라지만 류인이 몰래 날 불러내 이번기회에 해버리라고(뭘?) 협박하는 말로 미루어 녀석이 또 무언가 저지르려는 구나라고 눈치를 챘다. 하지만 정말 그때는 더운 날씨와 공부로 지쳐있었기에, 아름다운 전원주택과 드넓은 자연이 있다는 선호네 외할머니 댁에 가자는 제안에 마음이 쏠렸었다. 물론.. 나도 그 기회에 정말로 뜨거운 밤을 한번 보내볼까라는 생각도 조금 가지고 있긴 했지만 뭐.. 그런데 말이다 뭐가 아름다운 전원주택에 드넓은 자연이란 말이냐! 물론 내가 요들송 나오는 스위스의 예쁜 집들을 상상한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푸세식 화장실에 펌프질로 지하수를 길어 세수를 해야 하는 100년 된 흙집을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해버리라고 말한 녀석의 말이 무색하게 어째서 한방에서 우리 넷이 모두 자야 했냐 라는 건 정말 열 받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선호 녀석 또 한다는 말이 자기네는 상관 말고 볼일을 보라나? 씨발.. 내가 변태냐? 누가 보면 더 흥분하는 놈이게. 열 받아 그날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전기세 나간다며 불 끄라던 선호 외할머니의 고함이 주 요인이었다.) 시작부터 불길했던 여행의 비극은 저녁 무렵부터 무서운 기세로 내리던 빗줄기에서 나타났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불안한 듯 계속 내리던 비는 결국 우리가 자는 사이 점점 땅을 차고 올라오고 있었다. 급기야 새벽 1시쯤 이장님의 긴급 대피명령으로 인해 밤중에 할머니의 짐을 짊어진 채 2km 떨어진 인근 초등학교까지 나르는 일을 수행하게 되었다. 기상청의 관측 이래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은 비가 왔다는 시간당 160ml의 집중호우로 집이 물에 잠길 걸 염려한 할머니의 강제적 압박으로 인해 우리는 다시 집으로 할머니의 하나 밖에 없는 소 금동이를 구출하러 갔는데 바로 그게 문제가 있었다. 이미 축사가 반쯤 잠겨 금동이가 구슬픈 울음을 내며 물위에 동동 떠있었던 것이다. 집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데 류인이가 밧줄이라도 구해오겠다며 어디론가 뛰어갔다. 하지만 그 사이 축사에 묶여있던 끈이 풀리면서 금동이가 물에 떠내려갈 위기에 처하자 우리 셋 중 유일하게 수영을 할 줄 아는 난 앞, 뒤 볼 것도 없이 물에 뛰어들었다. 캄캄한 어둠,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 가슴께에 올라오는 흙탕물. 다행이었던 것은 물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 고이기만 해서 걷기가 그나마 수월했다. 그리고 겨우 금동이에게 다가가 줄을 잡을 수 있었는데 그만 물속에서 발을 헛디뎌 물을 몽창 먹으면서 발란스를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순간 번쩍하며 정말 이대로 죽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드는데 내 팔을 잡고 물위로 쑤욱 들어 올려내는 어떤 강한 힘이 있었다. 땅위로 올라와 먹은 물을 겨우 토해내고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 보인 건 날 무섭게 내려다보고 있는 류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녀석의 얼굴이 얼마나 반갑던지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나와 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류인이가 날 안아들더니 뛰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기절한 내가 나중에 들으니 녀석은 날 엎고 그 빗길에서 2km를 달려 응급요원이 있는 곳까지 데리고 갔다고 한다. 덕분에 집에 돌아와서도 이틀정도 앓아눕긴 했지만 내가 눈떴을 때 침대 옆에서 앉은 채 자고 있는 류인이를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에 비하면 아픈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뭐랄까.. 별로 내색도 없고 좋아한다는 말도 못 들었지만 우쭐해질 만큼 가슴으로 전해지는 녀석의 마음에 한 가지 결심을 했었다. 절대.. 나중에라도 녀석이 내가 싫어서 떠나는 날이 온다고 해도 난 변하지 말아야겠다는 좀 유치한 생각 말이다. 물론.. 깨어난 류인이 녀석이 나의 부드러운 눈빛을 보며 명태눈깔 치우라는 발언을 해 결심이 5분만에 깨어진 건 비극이지만 말이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어쨌건 그 날 이후 류인이와 자는 것에 대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일말의 불안감 같은 게 사라져 버렸었다. 그렇게 보자면 선호의 여행 계획이 좀 효과가 있었던 걸까? 잠시 과거의 회상에 잠겨있는데 시끄러운 전자음이 내 생각을 깨트렸다. “여보세요.” 처음 보는 번호에 내가 조심스레 전화를 받자 곧 수화기 너머로 전혀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류인이랑 약속은 했어?” 난 슬쩍 던져놓은 강백호와 서태웅의 충격적인 동인지를 보며 병국이에게 답했다. “새끼 넌 그거 말고 딴 할말은 없냐?” “딴 거 뭐?” “슬램덩크라고 니가 준 만화책 말야.” 그러자 수화기 너머 방정맞은 녀석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크크크.. 순진한놈. 너 그거에 충격받은 거냐? 선호야, 이 자식 아까 내가 준거 보고 충격 받았단다.” 옆에서 조그맣게 ‘얼빵한 놈’이라는 선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내가 과연 이 통화를 계속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경민. 너 그거 보고 열심히 자세 연습하라고 준 나의 큰 뜻을 전혀 눈치 못 챈 거냐?” “전화 끊는다.” “잠깐만! 짜식.. 처녀같이 예민하게 굴긴. 그러지 말고 오늘 류인이한테 전화해서 거사를 치루란 말야, 이제 수능도 다 끝났겠다 도대체 뭐가...” 갑자기 병국이의 목소리가 없어진다 싶더니 곧이어 바톤을 이어받은 선호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경민, 이 경민.. 우리가 누누이 말했지만 류인이 그 자식은 의외로 너한테는 조심스러운 면이 있어서 니가 먼저 나서지 않는 이상은 둘이 합방하기는 글렀다니까? 아침에 내가 우리의 씨크릿 토킹 장소에서 너한테 준거 있지? 그거 가지고 가서 오늘 자~알, 성공적으로, 화끈하게 일을 치루란 말이다.” 합방? 너의 입방정을 조저주고 싶다만.. “시끄러워 임마.” “어허.. 이 자식 보게. 형님들이 뒤에서 서포터 해주면 넌 그냥 손 만 내밀어 받으면 되는 것을. 아니면 우리가 또 너 이쁘게 화장해서..” “야!” 난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릴 질렀고 녀석이 말한 화장이란 단어에 또 다른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 협박조로 덧붙였다. “씨발 니들 또 축제 때처럼 자는 나 데려다 화장시키면 의리고 뭐고 살인날 줄 알아.” “아.. 부끄럼 타긴. 야, 너 그때 얼마나 이뻤는데. 류인이 자식 놀래서 표정 굳었던 거 생각 안나?” 안 나긴.. 아직도 가끔 그때일이 꿈속에 나타나 가위에 눌린단 말이다. 10월 학교 축제 때 행사에 참여 안하는 3학년은 대부분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도 역시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졸려 정신없이 잠이 들었는데 세상에.. 깨어나 보니 텅 빈 교실에 날 의자에 묶어놓고 병국이와 선호 자식이 날 화장시키고 있는 미친짓을 벌이고 있었다. 그뿐이면 내가 이렇게 화를 내지도 않는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난 여자교복을 입고 있었고 나의 그 얼마 없던 자랑스런.. 그 귀한 다리 털이 모두 밀어져 있는 것이었다. 아.. 지금 생각해도 열이 뻗쳐오르는군. 그래놓고 잠에서 깬 내가 발광하는 사이 류인이를 교실에 밀어 넣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면서 잘해보라고 말하고 두 녀석은 나가버렸다. 정말로 굳어버린 류인이와 당황한 내가 순간 눈이 맞았고, 나에게 천천히 다가온 류인이가 내 끈을 풀어주며 부드럽게 안아주며 뜨거운 한낮을 보냈다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난 그때 퓨즈가 나간 상태였다. 눈앞에 류인이 녀석이 얼빠진 표정으로 있건 없건 나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이런 짓을 한 두 녀석을 처단해야 한다는 생각에 묶여있던 의자를 들어 괴력을 발휘해 엉거주춤 일어선 뒤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두 녀석을 쫒아 복도로 달려 나간 것이다. 당시 우리학교 축제는 별로 유명하지 않았었는데, 의자를 뒤에 메달고 두 남자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쫓아가는 한 여학생의 퍼포먼스로 인해 이 일대에 학교 축제를 널리 퍼트리는 일조를 한 게 나라는 건... 죽을 때까지 비밀이다. 다행이 그 여학생이 나라는 게 밝혀지지 않아 나중에 정신 차리고 안도를 했지만 덕분에 난 교실에서 멍하니 있던 류인이를 잊어버렸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 일 이후 날 피하던 류인이를 다시 원래대로 돌리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암튼 오늘 내가 준 준비물들을 잘 챙겨서 류인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바란다. 후후후..” 계속 들려오는 선호의 말에 정신을 차린 난 전화를 끊기 전 물었다. “근데 니들 어디야? 모르는 번호던데.” “미용실.” “거긴 왜?” “너 착한 병국이한테 얘기 못 들었냐? 나 오늘.. 흐흐흐흐....” 음침한 웃음소리와 착.한. 이라는 호칭이 어색한 병국이의 이름으로 보아 무언가 있나본데.. “305호 순이와 소개팅이 있으시다.” “아..” “뭐야? 그 실망스럽다는 어투는? 좀더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란 말이다!” “시끄러.” 수화기 너머 뭐라 선호가 소리치는 게 들렸지만 난 가차 없이 전화를 끊고는 다시 침대위에 앉았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쉬고 책가방을 들어올렸다. 오늘 아침 1교시에 수업도 안하고 모두 노는 분위기에서 선호가 날 조용히 개나리 화단 뒤로 불렀었다. 그리고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것 마냥 요란을 떨며 주위를 살피더니 검은 봉다리를 나에게 건냈다. 비닐이 구겨지며 시끄럽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건 진통제, 콘돔, 러브젤 그리고.. 호텔 무료 이용권. 이걸 받고 어이없어 하는 나에게 선호가 말했다. “진통제는 거사를 치루기 20분전에는 먹어야해. 효과가 좀 늦게 나타나니까. 그리고 급하더라고 콘돔은 꼭 끼고 하고, 어허 조용히 해봐. 제일 중요한 이것! 바로 별 5개짜리 초특급 호텔인 I호텔의 숙박권.. 은 아니고 바로 그 뒤 별 반쪽짜리 러브호텔의 숙박권이다. 씨바 이거 내가 형한테 뺏어올라고 얼마나 고생한줄 알아?” 뭐 이 녀석들의 지나친 간섭에 이제 포기할 때도 되었기에 이런 걸 준다고 해도 별로 놀라지는 않는다. 다만 어째서 내가 진통제를 먹어야 하냔 말이다! 그건 결국 내가 깔리란 소린데.. “아.. 젠장..” 난 벽에 머리를 기대며 손에 들린 진통제를 꽉 쥐었다. 선호와 병국이 말로는 비쥬얼적으로 봤을 때 내가 깔리는 게 당연하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이제 어떻게 남자끼리 섹스를 하는지도 잘 알고, 더불어 좀 전에 본 충격적인 슬램덩크 만화도 봐서 자세까지 눈으로 확인했으니 문제 될 건 없지만 그래도.. 겁이 난다는 게 문제겠지. 내 엉덩이 사이로 류인이의 그.. 그게 들어온다고? 으윽.. 난 절로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류인이 엉덩이에 손가락 넣고 애무하며 내걸 넣는다는 것도.. 아.. 난 역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일단 키스를 하면 정신이 없어 이런 고민 따위는 생각 안 날거란 걸 알지만 맨 정신인 상황에서 생각해보면.. 무섭다고. 하지만.. 두 녀석들 말대로 내가 수능 전까지는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말에 신체 접촉을 자제해온 류인이의 인내심을 생각하면 정말로 내가 뭔가를 해주고는 싶었다. 난 봉지 속에 러브젤과 콘돔 등을 도로 넣으며 마음을 굳히고 전화를 들어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가고 조금 있다 류인이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난 심호흡을 한번 한 후 입을 열었다. “나와라. I 호텔 근처에 있는.. 영화관 앞으로.” 얼굴에 와 닿는 11월의 바람은 벌써부터 감각을 못 느낄 만큼 차게 느껴졌다. 난 시계를 보며 약속시간에 좀 늦은걸 알고는 서둘러 극장 앞으로 뛰어가며 복잡한 머릿속을 잊어보려 노력했다. 어차피 나도 류인이와 자고 싶었던 것도 있으니 이렇게 초조해하는 건 우습지만 그래도 남잔데.. 난 왜 이렇게 떨리는 건지. 이러다 호텔도 못가보고 기절 하는 거 아냐? 선호의 선물인 검은 봉다리가 들어있는 사선으로 길게 메어진 가방을 등 뒤로 넘기며 난 빠르게 에스컬레이터를 뛰어내려 극장 앞으로 향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북적이는 극장 앞에 서성이며 두리번거렸지만 류인이의 모습이 바로 보이지는 않았다. 10분정도 늦어 뛰어오는 바람에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느라 난 가슴에 손을 올리고 상체를 약간 숙이며 서있는데 갑자기 내 어깨위로 올려지는 손이 느껴졌다. “뛰어왔냐?”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난 얼른 고개를 돌렸다. “미안. 넌 언제...” 언제 온거냐고 물어야 했지만 난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해 나머지 말을 내뱉지 못했다. 조금 추운 날씨에 나도 나올 때 허벅지까지 오는 털모자 달린 봄버를 입고 오긴 했지만 류인이는 검은색 긴 롱코트를 입고 있었다. 좀 타이트하게 몸매를 들어내는 긴 코트는 목 위로 세워지는, 차이니스칼라 보다는 조금 더 긴 특이한 모양으로 옷의 여밈은 단추가 없는 대신 칼라에서부터 아래까지 중간 중간 두개가 쌍으로 된 검은색 가죽이 달려있어 반대편의 반원의 쇠고리에 연결하게 하는 형식이었다. 열려진 코트 안에는 깊게 패인 단순한 디자인의 V넥 검은 니트티와 검은 바지가 보였다. 온통 검은색으로 입은 녀석의 모습은 그야말로.. 모델 같았다. 교복만 입던 녀석의 모습에 익숙하던 내가 넋을 잃을 만큼 바라 본데에는 평소에 내리던 앞머리를 모두 뒤로 넘겨 외모가 한층 더 샤프해 보이는 것도 한 몫 했지만 말이다. 아니 학교 끝나고 언제 이렇게 쫙 빼입은 거지? 라는 의문은 류인이를 넋 나간 듯이 바라보는 나 이외의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금세 잊혀졌다. 가뜩이나 큰 키에 사람들의 이목을 받는 녀석이 옷마저 멋들어지게 입고 있으니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고 있었다. “뭐 볼까?” “어? 아..” 정신을 차린 내가 겨우 녀석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대답하자 날 힐끔 보던 녀석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살짝 끌어당겼다. 그리고 앞으로 헤쳐 나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 이쁘다.” 뭐라고? 난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고개를 홱 들어 올려다봤지만 녀석은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다. 남자인 나보고 이쁘다니.. 당장 화내야 하지만... 왜 이렇게 얼굴이 화끈거리지? 희미한 불이 켜져 있는 극장 안은 언제 들어와도 조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영화시작전이라 이곳저곳 소란스럽긴 하지만 영화 표에 나와 있는 좌석을 찾아 천천히 폭넓은 계단을 올라가며 들리는 목소리들은 확실히 평소보다는 한 단계 낮은 소리들이었다. 앞서가던 류인이가 걸음을 멈춰서며 돌아서자 나도 바로 아래에서 걸음을 멈췄다. 예매를 해놓은 게 아니어서 자리가 계단 끝의 두 자리 라는 게 불만이긴 했지만 그래도 표를 구한 게 어딘가. 나보고 먼저 들어가라는 듯 기다리는 류인이를 지나쳐 난 의자를 내리고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그런데 언뜻 앉으면서 보니 내 바로 앞에 앉은 커플이 키스를 할 듯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게 아닌가. 아직 영화가 시작된 것도 아닌데 뭐하는 뻘짓이지 란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는데 나의 시선을 알아차린 건지 옆에 앉으려던 류인이 역시 앞의 꼴불견 커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도로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선 녀석에게 놀라 내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자 녀석이 ‘잠깐만’이라며 작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도로 계단을 내려가는 류인이 멀뚱히 보다 난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류인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살짝 손을 떨고 있었다. 혹시 녀석은 눈치 챘을까? 내가 오늘 굉장히 긴장하고 있다는 걸.. 여태까지는 무언가 오래 동안 망설이던 일을 결정을 하면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는 적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선호, 병국이의 소원풀이가 아니라 나 스스로 류인이와 무언가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오늘은 기필코 녀석과 자리라 마음먹은 건데.. 어째 망설이던 때보다 더 마음이 흥분되고 떨리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면 4시 정도 되니까 일단 밥을 먼저 먹자고 한 다음에 미리 지리를 숙지해 놓은 에... 그... 러브호텔로.. “아~ 열라 깜깜해. 씨발 불 좀 켜놓던가..” 나의 진지한 고민을 한순간에 날려버리는 독특한 음색 덕분에 난 의자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경악스런 눈으로 바로 옆 계단을 욕과 함께 올라오고 있는 한 남자를 바라봐야 했다. 아..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절대 못 알아 볼 이 인간이 어째서 여기에.. “어? 이 경민!!” 흡사 옆에 도플갱어라도 있어 둘이 동시에 소리치는 것처럼 이중으로 갈라지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외치는 민섭이를 보며 난 경민이가 아닌 척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의 세계 유일의 목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인상을 쓰며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다. ‘뭐야, 이거 공포영화야?’ 라며 잠이 들깬 사람들의 목소리로 간간히 들리는 말에 의하면 모두들 역시 민섭이의 목소리를 반기는 것 같지는 않구나. “목소리 좀 낮춰라.” 내가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건만 어두워서 잘 안보인건지 녀석은 더욱더 반갑다는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한발자국 더 다가왔다. “이야~ 너 안경 안 썼네? ...옷도.. 되게 귀엽다.” 의자에 기대느라 털모자에 반쯤 묻힌 나의 모습을 보며 한 말이라면 당장에 이 옷을 벗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궁금해 하는 주위의 시선에 더욱더 그 귀엽다는 대상을 누군지 확인시켜 줄 것 같아 몸을 더욱 낮추며 녀석에게 소곤거렸다. “그러는 넌 오늘 끔찍하다.” “크큭... 오늘 형님의 멋지구리한 모습에 질투하는 거냐?” 제발.. 웃지만 말아줄래? 몇몇 사람들이 아까운 콜라를 뿜어내는 구나 민섭아. “그래. 근데 너도 영화 보러 온 거 아니야?” 빨리 대화를 끝내야 겠다는 생각에 영화를 보러왔으면 얼른 자리로 돌아가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물었 것만 그 뉘앙스를 못 맡았는지 녀석은 득의만만한 미소를 입가에 가득 지으며 말했다. “크큭크크... 오늘 이형님은 말이야 어여쁘신 여자친구와..” “꺼져. 김 인문.” “으엑!” 갑작스레 들려온 류인이의 목소리에 민섭이는 정말 놀랬는지 자지러지게 놀래며 요란한 오버액션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하.. 한류인 너도.. 있었냐?” 정말 언제 온 건지 류인이가 민섭이 바로 뒤에 서있었다. 민섭이의 질문에 류인이가 대답대신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자 민섭이는 서둘러 나에게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그러고 보면 민섭이 자식 은근히 류인이를 무서워하는 거 같지? 사라지는 민섭이의 뒷모습을 보다 옆에 털썩 주저앉은 류인이를 보니 두 손에 팝콘과 콜라가 들려져 있었다. 아.. 이걸 사러 간거였나? 그러고 보니 바로 앞의 꼴불견 커플이 팝콘과 콜라를 먹고 마시며 놀고 있었다. 혹시.. 내가 앞을 쳐다 본 게 콜라와 팝콘 때문이라 생각한건가? 갑자기 냉큼 콜라와 팝콘을 사온 류인이의 행동이 귀여워져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녀석의 손에서 팝콘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류인이가 중얼거렸다. “콜라 값은 니가 내.” 제길 귀엽긴 쥐뿔.. “복선도 없이 결말이 너무 엉뚱하다.” “아.. 그렇지..” 극장을 나오며 영화에 대해 말하는 류인이의 말에 나도 대꾸를 해줘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이유는 영화를 보지 않았으니까. 영화 내내 끝나고 나와 어떻게 류인이에게 말하고 호텔로 향하나란 고민 때문에 영화의 내용은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솔직히 아직 해도 안 졌는데 분위기를 잡는다는 게.. 아무래도 밤이 더 낫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고.. 하지만 밤이라면 둘 다 외박을 해야 할텐데 그러면 그거 나름대로 서로 다음날 일어나서 뻘줌 할 것 같고.. “안가?” “어?” 생각에서 깨어나 고개를 드니 몇 걸음 앞에서 뒤돌아보며 류인이가 서있었다. 아마 나도 모르게 고민을 하느라 걸음을 멈췄던 것 같다. “너 오늘 좀 이상하다.” “내.. 내가?!!” 라고 이렇게 큰소리로 말하면... 녀석의 말에 동조하는 게 되지 않냐 이 바보 이경민. 으윽.. 후회해 봐도 소용없지만 이미 빨개진 얼굴로 류인이를 당황스럽게 쳐다보자 녀석이 다가왔다.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없지만 아마.. 앞으로 있을 거야. “아니.. 밥 먹으러 갈래?” 류인이의 팔을 잡고 앞으로 나가는데 옆에서 녀석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은 오늘 밥 먹고 말야..” 녀석 답지 않게 약간 주저하는 듯 말하는 목소리에 난 살짝 눈을 크게 뜨고 류인이를 올려다봤다. 오늘 밥 먹고.. 뭐? 설마 너도 오늘 나와 같은 생각으로.. 난 침을 꿀꺽 삼키며 진지하게 날 내려다보고 있는 류인이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러자 눈 위로 늘어져 있는 내 앞머리에 손을 올려 살짝 위로 올려주더니 천천히 입을 올렸다. “밥 먹고 시간 괜찮으면 같이..” 시간? 당연히 괜찮지! 그래 같이.. “니들 아직 안 갔냐?” 1000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목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푹 숙여지는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무슨 복이 있다고 타이밍의 신에게 저주를 받은 인생이 아니더냐. 류인이 입에서 먼저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그러는 너는 왜 안가고..“ 민섭이에게 퉁명스럽게 대꾸를 해주려다가 난 민섭이 옆에 서서 나와 류인이를 똘망똘망하게 쳐다보고 있는 여자애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 아까 여자친구랑 같이 왔다고 했지. “야, 인사해라 내 여자친구..” “시끄러 김 인문. 니 갈 길이나 가.” 류인이 역시 화가 났는지 평소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자 민섭이의 얼굴이 금세 붉어지며 뭐라 한마디 할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 눈치 없는 한류인. 웬만해서는 여자친구도 있는데 김인문이란 별명은 말하지 말지.. 난 이러다 싸움 나는 거 아닌가 싶어 류인이의 팔을 잡고 뒤로 끌어당기며 민섭이에게 인사했다. “우리 먼저 가볼게. 다음에 보자.” 그리고 뒤돌아서려는데 갑자기 민섭이의 여자친구가 날 가리키며 물었다. “저.. 이름이 이 경민 아니야?” “어? 너 경민이 어떻게 알아?” 나도 반쯤 돌아선 상태로 고개를 돌리자 민섭이의 여자친구가 날 보고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파트에서 몇 번 봤거든. 옆집 사는 애 집에 놀러 오는 거 본적 있어.” 라니... 잠깐.. 난 무언가 불길한 기분에 휩싸여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그 옆집 산다는 애 이름이..” “응. 임병국이라고 해.” 윽! 내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류인이 내 팔을 잡으며 물어왔다. “왜 그래?” 설마.. 305호 순이는 아니겠지란 나의 희망은.. “어? 그럼 오늘 너보고 잠깐 보자고한 옆집애가 바로 임 병국 자식이란 말야? 우리 순이?” 깨져버렸구나.. 제기랄.. 분명히 선호는 소개팅으로 알고 있던데 이게 무슨.. 순이란 이름에 뭔가 생각난 듯 한 류인이가 얼어있는 나와 순이를 번갈아 보더니 살짝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305호 순이?” “어머? 나 305호 맞는데.” 신기 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이에게 한발자국 다가선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오늘 병국이가 아무 말 안 했어? 만나자고 한거에 대해서..” “응. 그냥 시간 있으면 잠깐 보자고만 하던데. 내가 오늘 이 극장에서 약속 있다니까 잠깐 이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보면 된다고. 그러고 보니 약속 시간 다 됐네. 민섭아 우리 얼른 가자~” “아 그래 귀염둥이. 병국이 자식 만나면 우리 순이한테 잘해주라고 내가 한마디 해야겠군. 크크큭..” “어머! 넌 정말 목소리가 매력적이야.” 이해할 수 없는 충격적인 말을 남기고 떠나는 두 사람을(정확히 순이!) 멍하니 지켜보다 난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서둘러 버튼을 누르는데 뒤늦게 충격에서 깨어 난건지 류인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씨발.. 순이라는 애 귀에 문제 있는 거 아냐?” “보청기를 두고 왔나보다... 어? 야, 임병국!” 전화기 너머 병국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난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너 지금 어디야!” “새끼! 귀 뚫리겠다. 왜 소릴 질러!” “너 솔직히 말해봐. 순이라는 애한테 오늘 만나는 게 소개팅이라고 제대로 설명했어?” “어? 아.. 아니 그게.. 아무래도 갑자기 그렇게 말하면 부담이 될 것도 같고..” “야, 지금 옆에 선호 있지? 빨리 선호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 순이한테 전화해서 당장 약속 취소하고.” “왜?” “젠장.. 너 진짜 아무것도 몰라?” “뭘 모르는데?” “일단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어쨌든 얼른 거기서 피하... 어? 야! 병국아!” 갑자기 끊어진 전화에 내가 당황해 소리를 지르자 류인이가 내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갔다. “무슨 일이야?” “아.. 그게 말이지..” 전화가 끊어진 이후로 계속 통화가 안 되는 탓에 난 지금 열심히 민섭이네 커플보다 먼저 도착하기위해 패밀리 레스토랑을 향해 달려 가야했다. 내 설명을 들은 후 병신들이라며 그냥 내벼려 두라고 류인이는 말했지만 학교 끝나고 미용실에서 꽃단장한 선호가 만약 민섭이를 본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의외로 마음약한 녀석인데 말야.. 투덜거리면서도 용케 날 따라온 류인이가 자꾸만 시계를 보길래 패밀리 레스토랑의 문을 열고 들어가며 내가 물었다. “뭐 약속 있어?” 그러자 대답은 안하고 날 잠깐 보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오늘 말야..” “어! 저기 있다.” 하지만 선호와 병국이를 발견한 난 류인이의 말을 뒤로하고 뛰어갔다. “야! 니들 빨리 일어나.” “어? 너 여기 웬일이야?”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무스로 정리하고 어디서 빌려 온 건지 시골에서 선보러 올라온 노총각마냥 꽉 끼는 양복까지 입은 선호가 날 보고는 놀란 듯 물었다. “그건 나중에 말하고 나가자.” 난 선호의 팔을 잡고 일으키며 벙찐 얼굴로 있는 병국이에게 말했다. “순이 걔 남자친구 있어.” “에엑!! 누구!!” 못 믿겠다는 듯 병국이가 소릴 치자 언제 왔는지 내 뒤에서 류인이가 이름을 말했다. “김 인문.” 류인아 제발.. 민섭이의 본명을 한번이라도 말해보렴. 남자는 세상에 태어나서 딱 세 번 운다고 한다.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여자한테 차였을 때. 그래서 여기 얼굴을 보기도 전에 차인 한 남자가 울고 있었다. “흑흑... 씨발..” 아직 이른 저녁이라 텅 빈 호프집 안은 딱 두 테이블 만 차 있었는데 우리가 그 중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탁자 위에 나뒹구는 여러 병의 맥주병들은 모두 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흑... 야! 도대체 내가 김 인문 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 어? 얼굴이 딸려, 몸매가 안 좋아 그렇다고 성격이 나빠!” 물론 셋 다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래도 친구라 부인은 못하고 고개만 살짝 돌렸다. 하지만 자신의 죄는 생각도 못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있던 병국이가 예의 엄지와 검지를 벌려 턱에 가져 다 대며 기어이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민섭이 자식이.. 얼굴은 꽤나 잘났지.” “뭐? 그 자식이 나보다 잘났다고?!!” 버럭 화를 내는 선호를 보더니 자신의 상황을 깨달은 듯 병국이가 답했다. “응!” “씨발! 니가 그러고도 친구야?” “어허 장선호. 진정한 친구란 원래 고깝게 들리더라도 진실만을 말해주는..아얏!” “야, 이경민 니가 말해봐. 정말 민섭이 자식이 나보다 낫단 말야?” 라고 나에게 묻는다면.. 난 선호에게 손도끼로 정수리를 맞아 머리를 움켜쥐고 있는 병국이를 보며 심각하게 답했다. “확실히.. 너... 보단 민섭이가 잘났지.” “우어어~~” 동물 같은 괴성을 지르며 무스로 딱딱해진 머리를 쥐어뜯는 선호를 보니 항상 진실만을 얘기하는 내 입이 조금 원망스럽진 않고 물론 자랑스러웠다. 역시 친구란 진실을 얘기해주는.. “야! 그만 마셔!” 갑자기 맥주병을 입 안으로 들이붓는 선호의 과격한 행동에 놀란 내가 벌떡 일어서 말리자 선호가 내 손을 뿌리쳤다. “이거 놔! 나 오늘 술 먹고 뻗을 꺼야!” 이러다 이 녀석 정말 일 치르겠다는 생각에 난 할 수 없이 비극적인 사실을 말해주기로 작정했다. “진정하고 내말 들어봐.” “씨발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순이가 민섭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러자 머리를 문지르던 병국이도 병나발을 불던 선호도 나를 바라보았다. “....목소리에 반해서야.” “....” “....” 잠시 침묵만이 시끄러웠던 테이블 위를 감돌았고 나의 충격적인 발언에 얼어있던 두 사람이 반응을 하기 시작한건 한참 후였다. “농담이지?” 병국이가 물었고 난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진짜냐?” 선호가 물었고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약 1분간 내가 던진 충격적인 사실을 받아들이느라 두 녀석이 입을 다물었고 잠시 후 언제 그랬냐는 듯 울음을 뚝 그친 선호가 메뉴판을 뒤적이며 말했다. “야, 밥이나 시켜 먹자.”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했던 병국이가 선호의 말에 표정을 바꾸며 금세 동참했다. “난 김치 볶음밥.” 한순간에 모든 걸 잊고 훌훌 털어버린 녀석들이 한심해 잠시 쳐다보다 난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거기 스파게티 있냐?” 아까부터 선호의 쇼를 경악스럽다는 눈으로 관람하던 종업원이 와서 잠시 우리를 본 후 주문을 받아가자 꽉 끼는 마의를 벗어던진 선호가 물었다. “류인이는 어디 간거야?” 아.. 그러고 보니, 여기 들어오자마자 전화를 받고 나갔는데.. 선호 때문에 정신이 없어 어딜 가는지 물어보지도 못했다. “글쎄. 누구 전화 받고 나갔는데 바로 온다고 했어.” “뭐? 어디 간지도 모른단 말야? 야 야.. 도대체 내가 그렇게 모든 베이스를 깔아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거사를 못 치뤘다는 게 말이 되냐? 어?” 선호 니가 정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건 다 너 때문이라는 걸 상기시켜 주고 싶은데 말야. 그래도 오늘 먼지만한 마음의 상처를 입은 녀석이었기에 난 잠시 야리는 걸로 끝내고 얼굴을 돌렸는데 병국이의 표정이 이상했다. “병국. 너 어딜 그렇게 노려보는 거야?” 난 맞은편 선호 옆에 앉은 병국이가 내 뒤쪽을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보는걸 알고는 물었고 선호도 궁금했는지 병국이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리고 있었다. “저 자식들.. 자꾸 아까부터 우리보고 웃고 있어.” 그 말에 난 고개를 홱 돌렸고 우리 바로 한 테이블 건너에 있는 두 명의 우리 또래로 보이는 양아치들이 비웃는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자기들 끼리 속삭이고 있었다. “뭐야, 저 새끼들.” 선호도 기분 나쁜지 표정을 굳히며 앞쪽을 노려보았다. 물론 나도 기분이 나빴지만 오늘 안 좋은 일도 있었고 해서 그냥 넘어가자는 의미로 선호와 병국이의 팔을 툭툭 치며 부드럽게 말했다. “무시해. 할일 없어서 그냥 시비거는 놈들이니까 상관하지 말..” 하지만 난 말을 다 마칠 수가 없었다. 내 귀에까지 선명하게 들리도록 뒤에 앉은 양아치 새끼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크크.. 존나 병신들..” “씨발.” 선호가 크게 의자가 밀리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고 병국이 역시 열이 받은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초저녁부터 저 자식들이 감기약 과다복용으로 맛이 갔나란 생각을 하며 나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서 선호의 옆으로 갔다. “니들 다시 말해봐.” 내가 잡을 세도 없이 녀석들에게 다가간 선호가 악 다문 이 사이로 물었고, 노랗게 머리를 물들인 한 놈이 선호를 올려다보며 얘기했다. “병.신.들.이라고 했다. 근데 넌 다 짰냐? 좀 전까지 존나 추하게 울더만.. 큭..” 노랑머리의 말에 팔에 핏대가 서도록 주먹을 꽉 쥔 선호가 두 녀석을 매섭게 노려보고는 이빨 사이로 내뱉었다. “개새끼들... 이제부터 니들이 존나 추하게 울도록 만들어 줄까?” 그리고는 녀석들의 탁자 위를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평소 시비가 붙더라도 우리는 잘 싸우는 편이 아니다. 주먹을 쓰며 싸울 때가 있다면 지금처럼 정말 뚜껑 열려 도저히 참을 수없을 경우는 모두의 예상대로 절대 아니고, 상대방의 쪽수가 우리보다 적을 경우만 싸움에 임한다는 신념의 소유자들이다. 물론.. 이길 확률도 99.9%일 때 만 몸을 움직인다는 건 필수겠지. 우리의 역대 시비싸움이 무패를 달리는 비밀은 여기에 있다고나 할까. 이번에도 역시 좀 비리하게 생긴 두 녀석의 외모에 선호가 투지를 불태우는 건 아무래도 뒤에 버티고 있는 병국이와 나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런데 가끔, 아주 가끔 확률 0.1%의 개 같은 경우가 발생할 때가 있는데 바로.. 녀석들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우리 뒤를 가리키는 지금 같은 때이다. “뭐야?” 양아치 두 놈의 손가락질에 화를 내며 선호가 고개를 돌렸고, 나와 병국이 역시 저 자식들이 뭘 믿고 그러나 싶어 고개를 돌렸는데... 험악한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걸어오시는 다섯 분의 양아치님들이 계셨다. 설마 앞의 두 놈과 같은 일행은 아니겠지란 0.1%의 불안함은... “야, 이 세 놈이 우리한테 시비 거는데 어쩔까?” 노랑머리의 말에 의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젠장할.. 정말 혀끝까지 차오르는 욕을 겨우 삼키며 난 슬쩍 호프집의 뒷문이 어디 있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뒷문은 보이지 않고 정문은 멀기만 하구나. 옆을 보니 선호와 병국이 표정도 완전 좆 됐다는 표정으로 나름대로 머리들을 굴리는 것 같은데 굴리지만 말고 행동을 좀 해볼래? 양아치 군단이 바로 눈앞까지 왔지 않느냐! “좆만한 것들이.. ” 대장인 듯 보이는 콧수염을 살짝 기른 20대 중반의 오리털 잠바가 우리가 앉았던 테이블을 곁 눈길로 보더니 피식 웃으며 뒷말을 내뱉었다. “공부는 안하고 술은 처먹고 난리야 어? 먹었으면 곱게 집에나 가 엄마 쭈쭈나 빨 것이지 어디서 시비를..” 꽤나 자존심 상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앞으로 나설 뻔했지만 불행히도 이길 확률이 99.8%로 예측되어 분하지만 자중해야만 했다. 아깝다! 0.1%만 확률이 높았어도 모두 갈아엎는 건데란 쓸데없는 생각으로 혼자 고민 하는 와중 옆에서 선호와 병국이가 모종의 시선을 나누는 게 목격됐다. 뭐지? 난 여전히 설교를 하고 있는 오리털 잠바에게서 시선을 돌려 두 녀석을 쳐다보는데 모종의 의논은 끝난건지 바로 옆에 있던 선호가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대며 속삭였다. “미안하다.” 미안? 뭐가? 라는 물음도 잠시 갑자기 내 몸이 앞으로 쏠린다 싶더니 뒤에서 미는 강력한 힘에 난 오리털 잠바의 품안으로 순전히 타의에 의해 뛰어들어야 했다. “으앗..” 입에서 큰소리가 나오고 앞으로 밀리며 균형을 잡으려다 난 오히려 스텝이 엉켜 오리털 잠바의 배를 잡고 늘어지는 참극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그리고 나에게 뱃살이 잡힌 게 창피했는지 오리털 잠바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다정히 외쳤다. “씹쐑! 저리 안 비켜!” 덧붙여 달라붙은 날 0.1초 만에 내팽겨 치는 신속함까지 보인 오리털 잠바 덕분에 이번엔 졸지에 그의 바지가랑이를 붙들고 바닥에 늘어진 심순애 포즈가 되고야 말았다. 다리를 들어올리며 날 떨쳐내려는 그의 애절한 몸부림 덕분에 완전히 바닥과 친분을 쌓는 와중 난 나를 민 놈이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짓고 있는 선호와 병국이를 보고야 말았다. 장선호.. 그래 니가 밀었단 말이지? 갑작스레 치밀어 오르는 화에 벌떡 일어서서 응징을 가하려 하는데 갑자기 선호가 조금 전의 음흉한 미소는 지우고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바뀌더니 아주 큰 소리로, 문 앞까지 들리게 소리쳤다. “어머! 경민아! 니가 저 양.아.치. 들에게 맞아서 바닥에 쓰.러.지.다.니!!” 그리고는 가식적인 포즈가 역력한 액션이 큰 동작으로 쓰러져 있는 날 부축하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 “경민아!! 아무리 아파도 기.절.하면 안돼!!” 이놈은 바카스 과다복용인가 라는 생각밖에 할 수 없는 녀석의 일인극에 나와 양아치들 모두는 할말을 잃고 선호를 바라보아야 했다. 그리고 오리털 잠바가 겨우 한마디를 던졌다. “니 미칬나?” 어이가 없는지 사투리가 튀어나온 오리털의 한마디는 그야말로 모든 이들의 궁금증을 대변하는 정곡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선호 녀석은 대답대신 손가락을 길게 뻗으며 다른 말을 했다. “걱정 마 경민! 저기 류.인.이.가 왔다!” 에? 난 그제서야 고개를 올려 양아치들 위에 머리하나 불쑥 솟은 류인이를 알아차렸다. 양아치들도 고개를 돌렸다가 싸늘한 표정으로 서있는 류인이를 보고 흠칫 놀랐는지 한발자국씩 뒤로 물러서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류인이는 그런 양아치들은 안중에도 없는지 나만 똑바로 내려다 보다 나직이 한마디 내뱉었다. “씨발” 역시 그 말이 나올 줄 알았지. 그런데 평소의 씨발과는 좀 다른 감정이입이 많이 되어 보이는 말투에 순식간에 양아치들 무리가 반으로 갈라져 류인이와 나 사이에 길을 터주었다. 덕분에 바닥에 누워 선호의 부축을 받고 있는 비련의 여주인공 포즈가 적나라하게 노출된 나 역시 한마디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기랄..” 그리고 간사하게 머리를 굴린 게 역력히 들어 난 선호를 노려봤다. 니가 날 오리털에게 민 이유가 이거였단 말이지? 어? 넌 죽었어란 심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류인이의 목소리가 날 멈칫하게 했다. “어떤 새끼야.” 여전히 날 보며 묻는 것 같은데.. 세상에 난 류인이가 정말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걸 알아차렸다.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류인이의 지금 냉막한 표정은 과거 쇠파이프를 들고 피를 묻히며 싸우던 살벌한 모습을 떠올리게 해 난 순간적으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서둘러 표정을 바꾸며 녀석에게 대꾸했다. “아니야. 이건 누가 날 때린 게 아..” “어떤 새끼? 이 좆만이가.. 내가 그랬다. 이 씹새야.” 화해와 안정의 분위기로 이끌려는 나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튀어나온 류인이가 못마땅했는지 오리털이 자기가 하지도 않은 짓을 했다며 고백하고 있었다. 덕분에 선호와 병국이만 얼굴을 돌리며 터져 나오려는 미소를 감추느라 고생해야만 했다. 다른 양아치들은 류인이의 범상치 않은 분위기에 잠시 주춤해 있는 것 같은데 가만히만 있으면 오늘 하루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것을 왜 오리털은 저런 헛소리를 하는 걸까? 난 몰려오는 두통에 잠시 머리에 한 손을 가져 다 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선호가 두 팔로 날 감싸 안으며 외쳤다. “경민! 많이 아프냐?” 졸지에 나마저 선호의 쇼에 동참한 꼴이 되어버린 난 어이가 없어 다시 한번 선호를 노려보는데 류인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떨.어.져. 장선호.” 살벌한 녀석의 말에 선호는 흠칫 놀라며 두 손을 들고 물러섰고 난 녀석을 올려다보며 다시 한번 설명하려고 했다. “류인아. 지금 이건 말이야..” 하지만 류인이는 이미 나에게서 눈을 돌려 오리털을 쳐다보고 있었다. “너 김흥국. 죽고 싶어?” “뭐? 씨방새끼! 니가 지금 나보고 한 소리냐?” 류인이의 발언이 상당히 마음에 상처가 됐는지 오리털이 동공확대 증상을 보이며 눈을 부라렸지만 반대로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류인이에게 그 위협이 먹힌 것 같지는 않았다. “경민이 넌 나가있어.” 오리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류인이가 말했고, 그의 말대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한건 역시 선호와 병국이었다. 류인이의 말을 시작으로 정신을 차린 양아치들이(쪽수가 많다든걸 깨달은 듯 했다) 녀석의 주변으로 몰려가기 시작하자 난 얼른 말려야 된다는 생각에 일으킨 몸으로 녀석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런데 뒤에서 날 붙잡는 손이 있었으니.. “가긴 어딜 가. 보고만 있어.” 선호나 병국이 인줄만 알고 뒤돌아보며 한마디 해주려던 나는 뜻밖의 인물에 나오려던 질책대신 다른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에?” 놀라 눈만 크게 뜬 내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내 팔을 잡고 있는, 정확히 말하자면 옷의 라인 전부에 밍크로 추정되는 빨간 털이 달린 니트 소제의 겉옷 입고 있는 류민이 형이 이었다. “형 언제 여기에..” 라는 질문은 좀 떨어진 옆에 내빼던 선호와 병국이의 발걸음을 얼어붙게 만든 류진이 형이 보여 말끝이 흐려졌다. 어? 류진이 형은 어떻게 같이 있는 거지? 내 시선이 류진이 형에게 가있는걸 알자 류민형이 입에 문 담배를 빙글 돌리며 말해주었다. “저 녀석 오늘 전역했다.” “아..” 축하해요 형이라고 말해주어야 하는데 전역 첫날부터 검은 긴머리 가발을 둘러쓰고 예의 그 라이더의 유니폼이라 할 수 있는 가죽옷을 입은 모습이... 불길한 드라이브를 떠오르게 만들어 입이 굳어버렸다. 나와 같은 두려움을 느낀 건지 특히 병국이는 평소에 그렇게 원하던 피부 화이트닝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 바로 뒤에서 양아치들의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난 잠시 류인이를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류인이 한명을 7명이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키 크고 오늘따라 멋져보이던 녀석은 가히 군계일학이었다. 아니 이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하지만 앞으로 나아갈려니 아직까지 내 팔을 붙들고 있는 류민형 때문에 난 형에게 부탁했다. “류인이 말려야져 형.” “뭐 하러?” 정말 왜라는 표정으로 되묻는 형을 보니 싸움의 백해무익과 평화로운 해결방법의 이점들을 설명해봤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도대체 동생이 지금 싸움판에 끼어들게 생겼는데 말리지는 못할망정.. “새끼 빨리빨리 해치울 것이지.” 라며 부추기는구나. 하긴 형제가 어디 가겠냐만.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처음 류인이의 위험한 오라 방출에 쫄은 것 그대로 조용히 나갔으면 문제없었을 양아치들이 류인이 한명을 상대로 싸우겠다는 거 까지는 그래도 이해하려했다. 하지만 쪽수의 월등한 우위에 잠시 이성을 잃었는지 녀석들 중 하나가 부추기는 류민형의 말을 듣고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리고 만 것이다. “씨발, 존나 옷도 할머니 밤무대 내복 같은걸 입고 와서는 어디서 지랄이야!” 순간 얼어버린 건 나만이 아니었다. 선호와 병국이도 류진이 형마저 약간 놀란 듯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천천히 담배를 바닥에 던지는 류민이 형을 바라보았다. 아.. 진짜 큰일 났군. 유난히 패션에 민감한 형을 건드리는 말을 하다니.. 넌 죽었다고 봐. 호프집 알바생은 아예 처음 내가 바닥에 엎어졌을 때부터 도망갔는지 안보이더니 가게 문을 닫은 건지 손님도 안 들어오는 이 조용한 가게에서 류인이 만큼 화가 난 형이 날 옆으로 밀치고 앞으로 나서며 중얼거렸다. “막내야. 방금 말한 놈은 건드리지 마라.” 형의 말에 류인이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게 보였고, 난 암울한 미래를 차마 보지 못해 눈을 감아 버렸다. 정말 최악의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말려야할 류민이 형까지 나서다니 이러다 류진이 형까지 끼어드는 거 아니야 라는 불길한 생각은.. “이 미친 사이코 새끼들. 우리가 무슨 땅 따먹긴 줄 알아? 니들끼리 알아서 나눠먹게? 씨발 어디 저기 가발 쓴 미친년도 합세하지 그러냐? 어?” 상황파악 못하는 이름 없는 양아치의 발언으로 가발 쓴 미친년이 진짜 합세하고야 마는 비극이 현실로 다가왔다. “나가있으라니까.” 무뚝뚝하게 내뱉은 류인이의 말이었지만 지금 삼형제의 활약에 놀라 벙쩌 있는 나를 걱정해 하는 말이라는 걸 잘 안다. 어떻게 싸움 시작한지 5분도 안돼서 저렇게 모두들 죽이 되도록 만들 수 있는 거지? 게다가 정신을 잃고 있는 오리털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카운터에 맡기며 수리비라고 건네주는 류민이 형의 저 여유로움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갑자기 땀에 젖어 약간 촉촉한 손이 내 이마에 살짝 와 닿는 게 느껴졌다. 눈을 드니 탁자위에 앉아있는 내 앞에 서서 천천히 긴 내 앞머리를 넘기는 류인이가 보였다. “아까 나한테..” 갑자기 나온 말에 약간 허스키해진 내 음성을 류인이가 조용히 듣고 있었다. “하려고 했던 말이 오늘.. 류진이 형하고 같이 보자는 거였어?” 착하게도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류인이의 모습이 약간 서운하게 느낀 건 아마 낮부터 혼자 계획했던 일이 오늘은 물 건너 갔구나란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의 시선이 저절로 내 가방으로 향하는걸 보니 말이다. 서운하다고? 난 다시 류인이을 올려다보았다. 항상 녀석과 진도 나가는 걸 주저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녀석과 단 둘이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언제부터 난 이렇게 두려움 없이 원하게 된 걸까.. 너를. “왜 웃어?” 아.. 내가 웃고 있었나? 갑자기 낮 동안의 긴장감이 녀석과 있고 싶다는 욕망으로 대체된 지금 내가 어떻게 안 웃을 수가 있겠어. “그냥.” 다시 한번 씨익 웃어주고 녀석을 스쳐 선호와 병국이에게 향하면서 약간은 경고조로 말해주었다. “수능 끝난지.. 3일이나 지났다.” 흘낏 옆을 보니 눈이 살짝 커지는 류인이가 보였다. 알아들었을까? 미안하지만 난 생각보다 이기적이라 먼저 손을 내미는 것 보다 역시 니가 날 원한다고 말하는 게 듣고 싶다고. 못됐다고 욕해도 상관없다. 이렇게 나답지 않게 부리는 어리광 기분 좋게 받아줄 꺼 라는 거 알거든. 아.. 정말 못 된 건가? 자.. 그럼 이제 남은 건 처절한 응징뿐이로군. 장 선호군. 병국이와 선호에게 다가가면서 슬쩍 류진이 형의 위치를 파악한 나는 선호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왜 그래?” 하지만 나의 아름다운 미소를 경계하는 듯 녀석은 상체를 뒤로 빼며 못 볼꼴을 봤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미안하지만 말야.. 아까 너 때문에 바닥에 엎어져 꼴사나운 포즈를 취했던 건 꼭 되돌려 주고 싶거든. 바로 이렇게. 난 선호에게 몇 걸음 만에 다가가 녀석의 어깨에 탁 손을 얹었다. 그리고 도망 못가도록 손으로 꽉 짚으며 소리쳤다. 물론 좀 떨어진 류진이 형이 듣기에 충분할 정도의 목소리로. “뭐야! 선호 너 류.진.이.형. 바이크에 그렇게 타고 싶다고? 그것도 4시간짜리 풀 드리이브로! 근데 형이 거절할까봐 말도 못해? 이런 이런. 친.구.야. 류진이 형은 얼~마나 너그러운 사람인데. 다시 한번 부탁해 보렴!” 서서히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선호의 얼굴을 보며 난 바로 몸을 돌렸다. 모든 뒷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자한 모습으로 걸어오는 류진이 형에게 맞기고 말이다. 명목상 어르신이 쓰다가 수능이 끝난 후 제재가 풀어져 다시 명목상으로 이사를 온 류인이의 작은 원룸에서 한창 ‘한류진 제대기념‘ 겸 수능을 치룬 4명의 고3을 위한 생선회 파티를 벌이는 중이었다. 형이 오랜만에 만난 바이크와 먼저 회포를 풀어야 한다며 나무토막처럼 굳어버린 선호를 데리고 4시간짜리 드리이브를 하고 오는 통에 파티는 11시가 가까워져서야 시작이 되었다. 뭐 내일이 일요일이라 모두들 가벼운 마음에 술을 먹는 분위기였는데 물론 처음에는 이러지 않았다. 과거 피 뭍은 쇠파이프를 본 후 이슬이를 오직 어르신으로만 보던 선호와 병국이가 이 모임에 낀 이슬이를 보고 표정이 굳어버려 잠시 동안 녀석들의 수다를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불과 5분. 술이 한잔씩 들어가자 녀석들은 이슬이의 어깨를 툭툭 치는 선까지 발전했고, 넘쳐나는 술에 정신을 잃은 병국이가 과도한 음주로 그만 그 선을 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4월 달 이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일명 이슬이 쇼를 녀석 앞에서 보여주고 만 것이다. “아잉~ 경민이 혀엉~ 소주 백만 스물 두병 이슬이랑 나눠 마셔요오~” “켁.. 쿨럭...” 바로 내 옆에서 나에게 달라붙으며 간댕이 부은 발언을 하는 병국이에게 놀라 난 마시던 소주를 뱉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얼핏 보니 선호도 이자식이 완전 맛이 갔구나란 표정으로 병국이를 살피면서 동작이 멈춘 채 병국이를 바라보고 있는 이슬이의 눈치를 보는 듯 했다. “야.. 정신 차려.” 난 살짝, 실제로는 힘을 주어 병국이의 뒤통수를 때리고는 이슬이에게 하하 웃어주었다. “얘가 좀 취했나 보다.” “이잉~ 취하긴 누가 취해~ 어서 이슬이랑 우유 삼천사백오십육개 사러가자 경민 혀엉~” 비위가 강한 한씨집안의 형제들조차 표정이 굳을 만큼 강한 포스를 자랑하던 병국이의 술주정을 한방에 날려준 건 의외로 이슬이였다. “와.. 병국이형.. 되게 귀엽네요.” 거의 만취상태에 가까웠던 병국이의 술은 순식간에 깨버렸다. 아무 준비 없이 류인이네로 오는 바람에 안경을 가지고 오지 못한 나는 아직까지 렌즈를 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눈이 빡빡함이 느껴져 계속 몇 번 깜박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새벽 2시가 넘어가자 술병은 늘어가고 수다는 변신을 거듭해 각자의 장기자랑까지 치닫는 상당히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아마 밤 샐 분위기인 것 같은데 안의 공기가 워낙 뜨거워 류인이의 반팔을 빌려 입고도 더웠던 난 잠깐 나갔다온다고 말하며 지금 넓은 류인이네 정원의 한쪽 구석에 앉아있었다. 정원이라고는 하지만 인공적인 걸 싫어하는 류인이 아버님의 기호 때문에 나무와 제멋대로 자란 풀들이 마치 작은 숲처럼 느껴졌다. 중간 중간 통나무 잘라놓은 게 놓여있어는 데 난 그 중 하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부스럭’ 좀더 크게 내 뒤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난 슬쩍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봤다. 솔직히 밖으로 바람 쐬러 나온다고 하면서 류인이가 뒤따라 나와 주길 기대 안한 건 아니었다. 오늘은 사건이 많이 생기는 바람에 선호가 선물한 것들은 하나도 쓸 수가 없지만 그래도 가게에서부터 계속 둘이서만 있고 싶다는 생각이 온통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냥 둘이서만 있고 싶다. 같이 자는 것 따위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기분이.. 묘해... 류인이도 이런 느낌을 받은 걸까? 그래서 수능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준걸지도. 이렇게 쌀쌀한 밖이라도 단둘이서 그냥 있는 거라면 말이야.. 나도 기다릴께. 그리고 추운데 뭐 하러 나왔냐며 튕기는 한마디를 던지려던 나는 상대방이 먼저 말을 꺼내는 바람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아.. 열라 춥다. 넌 여기서 아무도 안 보는데 개 폼 잡고 뭐하냐?” 오늘따라 유난히 내 심기를 건드리는 선호가 마지막을 장식해 주려는 듯 내게 실망감을 안겨주며 다가왔다. “뭐야? 표정이 왜이래?” “아니 암 것도.. 추운데 넌 뭐 하러 나왔냐?” 아.. 이건 류인이한테 할 대사였단 말야. “아 씨 계속 앉아있으려니 엉덩이가 저려서 말야. 혈액순환을 시켜주려고 나왔다. 제기랄 류진이 형은 정말 미친 거 아니냐? 어? 어떻게 4시간이 넘게 바이크를 탈 생각을 하냐? 그것도 이 추운 날씨에! 병국이 자식 지병의 원인을 류진이 형으로 잡는 거 난 전적으로 동감이야.” 음.. 그건 나도 100%로 동감이다. 그리고 선호 녀석은 할말이 많은지 아님 술에 취해서 그런 건지 내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계속 떠들기 시작했다. “너도 타봐서 알지? 바이크가 좀 춥냐? 난 오늘 가뜩이나 얇게 입고 왔는데 나중에 팔 다리에 감각이 없더라. 내가 그 것 뿐이면 말도 안 해. 씨발.. 저놈의 가발 말이야! 바람에 날려 날 막 쳐대는데.. 야, 여기 목에 빨갛게 자국 난거 보여? 완전 채찍이 따로 없어. 난 가발에 풀 먹인 줄 알았다니까? 그리고 말야..” 그냥 앞만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선호의 얘기를 듣건 난 갑자기 말이 뚝 끊기 길래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선호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앗! 선호.. 에? 야! 이 미친새끼.” 자세히 보니 바닥에 엎어져 쓰러져 있는 선호의 모습에 난 정말 욕이 아니 나올 수 없었다. 그러게 술 좀 작작 먹지! 도대체 누가 너 업고 가라고! 과거 높은 곳에서 곧잘 기절하던 누구씨 덕분에 엎는 거라면 이력이 난 나는 두터운 몸매의 선호를 들쳐 메고 낑낑거리며 류인이의 집 앞까지 걸어갔다. 생각 같아선 당장 바닥에 던져버리고 싶지만 오늘 민섭이와 순이 커플로 인해 선호가 받은 먼지만한 상처가 역시 날 주저하게 했다. 아마 말로는 금방 괜찮아 졌다고는 하지만 기집애들 같다며 생전 안 가던 미용실에까지 들린 거 보면 꽤나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나름대로 잘 극복하는 것도 녀석의 장점이랄까? 난 몇 걸음 현관문 앞에 서서 다시 선호를 한번 고쳐 업고는 손잡이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내가 미쳐 손잡이를 잡기도 전에 문이 열리더니 한씨 집안 삼형제가 나란히 나오고 있었다. “뭐야?” 나와 등에 업힌 선호를 번갈아 보며 살짝 눈을 찌푸리더니 류인이가 물어왔다. “보이는 데로. 술 먹고 뻗었다. 근데.. 어디 가시는 거에요?” 완전히 옷을 다 갖춰 입은 두 형을 보며 내가 묻자 류민형은 그냥 내 어깨를 한번 두드리며 지나갔고, 류진형이 옆에 서서 대답을 해주었다. “일이 생겨서 나랑 형은 지금 부산 내려가야 돼. 나머지는 니들끼리 잘 놀아라.” 일? 집안일인가? 전에 얼핏 듣기에는 부산에 아주 친밀한 거래처가(보통회사는 아닌 듯) 있다고 했는데.. 그쪽 일인가.. 나에게 웃어주고는 류진이형 역시 지나쳐 가려는데 난 퍼뜩 생각나는 게 있어 형을 불러 세웠다. “류진형.” “왜?” “아.. 제대 하신 거 축하드려요.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말도 못했네요.” 그러자 다시 몇 걸음 다가온 형은 착하다는 듯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짜식.. 넌 어떻게 항상 그리 이쁜 말 만 골라하냐.” 그리고는 앞에서 류민형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류인이를 살짝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저 자식 복이 넘쳤지.” 그 복이란 건 물론 나겠지? 라는 생각과 함께 어째 내가 이집에 시집오는 색시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젠장. 난 화제를 얼른 바꾸고 싶어 형에게 말했다. “군대에서 고생 하셨을 텐데 오자마자 일이네요 형.” 그러자 무슨 소리냐는 듯 형이 살짝 예의 그 한씨 집안 형제들의 버릇인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고생? 아주 재미있게 보내고 왔는데 뭔 소리야. 답답했던 거 빼고는 다들 아는 분이라 난 있기 편했지. 류민형이랑 친했던 하사관도 도와줬고.” 난 잠시 형의 말이 이해가 안가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류민형이 근무했던 부대로 가신 거였어요?”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냐?” 당연히 몰랐죠! 근데 듣기로는.. 류민형이 있었던 부대는.. 거의 특공부대처럼 빡센 훈련으로 악명이 높은데 라던데.. 군에서 높은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걸까? 그런데 내가 잠시 갸웃거리는 와중 류진형이 묘하게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난 알고 있는데 넌 모르냐는 듯한 보는 사람 불안하게 하는 웃음 말이다. “아.. 그 부대에 대해 궁금한 거 있음 언제든지 물어보라고.” 물어보라니? 내가 그 절대 가고 싶지 않은 부대에 대해 궁금할 게 뭐란 말인가. 근데.. 나에게 말하고 스쳐 지나가는 형의 뒷모습에 왜 한기가 느껴지는 거지? 멍하니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삼형제를 보는데 류민형과 류진형이 곧 뒤돌아 차고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안 무거워?” 그러고 보니 어깨가 엄청 뻐근하다 했더니 선호 녀석이 있었구나. “기절 직전이다.” 난 휘청거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이며 류인이에게 답하고는 녀석이 열어준 문으로 들어섰다. 현관에서 보이는 방의 풍경은 참으로.. 화기애애하다고나 할까? 술에 취해 뻗은 병국이가 평소 입방정을 떨었던 이스을~이의 품안에서 잠이 들어있던 것이다. 잠시 무거운 선호도 잊고 저걸 사진 찍어야 하나 캠코더로 찍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듣기에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소리가 갑자기 내 귀에 들려왔다. “우욱!” 내 바로 어깨위에 올려졌던 선호가 용트림을 한번 하며 내뱉는 소리에 난 서둘러 신발을 벗으며 소리쳤다. “으앗~!” “던져버려.” 간단하다는 듯 말하는 류인이를 째리며 난 내 옷에 토하면 이놈 완전히 죽여주겠다는 생각에 얼른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허나.. 우등생의 말을 무시한 결과는 참혹했다. “우웩~ 으욱~!” “으~~악!! 장선호!!!” 집안이 따듯하긴 했지만 그래도 겨울이라 욕실 안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몸서리가 쳐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서둘러 류인이가 준 다른 옷을 입고 나오니 시간을 벌써 2시 40분. 침대와 거실을 장악하고 있는 세 녀석을 뒤로하고 부엌 의자에 앉아 무언가 생각하는 류인이에게로 다가가자 녀석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안 피곤해?” 내가 묻자 녀석은 대답은 안하고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를 수건으로 문지르던 내가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자 류인이가 내 손을 잡더니 현관 쪽으로 갔다. “어? 어딜 가?” “자러.” 에? 난 고개를 돌려 대자로 뻗어있는 녀석들을 보았다. 집안을 장악하긴 했지만 우리 둘이 낑겨서 못잘 것도 없는데.. “본가 니 방으로 가서 자게?” “응.” 아... 귀찮게 뭐 하러 거기까지 가냐 라는 생각은 내 손목을 꽉 쥐고 끌어당기는 녀석 때문에 포기해야했다. “아야..” 긴 옷을 입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쫘악 하고 긴 흉터가 남았을지도 모를 팔을 보며 난 작게 소리를 냈다. 도대체 현관과 계단의 존재가 왜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나까지 나무를 타고 창문을 넘어오는 통에 창틀을 넘다 길게 뻗어있는 메마른 나뭇가지에 팔을 긁힌 것이다. 다행히 옷 위로 긁힌 거라 옷을 걷어보니 빨간 자국만 남았지만 아픈 건 매한가지였다. 내가 잠깐 팔을 문지르고 있는데 조용히 침대 옆으로 다가간 류인이가 스탠드 불을 켰다. 곧 방안이 보일만큼의 밝기가 생겼고 아직까지 창틀에 기대어 서있던 난 스탠드 바로 앞에 서서 음영으로 인해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류인이에게 걸어갔다. “오늘 하루가 진짜 길었다. 그지?” 실은 샤워를 하며 좀 깼던 잠이 따듯한 방안으로 들어오니 다시 졸음이 몰려와 난 피곤함을 느끼며 얼른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두뇌활동이 조금은 둔해졌다고나 할까? 그래서 아무생각 없이 날 바라보며 가만히 서있는 류인이의 팔을 잡고 침대위로 향한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가 먼저 유혹한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때는 일단 자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침대위의 이불을 걷어 올리고 여전히 류인이의 팔을 잡은 채 내가 먼저 올라서서 앉았는데 류인이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난 고개를 들어 왜라는 듯 묻는 시선으로 보니 녀석이 나에게 잡힌 팔을 살짝 빼더니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안 잘 거야?” “아니.” “근데 어디가?” “너.. 피곤하잖아.” 당연하지! 오늘은 꽤나 일이 많은 하루였다고. 근데 왜 그런걸.. “그러니까 얼른 자야지.” 다시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녀석은 말했다. “여기서 자. 난 딴 방가서 잘 테니까.” “왜?” “...” 아.. 나의 둔함이란. 이건 정말 잠 때문에 뇌세포가 파업을 한 상태라고 밖에 변명할 길이 없는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왜라고 물어보다니.. 대답은 안하고 진진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는 류인이를 보며 난 확하고 잠이 깨는 걸 느꼈다. 욕망 같은 게 내비치는 건 아니지만 묘하게 나를 자극하는 그의 시선에 난 나도 모르게 잊고 있었던 내 욕심이 떠올라 버렸다. 같이 있고 싶다. 그리고 좀더.. 너와 무언가를 나누고 싶어. 난 한참을 녀석과 시선을 떼지 않았다. 머릿속에 바람이 불어 모든 피곤함을 몰아낸 느낌이랄까? 순간적으로 차 올라오는 흥분감에 난 빛에 의해 조각상처럼 들어 나는 류인이를 보며 천천히 무릎을 꿇은 채 침대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지만 입고 있던 녀석의 두터운 남방위로 손을 올렸다. 아무 말도 안하고 가만히 날 바라보는 류인이를 보며 콘돔이나, 진통제, 젤 따위는 머릿속에 없었다. 그냥 바보처럼 또 날 생각해 물러서려고 하는 녀석을 어떻게든 잡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번 한번이야. 천천히 위에서부터 하나씩 단추를 푸르며 난 속으로 외쳤다. 이번만 내가 먼저 시작할 테니까.. 다가와. 내 편의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마! 마지막 단추를 남겨놓고 잠시 망설이며 난 녀석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녀석의 표정을 보며 오기가 생긴 난 마지막 단추에 손을 올리고 작게 속삭였다. “해줘.” 살짝 류인이의 눈이 커진다 싶더니 눈 깜짝 할 사이에 류인이는 내 몸 위로 덮쳐왔다. 그리고 엄청난 그 힘 때문에 난 침대위로 쓰러졌다. 갑자기 바뀐 자세에 내가 적응 할 새도 없이 내 입술을 찾아 다급하게 키스를 하는 류인이의 온기를 느끼며 난 그대로 눈을 감았다. 시각마저 차단되고 극도로 높아진 피부의 감각들은 혀끝에서 느껴지는 아니 몸 전체에 와 닿는 류인이의 감촉에 중독되듯 즐거움에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하아..” 귀를 지나 내 목에 얼굴을 묻고 따듯한, 아찔해질 만큼 살짝 빨아 당겨지는 감촉에 나도 모르게 만족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급하게, 하지만 조급함은 느껴지지 않는 키스를 퍼부으며 류인이는 훤히 들어 난 내 배위에 한손을 올리더니 마치 손으로 그 모양을 기억하기라도 하려는 듯 천천히 가슴까지 쓰다듬어 올라갔다. 그리고 강한 힘이 느껴지는 그의 손끝이 젖혀진 남방을 완전히 밀어내며 유두 끝을 어루만졌다. “읏..” 관능적으로 움직이는 녀석의 손끝에 등골을 타고 찌릿하며 쾌감이 느껴졌고, 나도 모르게 이제 쇄골에 키스를 퍼 붙고 있는 류인이의 머릿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응대라도 하듯 류인이의 나머지 손이 내 옆구리를 쓸어내리며 천천히 바지를 밀어 내렸다. 난 무의식적으로 엉덩이를 살짝 들며 녀석을 도와줬는데 그러다 딱딱하게 굳어진 흥분된 류인이의 것과 내 것이 맞닿았다. “하앗..” 세상에.. 좀 전 애무로 인한 쾌감을 비웃듯 비교할 수 없는 아찔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허리가 튕겨졌고 입에서 색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본능적으로 류인이의 머리카락 속에 있던 손에 힘을 주었고 저절로 고개가 넘어간 나는 천천히 옷 위에서 자신의 것과 비벼대는 류인이의 동작에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귀를 통해 들리는 거칠어진 류인이의 숨소리가 나를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난 손을 내려 류인이의 얼굴을 잡아 내 위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급하게 녀석의 입을 찾아 내 혀를 집어넣자 불만스러울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던 류인이가 좀더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으음..” 만족의 소리처럼 되어버린 내 약한 신음에 류인이는 나에게서 얼굴을 들고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 내 시선을 놓지 않으며 서둘러 웃옷을 벗어 던졌다. 아래의 옷을 잡은 채 팔을 들어올려 옷이 벗겨지는 와중에도 완전히 들어 난 그의 알몸에 난 조금의 시간도 참을 수 없다는 듯 서둘러 류인이를 끌어내렸다. “하...미칠 것 같아..” 류인이의 목소리가 아닌 듯 낮고 허스키하게 내 귀에서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이미 미친 것 같거든. 눈을 뜨고 가장먼저 떠오른 건 생각보다 내가 일찍 일어났구나 라는 거였다. 커다란 류인이의 창은 침대 머리맡 쪽에 위치해 있어 직접 보이진 않지만, 방안을 비추는 평소보다 환하지 않는 햇빛은 겨울의 늦은 새벽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럼 얼마 자지도 못 한거네. 그런데 왜 이렇게 푹 잔 것처럼 느껴질까? 잠시 눈만 깜박이며 이제 막 돌아가는 생각들을 정리하려 하는데 내 목덜미에서 느껴지던 따듯한 숨결이 멀어지는 걸 눈치 챘다. “더 자.” 천정을 보고 누운 내 몸을 옆에서 완전히 감싸 안 듯 팔과 다리를 내 몸 위로 걸치고 있던 류인이가 얼굴을 살짝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 가슴께에 있던 류인이의 손이 부드럽게 내 머리를 넘겨주고 있었다. “몇 시야?” 아.. 이런.. 순간 나온 내 목소리는 완전히 폭포를 향해 소리를 내지르는 득음을 달성하기 직전의 소리꾼같이 완전히 쉬어있었다. 그럼 이제 득음만 남은거야? 라는 농담은 잠시 접어두고 이게 간밤에 내가 쾌감에 못 이겨 낸 커다란 신음소리의 결과라는 걸 알기에 녀석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봤자 이미 빨개진 얼굴을 감출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6시 15분.” 그럼 한 시간도 못 잔건가? 마지막 거의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 눈이 감길 때 어렴풋이 보았던 시계 바늘은 5시를 살짝 넘기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지금은 딱 내가 일어나는 시간이군. 이래서야 어디 고등학생인거 숨기지도 못하겠잖아. 슬쩍 눈만 돌려 류인이를 바라보니 살짝 든 머리 그대로 날 가까이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음.. 굉장히 부끄럽거든? 내가 다시 시선을 돌리려 하자 녀석은 갑자기 내 머리 옆에 놓여있던 손으로 얼굴을 돌리며 부드러운 키스를 해왔다. “으음..” 이제 키스만 해도 자동적으로 나오는 내 신음소리에 류인이의 몸이 움직인다 싶더니 금세 내 몸 위로 올라왔다. 아.. 나도 모르는 타고난 색끼가 있었단 말인가? 라는 건 정말 우습다고 이경민. 어째서 류인이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렇게 반응하는 거냐고. 하지만 이런 고민도 잠시 팔을 올려 류인이의 머리를 감싸느라 비어있는 내 옆구리를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던 류인이가 한 손으로 쓸어 올리자 그 전기가 통하는 듯한 자극적인 느낌에 난 허리를 들어올렸다. “아야!” 하지만 허리를 움직이는 순간 엄청난 고통이 뒤따라 난 눈썹을 찡그렸고 류인이는 놀랬는지 얼른 내 입술에서 떨어져 내 얼굴을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아.. 너 그 표정 너무 귀엽잖아. 고통에 한쪽 눈만 찡그리며 감고 있던 난 그대로 눈가에 웃음을 지으며 류인이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아프다..” 내가 칭얼거리듯 말하자 녀석이 살짝 비켜나 반만 내 위에 몸을 걸치고는 허리에 자신의 팔을 감으며 날 살짝 끌어 당겼다. 그리고 내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냄새를 맡는 듯 코를 내 목에 비비는 게 고양이 같아 난 손을 올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웅얼거리듯 말하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좋아.” 난 눈동자만 내려 류인이를 보았다. 지금 좋다고 한거지? 이거..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고백으로 받아들여도 될까? 나도 모르게 입가가 곡선을 그리며 웃음이 나왔다. 뭐 어떠랴. 이미 녀석의 마음을 알고 있는데.. 갑자기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아침, 세상은 아직 조용하고 따듯한 이불 속에서 기분 좋은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있는 거.. 너무 행복해서 오히려 무섭기까지 했다. 앞으로 우린 계속 행복할 수 있을까? 이렇게 둘이 같이 있는 즐거움을 알아버렸는데 헤어지기라도 한다면... 갑자기 찾아온 우울한 생각에 난 움직이던 손을 딱 멈추었다. 그러자 내 기분을 알아차린 건지 류인이가 고개를 들고 날 내려다 봤다. “왜 그래?” 평상시처럼 무표정이었지만 걱정스럽게 빛나는 류인이의 눈을 보며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아.. 너무.. 기분이 좋으니까 불안해서.” “뭐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류인이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고 난 작게 한숨을 쉬며 답했다. “이러다.. 서로 떨어져 있는 걸 참지 못할 것 같아서 말야.” “그럴 일은 없어.” 전혀 재고의 여지가 없다는 듯 단정 지어 말하는 녀석을 보며 난 장남다운 이해심으로 한씨집안의 막내 머리를 살짝 어루만지며 설명했다. “나중에 군대문제도 있고, 사람일은 모르는 거니까..” “군대?” 약간은 어이없다는 듯 되묻는 류인이를 보고 혹시 이 녀석이 군 면제되는 소말리아 국적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을 잠시 해야 했다. 허나 내가 알고 있는 한 이 녀석은 분명 국방의 의무를 이행해야할 대한민국인이 맞는데.. “군대 안갈 거야?” 내가 어이없다는 듯 묻자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아니.” “그럼?” 그러자.. 녀석이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보기에도 상당히 불안한 음모의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어.. 어이, 너의 그 웃는 의도를 얼른 설명해 보아라! “뭐.. 나중에.” 라며 웃음을 더 짙게 하는 녀석에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보라며 닦달했어야 했다. 하지만 다시 가벼운 키스를 해오는 류인이 때문에 일말의 불안감만 남겨두었던 난 훗날 그 불길한 미소의 의미를 깨닫고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된다. 정확히 말해서 1년 반 뒤 어째서 선호, 병국 그리고 내가 똑같은 날 입대영장을 받고 똑같은 부대, 소대 그것도 모자라 같은 내무반에 배치 되었는 지와 결정적으로 우리보다 한달 먼저 군대에 간 류인이 녀석이 왜 우리의 상사가 되어 버티고 있는지는 아마 이 한씨집안만이 알고 있겠지. 더군다나 1년 후 들어온 이등병에 어째서 이슬이가 껴있는 것인가 까지도 합해서 말야. 덕분에 병국이는 쇼생크 탈출을 바이블 삼아 장기전으로 탈영을 시도하겠다며 서울 쪽을 향해 매일 삽질을 해댔고, 우연찮게 민섭이 까지 옆 내무반으로 배치 받아 들어오자 매달 민섭이 면회 오는 순이의 얼굴을 보기 괴롭다며 선호는 담배 과다복용이란(하루 한 까치)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해야만 했다. 물론 두 사람은 안타깝게 지금도 멀쩡히 살아있다. 젠장.. 남 말할 처지가 아니지. 정말 부대의 모든 높으신 분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한 류인의 쫄다구로 보낸 나의 2년간의 암흑 같았던, 온통 주위에 아는 사람으로 둘러싸인 군대생활을 금속판에 세기면 팔만대장경의 길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팔만고생경 이 될지도 모른다! 제기랄! - 진짜 끝 - *******************************************************************************************